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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사도세자, 혜경궁(2) - 단막극 '붉은 달'

Lesley 2015. 9. 26. 00:01

 

  지난 8월 'KBS 드라마 스페셜 단막 2015' 으로  '붉은 달' 이 방영되었다.

  특이하게도 이 드라마는 사도세자의 비극을 소재로 한 공포물이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보면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네 아니네 하고 따지면 곤람함. ^^;;)  원래 공포물을 싫어하지만, 사도세자가 나오는 공포물이라니 호기심이 동해서 봤다.  

 

  먼저, 드라마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는 이야기부터 하자면... 

  '붉은 달' 이 방영할 당시에는 사정이 있어서 못 보고, 한 달 정도 지나서야 다운을 받아서 봤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기도 전에 드라마에 대한 연예기사가 뜬 것부터 봤다.  드라마 내용을 미리 알면 재미가 없으니, 일부러 기사 내용은 안 보고 인터넷에 뜬 기사제목만 훑었다.  그런데 그 중에 '귀신 없이도 이렇게 공포스러울 수 있다니...' 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띄었다.  당연히 '아, 이 드라마는 귀신이 안 나오는 공포물이구나.' 하는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반전을 기대했다.  드라마 초반부터 장희빈의 귀신이 등장했지만, 그 귀신은 진짜 귀신이 아니라 어린 사도세자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환영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드라마 끝에서는 그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이 어떤 못된 무리들의 음모인 것으로 밝혀질 거라 추측했다.  예를 들면, 영조의 반대파가 영조에게 타격을 입힐 생각으로 사도세자의 음식에 이상한 약을 섞어서, 사도세자가 귀신의 환영을 보며 서서히 미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결국 이 드라마는 '귀신이 나오는 공포물' 이었다. (그 기사 도대체 뭐지?  낚시글이었나? -.-;;)   

 

 

사도세자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핏빛으로 물든 달.

 

 

  이 드라마는 전체적으로는 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대신 신선한 시도가 나온다.

  사도세자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영화나 드라마가 이미 수도 없이 다룬 소재다.  그러다 보니 앞선 사도세자 관련 작품들이 온갖 해석과 시도를 다 보여줬기 때문에(심지어 사도세자를 현대식 민주주의자 비슷하게 그린 드라마까지 나온 판국이니... -.-;;) 더 이상은 새로운 시도나 해석이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곰탕처럼 재탕에 삼탕을 거듭하여 이제는 다 쫄아들 판국인 사도세자라는 식상한 소재로, 용케도 참신한 시도를 보여줬다.  기존의 사도세자 관련 작품은 전부, 당사자인 사도세자 또는 그 배우자인 혜경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붉은 달' 에서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의 비중이 무척 크다.  비록 선희궁이 원톱 주인공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사도세자가 나온 드라마에서 선희궁의 비중이 이렇게 높았던 것은 처음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자기가 낳은 아들을 자기 입으로 처분하라고 남편에게 청하는 어머니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물론 아버지 손에 죽어야 했던 사도세자나 남편이 처참히 죽는 것을 봐야 했던 혜경궁도, 분명히 비극의 주인공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 두 사람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훨씬 더, 선희궁이야말로 비극의 주인공으로 걸맞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여지껏 나온 사도세자 관련 작품에서는 선희궁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선희궁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나 드라마가 나왔어도 몇 번은 나왔을 법한데, 왜 그런 작품이 없는 걸까... (혹은 이미 나왔는데 내가 모르는 것 뿐일까...)

 

 

사도세자 처소 지하의 밀실에서 마주하는 장희빈 귀신과 사도세자.

(이 몸은 진정 저 귀신이 사도세자가 보는 환영이라 믿었소... ㅠ.ㅠ)

 

 

  '붉은 달' 에서는 영조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서 아들 사도세자를 저승전에서 살게하는 것으로 나온다.

  일단 이 드라마 설정상으로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으로 나온다.  그러다 보니 경종의 원수를 갚겠다며 영조를 죽이려는 시도가 줄을 잇게 되고, 영조는 자신이 결백하며 자신의 즉위가 정당하다고 선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경종을 독살하기는커녕 경종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고 알리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을 경종과 경종의 생모 장희빈이 살았던 저승전에서 살게 한다. 

  선희궁은 처참하게 죽은 장희빈이 살던 저승전으로 아들을 보내는 것이 걱정스러워, 그러지 말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어린 사도세자 역시 무서움에 바들바들 떨며 어쩔 줄 몰라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영조의 뜻을 거역하지 못 한다.

 

  장희빈의 원혼이 떠도는 음산한 저승전에서 성장기를 보내면서, 사도세자는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선희궁은 아들이 미친 이유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아들을 저주에서 구해낼 수 없음을 알고, 그 옛날 어린 아들을 저승전으로 보낸 영조와 그것을 끝까지 반대하지 못 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오열한다.  "전하와 제가... 세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아들을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두며 비정하면서도 회한 어린 표정을 짓는 아버지.

아버지의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선전물로 살다가 어둠에 묻혀버리는 아들.

 

 

  아버지 때문에 오랜 세월 공포에 눌려 살았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부르짖는다.

  "또 다시 저를 어둠 속에 버리려 하시나이까!  어린 시절 아바마마를 위해 제가... 제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또 다시 저를 어둠 속으로 보내시려는 겁니까?"

 

  마침내 뒤주 속에 들어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영조에게 한탄하듯 원망하듯 나즈막히 말한다.

  "대체 당신에게... 자식이란 무엇입니까?"  정말 영조란 사람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이 드라마는 젖혀두고라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연을 책이로든 드라마로든 접할 때마다 궁금했던 점이다.

 

 

똑같이 자식 잃은 한을 품고 마주선 두 여인.

 

 

  선희궁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광경을 피눈물 흘리며 지켜본 후, 저승전으로 장희빈의 귀신을 찾아간다. 


  선희궁 : "제 시아버님께옵서 희빈에게 사약을 내리시었고, 제 남편 상감께옵서 희빈의 아드님인 경종대왕을 독살하셨습니다."
  장희빈 : "(독이 잔뜩 올라 빈정대며) 알긴 제대로 아는구나."
  선희궁 : "헌데 말입니다.  저는 희빈 때문에 제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원한이 더 클 것 같습니까?  희빈일까요, 저일까요?"

  장희빈 : "!" 

 

 

저승전 밀실은 화염에 휩쌓인다.  그 안에 깃든 장희빈의 원한과 함께...

 

 

  선희궁 : "세손에게는 손대지 마십시오." 

  장희빈 : "(여전히 기세등등해서) 그래서 살아있는 네가, 죽어 귀신이 된 나에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장희빈은 살아있는 사람이 무슨 재주로 귀신을 당할 수 있겠느냐고 야유하지만, 선희궁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선희궁이 아무 말 없이 밀실에 있는 관 위에 기름을 뿌리자, 장희빈은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선희궁이 불이 켜진 초를 들고서 장희빈 만큼이나 원한 서린 미소를 짓고 말한다.  "제가 죽으면 상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들을 죽인 어미입니다.  손자를 위해 뭐든 못할 것 같습니까?  같이 구천에서 말동무나 하시지요." 

 

  그렇게 저승전의 밀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쌓인다.

  그 속에서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한을 품고 원귀가 되었던 한 여인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진다.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야 하는 한을 품은 또 다른 여인에 의해서...

 

 

  '붉은 달' 에 대한 나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7점이다.

  아무래도 단막극이라는 게 방송국에서 팍팍 밀어주는 쪽이 아니다 보니, 제작비 부족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게 보인다.  첫장면으로 나온 영조 암살 미수 사건부터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명색이 임금님 행차인데 무슨 동네 사또 행차 수준이고, 자객들은 어찌나 어설퍼 보이던지 암살이 성공하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  그리고 궁궐이라고 나온 곳이 아무리 봐도 궁궐 비슷하게도 생기지 않고, 무슨 서원이나 사당 정도 되는 듯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 자막이 올라갈 때 촬영장소를 보니, 역시나 궁궐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경북 문경과 전남 남원이 나오는... -.-;;) 

  그렇게 여러 단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포스트 앞머리에 쓴대로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 때문에 이 드라마를 높이 사고 싶다.  사도세자 이야기에 선희궁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 하나만으로 무척 신선한 느낌이었다.

 

 

 

  ※ 덧붙임 - 방영 당시 논란을 일으킨 장면이 있음.

 

 

이 드라마 속 '옥의 티' 정도가 아니라 '옥의 엄청난 흠집' 이었던 장면. ^^;;

 

 

  드라마가 후반부로 접어들었을 때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튀어나왔다.

  선희궁이 영조에게 아들 사도세자를 처분하라 말하는 장면이다.  사도세자를 더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손자(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라도 살리려는 마음에 모진 결심을 한 것이다.  영조 역시 선희궁의 말을 듣고 사도세자를 죽일 결심을 하는데...

  이 장면에서 영조가 위패 앞에 꿇어앉은 상태에서 두 팔을 큰 동작으로 들기에 무엇을 하려는 걸까 생각했더니만, 뜬금없이 짝짝짝 하고 세 번 손뼉을 치는 것이다...! -0-;;  순간 멍해진 기분으로 '이게 뭐지?' 하는데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또 다시 손뼉치는 모습이 나왔다.  일본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일본인이 신사에 가서 기도할 때 보이는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붉은 달' 이 방영하고서 저 장면에 대해 일본식 기도법 아니냐고 항의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과의 글을 올렸는데, 그 사과라는 게 내 눈에는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변명으로 밖에 안 보였다.  네티즌들은 어째서 우리나라 사극에 일본식 제례행위가 나오냐며 항의한 건데, 사과글에는 동문서답식으로 영조가 입은 갑옷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나온다.  즉 "아마도 갑옷을 영조가 입은 모습이 생경하여 더욱 그리 느끼는 듯한데, 영조는 나주벽서 사건 등 역모사건의 국문 중에도 종종 갑옷을 입고 무장한 모습을 보인다." 라고 해명했다.

  여보쇼, 작가 양반!  누가 영조가 입은 갑옷 가지고 뭐라고 했소?  문제는 갑옷이 아니라 손뼉이오, 손뼉...! -.-;;  설사 영조가 갑옷차림이 아니었어도, 위패 앞에서 손뼉 치는 장면을 보면 누구나 '저건 일본식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15 사도세자, 혜경궁(1) - 한중록(정병설 번역본)(http://blog.daum.net/jha7791/15791236)

2015 사도세자, 혜경궁(3) - 사도 / 혜경궁 홍씨(DnC Live)(http://blog.daum.net/jha7791/1579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