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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황금의 제국' 작가가 그려낸, 정글 같은 세상의 전쟁

Lesley 2015. 2. 20. 00:01

 

  작년 12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이틀 전에 종영한 드라마 '펀치' 를, 나는 약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몰아봤다.

  처음 보던 날 원래는 두세 회차만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나 흥미진진하든지 하루 동안 1회부터 8회까지 한꺼번에 몰아보고는 안구 통증으로 고생 좀 했다. -.-;;

 

  이 드라마는 2013년에 본 '황금의 제국' 을 집필한 박경수 작가의 작품이다.  

  황금의 제국처럼 이 드라마도 곳곳에 복선이 깔려있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작가가 어려서 뭘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탄탄한 대본을 쓸 수가 있는 걸까?)  황금의 제국 - 또 하나의 명품 드라마(http://blog.daum.net/jha7791/15791015) 

 

  그리고 등장인물 캐릭터가 무척 입체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해서 마냥 선하고 정의롭지 않고, 또 악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악하지 않다.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알게 모르게 옳지 못 한 행동을 하고, 악역은 악역대로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떠나서 '어쩌면 나도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공감도 하게 되고, 또한 '우리가 미처 몰라서 그렇지 실제로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 같아.' 는 느낌(즉, 개연성)도 강하게 갖게 된다.

 

 

 

 

줄거리(앞부분 위주로)

 

 

  이 드라마는 줄거리를 정리하기 힘들다.

  위에 이미 쓴 것처럼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앞에 나왔던 사소한 내용이 뒤에 나오는 큰 사건의 복선이 되고, 등장인물들끼리 같은 편이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 또 다시 같은 편이 되는 등 등장인물 관계도 복잡하다.  그렇게 원래도 정리가 힘든 내용인데, 19부작짜리 드라마를 포스트 한 편에 구겨넣기까지 해야 한다. 

  그러니 드라마 앞부분만 간단히 설명하고, 등장인물별로 따로 성격이나 사연을 설명하는 식으로 쓰겠다. ('황금의 제국' 감상문 올릴 때도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밖에 없었음.)  말이 간단히 설명하는 거지, 간단히 설명한다고 해도 꽤 길 것 같다. ^^;;

 

 

  ◎ 이태준과 박정환 Vs. 윤지숙과 정국현

 

  차기 검찰총장 자리를 두고 검찰의 고위간부급 검사인 '이태준(조재현)''정국현(김응수)' 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다.

  두 사람은 각각 부패한 공직자와 청렴한 공직자의 대표격이다.  이태준은 젊은 시절부터 권력층의 눈에 들어 승진하기 위해 불법수사를 밥먹 듯 벌였고,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장차 자기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동료나 후배들은 꼬투리를 잡아 쳐내곤 했다.  그에 비해 정국현은 검찰 개혁을 위해 애쓰는 현직 법무부장관 '윤지숙(최명길)' 쪽 사람으로,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소장파 검사들에게 존경 받고 있고 이태준 무리를 견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정국현이 더 유력한 후보였지만, 이태준 쪽 사람인 '박정환(김래원)' 의 음모로 이태준이 검찰총장이 된다.  외국 유학 중인 정국현의 아들에게 마약사범 혐의를 뒤집어씌어서 정국현을 낙마시킨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박정환은 이태준의 심복인 중견 검사인데, 이태준의 후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환은 권력욕이 큰 것도 그렇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도 그렇고, 능력(좋은 쪽 능력 뿐 아니라 나쁜 쪽 능력까지도)이 매우 뛰어난 것까지도, 정말이지 이태준과 너무 닮았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닮은 이 두 사람은 그저 평범한 상관-부하직원 사이가 아니다.  박정환은 7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검사 경력이 끝장날 뻔했는데, 이태준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그래서 이태준에게 강한 충성심과 의리를 지닌 채 이태준을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벌였다.  이태준 또한 박정환이 말 그대로 목숨 걸어가며 자신의 비리를 덮어준 것에 크게 감동받고, 박정환을 각별히 생각했다.  그리고 박정환이 자기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사법시험을 통과해서 검사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동병상련 내지는 동지애 같은 감정도 느끼고 있다. 

  그렇게 비록 악당들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끈끈한 정과 의리로 뭉쳐 지냈다.  지난 7년 간 이태준과 박정환은 서로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끌어주었으며, 자신들의 돈독한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는데...

 

 

  ◎ 세진자동차 차량의 급발진 사고 / 세진자동차와 이태준의 밀월관계

 

  박정환과 박정환의 전처 '신하경(김아중)'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유치원 버스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신하경은 그 사고가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이 사건을 신하경이 건드리기 시작하면서, 신하경과 박정환의 인생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 완전히 바뀐다. 

 

  그 유치원 버스는 세진자동차 제품이다.

  세진자동차는 과거 잘 나가는 자동차 회사였지만, 몇 년 전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나서 경영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상태다.  그 후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장기간 시위를 벌이고 자살자까지 속출하고 있는데, 정작 이 모든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회장은 잠깐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러난 뒤로 국내외를 떠돌며 호의호식하고 있다. (이쯤 되면 뉴스와 담 쌓고 사는 시청자 아닌 다음에야, 드라마 속 세진자동차가 현실 속 쌍용자동차와 대우자동차를 짬뽕해서 만들어낸 회사임을 알 수 있음. ^^;;)  

 

  그런데 이 세진자동차의 사장(정확히 말하면 바지사장)인 '이태섭(이기영)' 이 바로 검찰총장 이태준의 친형이다.

  그 동안 이태섭을 연결고리로 해서, 이태준과 세진자동차는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이태준은 세진자동차가 저지르는 온갖 불법행위를 법적으로 무마시켜줬고, 대신 세진자동차 회장은 이태준에게 소위 스폰서 역할을 해주었다.  즉, 세진자동차 회장은 오랜 기간 이태준이 검찰 내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경제적으로 받쳐줬을 뿐 아니라, 이태준을 검찰총장으로 만을기 위해서만 정관계에 30억이나 되는 로비자금을 뿌렸다.

 

  그러니 이태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건을 운전기사의 과실로 밀고나가야 한다.

  세진자동차가 불량부품을 사용해서 급발진 사고가 일어났다는 게 드러나면, 세진자동차 사장으로 있는 형이 곤란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진자동차와 자신의 불법적인 거래까지 드러날테니까.  그래서 이 사건을 운전기사 과실로 조작하는 임무를 박정환에게 맡긴다.  

 

 

  ◎ 박정환의 시한부 인생 판정 / 박정환과 이태준의 결별

 

  그런데 뜻밖에도 박정환이 뇌종양에 걸려 몇 개월 못 산다는 진단이 나온다!

  어렵게 받은 수술은 실패하고, 박정환은 코마 상태에 빠져 오늘 내일 하는 처지가 된다.  그 와중에, 이태준의 형 이태섭이 엄청난 짓을 저지르며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이태섭이 세진자동차의 전 연구원에게서 불량부품에 관한 결정적 증거를 뺐으려다가, 그만 그 연구원을 죽인 것이다.

  그러자 이태준은 살인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신하경을 용의자로 몰아붙인다.  박정환이 이혼하고도 신하경에게 미련을 못 버렸으며 신하경이 박정환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식불명으로 누워있는 박정환에게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어차피 박정환은 곧 죽을 사람이니, 계속해서 세상을 살아갈 자기 형을 구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문제는... 박정환이 기적처럼 깨어났다는 점이다.

  이태준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의외로 박정환은 이태준에 대해 서운함을 드러내면서도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태준 또한 남을 함부로 짓밟던 사람답지 않게 박정환에게 미안한 나머지 눈물까지 쏟아가며,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신하경을 석방하려 한다.

 

  그렇게 어쩌면 다시 합칠 수 있었던 박정환과 이태준의 관계는, 주위 사람들이 개입하면서 점점 꼬이고 틀어지게 된다. 

  법무부장관 윤지숙이 검찰 개혁을 위해 이태준을 검찰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연구원 살해사건 수사에 개입한 것이다.  그러자 이태준은 마음을 바꿔서 신하경을 석방하지 않기로 한다.  판이 너무 커지면서, 신하경을 풀어줄 경우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대가 역시 커졌기 때문이다.  박정환은 박정환대로 이태준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신하경을 구하려고 이태준에게 맞선다.

  결국 지난 7년간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쳤던 이태준과 박정환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을 맞게 된다. (여기까지가 1~4회 내용임.)

 

 

  ◎ 반전, 반전, 또 반전...!

 

  박정환과 이태준이 서로를 등지게 되면서, 등장인물 사이의 이합집산이 수시로 벌어지게 된다.

  흔히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고 하는데, 대검찰청을 무대로 벌어지는 이 드라마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 삼각관계(애정상의 삼각관계 말고 내용상 세 중심인물이란 뜻임. ^^)를 이루고 있는 박정환, 이태준, 윤지숙이 서로 한편이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 하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은 보통이고, 그 세 사람의 조력자 내지는 부하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이편으로 갔다가 저편으로 갔다가 정신 없이 움직인다. (그게 진심이든, 스파이 노릇하기 위해서든 간에.)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서로 물고 뜯고 뒤통수를 치는 동안, 사건도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진다.

  처음에는 유치원 버스의 사고가 급발진 사고냐 운전기사 개인 과실이냐를 따지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곧 세진자동차 전 연구원의 살인사건이 되더니, 다시 바지사장을 앞세운 세진자동차의 실소유주가 누구인가 하는 사건으로 변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270억원짜리 대형 정치 비자금 사건이 된다!

 

  그렇게 온갖 권모술수와 배신으로 점철되었던 드라마는, 다행히 끝에서는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에잇, 더러운 세상!' 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만 살고 말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살 세상을 위해 한 발 더 나가도록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자, 이쯤에서 복잡한 줄거리는 생략하고... 

 

 

 

박정환과 그 주위 사람들

 

 

  ◎ 박정환(김래원)

 

  "나보다 못 한 놈들 서울 명문대 가는데, 나는 지방대로 갔어.  뭘까, 한 번에 그 놈들 앞에 설 방법.  그래서 난 검사가 됐어."

 

  박정환은 개천에서 난 용이다.

  박정환의 아버지는 살아서는 무능함으로 식구들을 고생시켰고, 죽어서는 난치병 치료비로 인한 빚을 잔뜩 남겨 식구들을 고생시켰다.  그래서 박정환은 여동생과 함께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지만,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전액 장학금 및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대학교로 하향지원해야 했다.  그리고 주경야독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지만, 연줄이 없는 탓에 처음에는 지방의 한직만 전전했다.

  이렇게 타고난 능력도 뛰어나고 노력도 엄청나게 하건만, 주위 환경이 그 능력과 노력을 뒷받침해주지 않아 여러 차례 좌절을 겪다 보니...  박정환은 신분상승의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이 되었다.

 

  "하경아, 나 이태준 검사장하고 같이 갈거야." / "아니, 다시는 안 밀려날거야.  하경아, 나 높아질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정환이 처음부터 이태준과 함께 권력지향적으로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무리한 수사 방식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벌 받을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억울한 사람은 구제받아야 한다' 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검사였다.

  그런데 7년 전 아직 검사장이었던 지금의 법무부장관 윤지숙 아래에서 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고위층 자제의 병역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법 병역면제자들의 명단을 얻기 위해 병역 면제를 알선한 브로커와 거래를 한 것이다.  평소 '국민에게 사랑받는 깨끗한 검찰' 을 만들겠다며 원리원칙을 강조했던 윤지숙은, 범죄자와 불법거래를 한 박정환을 변호사법 위반으로 기소하려 했다.  박정환의 검사 생명이 끝장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예 법조계에서 완전히 퇴출될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이태준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박정환은 철저히 타락한다.

  이태준을 위해 세진자동차와 관련된 온갖 더러운 일의 뒷처리를 맡는다.  물론, 자신을 구해준 이태준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신이 수사 절차를 어겼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불법으로 병역면제 받은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나름대로 애쓴 것이다.  그런데 권력과 돈을 이용해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사건을 파헤친 자신만 신세 망칠 뻔했다.  그렇잖아도 돈도 연줄도 없어 힘들게 살았던 박정환인데, 그런 일까지 겪게 되자 '역시 세상은 힘있는 자들의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힘을 가진 자가 되어야지.' 라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동시에, 검찰 개혁의 기수로 꼽히는 윤지숙과는 척을 지게 된다.

 

  "내가!  내가 고통스러운 건 내가 죽은 뒤에도 니들 같은 놈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을 거라는 거, 그게 정말 슬프다." 

 

  그런데 이태준을 검찰총장으로 올려놓고, 자신도 이태준의 도움으로 미래에 검찰총장이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때에, 뇌종양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된 것이다.

  뇌종양은 박정환의 육체적인 수명 뿐 아니라, 그 동안 힘들게 얻은 권력까지 앗아간다.  이태준이나 윤지숙과 싸우는 과정에서 뇌종양 때문에 몸이 점점 나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주위의 조력자들이 줄어드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박정환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게 알려지자, 박정환이 승승장구할 때는 부르지 않아도 몰려들었던 동료들이나 선후배들이 하나씩 떠난다.  그들 입장에서는 곧 죽을 박정환 보다는, 앞으로도 살아남아 높은 자리에 머물 이태준이나 윤지숙 옆에 있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병역비리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더욱 분노하고 독기를 뿜게 된다.

  알고 보니, 7년 전 박정환이 입수했던 불법 병역면제자 명단에 윤지숙 아들의 이름도 올라있었다...!  박정환은 그 사람이 윤지숙의 아들인 줄 몰랐지만, 하필이면 자기 상관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감옥에 보낼 뻔한 것이다.  그리고 아들 이름이 명단에 오른 것을 안 윤지숙은 그 사건 수사를 막기 위해, 검찰 자체 징계 정도로도 충분했던 박정환의 처벌을 일부러 변호사법 위반으로 몰고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유능한 부하 검사 박정환을 변호사법 위반으로 조사하게 했던 것으로 보였는데, 사실은 자기 아들과 자기 경력을 위해 박정환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 부분이 이 드라마에 나온 수많은 반전 중 TOP5에 들어갈만한 엄청난 반전이었음.)

 

  박정환은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태준과 윤지숙을 철저히 무너뜨리는데 남은 인생을 쓰기로 한다.

  윤지숙이나 이태준이나, 모두 한 때는 박정환이 존경하고 충실히 보좌했던 상관이며 선배였다.  그런데 한 명은 자기 아들의 병역비리를 덮기 위해, 또 다른 한 명은 자기의 검찰총장 자리와 비자금 문제를 덮기 위해, 그렇잖아도 살 날이 얼마 안 되는 박정환을 매장시키려 든다.  자신은 한창 나이에 죽게 되었는데, 자신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높은 자리에서 희희낙락하며 사는 꼴을 도무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7년 총장님하고 남의 인생 밟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내 인생 밟히니까 그거는 못 참겠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박정환도 결국에는 이태준이나 윤지숙 같은 악당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와 차별되는 중요한 요소다.  보통 검찰이니 경찰이니 하는 곳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이 드라마와 같이 썩은 검사나 경찰관이 반드시 나온다.  하지만 주인공은 온갖 고난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사도로 활약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주인공 박정환은 지난 7년 간 이태준을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았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멀리 가서 찾을 필요 없이, 당장 1회에 나오는 급발진 사고의 운전기사부터 박정환의 거짓수사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임.)

 

  만일 시한부 인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박정환은 이태준 옆에 남아 나쁜 짓을 계속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태준의 뒷배로 훗날 자신도 검찰총장이 되어, 또 자신 같은 악당 후배들을 키워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태준이나 윤지숙 정도는 가볍게 능가할 정도의 대마왕(!) 수준의 악당으로 진화(?)했을 수도 있다. (박정환의 독한 성격을 생각했을 때, 이태준과 윤지숙을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었을 가능성 95%...!)

 

  "나는 인생 한 번 사는데, 저 사람들은 인생 두 번 세 번 살아.  병역비리는 힘으로 덮고 더 큰 문제는 돈으로 덮어.  하경아, 나 앞으로 한 걸음만 나갈란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이 박정환이란 인물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부의 대물림이 점점 당연시 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대한 반발감이다. 

  박정환이란 인물이 한 행동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못 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가 어째서 그런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안타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발버둥을 치며 얻은 모든 것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저승길을 떠나게 된 것을 보면서, 저렇게 허무하게 갈 것을 무엇 하러 그런 악행을 저지르며 본인 인생 낭비하고 남의 눈에서 피눈물 짜냈을까 하는 측은지심도 느끼게 된다..

 

  또한, 박정환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개과천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시청자들에게 정상참작(?)을 받게 되는 요인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망친 이태준과 윤지숙에게 복수하겠다는 독기 하나로 두 사람에게 맞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두 사람에게 죄값을 치르게 하려는 게 전부가 아니라, 자신 또한 그 동안 옳지 못 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여러 번 마음의 상처를 받은 어린 딸이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것을 보면서, 이태준, 윤지숙, 자신 같은 이들을 처벌받음으로써 딸이 살아갈 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소망도 품게 된다. 

 

 

"나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경아, 나는 살아야겠다.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나는 더 자라고 싶다."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뭐야?  정의로운 세상?  하경아, 내 인생 잘 풀리면 정의로운 세상이고, 내 인생 꼬이면 더러운 세상이야.  너나 잘 살아.  눈 감아!  귀 막고!  예린이(박태준과 신하경의 딸)만 봐!  네 앞길만!"

"그럼 내 인생은?  내 인생은 뭐지?  윤지숙 그 여자가 자기 아들 구하려고 판 덫에 걸려서, 이태준 그 사람 총장 만들고 떠나는 게...  하경아, 무슨 인생이 이러냐..."

"총장님(이태준), 저 감옥에서 죽겠습니다.  총장님은 만수무강 하십시오, 감옥 안에서."
"난 이렇게 살다 가는데, 장관님(윤지숙)은 왜 인생 두 번 살려고 하십니까?  7년 전에 존경받는 지검장이 아들 병역비리로 책임지고 내려와서 벌받고 거기서 시작해야지요?  힘으로, 돈으로, 왜 인생 두 번 살려고 남의 인생까지 차선 변경하게 만드십니까?"

"예린이 아빠 미워하지도 말고, 아빠 닮지도 말고, 아빠 가고나면... 우리 예린이는 엄마처럼 살아라.  알았지?"

"인생에 정답이 있나, 선택만 있지.  난 그런 선택을 했고 지금 책임을 지고 있어."

 

 

  ◎ 신하경(김아중)

 

  신하경은 박정환과 사법연수원 동기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지만, 결국 딸 하나를 둔 채 이혼한다.

  신하경은 남편 박정환이 썩어빠진 정치 검사 이태준의 심복이 되어 점점 변해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극약처방을 내놓았다.  이태준의 비리를 파헤친 내사보고서와 협의이혼장을 박정환에게 건네주며, 둘 중 하나에 도장을 찍으라 한 것이다.  마음 속으로는, 박정환이 결국 이태준을 버리고 가족을 선택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박정환도 가족을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일이 꼬이면서, 박정환은 결국 이태준을 선택하고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감정적으로 완전히 정리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검사란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가치관 등의 차이 때문에 수시로 대립하면서도, 속으로는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상대가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든 구하려 애를 쓴다. 

 

  그런데 신하경은 이 드라마 속 인물로는 드물게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 이긴 한데, '모범적인 검사' 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분명히 신하경이 지향하는 바는 정의사회 구현이다.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해 하는 행동에 문제가 있다.  아직 타락하기 전의 박정환처럼 '정의 추구와 약자 보호라는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절차는 다소 무시해도 된다.' 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좀 심하게 말하면,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랄까...

 

  대표적인 예가,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던 급발진 사건을 수사할 때 신하경이 보인 태도다.

  분명히 우리 시청자들은 유치원 버스의 운전기사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고, 사고 원인은 세진자동차가 불량부품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시청자이기 때문에, 드라마 속 모든 인물의 상황을 다 봐서 알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신하경은 드라마 밖 시청자처럼 모든 상황을 알지 못 한다.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서, 마땅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모든 증거를 다 고려하면서 수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도 운전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실, 즉 운전기사가 평소 과로에 시달렸으며 다리 통증 때문에 강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이다.  과로에 찌든 몸과 강한 진통제는 분명히 운전에 영향을 끼칠만한 요소다.  하지만 신하경은 처음부터 '운전기사는 아무 잘못 없고 전부 세진자동차의 탓이다.' 라는 결론을 내려놓고서, 그 결론에 맞춰 수사를 벌였다.

 

  물론,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신하경이 박정환이나 이태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며 좋은 검사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박정환과 이태준은 그 교통사고가 세진자동차 잘못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작정하고 운전기사 잘못으로 몰고 갔으니까.  하지만 만일 정말로 세진자동차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가해자일지도 모르는 운전기사에게, 그 사람이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면죄부를 주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

  신하경의 태도는 검사로서는 위험하기까지 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전혀 객관적이지 못 한 시선으로 사건을 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신하경의 태도를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보통 법조계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나 주인공 편에 선 사람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정의롭고 완벽하기만 하다.  과연 현실 속에서 저런 인물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할까 싶을 만큼, 하나 같이 정의감 투철하고 이타주의로 중무장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신하경은 도덕적으로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는 분명히 구분하면서도, 그 도덕을 지키려 행동하는 과정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오류를 저지른다.  박정환의 편에 서서 이태준과 윤지숙의 죄상을 밝혀내려 애를 쓰는 과정에서도, 수사를 느리지만 적법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빠르지만 불법적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박정환과 여러 번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뇌종양에 걸린 박정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과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의 힘이 너무 엄청나다는 점 때문에, 점점 박정환의 방식을 따르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 살아가려면 옳은 방법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싶어 씁쓸해지는데, 동시에 사실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신하경은, 인생 막바지에 고립된 박정환 옆에 서서 힘든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어 준다.

  이태준과 윤지숙의 음모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만 동반자가 되어준 게 아니라, 세상 뜰 날이 2주일 정도 밖에 안 남은 박정환에게 다시 아내가 되어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박정환에게서 새 생명을 받아, 두 사람의 딸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박정환의 유지까지 잇게 된다.

 

"세상 원래 그래.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공평한 세상?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런 세상.  정환씨, 문제는 나야.  그런 세상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환씨는 그렇게 살았어.  이제 책임 져야지, 벌도 받고.  가난한 사람, 성실하게 살아온 분들 조롱받는 세상이야.  왜 그런지 이제 알겠어.  매번 지니까, 당신 같은 사람한테 지니까.  지는 거 싫으니까.  예린이(박정환과 신하경의 딸)도 사람들도 이긴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예린이한테, 사람들한테 이기는 거 보여줄거야.  법대로 할거야, 원칙대로 수사할거고."

"조롱당하면서도 신념을 지켜야 하나요?  이태준 총장 법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법으로 어떻게 잡죠?  방법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 지시 따르겠습니다, 차장검사님."

"고마워, 정환씨.  선택 책임줘져서.  기억할게, 오래오래.  말할게, 예린이한테.  엄마는 아빠랑 보낸 시간 부끄럽지 않다고."

 

 

  ◎ 최연진(서지혜)

 

  최연진은 원래 이태준 쪽 사람으로 박정환 직속(?)으로 일하던 검사인데, 박정환을 좋아하고 있다. 

  드라마 초반에는 서지혜라는 배우 이름값에 비해서 비중이 너무 낮다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독특한 캐릭터로 변한다.  항상 자기에게 이익이 될지 아닐지를 계산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 드라마 속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쁜 사람' 이다.  그런데 그런 이기적인 행보 속에서도 은근히 사랑과 의리를 지키려는 움직임도 보이는 게 최연진이란 캐릭터의 매력이다.

 

  최연진은 6선 국회의원인 유명 정치인과 여배우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생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생부가 정치 경력을 위해 딸을 외면했던 모양임.), 다음 총선 때 생부의 지역구에 출마해 생부를 끌어내리고 국회의원이 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검사라는 지위도, 그렇게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악당이라지만 한창 기세등등한 이태준과 박정환 편에 섰던 것 같고...

 

  박정환이 이태준과 갈라선 뒤에도 박정환의 편에 서는데, 박정환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흔들린다.

  곧 죽을 박정환이 이태준이나 윤지숙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 박정환 편에 섰던 자신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 계획도 날아가 버릴테니까. (게다가 박정환에게 사랑 고백했다가 차이기까지 했으니... ^^;;)  이 때 박정환이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태도로 최연진에게 '네가 내 편에 서게 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 을 나열하고, 최연진은 흔들리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철저히 자신이 받아낼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는 장면이 대단했다.  

 

최연진 : "미안합니다.  이젠 선배를 도울 수가 없네요."
박정환 : "도움은 필요없어.  내가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지."
최연진 : "?"

 

<과거 회상 장면>
박정환 : "연진아, 너에게 기회는 다음에 주지.  여의도로 입성할 아주 좋은 기회."

 

박정환 : "(사무적인 태도와 말투로) 이태준, 윤지숙 수갑 네가 채워.  조서도 네가 쓰고.  최종 수사 결과 브리핑도 네가 해.  전국민이 너를 보게 될 거야.  대한민국 법의 거두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에 맞서 싸워 이긴 정의의 여검사.  이번 배역 마음에 드나?"
최연진 : "!" (그렇게만 된다면 무조건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겠구나 싶은 표정.)
박정환 : "계산만 해."
최연진 : "선거자금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박정환 : "스폰서가 될만한 기업이 있나 알아봐주지."
최연진 : "선배 계획이 실패하면, 저는 조강재(이태준 측근) 부장 방문을 열게 될거고요."
박정환 : "현명하군."
최연진 :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하... (눈물 고인 눈으로, 그러나 표정은 차갑게) 선배가 떠나면 마음이 아플 겁니다."
박정환 : "장담하지마.  국세청 가서 오션캐피털 세무조사 자료 받아와, 어서."

 

  그리고 최연진 하면 또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박정환에게 약점 잡힌 조강재가, 마침 이태준이 유력한 정치인들 사정에 들어간 틈을 타서 최연진의 생부도 끼워넣어 조사한다.  최연진 생부를 볼모 삼아 최연진을 회유해서, 박정환의 압박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연진이 생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미처 몰랐다는 게 문제다.  최연진은 생부가 감옥에 가면 자신이 쉽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겠다면서, 조강재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한다. -.-;;  자기 의도가 빗나가자 조강재는 크게 낭패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뜻밖에도 최연진이 제 발로 와서는 조강재의 약점이 들어있는 USB를 조강재에게 건네준다. (사실은 최연진이 박정환을 위해 스파이 노릇 할 생각으로 이태준과 조강재 편이 되는 척 한 것임.)  조강재는 최연진이 결국 핏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최연진도 다른 등장인물들 만큼이나 지독한,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지독한 사람이었으니...     

 

조강재 : "(안심한 표정으로) 그래, 미워도 아버지지.  최철환(최연진 생부) 의원 당장 석방..."
최연진 : "법대로 해요, 우린 검사니까.  최철환 의원 뇌물 수수로 피선거권 10년 박탈, 가능하겠죠?"
조강재 : (이건 또 어떤 상황인가 싶어 당황스런 표정 짓는)
최연진 : "그 사람 지역구 물려받으려는 아들이 있어요.  그 아들도 엮어요.  피선거권 10년 박탈."
조강재 : "(그제서야 상황 파악되는) 하... 최철환 의원하고 그 아들 선거에 못 나오게 해놓고, 안방 차지 못 한 네 엄마 대신 네가 그 사람들 지역구를 차지하시겠다?"
최연진 : (바로 그거라는 표정으로 USB 들어보이는 최연진.)
조강재 : "(손가락 튕기며) 콜~"

 

 

  최연진과 신하경 커플(?)이 손발 척척 맞추는 장면이, 이 드라마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이 부분이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재미있는 게, 만일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최연진과 신하경은 같은 편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말도 제대로 섞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우선, 인생관과 직업관 측면에서 두 사람은 극과 극이다.  신하경이 도덕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인데 비해, 최연진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놓고 권력의 풍향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이다.  게다가, 박정환을 사이에 둔 연적 비슷한 관계이기도 하다.  신하경과 박정환은 이혼한 사이라지만 여전히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최연진은 박정환에게 고백을 하기도 하고(비록 거절당했지만), 또 그 사실을 신하경에게 숨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상황이 워낙 급박하고 특수하다 보니, 박정환이란 선장이 모는 배에 두 사람이 함께 선원으로 승선해서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박정환을 위한 일을 하는 파트너로서는 서로에게 신뢰감을 갖고 있으면서, 은근히 박정환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또 그러면서도 상대방 태도를 쿨하게 넘기는 것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

 

신하경 : "시간이 많으면 겪어볼 건데, 너란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바쁘니까 물어볼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환씨 편에 서줄 수 있어?"
최연진 : "나한테 유리하면, 누구 편이라도."
신하경 : "(너와 내가 일단은 같은 편이지만, 선은 분명히 긋자는 식으로) 아, 나 결혼했어, 정환씨랑."
최연진 : "(태연하게 웃으며) 축하해요. (옆으로 고개 돌리며) 젠장."

신하경 : (픽 웃는)

 

 

 

이태준과 그 주위 사람들

 

 

  ◎ 이태준(조재현)

 

  이태준은 박정환처럼 개천에서 난 용이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고, 까막눈이었던 어머니는 동네 이장이 내미는 종이가 빚보증 서류라는 것을 모르고 도장 찍었다가 그나마 있는 것도 다 날려버렸다.  가난하고 힘없는 죄로 당한 게 한이 된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들 손을 붙들고 꼭 출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태준은 하나 남은 피붙이인 형 이태섭과 함께, 부모님 산소를 이장할 비용으로 나온 보상금(수몰지역 보상금)을 대학 등록금으로 쓰고 부모님 산소는 물 속에 잠기게 하는 쪽을 택했다.  남들 눈에는 불효막심한 짓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태준 형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돈을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 옮기는 데 쓰기 보다는 자기 형제가 출세하는 데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성장 환경 탓에, 이태준도 박정환처럼 권력욕이나 신분상승욕이 강하다.  그리고 자기 곁에 20년이나 있었던 조강재보다 7년 간 있었던 박정환을 더 아낀 것도, 박정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남들을 마구 짓밟은 이태준이지만, 형 이태섭에게만큼은 절절했다.

  형은 부모가 세상을 뜬 후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었고, 또 자신을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형이 살인죄를 저지르고 자신에게 뻗쳐오는 수사망에 동생까지 걸려들 것 같자,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살한다.  그나마 형이 살아있을 때에는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어느 정도의 분별은 있었는데, 형이 그리 떠나자 그야말로 폭주한다.  형을 자살할 수 밖에 없게끔 몰아간 박정환도 윤지숙도 전부 밉고, 모조리 쓸어버려야겠다고 정신 없이 몰아친다. (사실 형의 죽음에는 이태준의 측근 조강재가 걸려있었는데, 아직 그걸 모르는 상황임.)

 

  그런데 이태준은 같은 적이라도 윤지숙에게는 승부욕과 증오감만 느끼는데 반해, 박정환에게는 여전히 끈끈한 정도 느낀다.

  검찰 개혁을 부르짖는 윤지숙과는 당연히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표면적으로 드러난 정치적인 이유 말고도 태생적인 거부감도 있는 것 같다.  자신과 다르게 법조계 명문가 출신으로 평탄하게 산 윤지숙에게, 개천에서 난 용인 이태준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거기에, 윤지숙이 자기 권한을 이용해서 아들 병역비리 사건을 덮고 그 밖에 이런저런 악행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너와 나는 똑같이 나쁜 사람인데, 왜 너 혼자만 깨끗한 척 하냐?' 식의 억울함(?) 같은 것도 느끼는 듯하고...

  하지만 박정환과는 다르다.  박정환과는 어떤 원한 관계가 있어서 등을 지게 된 게 아니라, 그만 상황이 여러 차례 꼬이면서 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똑같이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점, 자신을 지금 검찰총장 자리에 있게 한 일등공신이 박정환이라는 점, 박정환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점 때문에, 박정환을 눌러버리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박정환의 절박한 심정도 이해를 하는 것 같다.  애증의 관계랄까, 호적수 관계랄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그런 복잡한 감정으로 이태준과 박정환은 얽혀있다.

 

이태준이 형의 자살로 이성을 잃고 날뛰며, 윤지숙 아들의 병역비리 증거가 든 칩을 공개하겠다는 암시 주며 윤지숙을 몰아붙인다.

이태준 : "내 집에 불 나면 장관님 집에 더 큰 불이 날깁니다."
윤지숙 : "약속했어요, 그 칩 공개 안 하기로."

이태준 : "장관님, 지는요, 내한테 유리한 약속만 지킵니다.  내는 벌개벗고 뛰는데 장관님도 화장 지우고 맨얼굴로 돈도 주고 자리도 약속하고 이자는 사람 그리 만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태준이 대통령 자리를 넘보고 있음을 알고, 윤지숙이 경악한다.
윤지숙 : "정치인 사정을 하는 이유가, 유력 대선 후보들을 낙마시키려는...?"

이태준 : "내보다 공부 잘 하는 놈은 시험장에 몬 가게 막아야 하지 않겠십니까?"


이태준은 조강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고, 특별검사 윤지숙에게 조강재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내 처벌하라고 닥달한다.

이태준  : "퍼뜩 끝내고 특검 문 닫읍시다.  강재 그 놈아가 지 입으로 내가 그랬다 하게 만드이소."

윤지숙 : "조강재를 회유하란 말인가요?  피의자를 회유할 수는 없어요." 
이태준 : "손에 피를 묻히야 내 같은 놈하고 우리가 될긴데, 이문만 남기고 손해는 안 볼라카네.  세상천지에 요런 장사가 어디 있노?   특별검사님, 제 옷에 묻은 먼지 퍼뜩 털어주이소."

 

이태준 : "요번 일 잘 되면, 정환아, 네 상가에 부조 두둑히 하꾸마.  조화도 큰 놈으로 보내주고."
박정환 : "이번 일 잘 되면 교도소에 사식은 넣어드리고 떠나겠습니다."

 

이태준 : "정환아, 니 그 문 열면 니 남은 인생 감옥에서 보내야 할기다."

박정환 :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시네.  총장님, 저 감옥에서 죽겠습니다.  총장님은 만수무강 하십시오, 감옥 안에서."

 

박정환 : "나 떠나면 총장님 비리 내 지게에 다 올릴 생각, 그거 먼저 잊으시죠.  내 짐만 올려도 무겁습니다.  자기 짐 각자 지고 갑시다."

이태준 : "정환아."

박정환 : "지난 7년 총장님하고 남의 인생 밟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내 인생 밟히니까 그거는 못 참겠네."
이태준 : "정환아, 니는 일개 과장이고 내는 총장이데이."
박정환 : "하루에 한 걸음씩 갈랍니다.  열흘이면 당신 멱살 잡겠네."


이태준 : "근데 정환아, 니 며칠 안 남았는데 죽는 거 안 무섭나?"
박정환 : "죽는 건 가볍네, 사는 게 무섭지."

 

 

  ◎ 조강재(박혁권)

 

  조강재는 부장검사인데 이태준의 측근으로 20년 동안 그 수발을 들었다.  

  분명 악당 무리 중 하나인데, 코믹 캐릭터다.  2:8로 나눈 가르마에, 일부러 과장되게 표현하는 표정에...  그래서 남을 협박하거나 남에게 빈정거리는 것조차 재미있어 보인다. ^^

 

  하지만 그런 조강재도 꽤나 입체적인 캐릭터다.

  얼핏 보면 우스워 보이기만 하는데 이런저런 악행을 저지르고 있고, 밖에서는 온갖 더러운 짓을 하지만 가정에서는 아내와 딸들에게 무척 자상한 남편이며 아빠다.  그리고 자신이 이태준에게 추천한 박정환이 자신을 제치고 이태준에게 더 신임을 받자 질투심을 느끼고, 나중에는 박정환의 계략에 걸려 이태준이 자신을 버리려 한다고 믿고 인간적인 배신감을 토로한다.  이태준에게 복수하기 위해 영상을 녹화할 때에도, 구속되어 기자 회견을 할 때에도, 항상 자신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하고 성실한 검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뻔뻔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연민마저 든다.

 

이태준이 조강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고 수사관들을 보내 잡으러 하자, 쫓기게 된 조강재가 박정환의 도움을 받는다.

조강재 : "정환아.  정환아, 나 너무 억울하다."
박정환 : "나보다?  난 떠나지만 그 쪽은 남을 거고.  나 떠나기 전에 이태준 총장 같이 잡읍시다."

 

자신과 조강재가 모두 박정환의 계략에 넘어간 것을 알고, 이태준이 조강재를 불러내어 오해를 풀려고 한다.

조강재 : "저 때문에 울어본 적 있습니까?  정환이 뇌종양 앓았을 때, 정환이 마누라 옥에 보낼 때, 울었잖아요.  그런데 20년간 수발 든 나 보내고 웃고 있네요."
이태준 : "강재야, 서운한 거 잊어뿌고 인자는 니 살길만 생각해라."
조강재 : "총장님이 죽어야 제가 삽니다.  270억 저한테 덮어씌우셨잖아요.  총장님이 그거 가져가셔야 제가 살죠."

이태준 : "강재야, 고건 아니다.  내가 정환이..."

조강재 : "총장님 우는 거 한번 봐야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 봐야겠습니다.  저수지에서요, 정환이 먼저 가고 이태섭 대표하고 둘이 있었습니다.  피의자가 사망하면 공소가 중지된다고 제가 이태섭 대표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조강재가 배신감에 흥분한 나머지, 이태준 형 이태섭이 자살한 게 사실은 자신이 종용한 것이라고 밝힌다.  이 일로 이태준과 조강재가 화해할 가능성은 날아가 버리고...)

 

 

 

윤지숙과 그 주위 사람들

 

 

  ◎ 윤지숙(최명길)

 

  윤지숙은 이태준만큼이나 매력적인 악당이다.

  이태준이 '스스로 악당임을 숨기지 않는 호방하고 솔직한 악당' 이라면, 윤지숙은 '한 때 깨끗했던 이가 더러워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빨리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 했던 자신의 어두운 면에 잡아먹혀버린 악당' 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지숙은 박정환이나 이태준과는, 태생도 그 동안의 행적도 정반대다. 

  대한민국 법조계 최고의 명문가로 이름난 윤지숙의 집안을, 이태준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법조계 인사로 병풍을 만들면 12폭짜리 병풍을 몇 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집안' 이라고.  친가와 외가 양쪽으로 이름난 법학자와 판검사가 즐비하며, 윤지숙 스스로도 검사 출신 법무부장관이고, 윤지숙의 아들도 최근에 판사가 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윤지숙이 탄탄한 배경만 믿고 거만하게 굴거나 권력을 탐하는 등 속물적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항상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예의 갖춘 태도로 대하고, 썩은 검찰을 개혁해서 국민에게 사랑과 믿음을 받는 검찰로 만들겠노라며 동분서주한다.  부드러움 속에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랄까?  그래서 소장파 검사들이나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법은 하나다.' 라는 소신을 지키려고 정치권의 비리를 파헤치다가, 정치권의 부당한 압력을 받게 되자 검사복을 벗었다.  하지만 그 일은 전화위복이 되어 '깨끗한 검사의 대명사' 로 국민들에게까지 알려졌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법무부장관이 되었다.  

  검찰총장 자리가 비게 되자, 자신과 뜻을 같이 했던 정국현을 그 자리에 앉혀 검찰 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려 한다.  하지만 박정환의 음모로, 정국현 대신 '썩은 검사의 대명사' 이태준이 검찰총장이 되었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통째로 걸고 막상막하의 혈투를 벌이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윤지숙이야 말로 능력과 인격을 모두 갖춘 이상적인 공직자라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이태준보다 더 무서운 악당이다...! -.-;;

  윤지숙이 타락하게 된 직적접인 계기는 아들의 병역비리 연루 사건이다.  7년 전 박정환이 맡았던 고위층 자제들의 병역비리 사건 명단에 윤지숙 아들의 이름도 올라있었다. (다만 윤지숙의 시어머니가 혼자서 벌인 일이라, 윤지숙은 박정환에게 병역비리 사건 명단을 받기 전까지 아들이 불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줄 전혀 몰랐음.)  그 동안 공직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던 윤지숙은, 아들이 전과자가 되는 것과 자신의 공직생활에 오점이 남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사건을 덮어버리고 대신 박정환을 희생시키려 했다.  자신은 '이번 한 번만' 이라는 심정으로 그런 짓을 벌였지만, 그 일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 새로운 악행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만, 아들의 병역비리 사건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원인' 이고, 윤지숙 내면에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 했던 권력욕이 있었던 게 '근본적인 원인' 이라고 생각한다. 

  이태준과 박정환이 한 말처럼, 윤지숙은 정말로 청렴결백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돈도 권력도 충분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동안 부정부패를 저지를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회에서 신하경이 한 말처럼, 항상 원리원칙을 강조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들에게만이었고, 정작 윤지숙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즉,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7년 전 병역비리 사건 조사 때, 박정환이 병역 브로커와 거래한 것을 알고 윤지숙이 박정환을 질책한다.

박정환 : "보고만 있을까요?  병역비리로 군대 빠진 높은 분 자제들, 나중에 판사가 되고 공무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꼴.  그 놈들 잡으려고, 네, 브로커 부탁 하나 들어줬습니다."
윤지숙 : "우리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야.  법은 하나야, 나한테도 그들한테도."

 

7년 전 병역비리 사건 때 윤지숙이 아들을 구하려고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았음을 이제야 안 박정환이 윤지숙에게 따진다.

윤지숙 : "이태준 총장 손잡은 건 정환이 네 선택이야."
박정환 :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집니다.  장관님 선택도 책임지십시오."
윤지숙 : "..."
박정환 : "내 빈소에 당신은 못 올겁니다.  감옥에 있을 거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윤지숙씨."
윤지숙 : "!"
박정환 : "법은 하나야. 나한테도, 당신한테도."

 

윤지숙이 이태준을 치기 위해 이태준에게 뇌물 받은 정치인들을 전부 소환하는 초강수를 둔다.

윤지숙 : "20분 뒤에 기자 브리핑 실시합니다.  보도자료 준비하세요.  이태준 총장이 로비한 정관계 인사 42명 전원 명단 공개하고 소환장 발부하세요."
수사관 : "고위직이 많습니다.  좀 더 확인을 거친 뒤에..."
윤지숙 : "법은 하나입니다.  나한테도 그들한테도.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예외없이, 소환장 발부하세요."

 

마지막회에서 유죄판결 받고 끌려나가는 윤지숙에게 신하경이 말한다.

신하경 : "윤지숙씨, 법은 하나에요.  정환씨한테도, 당신한테도."

 

  원래 얼룩 적당히 묻은 쪽보다 새하얗기만 한 종이가 더러워지려면 더 빨리 더 크게 더러워지는 법이다.

  자신의 타락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태준을 검찰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려 검찰 개혁을 완수하자' 는 목표에 매달리게 된 게, 오히려 윤지숙의 타락을 더 가속화하게 된다.  이태준을 처벌하는 건 어디까지나 검찰 개혁을 위한 수단인데, 그 수단이 목표로 바뀌면서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리수를 연달아 두게 된 이유는, '나는 이태준 같은 더러운 인간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검찰을 깨끗이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손에 먼지 묻히는 것 뿐이다.' 고 스스로의 타락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니...

  결국, 잘못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그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이태준을 잡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고, 또 다시 그걸 덮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윤지숙은 그런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어, 등장인물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타락하게 된다. 

 

윤지숙이 점점 스스로의 원칙을 저버리고 변해가는 것에 대해 우려하면서, 정국현이 신하경에게 말한다.

정국현 : "(윤지숙이) 피의자하고 거래도 허락하고, 검사장들 앞에서 거짓말도 하고...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이 되면 어떻하나 그런 생각도 들어."

 

윤지숙이 아들 관련 병역 브로커를 빼돌리자, 정국현이 찾아와 따진다.

정국현 :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장관님 대답은 제가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장관님은 이태준 총장 덕분에 존재하는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잘못을 하든, 이태준 총장을 잡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윤지숙 : (문득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이태준의 모습으로 보이자, 자기도 모르고 눈을 질끈 감는)
정국현 : "괴물을 잡으려다가 괴물이 되셨군요, 장관님."

 

이태준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윤지숙과 박정환이, 그 일이 해결된 후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윤지숙 : "이태준 총장 욕심만 막으면, 정환아."

박정환 : "당신은 누굽니까?  하나님은 대답했죠,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당신은 이태준 덕분에 존재하네.  이태준을 막아야 되니까.  뭐가 다를까, 당신하고 이태준."

 

 

  ◎ 이호성(온주완)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

  다른 등장인물은 주연과 조연, 선역과 악역을 막론하고, 입체적이고 개연성 있는 캐릭터다.  그런데 이호성만은 '저 사람 도대체 뭐지?' 하고 고개 갸우뚱하게 되는 캐릭터다.  

 

  이호성은 박정환, 신하경과 사법연수원 및 검찰 동기이며 친구다.

  처음에는 신하경처럼 검찰 내 세력다툼 따위에 신경 안 쓰고 자기 임무에만 최선을 다 하는 올곧은 검사였다. (이혼한 신하경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품고 있는 듯한 낌새도 있었는데, 그냥 낌새로 멈춰버림. ^^;;)  박정환과는 성격이나 인생관의 차이 때문에 점차 멀어진 것 같지만, 친구로서 최소한의 정은 간직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호성에게는 한 가지 큰 비밀이 있다.

  7년 전 윤지숙이 아들을 위해 박정환을 변호사법 위반으로 연행해 조사하게 된 것에, 이호성이 한몫 했던 것이다.  당시 이호성도 다른 젊은 검사들처럼 윤지숙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검찰 개혁을 주도하는 윤지숙이 타격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박정환이 병역비리 브로커와 거래한 것을 알려줬던 것이다.

  다만, 이 때까지는 악행을 저질렀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박정환이 병역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불법수사를 한 것은 사실이고, 또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정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는 심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윤지숙이 병역비리 수사만 멈추게 하고 박정환을 다치게 않게 하겠노라 해서, 박정환의 잘못을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윤지숙이 그 약속을 깨고 박정환을 아예 법조계에서 축출하려 했기 때문에, 그만 박정환이 이태준과 함께 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런데 7년만에 다시 도움을 청하는 윤지숙의 손을 잡더니, 그 때부터 황당하게 변해간다.

  처음에는 윤지숙을 다시 돕는 것을 망설이면서도 이태준을 끌어내리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마지 못 해 윤지숙 편에 선 이호성이었다.  차라리 윤지숙처럼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권력욕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이태준이나 박정환처럼 돈도 권력도 없이 산 게 한이 되어 권력욕 넘치게 된 상태라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악당으로 변하게 된 이유가 충분히 설명이 된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변한 건지 이해가 안 간다.

  특히 드라마 막바지에서 윤지숙이 신하경을 고의로 차로 들이박고서 스스로도 놀라 공황 상태에 빠진 뒤로는, 아예 이호성이 악행을 주도한다.  그리고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윤지숙보다 한 술 더 뜨는 모습을 보여준다. -.-;;  박정환이나 신하경을 대할 때의 표정이나 태도를 보면, 분명히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죄책감을 무릅써가면서까지 점점 더 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된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이태준이 윤지숙 아들 관련 병역 브로커를 한국으로 불러들어 손에 넣으려고 하자, 윤지숙은 이호성에게 도움을 청한다.

윤지숙 : "호성아. 브로커가 이태준 총장 손에 들어가면, 이태준 그 사람이 검찰의 실세가 되겠지.  그건 막고 싶다.  이태준 총장이 검찰을 장악할 거야.  그건 막고 싶다."
이호성 : "나쁜 사람, 덜 나쁜 사람.  내 앞의 선택은 지금도 똑같네."

 

이태준을 구속할 수 있는 상황인데, 윤지숙이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이태준의 꼬임에 넘어가서 이태준을 봐주려고 한다.

이호성 : "장관님, 이태준 총장 퇴임시켜야 합니다.  이태준 총장 잡기 위해서 저하고 장관님 여기까지 온 겁니다."
윤지숙 : "뭐가 달라질까?  이태준 그 사람 하나 물러난다고."
이호성 : "장관님!"
윤지숙 :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들 공도 있고 과도 있어.  정의로운 사회, 풍족한 세상 모두가 꿈꿨지.  모두가 실패했고.  호성아, 내가 만들어볼게, 그런 세상."

 

이태준의 자택 및 집무실의 압수수색을 앞두고, 윤지숙과 이호성은 전화로 결의를 다진다.

이호성 : "특별검사님, 제가 한 선택, 특별검사님 믿고 따라온 길 후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윤지숙: "압수수색만 성공하면, 그 칩만 없애면, 이태준 총장 세력 사라질 거야.  호성아, 이제는 우리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윤지숙 차에 치인 신하경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이호성이 윤지숙에게 전한다.

이호성 "오늘 사건 알려지면, 정환이는 떠나고 하경이는 힘들고 특별검사님은 감옥에 갈 겁니다.  이 세상에는 이태준만 남을 거구요."
윤지숙 : "!"
이호성 : "이태준부터 잡아야지요.  안 그러면 내가 왜 친구를 버렸는지, 왜 특별검사님 손을 잡았는지, 나를 설득할 수가 없네."

 

 

 

기타

 

 

  ◎ 박정환네 집

 

  드라마에서 박정환의 집은, 수시로 전철이 지나가 덜컹거리는 철로 근처의 주택가에 있다.

  처음에는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이다 하면서도 그냥 넘겼는데, 어느 날 그 철로 위로 중앙선(전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 곳은 서울 회기역 근처에 있는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철로였다...! (물론, 회기역 근처가 아닌 중앙선이 지나는 다른 지역 주택가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일단 나는 회기역 근처라고 믿으련다... ^^;;) 이제 서울에서 철로 횡단보도를 볼 수 있는 곳이 정말 없는데, 그 곳은 정말 드물게 남아있는 철로 횡단보도다.  대학 다닐 때 MT 등으로 청량리역을 이용하느라 몇 번 직접 지나가봤고, 전철 안에서도 수도 없이 스쳐지나갔던 장소다.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전원적(?)인 풍경을 드라마에서 보게 되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

 

 

  ◎ 둔탱이 이태준

 

  아무리 사실적이라고 해도 결국 드라마는 드라마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에도 이런저런 구멍이 있는데, 그 중 제일 두드러졌던 게 이태준이 최연진과 이호성에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가는 부분이다. 

 

  이태준 옆에는 스파이가 두 명이 붙어있다.

  최연진은 박정환을 위한 스파이로, 이호성은 윤지숙을 위한 스파이로, 각각 박정환과 윤지숙을 버린 척 하고 이태준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스파이로서 엄청난 활약(?)을 해서 박정환과 윤지숙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이태준이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검찰총장이 되기까지 온갖 권모술수를 부렸고, 자기 말마따나 30년간 매달려 사는 심정으로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게다가 오른팔 왼팔이라 할 수 있는 박정환과 조강재와의 관계가 모두 틀어져버렸다.  그렇다면 원래 다른 사람 편이었다가 자신에게 온 최연진과 이호성에게 경계심을 품는 게 맞는 것 아닐까?  게다가 언제부턴가 자신이 같은 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만 한 말을 박정환과 윤지숙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욱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는 게 맞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태준은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슈퍼 둔탱이 검찰총장님... -.-;;)

 

 

  ◎ 예린이의 종잡을 수 없는 어휘실력

 

  박정환과 신하경의 귀염둥이 딸이자, 정글 같은 세상의 작은 희망을 상징하는 예린이...

  처음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걸로 나왔는데, 중간에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입학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즉, 예린이는 드라마에서 8살로 설정된 아이다.

  그런데 검찰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자기 아빠가 시한부 인생이란 글을 보고서, 아빠가 얼마 못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겨우 8살이 된 예린이가 '시한부 인생' 이란 말을 이해한다는 것에 깜짝 놀랐는데, 더욱 놀라운 일이 나중에 벌어진다.  박정환이 국제초등학교에 자기 딸을 불법입학시킨 일이 신문에 대서틀필 된다.  그런데 '시한부 인생' 이란 말도 아는 예린이가 '불법입학' 이란 말은 몰라서 어른들에게 물어본다. -.-;;

  지인의 말로는, 예린이를 키우는 게 권력욕 강한 박정환이 아니라 청렴결백한 신하경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엄마가 '불법' 이란 더러운 말 붙은 단어 따위 딸래미에게 안 가르쳐서 그렇다나... ^^;; 

 

 

  ◎ 마지막회 방송사고 

 

  워낙 숨가쁘게 엎치락 뒤치락 하며 달려온 드라마다 보니, 마지막회에서 허겁지겁 결말 짓는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뻔한 구석이 없는 우수한 작품이었고, 또 이태준이 박정환이 죽기 전 남긴 영상물 보며 눈물의 소주잔 기울이는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터라, 내용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었는데...

 

  그만 방송사고가 터졌다...!

  중간에 화면이 멈춰버린 일이 두세 번 있었다.  그리고 이태준과 조강재가 재판받는 장면에서는, 검찰이 조강재의 형량을 구형하려는데 갑자기 시커먼 화면이 나왔다.  그러더니 이미 재판이 다 끝나고 조강재가 법원 밖으로 나가는 장면과 함께, 조강재가 항소했다는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덕분에 펀치 마지막회 방송사고 관련 기사 중 추천수 1위 댓글로 '조강재가 항소한 이유는 방송사고 때문에 검사가 자기에게 몇 년을 구형했는지 못 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게 올라올 정도였으니... -0-;;  그런가 하면, 이 드라마 제목이 '펀치' 여서 막판에 시청자들에게 펀지 한 방 제대로 먹였다는 댓글도 올라왔고... ㅠ.ㅠ

 

  방송국의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라, 사전제작제와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 드라마 상황상 벌어진 사고인 듯하다.

  마지막회가 방영되는 당일까지 정신없이 촬영을 하다보니, 방송 내보내기 전에 편집 시간이 충분히 확보될 리가 없다.  방송을 내보내면서 실.시.간.으.로. 편집하다가, 몇몇 장면에서 다음 장면의 편집본이 미처 준비 안 되어 사고가 난 듯하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거라는데, 괜찮았던 드라마의 끝부분이 참 아쉬웠다.  드라마 제작환경이 나아져서 이런 황당한 일이 다시는없었으면 한다.   

 

 

  ◎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이 드라마에는 김경주란 시인이 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라는 시집이 나온다.

  시집 제목부터, 숨돌릴 틈 없이 앞만 바라보며 치열하게 살다가 한창 나이에 죽게 된 박정환에게 잘 어울린다.  이 시집은 예전에(아마도 두 사람의 연애시절에) 신하경이 박정환에게 생일선물로 준 것이다.  당시, 신하경은 이 시집에 "생일 축하해, 정환씨.  인생에 남은 생일들, 언제나 내가 옆에 있기를." 이라는 축하 메시지를 적어서 줬다.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 박정환이 뇌종양 수술을 받으면서 동생을 통해 이 책을 신하경에게 되돌려줬다.

  전에 신하경이 적은 축하 메시지 아래 자신도 따로 메시지를 적은 채...  "나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경아, 나는 살아야겠다.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나는 더 자라고 싶다."  수술 자체도 매우 어려운 수술이라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고, 실패할 경우 그나마 6개월 남았다는 수명이 더 단축될 것이 뻔한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듯이 투지부터 불태우는 박정환의 마음이 잘 드러난 메세지다.

 

  그리고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 신하경이 예전에 박정환과 결혼을 약속했던 바닷가에서 이 시집을 다시 들쳐본다.

  자신과 박정환이 쓴 메시지가 있는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그 다음 페이지에 박정환이 남긴 새로운 메시지가 나온다.  아마도 수술 실패 후 죽음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 쓴 메시지일 것이다.  "나의 시간은 끝났다.  하경아, 이제는 너의 시간이다.  잘 살아라, 하경아.  나의 심장으로, 너의 신념으로.  예린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신하경과 이혼 후에도 변치 않았던 애정 어린 마음, 자신은 옳지 못 한 방식으로 삶을 살았지만 신하경만은 자신에게 받은 새 심장으로 옳은 신념을 그대로 지키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신하경의 신념으로 두 사람의 딸이 살아갈 세상을 한결 더 나아진 곳으로 바꿔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멋진 말이다.    

 

 

  이 드라마 마지막회를 보고 난 다음 날(즉, 올해 설연휴의 첫날),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간 김에 영풍문고에 들렀다.

  드라마 속 이 시집에 박정환이 남기는 메시지가 인상적이기도 했고, 또 어떤 펀치팬이 이 시집을 사서 읽어봤는데 마치 박정환의 심정을 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오래간만에 시집 사서 읽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책을 찾으면서 좀 황당하고도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서가에 이 시집과 시리즈로 나온 시집이 잔뜩 꽂혀 있는데, 몇 번을 찾아봐도 이 시집만 안 보였다.  다른 책을 뒤적이다가 내 옆으로 온 친구가, 자신도 같이 찾아보겠다면서 시인 이름과 책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내 딴에는 정확히 알려줄 생각에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라고 좀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끊어가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고 겨우 몇 초나 지났나, 서가 앞에 한 쪽 무릎 꿇고서 손가락으로 시집 하나씩 짚어가며 찾는 중인 내 앞에 별안간 이 시집이 불쑥 나타났다.  놀라서 얼굴을 들어보니, 어떤 남자 두 명이 내 옆에 서서는 그 책을 내 얼굴 바로 앞에 내밀고 있었다.  얼떨결에 받아서 책 제목을 확인하고서는 고맙다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웃으며 다른 곳으로 갔다.

  내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친구 왈, 그 남자들이 내 목소리 듣고서 오더니 서가에 꽂혀있지 않고 다른 책들 위에 놓여있던 그 책을 집어다가 내민 것이라고 한다.  그 말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막 그 서가로 갔을 때 그 남자들이 거기에 서있다가 자리를 비켜줬다.  나보다 먼저 그  시집을 찾아 보고는 다른 책들 위에 얹어두고 갔는데, 내가 그 책 찾는 소리 듣고 돌아와서 찾아주고 간 것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드라마 펀치를 열심히 본 나와 아예 본 적 없는 친구의 반응이 확 갈렸다.

  친구는 "책을 봤으면 제 자리에 꽂아야지, 자기들만 보면 다야?" 하고 투덜댔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들도 펀치 봤네, 봤어!  어제 마지막회 보고 시집 찾으러 온 거 분명해!" 하고 흥분했다.  친구 표정은 -.-;; ← 이렇게 변했고... ^^  

 

 

황금의 제국 - 또 하나의 명품 드라마(http://blog.daum.net/jha7791/157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