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단만극(3) : 환향 - 쥐불놀이

Lesley 2015. 5. 20. 00:01

 

  ◎ 병자호란의 아픔에 관한 드라마

 

  '드라마 스페셜' 중 하나인 '환향 - 쥐불놀이' 는 2012년 11월에 방영한 것이다.

  방영한지 2년도 더 지난 작년 12월에 들어서야, 이런 드라마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괜찮은 작품을 2년이 넘어서야 알게 되다니...

  단막극이라는 게 달랑 1회짜리 드라마라서, 이 단막극이 다루는 무거운 소재로 깊고 넓게 이야기를 풀어가지는 못 한다.  그래서 내용이 다소 뻔하게 흘러간다는 느낌도 좀 들기는 했다.  하지만 수십 회짜리로 기획되어서 내용을 풀어갈 시간이 충분한데도, 내용이 산으로 가버리는 연속극이 수두룩 하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60분짜리 드라마에서 이 만큼의 질을 뽑아내다니 상당한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고서, 전에 구입해놓았던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을 읽었다.  

  이게 바로 '드라마나 영화나 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쓸데없이 무엇하러 보는 거냐?' 하고 역정내는 어르신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드라마의 순기능이다.  60분짜리 드라마 한 편 본 것이, 시간 없다는 핑계로 책꽂이에 꽂아만 두었던 책을 단숨에 읽는 것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드라마 속 주요소재인 환향인들에 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비록 이 책에서는 환향인이라는 표현 대신 피로인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저 지나가듯이 언급된 강화도 함락에 관한 부분도 신경써서 읽게 되었다.  그 만큼 이 드라마가 인상적이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 환향녀를 둘러싼 비밀

 

  병자호란이 끝나고 4년 후, 한 젊은 군관(원기준)이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역에 있는 고을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 군관의 임무는, 청나라를 탈출해 조선땅으로 돌아오는 환향인을 체포하는 것이다.  사실은 군관도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게 싫다.  자신도 환향인들과 같은 조선인이며, 병자호란 중 어머니와 누이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들을 청나라의 침입에서 지켜주지 못 했던 무능한 조선 조정은, 여전히 청나라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신세다.  그래서 군관은 그런 조정의 명을 받들어, 어쩔 수 없이 그 잔인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목숨 걸고 청나라를 탈출한 조선인을 체포하는 조선 군사들.  

 

 

  그렇게 붙잡힌 환향인 중 보옥(오인혜)이라는 여인이 있다. 

  보옥은 그 고을에 사는 이생원이 자신의 남편이라며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생원은 보옥이란 이름에 펄쩍 뛰며, 그런 여자 모른다는 식으로 나온다.

 

  보옥을 둘러싸고, 살인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게 된다.

  먼저, 관아의 이방이 살해당하는 일이 생긴다.  보옥의 부탁 및 협박(!)으로 이생원을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그러자 이생원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보옥과 대질심문을 받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는 보옥에게 큰소리 탕탕 치던 이생원이, 보옥의 입에서 '도르곤(병자호란 때 조선침략에 큰 공을 세웠던 청나라 황족인데, 당시 어린 청나라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맡아 최고의 권세가로 군림하고 있었음.)' 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새파랗게 질려 쩔쩔맨다.  그리고 그 고을의 사또도 그 사건이 도르곤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안 후로는, 또 다시 청나라가 조선에 큰 해를 입힐 수 있다며 사건을 대충 덮어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군관은 진실을 밝히겠다며 계속해서 수사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방을 살해한 범인으로 의심받던 이생원마저 살해당한다.   

 

  그런데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군관의 귀에 가연이라는 이름이 자꾸 들어온다.

  가연은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 두 살인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군관은 가연의 친어머니 윤씨 부인(허윤정)과 의붓오라비 문진사가 어떤 식으로든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주위를 캐기 시작한다.  

  윤씨 부인의 남편은 병자호란 때 피난가는 임금을 호위하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그 공을 인정해서 불천위로 올리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윤씨 부인의 아들이 일찍 죽어 양자로 들어온 문진사는, 양아버지의 불천위 문제에 무척 공을 들이는 중이다.

  그런데 문진사는 살해당한 이생원과 가깝게 지냈고, 문진사의 양어머니 윤씨 부인은 청나라를 탈출하는 환향인들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었다.  군관은 그 가문에, 두 살인사건을 넘어서는 어떤 큰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하는데... 

 

 

 

"그런 사람(병자호란 때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어째서 돌아오는 백성들을 사냥하듯 잡아들이오?"

"부인, 그건..."
"왕명이니 뭐니 말하지 마시오!"

"부인!"
"그런 왕명 때문에 온세상이 이렇게 된 거 아니요? 귀신이 나오는..."

"..."

 

 

 

  ◎ 적군의 폭압보다 더 무서웠던 동포들의 냉대

 

  보옥과 가연으로 대표되는 환향녀(여자 환향인)들이 겪은 비극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깔려있었다.

 

  이생원은 아내에 대한 신의와 정을 저버렸다.

  이생원도 한때는 아내 보옥을 아꼈다.  청나라 군사들에게 끌려가는 보옥을 구하려고 쫓아가다가 함께 포로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보옥은 그런 남편을 위해, 도르곤이 조선에서 강탈했던 재물을 목숨을 걸고 훔쳐내 속환금(포로 신세에서 풀려나기 위한 몸값)을 마련해줬다.  아내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남편은 아내에게 굳게 약속했다.  고향에 돌아가면, 하루 빨리 아내의 속환금도 마련해서 보내주겠노라고...

  아마 이생원도 처음부터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에게 약속한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 편한 생활을 다시 누리게 되고, 집안 사람들과 그 지역 유생들이 자결하지 않고 적에게 정조를 잃은 여자와 어찌 살 수 있겠느냐며 설득하자, 결국 변심하고 만 것이다.

 

 

 

"왜 약조한 것을 지키지 않으셨소!"

"그도 한때 나를 목숨보다 더 아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조그마한 미련조차 없어져버린 그런 인연이 되었소."

 

 

  그리고 문진사는 이미 손에 넣은 것에 만족 못 하고 더 큰 것을 탐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저버렸다.

  그 고을에서 가장 유력한 집안의 양자가 되어, 그 집안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된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다.  하지만 문진사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 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뜬 양아버지를 불천위로 올려 가문의 명예를 높이고, 자신도 그 덕으로 출세하고자 했다.

  그런데 청나라로 끌려갔던 의붓누이 가연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여자 포로들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그리고 여자들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조선의 분위기에서, 문진사는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게 된다.  예전에는 친누이처럼 귀여워하며 아꼈던 가연이지만, 환향녀로 돌아온 가연은 가문과 자신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

 

 

 

  ◎ 쥐불놀이 - 살아 숨쉬는 악귀를 치죄하는 의식

 

  드라마 부제가 왜 '쥐불놀이' 인지, 마지막에야 알 수 있었다.

  정월대보름에, 곧 다가올 봄을 맞아 농사에 해를 끼칠 쥐나 해충은 물론이고 그 해의 악귀까지 태워버리는 것이 쥐불놀이의 목적이다.  그 쥐불놀이에서 태워야 하는 악귀가 바로, 환향인과 그 가족의 애타는 마음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던 뻔뻔스러운 무리, 그리고 환향녀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이기적이고 잔인한 무리인 것이다.

 

  사건의 전모를 어지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군관은, 동네에서 벌어진 쥐불놀이를 보고 경악한다.

  그 때까지는, 윤씨 부인의 주도로 몇몇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즉, 윤씨 부인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억울하게 죽은 딸의 이름으로 그런 악귀 같은 자들을 처단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고을 사람 상당수가 그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 (하긴, 청나라와의 국경지역이라서, 그 고을 사람치고 가족이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가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으니...)  심지어, 청나라에게 다시 조선을 침략할 꼬투리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며 도르곤이 관련된 살인사건을 대충 덮으려고 했던 그 고을 사또마저, 윤씨 부인의 움직임을 그저 묵인해주는 게 아니라 은근히 돕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럼... 가연 아씨의 귀신이라는 것이..."
"귀신을 빌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저들을, 이제 알아보겠소?"

 

 

  드라마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 한다.

  보옥을 위해 오랜 시간 애썼던 윤씨 부인도, 보옥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 군관도, 보옥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저 보옥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고향땅에서 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다.

  그렇게 보옥은 다시는 청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시신으로나마 고향땅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쥐불놀이 불길은 보옥이 죽은 들판에서, 닫집 뿐 아니라 환향인들과 그 가족의 한까지 함께 태우며 차가운 밤하늘로 치솟는다. 

 

 

단막극(1) : 원녀일기(http://blog.daum.net/jha7791/15791158)
단막극(2) : 화평공주 체중 감량사(http://blog.daum.net/jha7791/15791174)

단만극(4) : 곡비(哭婢)(http://blog.daum.net/jha7791/1579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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