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경주 -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스친 인연에 관한 영화

Lesley 2015. 1. 6. 00:01

 

  외장하드에 서너 달은 쟁여놓아 푹푹 익어버린 영화 '경주' 를 지난 12월에야 감상했다.

  제목 그대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경주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 때문에 의무적으로 한 번은 다녀와야 하는 곳일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몇 번을 가서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봐도 매번 좋기만 한 곳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 가서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만 개봉 기간을 놓쳤다.  그 후로 이 영화는 뇌리에서 차츰 잊혀지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인터넷 벗님의 은혜에 힘입어 뒤늦게라도 보게 되었다.

 

 

 

 

 

  ◎ 홀로 떠난 경주에서 1박 2일 동안 만나고 흘려보낸 인연들

 

  중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현(박해일)은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런 부고에 문상을 하러 귀국한 것이다.  고인과는 친했던 사이지만, 그 동안 해외생활을 하면서 연락이 뜸해졌던 듯하다.  함께 문상을 간 지인(현과 고인 모두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귀띔해주기 전에, 상주 노릇하는 젊은 여자가 고인의 아내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니...  그런데 그 지인에게서, 고인의 결혼생활이 최근 몇 년간 불행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현은 문상을 끝낸 후, 난데없이 혼자 경주에 가기로 한다.

  7년 전에 현, 고인, 지인 그렇게 3명이서 경주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리고 영화 끝부분에서야 드러나지만, 공교롭게도 현도 고인처럼 아내(중국인)와 갈등을 겪고 있다.  현은 한 때 가까웠던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사람과 자신 모두 결혼생활이 삐그덕거리는 점 때문에, 많이 심란했던 것 같다.  그래서 7년 전 고인과 함께 했던 경주여행을 되새길 겸, 또 원만하게 지내지 못 하는 아내와 잠시 떨어져 마음을 추스릴 겸, 경주로 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충동적으로 떠난 경주 여행에서, 현은 예상치 못 한 여러 인연(과거의 인연,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얽히게 된다. 

 

  우선, 단아한 매력을 지닌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와의 만남.

  현은 7년 전 경주여행 때 들렸던 찻집에 다시 가본다.  그런데 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처음에 윤희는 현을 변태(!)로 생각했다. ^^;;  현이 그 찻집벽에 붙어있던 춘화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다.  여러 손님이 그 춘화를 두고 짖궂은 소리를 했기 때문에, 윤희는 불쾌해진 나머지 춘화를 벽지로 덮어버렸다.  그런데 현이 7년 전에 봤다는 춘화를 이제와서 새삼스레 찾는 것을 보고, 현을 변태로 여긴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학창시절 여자후배와의 과거사.

  현은 경주에 도착한 후, 여자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한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건데, 지인들을 안 만나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 아깝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여자후배가 경주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살면서, 현의 전화 한통에 즉시 내려온 것이 좀 이상하다 했더니만...  그리고 그렇게 불원천리 내려온 것치고는, 현에게 반가운 얼굴 대신 냉랭한 태도를 보여서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더니만...

  과거에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면야,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연애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길 일이다.  그런데 현이 술에 취한 여자후배를 돌봐준다며 자취방으로 데려갔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던 것이다.  아마 그 후에는 서로 하룻밤의 실수일 뿐이라고, 아무 일 없던 셈치고 평범한 선배-후배의 관계로 지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현은 이제서야 여자후배가 그 때 임신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한 여자후배가 지금 불임인 이유가, 그 때 낙태한 후유증이라는 것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선배 원래 책임 안 지잖아?" 하고 원망과 비난을 담아 대답하는 여자후배...  그리고 아무 대꾸 못 하는 현...

 

  현은 여자후배와 헤어진 후 심란한 탓이었는지, 다시 찻집으로 간다.

  현을 배우로 오해한 일본인 관광객들 때문에 조금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건을 겪은 후, 현과 윤희는 조용히 마주앉아 차를 마신다.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을 변태로 생각했던 윤희가 서서히 현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일단 오해를 풀자 현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그 날 저녁 지인들과의 만남에 현을 데려가기까지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모임 참석자인 박교수(경주 모 대학의 교수)가 현에 대해 알고 있다.

  박교수가 현의 학문적 성과와 명성에 대해 칭찬하는 등, 두 사람의 시작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술이 얼큰히 오른 박교수가 현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서, 그만 일이 꼬여버린다.  현이 재직중인 북경대학에서 강연을 할 수 있게 초청해달라는, 한 마디로 스펙을 쌓게 도와달라는 청탁이다.  여러 번 만나 친분을 쌓은 사이도 아니고, 초면에 말이다. -.-;;

  그렇잖아도 여자후배의 일로 마음이 어수선한 현은, 박교수의 태도에 짜증스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박교수의 질문에 성의 없이 대꾸 한다.  자신의 상황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듯한 박교수는, 현이 자신을 무시한다며 벌컥 화를 낸다.  다행히 윤희가 적절한 때에 끼여들어 본격적인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참석자인 경찰 영민은, 한 남자로서 현을 경계한다.

  영민은 오전에 찻집 대문 앞에서 현과 마주쳤을 때만 해도, 현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그 때의 현은, 영민이 좋아하는 윤희네 찻집 매상을 올려줄 손님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윤희가 처음 만난 현을 모임에까지 데려온 것을 보고, 현에게 경계심과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한다.

 

  모임이 파한 깊은 밤, 윤희는 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동성끼리라도 처음 만난 사람을 자기 집에서 자게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물며 다 큰 남녀가 한 집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 일이 순수하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제공받는 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어둑어둑한 거실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는데, 두 사람의 태도가 묘하게 대비된다.  현은 신사적인 태도를 지키지만 긴장한 빛이 역력하다.  반대로 윤희는 서로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데, 그 자연스럽고 차분한 말투가 어쩐지 유혹적인 느낌을 띤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던 현이 무언가를 보고 일어선다.   

  현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봉작이라는 중국 화가가 그린 수묵화다.  현이 그 그림을 알아 보자, 윤희는 깜짝 놀란다.  그 그림은 남편이 죽기 며칠 전에 걸어두었던 그림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이 장면에서 좀 의외인 게, 현은 윤희가 이미 결혼한 적이 있고 사별했다는 말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냥 '아' 하고 한 마디 할 뿐이다. (영화 밖의 나는 '앗, 이게 어떤 상황이지?' 했는데... ^^;;)

  현이 그림에 씌여진 글귀를 해석해준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라고.  그러자 윤희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듯, 놀란 표정을 짓는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현을 그대로 거실에 남겨둔 채 자기 방에 들어가 그 말을 그 글귀를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다시 현에게로 와서, 뜬금 없이 현의 귀를 만지게 해달라고 한다.

  현은 얼떨결에 허락을 한다.  윤희가 현의 양쪽 귀를 꼼꼼히 만지면서, 두 남녀 사이에 야릇한 분위기가 피어나는데... 

  별안간 영민이 쳐들어온다. ^^;;  영민은 어두운 거실에 서있는 현을 보고 '역시 그랬군.' 하는 태도로, 피의자를 취조하는 것 마냥 여권을 보여달라 요구한다.  하지만 여권에 별 문제가 없자,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던지고 나가버린다. (영민은 떠났지만, 두 남녀 사이의 묘한 분위기는 이미 다 깨졌을 뿐이고... -.-;;)

 

  영민이 떠난 후, 윤희는 담담한 목소리와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의 사연을 말한다.

  우울증을 앓던 남편이 자살한 후 윤희는 술로 세월을 보냈는데, 한 스님의 권고로 술 대신 차를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차를 마셔봤더니 심신이 안정이 되어 계속 마시게 되었고, 아예 찻집까지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의 귀가 남편의 귀와 너무 비슷해서, 찻집에서부터 만져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만져보니 전혀 다르다고...

  영민만 아니었으면 한 단계 더 나아갔을 두 남녀는, 결국 각자 잠자리에 든다.  다만, 서로에 대한 묘한 이끌림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 한다.  윤희는 일부러 방문을 살짝 열어놓아 여지를 남긴다.  자신 쪽에서 먼저 다가설 생각은 없지만, 상대가 다가오면 피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그리고 현은 그 방문 앞에 서서 망설이다가, 엉뚱한 무협영화(!) 흉내로 겨우 마음을 다잡는다. (진지하고 차분한 영화인데, 이런 소소한 코믹요소가 가끔 나옴.)

 

  새벽녘,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 현은 중국인 아내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받는다.

  이 부부는 최근 어떤 일로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현이 한국에 와서 잠시 떨어지게 된 일로, 아내 쪽에서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화해의 뜻으로 중국노래 모리화를 불러준다.  현은 창밖으로 보이는 경주의 푸르스름한 새벽 풍경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그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윤희의 집에서 나온다.  분위기를 보아, 윤희에게 따로 작별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나온 듯하다.

 

  윤희에게 감정적으로는 이끌렸지만 아무 일 없이 밤을 보내고, 그 밤이 끝난 후 아내에게서 화해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현과 윤희의 인연이 처음부터 짧은 유통기한(?)을 갖을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현이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윤희와의 인연은 어차피 한계를 갖고 시작한 셈이니까.  혹은, 과거의 인연(7년 전 친했던 형과 함께 경주에 여행온 일, 혹은 그 형과의 인연 전체)을 돌이켜보려고 온 경주 여행이었기에, 윤희와의 인연도 처음부터 금새 과거의 인연으로 묻힐 운명이었던 것일까...

 

 

  마지막 10분을 남긴 상태에서, 영화의 분위기가 돌변한다.

 

  현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던 중, 전날 만났던 여자후배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의처증이 있다던 여자후배의 남편이, 아내가 현과 만났음을 알게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냥 화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현을 찾아 경주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현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서울에 있는 여자후배가 알고 있다.  즉, 그 남편이란 사람이 이미 그 식당 주변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현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저 놈 가만히 두지 않겠다.' 식으로 말을 한 모양이다. (사람 찾는 능력이 탁월한 것으로 보아, 그 남편이란 사람은 무슨 정보부 특수요원이라도 해야 할 듯... -.-;;) 

 

  현은 밥을 먹다 말고 후다닥 도망치는데, 이 때부터 현에게 기묘한 일이 연달아 생긴다.

  우선, 전날 여자후배와 갔던 노천 점집에서 봤던 할아버지가, 어쩌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막힌 소리를 듣는다.  그 다음에는, 전날 윤희와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스쳤던 오토바이 폭주족들을 다시 보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현의 눈앞에서 사고를 당한다.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한 듯함.)

  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적에게 쫓기며 인적이 드문 들판을 뛰다 걷다 하며 강가로 간다.  이 때 카메라가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하는 것처럼 현의 뒤편으로 서서히 다가간다. 

 

 

  영화는 그 후 현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보여주지 않고, 7년 전 윤희의 찻집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2시간이 넘는 영화에서 몇 번이나 언급되었던 춘화가, 영화가 다 끝나가는 이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이 부분도 나름 반전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춘화라고 하면, 조선시대에 그려진 옛스런 그림을 떠올린다.  그런데 찻집 벽에 붙어있던 춘화는 해학적인 필선으로 그린 현대의 그림이다. (사실 내 기준으로는, 그 정도 그림을 춘화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음. ^^;;)

  일행(고인, 문상을 함께 한 지인)이 그 춘화를 두고 이런저런 농담을 하는 동안, 현만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운다.  어찌 보면 민망해서 점잔 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 형들은 사춘기도 아니고 이 나이에 저 정도 그림 갖고 웬 야단법석이지?' 하며 시큰둥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때 윤희가 다기를 들고 나타나, 불쾌함을 누른 듯한 새침한 표정으로 차를 따른다.

  이 부분도 뜻밖인 게, 윤희는 분명히 3년 전에 찻집을 인수했다고 했다.  그런데 7년 전 현 일행이 찻집에 들렸을 때, 이미 찻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춘화를 보며 낄낄거리던 두 남자는 민망해하며 표정을 수습한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이 춘화를 놓고 농담 주고받을 때에는 무표정하게 있던 현이, 윤희 앞에서 갑자기 쿡쿡거리며 웃는다.  윤희도 일행도 모두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현은 애써서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다.  그리고 맑게 울리는 풍경소리(아마 다른 손님이 찻집에 들어온 듯)에 네 사람이 모두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 거의 잡힐 듯했던, 그러나 놓쳐버린 영화 주제 / 애매모호한 결말

 

  솔직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145분이나 되는 영화를 보면서, 결말에 가까워질 때까지는 영화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이 한동안 못 만났던 친한 형의 장례식장 풍경이다.  그리고 어쩌면 깊은 인연으로 묶일 뻔했던 강렬한 인상의 찻집 여주인은, 알고 보니 자살한 남편을 둔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과 같은 날 경주에 내려와서 두어 번 스쳐지나갔던 모녀는 함께 자살했다.  또한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카메라는 수시로 경주를 채운 거대한 고분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흔히 죽음을 삶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며 낯설어 하고 두려워 하지만, 사실은 죽음도 삶의 일부이며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있다는 것을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말을 10분 앞둔 때부터, 내 머리 속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영화를 다 본 후에는,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안다고 말하기가 애매해졌다.  인터넷 포털 영화 메뉴에 뜬 짤막한 평들을 훑어 보니, 이 영화에 호의적인 감정 품은 사람들도 마지막 10분에 대해서는 당혹스러워 했다.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반전이었다든지, 혹은 그 부분은 아예 편집해버리는 게 나았을 거라든지...

 

  그러다가 영화 포스터를 다시 보니, 한 가운데에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여행' 이라는 문구가 있다.

  영화를 대표하는 포스터에 그렇게 써진 것을 보니, 조금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돌이키게 되었다.  주인공이 7년만에 간 경주에서 옛 인연들을 돌이키며 과거에는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되고, 바람처럼 잠시 스쳐갈 새 인연들과 엮이게 된다는 것일까...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죽음이 그 옛 인연과 새 인연 사이를 잇는 묘한 실이 되어주고 있는...

  내가 쓰면서도, 억지로 가져다 붙인다는 느낌이 든다. ^^;;  나에게는 이 영화가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여행' 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보면서 받은 느낌과 포스터의 문구를 종합하자면, 대충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애매모호하게 처리된 결말 부분 때문에, 이 해석도 저 해석도 들어맞지 않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 부분만 아니었으면, 내가 제일 먼저 생각했던 그 해석이 얼추 맞을 것 같은데... 음... 어렵다. ^^;;

 

  그리고 현은 결국 죽은 걸까?

  현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장면의 연출만 봐서는,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날 아침 내내, 죽음이라는 것이 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몇 년 전의 죽음(점집 할아버지)이었고, 그 다음에는 현재의 죽음(폭주족들)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둔 가까운 미래의 죽음, 즉 현 자신의 죽음이 아닐까...

  의처증이 있다던 여자후배의 남편은,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현의 소재를 금새 찾아낸 것으로 보아, 원한을 품은 대상에 대한 집착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다.  그러니 강가에 선 현의 뒤편으로 은밀히 다가서던 카메라의 시선은 여자후배 남편의 시선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남편은 그저 현에게 원한 품은 사람이 아니라, 그 날 아침부터 현에게 기분 나쁘게 연달아 달라붙던 '죽음' 의 구체적인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7년 전 현이 처음으로 그 찻집에 갔을 때, 찻집 주인이 윤희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윤희가 3년 전 찻집을 인수했다고 말한 것은, 그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까?  처음 만난 사람의 질문에 시시콜콜히 솔직한 대답을 하는 게 꺼림칙해서 둘러댄 것 뿐일까?  

  그리고 윤희가 말한 춘화를 벽지로 덮어버리게 된 이유, 즉 손님들이 춘화를 보고 짓궂게 굴었다는 게 7년 전 현과 그 일행이 한 행동을 말했던 것일까?  그리고 윤희는 7년 전 찻집에 왔던 현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완전히 잊은 걸까?

 

 

 

  ◎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느낌은 좋은 영화

 

  이렇게 마지막 10분 때문에 수수께끼투성이의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지루한 느낌 없이 잘 봤다.

 

  우선, 영화의 배경이 경주라는 게 좋았다.

  이 감상문 첫머리에도 썼지만, 나는 고즈넉하고 옛스런 경주를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경주에 갔던 게 2008년이다.  영화 속에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경주의 모습과 내가 모르는 현재의 경주 모습을 번갈아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비록 영화의 주제가 막연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잔잔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 가끔 작은 아이러니에서 비롯되는 유머가 나온다.  거기에, 박해일의 지적이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신민아의 신비로운 분위기(다만 영화에 잘 어울리는 분위기와는 별도로, 신민아가 연기를 잘 한다는 느낌은 별로 못 받았음.), 영화에 가끔 흐르던 잔잔한 기타 선율로 된 배경음악 등이 박자를 맞춰가며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리고 습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더워 보이는 초여름 경주의 풍경도, 나에게는 색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던 것을 빼놓고는, 항상 겨울(초겨울 또는 늦겨울)에만 경주에 갔다.  수학여행 때는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초여름이었지만, 수백명의 학생들이 주마간산식으로 여기 찍고 저기 찍는 식으로 움직였으니 무언가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그저 석가탑과 다보탑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는 점, 번들번들한 파란색 체육복 입고 잠 덜 깬 모습으로 찍은 우리반 단체사진이 마치 한국전쟁 때 전쟁고아들 모아놓고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는 점이 기억에 남을 뿐... -.-;;)  그러니 '제대로 다녀온 경주여행' 으로만 따지자면, 오직 겨울에만 경주에 다녀온 셈이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씩이나, 영화 속 현처럼 나 홀로 초여름에 경주에 가서, 새파란 잔디가 돋은 고분을 사이를 걸어보고 전통찻집에 들려 황차를 한 잔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

 

 

 

  ◎ 아름다운 영상 - 찻집 풍경과 윤희 

 

  현이 처음으로 찻집에 가는 장면이 나왔을 때에는, 그냥 전통찻집이구나 하고 말았다.

  그런데 현이 두번째로 찻집을 찾았을 때에는, 처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 했던 찻집의 매력이 진하게 느껴졌다.  특히, 윤희가 현의 맞은편에 앉아 보이차를 우려내는 부분은 최고였다.  좀 어두워서 갈색톤으로 보이는 한옥과 그 한옥 한켠으로 쏟아져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영상에, 현과 윤희 사이에 오가는 가벼운(그러나 웬지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대화에, 윤희가 다기에 물을 따를 때 졸졸졸 하고 나는 물소리까지 전부 완벽했다.

 

 

 

 

  만일 내가 감독이라면, 틀림없이 이 장면을 영화의 메인 포스터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자전거를 함께 타는 장면을 메인 포스터로 쓴 이유를 모르겠다.  어차피 마지막 10분 때문에 이 영화에서 사실성이라는 것은 날아가버린 것 같은데, 차라리 몽환적인 느낌이 강한 이 장면을 메인 포스터로 썼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까지 본 신민아의 출연작은, 1990년대에 가수 조성모의 노래 '아시나요' 속 뮤직비디오가 유일하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그 뮤직비디오 속에서, 정말로 베트남 여배우를 섭외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신민아의 이국적인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신민아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신민아는, 막연하게 '이국적으로 생긴 사람'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국적인 외모 말고도 여러 가지로 색다른 느낌이 났다.  신민아가 차를 우려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갈색인 한옥과, 윤희가 내내 입고 있던 풍성한 새하얀 남방과, 차분하면서 뭔가 비밀을 간직한 분위기 덕분에,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윤희가 현을 데려갔던 모임에서, 박교수와 남자 플루티스트가 윤희를 '경주의 여신' 이라고 불렀다.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 기타

 

  이 영화 감독의 이름이 독특하더라니, 알고 보니 장률 감독은 조선족이다.

  그래서 한국 경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지만, 중국적인 요소가 종종 나온다.  주인공인 현부터가 중국여자와 결혼하여 중국대학에서 일하는 교수로 나온다.  그리고 중국산 담배, 한때 한국에서 다이어트용 차로 인기를 끌었던 보이차, 많은 한국인에게 이름조차 낯선 황차, 여주인공 윤희가 공자의 후손으로 설정된 것, 경주의 공원 한복판에서 중국음악을 틀어놓고 태극권을 하는 사람 등 중국에 관련된 것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거대한 고분들과 주택가가 한데 어우러져있는 풍경은, 경주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독특한 모습에, 일본인 관광객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여러 중국적인 요소까지 더해져서, 영화의 분위기가 더욱 독특했던 것 같다. 

 

 

  현이 여자후배를 마중나갈 때 등장하는 신경주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옛 경주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역을 만든 것인 줄 알았다.

  규모도 꽤 크고 에스켈러이터 같은 최신 설비도 갖추었고 겉면을 유리로 번쩍번쩍하게 치장한 신경주역을 보니, 감탄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몇 년 전 마지막으로 경주에 갔을 때 보았던, 소박하고 한적하고 옛스런 경주역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많이 아쉬웠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경주역과 신경주역은 별개의 역이다. ^^;; 

  경주역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제는 경주의 중심역이라는 위상을 신경주역에게 넘겨줬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이용했던 서울역과 경주역을 오가던 무궁화호와 새마을호 노선이 모두 폐지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주에서 다른 경북 지역 및 강원도 지역으로 이어지는 몇몇 노선만 남은 '한물 간' 역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신경주역이 경주를 대표하는 역이 되어, 서울역을 오가는 KTX가 다닌다고 한다.  전에는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를 타면 경주역까지 5시간이 걸렸는데, 이제는 KTX를 타고 신경주역까지 2시간이면 간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로 지은 역들은, 어쩌면 그리도 하나 같이 겉면을 유리로 떡칠(!) 해놓았는지....

  처음 서울역과 왕십리역을 그렇게 새로 지은 것을 봤을 때만 해도, 굉장히 세련되고 신선해 보였다.  중국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청량리역도 그렇게 바뀐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 후로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역을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제는 시큰둥 해지는 것을 넘어서서 질린다는 느낌마저 든다.

  천년의 고도라는 경주의 이미지와 전혀 상관 없이, 무슨 온실처럼 유리로 떡칠해놓은 신경주역을 보니,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코레일 직원들은 전부 전생에 유리공장 사장님이었나 보다.  그러니 새로 짓는 역사마다 유리만 죽어라 붙여놓지... -.-;;

 

 

  그리고 심각하거나 진지한 장면에서도, 종종 은근한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이 등장한다.

 

  먼저, 중국 담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여자후배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있음을 알게된 후, 현은 심란한 나머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  원래 담배라는 게 한번 인이 박히면 끊기 힘든 것이라, 그 동안에도 담배를 끊었다면서도 괜히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곤 했다.

  그런데 복잡한 심사 때문에, 독한 중국 담배를 한 개피도 아니고 두 개피나 동시에 피우면서 콜록거린다.  그러자 현에게 라이터를 빌려줬던 군인이 '정신병자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얼른 라이터를 돌려받고 그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일본인 관광객들이 현을 배우로 착각(!)하고 현과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두 여성 일본인 관광객은, 일부러 느릿느릿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동작이 차분하고 절제된 이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현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손으로 V자를 만들거나 머리를 현 쪽으로 기울이는 행동이 무척 귀엽다. ^^  

 

  한밤에 현, 윤희, 영민이 커다란 고분 위로 올라가는 장면에서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세 사람 고분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 보여서, 순간 '원래 고분 위에 올라가도 되는 거였나?  그렇다면 다음 번에 경주에 가면 나도 올라가봐야지.'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고분 아래에서 들려오는 관리인 아저씨의 고함 소리...!  "거긴 함부로 올라가는 데가 아니에요!  빨리 내려와요, 빨리!  여긴 문화재야, 문화재!"  역시나, 다들 술기운에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갔을 뿐, 고분은 올라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

  그리고 관리인 아저씨가 윤희에게, "얼굴도 예쁜 사람이 얼굴값도 못 하고 조상님 무덤에 함부로 올라가서 되겠어?" 하고 훈계할 때에는 그만 빵 터져버렸다.  경찰인 영민이 관리인에게, 사건 수사차 왔다고 둘러대는 장면에서 다시 빵 터지고... ^^ 

 

 

  그리고 이런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에 많이 쓰는 롱테이크가, 이 영화에서도 역시 자주 나온다. ^^

  특히, 현과 윤희가 마주 보며 혹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눌 때는 거의 롱테이크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긴 호흡으로 이어지기에, 중간에 한두 번 정도는 배우 얼굴을 번갈아 가며 크게 잡아줄 법도 한데, 카메라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롱테이크로만 나아간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는 대사 암기력이 뛰어난 배우만 캐스팅 해야지, 쪽대본에 익숙해져 한 번에 대사 몇 줄만 외울 수 있는 배우 캐스팅했다가는 큰일 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윤희가 여러 개의 다기를 써서 차를 우려내는 장면을 보면서,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차판매점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차를 끓이는 법이 따로 있고, 또한 다기를 갖추어 마셔야 차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듯하다.  같은 차를 끓였는데도 불구하고, 차판매점에서 제대로 절차를 밟아 끓여주는 차맛과, 기숙사에 돌아와서 내가 스테인레스컵(!)에 대충 타서 마시는 차맛이 달랐으니 말이다. ^^;;

  또한, 꼭 차맛이 다르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우아하고 정갈한 다기들의 모습과, 그 다기들로 꼼꼼히 차를 우려내는 모습에, 이미 차를 마시는 이의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기를 모두 갖추어 마시기에는 나의 상황이... ㅠ.ㅠ)

 

 

20시간 동안 경주 여행하기(4) - 영화 '경주' 속 찻집 '아리솔' / 김유신 장군묘 / 벚꽃(http://blog.daum.net/jha7791/1579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