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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The Mission) - 오래간만에 본 추억의 명화 / 칼과 십자가

Lesley 2015. 8. 10. 00:01

 

 

 

  지난 봄, 십수 년 만에 영화 미션(The Mission)을 다시 봤다.

  대학 때 '중남미 역사와 문화' 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했는데, 교수님이 책과 영화 목록을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그 중 하나씩 골라 보고 레포트를 써오라 하셨다.  그 때 골라서 봤던 영화가 바로 미션이다.

 

  기다란 목록에서 굳이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해 뭘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생일선물로 영화 OST 모음 테이프를 사줬는데(네... 그 때는 아직 카세트 테이프 쓰던 아날로그 시대였습죠... ^^;;), 그 테이프에 이 영화 주제곡인 '가브리엘의 오보에' 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영화인지 전혀 모르면서 '아, 그 좋은 음악...!' 하고 이 영화를 찍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다른 과목에서도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를 써야 했기 때문에, 책보다는 영화를 보고 레포트 쓰는 게 시간을 많이 절약되고 쉽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우연함과 발칙함(!)이 섞인 의도로 골랐던 영화였는데...

  다 보고나니 안 봤으면 정말 아쉬웠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괜찮은 영화였다.  영화 자체도 잘 만들었고(1980년대 만들어진 영화이건만 지금 다시 봐도 그다지 촌스럽지 않음.),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원주민과 신앙을 지키려 했던 두 종교인의 태도, 종교인 개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제국주의 침략에 일조했던 그 시대의 종교 등등.

 

  오래 전에 봤던 이 영화를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작년 여름에 있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었다.

  TV 뉴스에, 광화문 시복식이 시작하기 전 성악가 조수미가 축하공연을 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 때 조수미가 부른 노래가 미션의 주제곡('가브리엘의 오보에')에 가사를 붙인 '넬라 판타지아' 였다.  오보에 연주곡으로만 듣던 음악을 사람의 목소리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고, 조수미의 노래를 들으며 오래간만에 이 영화를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구해놓고는, 어쩌다 보니 외장하드 속에 묵혀두다가 올해 4월에야 봤다.  자막이 좀 어설펐던 게 거슬렸지만, 그래도 대학시절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생각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

 

  미션은 1986년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대상) 수상작이다. 

  전에 이 블로그에 소개한 중국영화 '패왕별희' 와 함께 '예술영화제 수상작은 수준은 높은지 몰라도 무척 지루하다' 는 나의 편견을 깨뜨린 작품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이만큼 관객이 이해하기 쉽고 지루해하지 않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만든 롤랑 조페 감독은 진정한 능.력.자.다...! 

  이 영화 속에서 지금은 어르신(!)이 된 배우들의 소시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연급으로 30대 시절의 제레미 아이언스로버트 드 니로가 나오고, 지금과는 다르게 아직 조연급이었던 리암 니슨도 역시 30대의 모습으로 나온다.  

 

  잠시 삼천포로 빠져서...

  고고한 한 마리 꽃사슴(!) 같은 제레미 아이언스를 처음 알게된 게 바로 이 영화를 통해서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제레미 아이언스의 나이를 몰랐다.  그리고 서양인의 노화가 동양인보다 빠른 편이다 보니, 40대 중반은 되는 줄 알았다. -.-;;  파릇파릇한 대학생에게 40대는 굉장히 많은 나이로 느껴졌고, 또 영화 속 제레미 아이언스 모습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우아하고 멋지던지...  나이든 남자도 그렇게 멋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브리엘 신부 역할을 맡은 제레미 아이언스를 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몇 년 전에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미국 드라마 '로 앤 오더 : SVU' 및 '보르지아' 를 통해 제레미 아이언스를 다시 봤다.  30대에 찍었던 미션 속에서도 멋있더니 60대의 모습조차 여전히 우아하고 이지적이다. (미중년을 거쳐 미노년으로...!)  그러고 보니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한 미션, 킹덤 오브 헤븐, 보르지아 세 작품 모두 카톨릭의 어두웠던 시절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레미 아이언스라는 배우는 카톨릭과 묘하고도 끈끈한 인연이 있나 보다.

 

 

 

위의 포스터보다 이 포스터가 더 마음에 듦.

('칼과 십자가' 가 두 주인공의 상반된 선택, 종교의 양면성을 잘 보여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에서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리던 1750년.

  남미에 머물고 있는 한 추기경이 교황 앞으로 보낼 편지를 구술한다.  그 편지는 남미에서 벌어진 예수회 관련 사건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영화는 그렇게 추기경이 구술하는 편지로 진행된다.

 

 

  
  "예수회 신부들은 음악을 통해 선교를 했습니다."

 

  남미의 과라니족이 어떤 신부의 시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그 신부는 과라니족에게 선교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그런데 과라니족은 그 신부에게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시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떠내려 보내면 그 신부도 부활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앞부분에서 신부의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거대한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은, 영화 뒷부분에 나오는 장면(리암 니슨이 연기한 신부의 죽음)과 겹친다. (일종의 복선이랄까?)

  즉, 과라니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두 신부 모두 죽은 후 폭포 아래로 떨어진다.  앞부분에 나오는 신부가 어째서 죽었는지 영화 속에서는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두 장면이 비슷한 게 우연이 아니라 앞부분이 뒷부분의 복선이기 때문이라면, 앞부분의 신부 또한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속 다른 신부들처럼 과라니족을 지키려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신부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예수회 소속 신부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이 나선다. (죽은 신부도 예수회 소속인 듯.)

  그런데 가브리엘의 선교방식은 무척 독특하다.  그 시절 많은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덮어놓고 성경을 들고가서 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혼자서 과라니족이 사는 깊은 숲으로 가서 오보에를 연주한다.  처음 듣는 오보에 소리는 과라니족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과라니족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다.  그렇게 음악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힌 후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로드리고(로버트 드 니로)는 용병 출신의 노예 사냥꾼이다.
  로드리고는 이미 많은 과라니족을 잡아 남미에 정착한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았는데, 이제는 가브리엘이 머물고 있는 밀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과라니족을 사냥한다.  과라니족을 보호하려는 가브리엘과는 당연히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로드리고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친동생과 삼각관계에 빠져, 욱하는 마음에 칼싸움을 벌였다가 그만 동생을 죽이게 된다.  동생과의 싸움은 정당한 결투로 인정되어 처벌받지는 않지만, 심한 죄책감으로 반년이나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을 만큼 괴로움에 빠진다. 

 

  가브리엘이 그런 로드리고를 속죄의 길로 이끈다.

  로드리고는 예수회 신부들과 함께 과라니족 거주지로 간다.  그런데 맨몸으로 가도 힘든 산길과 절벽을, 용병 시절 및 노예 사냥꾼 시절에 썼던 갑옷과 무기를 한 덩어리로 모은 짐을 잡아끌며 간다. 

  자신에 대한 과라니족의 반감을 모르지 않았을텐데도 가브리엘이 이끄는대로 순순히 과라니족에게 간 것을 보면, 로드리고는 간접적으로 자살을 하려는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자살은 엄청난 죄악이라, 아무리 괴롭고 삶의 의욕을 잃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다.  그러니 고행 끝에 과라니족 손에 죽는 방식으로 죄책감 범벅인 삶을 끝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처음에는 로드리고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적대감을 보이던 과라니족이, 가브리엘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어째서 로드리고가 그런 몰골로 나타났는지 묻고 대답했던 듯.) 로드리고가 끌고 온 거추장스러운 짐의 밧줄을 끊어낸다.  그 동안 로드리고 때문에 많은 동족이 끌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했는데, 그런 원수를 용서한 것이다.


  그 일로 개과천선한 로드리고는 신부들과 함께 과라니족 마을에서 살게 된다.
  함께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농작물을 심기도 하고, 과라니족 아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기도 한다.  바쁜 생활 중에도 가브리엘에게 받은 성경을 탐독하더니, 마침내 정식으로 예수회 수사가 된다. (자막에는 '신부' 가 된 것으로 나오던데, 신학교도 거치지 않았고 개과천선하고 단기간에 임명된 것을 생각하면 '수사' 가 맞는 듯함.) 

 

 

 
  "지상의 낙원을 건설하려는 예수회의 시도는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군주들은 가난한 자들의 천국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곳의 정착민(유럽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영화의 화자인 추기경이 남미에 도착한다. 

  남미에 정착한 유럽인들(주로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과 예수회가 세운 산 카를로스 수도회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생긴다.  그러자 교황청에서 그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추기경을 파견한 것이다. 

 

  유럽 출신 정착민들은 과라니족을 노예로 매매하고 부리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라니족의 인격을 부정한다.

  즉, 과라니족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해도 아무 문제될 것 없다고 주장한다.  가브리엘 등 산 카를로스 수도회 사람들은 그런 정착민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완벽하리만큼 아름답게 찬송가를 부르는 과라니족 아이를 내세운다.  과라니족이 정말 짐승이라면 어떻게 음악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과라니족 아이가 찬송가를 끝내자, 추기경이 스페인 정착민 대표자에게 "어떻게 이 아이를 짐승이라 할 수 있소?" 라고 묻는다.  이 때 스페인 대표자가 하는 대답이 걸작이다.  "앵무새도 노래를 가르치면 할 줄 압니다."  물욕에 눈이 먼 유럽인들에게, 과라니족은 앵무새처럼 말을 할 줄 아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과라니족의 인격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외에도, 노예제도 문제와 영토 문제까지 얽혀있다.

  산 카를로스 수도회가 세운 과라니족 마을이 있는 지역은, 당장은 스페인 영토로 되어 있다.  그런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그 지역을 서로 주고받으려는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포르투갈 정착민은 물론이고 경쟁관계에 있는 스페인 정착민조차, 그 지역이 포르투갈 영토가 되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역시 물욕이다.
  스페인은 노예제도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스페인 정착민들은 암암리에 과라니족을 노예로 매매해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엄연히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상황이라 나중에 탈이 날 수 있으니, 차라리 노예제도를 금지하지 않는 포르투갈에게 과라니족이 사는 지역을 넘기려는 것이다.  그러면 포르투갈인이 스페인인 대신 과라니족을 사냥할테고, 스페인인은 자신들의 손을 직접적으로는 더럽히지 않은 채 노예매매에 간접적으로만 관여해서 계속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대놓고 죄악을 저지르는 것들보다, 안 그런 척 하면서 저지르는 것들이 더 얄밉다!)

 

  게다가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황청과 세속 군주들(스페인 국왕 및 포르투갈의 국왕)간의 세력다툼까지 얽혀있어, 일이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이다.

  세속 군주들은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카톨릭 교회가 이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교회가 자신들의 협상을 방해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 입장에서 보자면, 이 일은 뜨거운 감자나 다름이 없다.  가뜩이나 카톨릭이 유럽에서 세력을 잃어가고 있는 마당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네 선교사들의 편을 들어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영토 협상을 막는다면, 두 나라의 반발을 사서 카톨릭의 입지가 더 좁아질 수 있다.  그렇다고 두 나라의 협상에 냉큼 동의해주자니, 한 때는 세속 군주들을 쥐락펴락 했던 카톨릭의 권위가 이제는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의사는 때로는 팔다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잘라내야 할 팔다리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추기경은 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의 마을을 직접 살펴보기로 한다.

  그래서 선교사들과 두 나라 정착민 대표까지 대동하고 산 카를로스 수도회가 세운 과라니족의 마을로 가는데, 그 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어지간한 유럽의 마을 못지 않게 잘 정돈된 과라니족의 마을, 역시 유럽의 교회에 견주어도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소박하지만 완벽한 교회, 과라니족이 이런저런 기구를 이용해서 꾸려나가 틀이 제대로 잡힌 대규모의 바나나 농장...  게다가 과라니족들은 너무나 우아하게 찬송가를 부르고, 공방을 세워 바이올린과 오보에 등 악기까지 제작하고 있다!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이 아무리 과라니족의 인격을 부인해도, 과라니족 역시 신앙과 농업기술과 예술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점이 마을 곳곳에서 드러난다.  

 

  추기경이 마을에서 만난 과라니족 출신 신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추기경 : "작년 수입이 얼마였소?"
  과라니족 신부 : "12만 에스퀴도스였습니다."
  추기경 :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분배했소?"

  과라니족 신부 :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했습니다.  여기는 공동사회니까요."
  추기경 : "아, 그렇군.  프랑스에도 그런 이론을 주장하는 급진파가 있소."
  과라니족 신부 : "추기경 예하, 이것이야말로 초기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추기경은 선교사들이 과라니족과 함께 이룬 성과에 큰 감명을 받는다.
  그래서 산 카를로스 수도회와 과라니족이 피해를 입지 않는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려, 양국 정착민 대표를 설득하려 든다.  그러나 역시나, 욕심과 뻔뻔함으로 뭉친 스페인 대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다.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 대표가 본국에서 날아온 나쁜 소식까지 전한다.  그 소식인즉슨, 포르투갈이 스페인에게서 과라니족의 땅을 양도받는 일에 대해 교황청이 반대한다면, 포르투갈 정부는 무력도 불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성과 양심에 따르자면 산 카를로스 수도회 편에 서서 판결을 내려야겠지만, 교황청의 사자로서 정치적인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교회 안에서 홀로 고뇌에 빠진 추기경에게, 가브리엘은 폭포 위쪽 마을에도 가볼 것을 권한다.  추기경이 갈등하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이룬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추기경을 옳은 결정으로 인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폭포 위쪽 마을에서도 과라니족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추기경 입에서 "여기야말로 에덴 동산이로군." 이라는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과라니족은 고유의 생활양식과 바다 건너 전해진 이질적인 신앙을 너무나 멋지게 조화시킨 삶을 살고 있다.

  처음에는 기적 같은 이 모든 일에 마냥 감격스러워 하던 추기경이, 과라니족의 찬송가를 들으며 묘하게 복잡하고 심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로드리고는 추기경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짐작한 것처럼, 불신과 경계심이 섞인 눈빛으로 추기경을 바라본다. 

 

 


  "우리 중 누구도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더욱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추기경은 종교인으로서의 신앙심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누르고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
  과라니족과 선교사들을 모아놓고, 그 동안 힘들게 이룬 모든 것들을 포르투갈인들에게 넘긴 후 원래 살던 밀림으로 돌아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추기경의 권위로 막아버린다.  어차피 이치나 양심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결정이기에, 상급 성직자로서의 권위로 불만과 이의를 눌러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라니족 추장이 가브리엘의 통역을 통해 추기경에게 항의를 한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정글에서 나와 선교회를 지었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답니다.",  "우리를 믿은 게 잘못이었답니다.  싸우겠답니다."  추장의 항의에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신은 항상 정의롭고 옳을지 몰라도, 현실에서 신을 모시는 자들이 하는 행동이 항상 정의롭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추기경은 선교사들에게, 과라니족의 싸움에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추기경 딴에는, 과라니족과 유럽인의 충돌을 막는 것은 틀렸으니 선교사들의 안전이라도 지켜보려는 것이다.  또한 교회와 세속권력이 충돌하여 일이 더 커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오랜 시간 과라니족들과 동고동락한 사이다.  과라니족들에게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고 마을과 교회를 건설하게 했던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들이다.  그런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과라니족의 일에서 손을 떼라는 추기경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비겁한 짓이다.

 

  결국 예수회 선교사들은 추기경의 지시를 어기고 과라니족 곁에 남기로 하는데, 그 방식을 놓고 두 편으로 갈린다.

  가브리엘은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긴 채, 그저 과라니족과 운명을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한다.  성직자로서 어떤 경우에라도 폭력을 사랑보다 앞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과라니족 아이가 호수에서 건져온 칼을 받고서 무력항쟁의 길을 선택한다.  로드리고란 인물이, 내내 성직자의 길을 걸었던 가브리엘보다 훨씬 현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과거에 노예 사냥꾼으로 살면서 과라니족을 해쳤기 때문에, 가브리엘 등 다른 예수회 사람들보다 과라니족에게 느끼는 마음의 빚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내 스페인 대표와 포르투갈 대표가 군대를 모아 공격에 나선다.  

  추기경은 군대가 집결해서 공격 준비를 하는 광경을 복잡한 눈빛으로 지켜본다.  교회라는 조직 전체를 살리기 위해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로 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자기 눈으로 보았던 에덴 동산처럼 아름답던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추기경의 눈빛에서 배어나온다.

  그렇게 유럽인들의 탐욕과 그 탐욕에 대한 교회의 묵인 속에서, 추기경이 들렸던 첫번째 마을(대규모로 바나나 농사를 짓던 마을)이 첫번째 목표가 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과라니족이 유럽 군대의 총칼에 밀려 모두 쫓겨난다.


  그 시각 폭포 위 마을에서는, 용병 경험이 있는 로드리고의 지휘 아래 뜻을 같이 하는 선교사들과 과라니족이 전투 준비를 한다.

  마침내 군대가 마을을 향해 몰려온다는 소식에, 로드리고는 가브리엘을 찾아가 축복을 부탁한다.  그러나 무력을 택하는 것을 신앙에 반하는 행동으로 보는 가브리엘은, 그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한다. "그대가 옳다면 하느님이 축복할 거요.  그대가 틀리다면 내 축복은 의미가 없소." 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그 상황에서, 로드리고의 포옹마저 거절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포옹 후에 나가려는 로드리고를 불러세워 십자가 목걸이(원래는 영화 도입부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강물에 떠내려 가 폭포로 떨어졌던 신부의 목걸이였는데, 그 신부의 무덤을 만든 후 가브리엘이 신부의 유지를 잇는 뜻으로 목에 걸고 다녔음.)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종교인으로서는 로드리고의 선택을 용납할 수 없지만, 로드리고 역시 과라니족을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음을 안다는 뜻일 것이다.


  처음에는 선전하던 과라니족이, 유럽 군대의 우수한 무기에 밀려 차차 고전하게 된다. 
  로드리고와 과라니족이 군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동안, 군대의 일부는 마을로 몰려간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가브리엘과 마을에 남은 과라니족(주로 여자들과 아이들)이 차분히 미사를 올리는 광경을 보고, 군인들은 차마 공격하지 못 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비무장상태인 가브리엘과 과라니족에게 화공을 개시한다. 


  로드리고가 마을로 뛰어들어왔을 때, 마을은 이미 불길에 휩싸인 상태다.

  어지간한 과라니족 성인 남자들은 이미 싸우다 죽었고, 겨우 열살 남짓한 어린 아이들이 활을 들고 저항하다가 총에 맞아 죽어간다.  로드리고는 마을을 지킬 최후의 수단으로 설치해놓았던 덫을 쓰려고 하지만, 뜻밖에도 덫이 작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군인들이 덫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그걸로 마지막 희망마저 완전히 꺼져버린다.

  결국에는 로드리고마저 총에 맞아 쓰러진다.  차츰 흐려지는 로드리고의 시야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과라니족을 이끄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들어온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하나씩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마침내 가브리엘마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보며, 로드리고는 눈을 감는다.  
 
  스페인 대표자와 포르투갈 대표자는 군사행동의 결과를 추기경에게 알린다. 
  그런 학살을 꼭 벌여야 했느냐는 추기경의 비난에, 스페인 대표는 예의 그 뻔뻔한 태도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포르투갈 대표가 그나마 진지한 태도로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자, 추기경이 받아친다.  "그렇지 않소.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거요."  그리고 눈물 어린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요."


 

 

  "교황 성하,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는 저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폐허가 된 과라니족 마을에 예닐곱 명의 아이들만 살아남아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성장해 낳은 아이들의 후손일 지금의 원주민들, 그 많은 원주민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신앙과 사랑에 고취된 성직자들이 그런 원주민들을 돕고 있다는 자막이 화면에 뜬다.  그리고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으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은 없다." 는 성경구절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가브리엘의 한계 혹은 시대의 한계

 

  대학시절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그리고 이번에 다시 봤을 때도, 가브리엘의 선택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다.

  분명히 가브리엘은 선량한 사람이며 존경받을만한 성직자고, 과라니족을 위해 애를 썼다.  다만, 종교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가브리엘의 태도가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라니족에게 종교를 갖게 하고 밀림에서 나와 교회와 마을과 밭을 건설하게 한 사람이 바로 가브리엘 자신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부당하게 빼앗기게 생긴 마당에, 폭력이 있는 곳에 사랑은 없다는 공염불(말 자체는 분명히 옳은 말인데 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인 것 또한 사실 아닌가?)이나 되풀이 하며 조용히 순교하는 길을 택하다니...  자신이야 자신의 뜻으로 순교했다 치고, 과라니족들은 어쩌라는 것인가!

 

  만일 내가 영화 속 인물이라면, 절대로 가브리엘의 선택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로드리고를 도와 유럽 군인들과 싸우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비록 승산이 낮은 싸움이라지만,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얼마 안 되는 확률에 매달려 무언가 시도라도 하는 게 나을테니까.

  혹은 종교인으로서 도저히 무력을 용납할 수 없다면, 이미 싸우기로 마음 먹은 과라니족 남자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이들과 여자들이라도 데리고 피하는 방법이라도 택했을 것 같다.  일단 살아남아야 후일을 기약하든 뭐를 하든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신앙심 돈독하고 고결한 인품을 지녔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가브리엘은 유럽인의 남미 식민지배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과라니족 마을의 귀속 문제를 놓고 유럽 정착민들과 갈등을 빚을 때, 가브리엘은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포 아래 지역은 두 나라의 협정대로 나눠가질 수 있으나, 폭포 위쪽은 하느님과 과라니족의 땅입니다."  가브리엘의 뜻은, 예수회와 과라니족이 함께 세운 마을을 절대로 포르투갈에게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말을 뒤집어 살펴보면, 그 마을을 제외한 지역에 대해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주고받아도 문제삼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가브리엘이 과라니족 마을을 지키려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심과 선교활동 때문이었다.  폭포 위쪽이든 폭포 아래쪽이든, 그 마을이 선교활동의 결과물로 나왔든 아니든, 원래 과라니족이 살던 땅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기들 멋대로 주고받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가브리엘 개인의 문제점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가브리엘이 탐욕에 가득찬 유럽인들에게서 과라니족을 보호하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브리엘 역시 그 시대의 유럽인으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유럽인이 새로운 땅을 찾아 정복하고 지배하는 행위가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은 못 한 듯하다.

  그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공평한 대접을 해주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 시절 온건파(?)라 할 수 있는 일부 총독부 일본인 관료들이 식민지배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은 못 하고 '조선에 대한 정책이 가혹한 것 같다.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자.' 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추기경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했던 말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우리 중 누구도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더욱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브리엘 등 선교사들이 아무리 과라니족을 위해 최선을 다 했다 한들, 그 선교활동이 '유럽인들의 남미 침략' 이 불러일으킨 부수효과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재물욕과 권력욕 넘치는 정복자들이 중남미를 식민화하지 않았더라면, 선교사들이 남미라는 땅이 어디 있는 줄 알고 가서 선교를 할 수 있었을까?

  추기경의 말처럼,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욕심 가득하고 잔인한 정착민들이든 선량하고 우호적인 선교사들이든, 그 누구도 남미에 오지 않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칼과 십자가 - 로드리고의 변화 / 종교의 양면성 

 

  이 글에 실린 포스터 중 두번째 포스터는 '칼과 십자가' 를 '실체와 그림자' 로 설정하고 있다.

 

  이 영화를 검색해 보면, 주로 첫번째 포스터(신부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폭포로 떨어지는 포스터)가 나온다.

  첫번째 포스터가 메인 포스터인 모양이다.  첫번째 포스터는 '미션' 이라는 영화 제목에 걸맞게 신앙, 순교 등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포스터의 목적은 무언가를 선전하는 것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주제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첫번째 포스터는 이 영화의 주제인 '종교의 의미',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 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포스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포스터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위에 쓴 것처럼, 나로서는 가브리엘이 마지막에 선택한 순교의 정당성이랄까, 의미랄까, 하여튼 그런 것에 공감이 안 가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탓이 클테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가브리엘의 선택에 대해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대학 시절 이 영화를 비디오방에서 함께 본 친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는데, 가브리엘이 죽는 장면에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음. ^^;;)

  그리고 첫번째 포스터가 보여주는 주제보다는, 또 다른 주제인 '불의를 대하는 종교인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 '종교의 양면성' 에 내 마음이 쏠려있다.  그래서 그러한 주제를 '칼과 십자가' 라는 상징으로 보여주는 두번째 포스터가 더 인상 깊을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로드리고라는 개인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로드리고의 칼은 로드리고가 용병과 노예 사냥꾼으로 살며 저지른 불의를 상징한다.  그래서 로드리고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불의의 상징인 그 칼은 더 이상 로드리고 옆에 있지 못 하고 다른 무기들과 함께 물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런데 유럽인의 탐욕으로 과라니족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그 칼은 로드리고에게 돌아온다.  더구나 그 칼을 물 속에서 건져와 로드리고에게 넘겨준 이가 과라니족 아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 의미심장하다.  과거에는 돈을 벌기 위해 과라니족을 죽이고 납치하는 데 썼던 불의의 칼이었는데, 이제는 과라니족을 지키기 위한 정의의 칼이 된 것이다.  마치 과거에 과라니족을 해쳤던 로드리고가, 이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과라니족을 지키려는 자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종교의 양면성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힌다.

  실제로 칼의 모양은 십자가와 비슷해서, 빛을 비추면 그 그림자가 십자가로 보인다.  종교가 담고 있는 가르침은 분명히 사랑과 평화지만, 현실에서는 종교로 인해 벌어지는 혹은 종교가 앞장서서 저지르는 죄악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런 종교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데 칼과 십자가보다 더 적절한 게 어디 있을까...

  공교롭게도 내가 이 포스트를 작성하던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미를 순방하면서 과거에 카톨릭 교회가 남미에서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애석함을 담아 이 이야기한다.  (카톨릭 교회가) 신의 이름을 앞세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많은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소위 아메리카 정복 시기에 원주민들에게 자행되었던 범죄들에 대해 겸허하게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그런 잔혹한 시대를 살면서 정의와 양심을 따른 성직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십자가의 힘으로 칼의 논리에 강력하게 반대한 수많은 성직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수많은 죄가 있었지만, 원주민들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덕분에 충만한 은총도 있었다." 

 

 

 

 

  뱀발

 

  묘한 기분이다.

  십수 년 전에 봤던 이 영화를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된 계기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었다.  그런데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영화 감상문을 쓰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감상문 속 내용과 통하는 발언을 했으니 말이다. 

  내가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는 호의와 존경심을 품고 있다.  종교간 갈등을 풀기위해 타종교와 화합하려 애쓰는 모습 때문이기도 하고, 전세계에 팽배한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나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경계하는 모습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제는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이런 좋은 영화를 복습(?)하기까지 했다.  우리 사이에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팬심(!) 지수가 좀 더 올라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