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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ABE) 전집' 혹은 '에이브(ABE) 88' 의 추억

Lesley 2015. 2. 6. 00:01

 

  ◎ 30대와 40대의 추억 속 '에이브(ABE) 전집' 또는 '에이브(ABE) 88'

 

  초등학교 고학년 때 우리집에 문학전집 한 질이 생겼다.

  '에이브(ABE) 전집' 혹은 '에이브(ABE) 88' 이라고 하는 문학전집이었다.  여러 나라의 유명한 아동문학가들이 쓴 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집인데, 무려 88권(!)이나 되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여기까지 읽고서 이미 감을 잡았을 것 같은데, 에이브(ABE)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Abraham Lincoln)' 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링컨이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독서를 열심히 하며 꿈을 키웠던 것처럼, 이 땅의 아이들도 그 전집을 읽으며 미래를 향해 전진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즉, '88권의 아동문학' + '링컨의 이름인 Abraham의 애칭 Abe' =  '에이브(ABE) 88'이다! 

 

  이 전집은 현재 30대 및 40대인 사람들의 초.중.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문학전집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 학년이 바뀔 때마다 우리 반에는 이 전집을 갖고 있는 친구가 한두 명은 꼭 있었다.  그런 친구들과 "앗, 너희집에도 에이브 88 있어?" 하고 흥분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 보면 30대나 40대 중 이 전집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꽤 많다.

 

  특이한 점은, 아동문학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성인이 읽어도 될 정도로 그 소재나 수준이 상당했다.

  보통 아동문학이라고 하면, 주인공이 처음에는 산전수전 다 겪지만 결국에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다.  또 고생을 해도 그 고생이라는 게 비교적 무난한(!) 수준이다.  마치, 작가가 순진한 아이들에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직 이 세상은 아름답단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전집은 달랐다.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책도 여러 권 있었고, 또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더라도 책이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참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자녀들의 고통, 사랑과 정의를 설파하는 종교들로 인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아이러니, 일본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세계 최초 달착륙선인 아폴로 11호의 계획이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은 독일 전범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  백인들의 침략 속에서 멸종한 미국 인디언 야히족의 마지막 생존자 이시에 관한 이야기, 제정 러시아 말기에 하층민들이 반체제 지식인으로 크는 것을 막기 위해 적당한 꼬투리 잡아 하층민 자식들을 퇴학시켰던 정책, 영국 산업혁명기에 벌어진 비참한 어린이 노동자들의 실상 등 어두운 사연을 다루는 작품이 다수 있었다.  일반적인 아동문학과는 달리 '현실은 결코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다. (요즘 말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 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깨우쳐주고 싶어하는 느낌이랄까?

 

  또 굳이 어두운 내용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재를 많이 다루었다. 

  잉카 제국 말기의 역사와 스페인의 잉카 정복,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했다는 학설을 증명하기 위한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의 남태평양 횡단 모험, 이집트의 여러 파라오의 무덤 및 트로이 유적의 발굴에 얽힌 이야기, 우리나라에서는 '초원의 집' 이란 TV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기를 배경으로 한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자전적 소설, 로마 제국 쇠퇴기에 영국에서 벌어진 로마인의 후예 및 브리튼 원주민들과 앵글로 색슨족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영국 종교개혁 시기 금지된 영어 성경을 발간한 윌리엄 틴들 목사에 관련된 이야기,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 등등...

  그래서 그저 재미로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초등학교 시절 나는 이런 내용이 전부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았음!), 어느새 교과서에서 배운 것 이상의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교과서가 이렇게 재미있으면 저절로 공부가 될텐데... ^^;;)

 

  워낙 다양한 소재가 나오다 보니, 그 시절에 어떻게 그런 책이 출간될 수 있었을까 싶은 책도 있었다.

  가령, '비챠의 학교생활' 이란 책을 보자면, 구 소련의 초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와 이런저런 고민도 하고 친구들끼리 우정도 나누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큰 줄거리 중간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장점이 스리슬쩍 홍보(?)되었다.  평등주의를 내세우는 소련 정부 덕분에 서민층 아이들도 예전과는 달리 당당히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고, 예전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 취급받던 기술자들이 우대받으며 살게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제일 불가사의한 책은 '검은 램프' 다.  놀랍게도 산업혁명기 영국에서 벌어진 피털루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책이었다! ('피털루 학살 사건' 이란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영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유혈 진압했던 사건임.  마침 그 사건 몇 년 전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 연합군이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승리한 '워털루 전투' 가 있었음.  그래서 '나폴레옹 군대를 쳐부순 것처럼 노동자들도 쳐부순 거냐?' 라는 빈정거림의 의미로 '피털루 학살 사건' 이라는 이름이 붙었음.)  당시 영국 자본가들이 10살 안팎의 아이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했던 게 정말 생생히 묘사된 작품이다.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야 나도 코흘리개 초등학생이라 미처 깨닫지 못 했지만, 나중에 머리가 굵어진 후 돌이켜 보니 '아직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1980년대에, 노동자들의 파업을 덮어놓고 빨갱이들의 준동으로 몰던 그 시절에, 그냥 노동자 탄압도 아니고 아동 노동력 착취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지?' 하는 생각에 아연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 때 도서 검열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아동문학은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책이라고 무시하며,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통과시켜줬던 모양이다. ^^;;

 

  그렇게 아동문학치고는 상당히 현실적이며 이단적(?)이었기 때문에, 아동문학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읽어도 지루하거나 유치하지 않았다.

  똑같은 작품을 봐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쌓게 된 지식과 경험의 정도에 따라 그 작품에 대한 이해의 정도와 감정이 달라지는 법이다.  초등학교 때는 에이브 88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상황이 그저 소설 속 허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중학교 때 집에 백과사전이 생기면서, 이 전집 속의 많은 내용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어떤 책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로 씌여져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는데, 머리가 굵어지고나서 보니 그 가벼운 분위기 밑에 묵직함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에이브 88은 바로 위의 문장에서 언급한 백과사전, 즉 '두산동아백과사전' 과 함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책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중.고등학교 시절, 에이브 88 속에서 언급되는 많은 사항과 두산동아백과사전의 설명은 내 지식의 보고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성인이 되어 인문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을 읽을 때면, 아동기 및 청소년기에 에이브 88과 두산동아백과사전를 읽어 얻었던 배경지식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용 뿐 아니라 삽화도 인상적이었다!

  아마 88권의 책 모두 그 책의 원본(원서)에 실려있던 삽화를 그대로 썼던 모양인데, 그림체가 참 다양했다.  에이브 88이라고 해서 전부 심각한 내용의 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무척 코믹한 내용이었는데, 그런 책에는 보통 신문의 네 컷짜리 시사만화에 나오는 그림체 비슷한 단순하면서 유머러스한 그림체의 삽화가 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미대생들이 그린 데셍 수준의 정교한 삽화가 들어간 책들도 있었다.

  하지만 최고의 삽화는 '바이킹 호콘' 과 '바이킹 소녀 헬가' 에 나오는 판화로 찍어낸 삽화였다!  처음 그 삽화를 봤을 때는 어린 마음에 '도대체 이 어설픈(!) 그림은 뭐야?' 하고 생각했다.  코찔찔이 초등학생 생각에는, 그림이란 그저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의 형상을 재구성한 독특하고 상징적인 그림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솔직히, 어른이 된 지금도 추상화를 보면 '그림이란 좀 알아볼 수 있게 그려야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음각 판화가 만들어낸 굵고 강렬한 선이 그려낸 주인공들과 북유럽 신화 속 여러 신들이 함께 담긴 그 삽화는 정말 굉장했다.

 

 

 

  ◎ 21세기가 되어서까지 여전히 사랑받는 '에이브(ABE) 전집' 또는 '에이브(ABE) 88' 

 

  유감스럽게도, 10여년 전 이사를 하면서 에이브 88과 두산동아백과사전을 모두 처리했다.

  이삿짐의 양이 너무 많아서 책을 대대적으로 처분해야 했다.  결국 처분대상으로 간택(?)된 것은 에이브 88 및 두산동아백과사전 등 두 전집이었다.  두 전집 모두 10년 넘는 세월 동안 되풀이 해서 읽었고, 또 전집이다 보니 부피도 크고 무게도 많이 나갔기 때문에(에이브 88은 88권이었고, 두산동아백과사전은 아마 32권이었던 듯...) 정리해고(?) 대상으로 뽑힌 것이다.

  그 때에는 두 전집을 버리는 걸 특별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수도 없이 되풀이해 읽은 책이니 더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둘 다 시대에 뒤진 면이 있었다. 

 

  먼저 두산동아백과사전 같은 경우를 보자면, 종이 백과사전의 특성상 업데이트가 될 수 없어서 현실과 안 맞게 되어 버렸다.

  백과사전 구입 후 몇 년이 지나 세상의 변화를 반영한 추록 2권을 따로 받았지만, 그 후로는 더 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이사가려던 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 때까지도 한국 대통령은 '노태우' 로 되어 있었고, 중국은 '중공' 항목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홍콩은 아직도 영국의 식민지 상태인 것으로 나와 있었고, 영국 찰스 왕세자의 전 부인인 다이애나와 빈민구제활동으로 유명한 테레사 수녀는 여전히 생존해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그 때는 이미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집집마다 쓸 수 있게 된 시절이라서, 굳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백과사전을 집에 두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소설인 에이브 88의 경우에는 백과사전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책 내용이 틀리게 되는 일은 없었지만, 형식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에이브 88은 1989년 시행된 한글 맞춤법 개정 이전에 나온 전집이었다. (초판 출간년도가 1983년 아니면 1984년이었을 것임.)  그래서 '~습니다' 대신 '~읍니다' 로 나오는 등 옛날 맞춤법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글 맞춤법 개정 이후인 중.고등학교 시절에 다시 읽을 때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큰 아쉬움 없이 처분했는데...

  몇 년 전부터 헌책방을 이용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1980년대 초중반에 나온 에이브 88을 구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있다는 사실을...!  워낙 오래된 책이라 구하는 것 자체도 어렵고, 또 운 좋게 구한다고 해도 88권 모두를 구하기는 힘들어서 몇 권 빠진 상태로 소장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88권이나 된다고는 하지만 근 30년 전에 나온 헌책인데, 수십만 원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복간이 되지 않아 앞으로 헌책시장에서도 이 책을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다.  그렇게 공급은 달리고 수요는 꾸준히 있으니, 가격이 뛸 수 밖에... (으아아~~ 에이브 88이 그렇게 귀하신 몸인 줄 알았으면, 이사할 때 내 머리로 이고 옮기는 한이 있어도 가져왔을텐데...! ㅠ.ㅠ)

 

  출간된지 30년이나 된 에이브 88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찾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에이브 88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88권이나 되는 다양하고 주옥 같은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 이미 썼듯이, 아동문학이라고는 하지만, 성인들이 읽어도 큰 감동을 느끼거나 생각할거리를 얻게 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 책들을 모아놓았다.

  둘째, 에이브 88을 이루던 대부분의 책은 그 후로 출판되지 않아서 오래된 에이브 88이 아니면 접할 길이 없다.  에이브 88 중 일부는 현재 각각 다른 출판사를 통해 새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은 한국어판으로 구할 길이 없다. (물론 외국어 천재라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등을 모두 아는 사람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해외직구를 통해 88권 모두를 원서로 접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을까... -.-;;) 

  그래서 지금도 에이브 88을 못 잊는 이들은 헌책방을 순례(!)하며, 비록 몇 권 빠진 채로라도 그 전집을 구하려는 애쓰는 것이다.

 

 

 

  '에이브(ABE) 전집' 또는 '에이브(ABE) 88' 속 비밀 - 1980년대 최고의 해적판(!) 문학전집 

 

  자, 여기서 문제 하나...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이 헌책으로라도 구하려고 애쓸 만큼 인기 있는 이 전집이, 어째서 새로 출간되지 않을까?  확실한 수요가 있으니, 일단 출간을 하기만 하면 잘 팔릴텐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저작권 문제 때문이다.  무려 88권이나 되는 책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자면 당연히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 하나...

  지금도 해결하기 곤란할 정도인 88권이나 되는 책의 저작권 문제를, 지금보다 출판 환경이 열악했던 1980년대에는 어떻게 해결했던 걸까?  정답은 '그 때는 저작권을 문제를 해결 안 하고 출간했다.' 다.  즉, 1980년대에 나온 에이브 88은 해적판이었다...! -0-;

  내 기억이 맞다면, 88권 모두 맨 마지막 페이지에 '인지는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생략합니다.' 라고 써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저자와 인지에 대해 협의를 하고 말고 할게 없었다.  아마도 애초에 저자와 연락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해적판이니까...  그 때는 에이브 88 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책(소설이나 만화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이나 대학원의 전공서적마저)도 저작권 문제 따위는 깨끗이 무시하고 출간되는 게 너무 흔했기 때문이다. 

 

 

  전에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을 읽을 때 에이브 88을 떠올렸다.

 

  장하준 교수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선진국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일반적인 관점이나 반응과는 다른 발칙한(?) 태도를 보인다. 

  지적재산권의 강화는 신자유주의 무역의 확대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지금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가들에게 무역장벽을 철폐할 것과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선진국들은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루기까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장벽을 쌓았고 타국의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런 방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고서는, 이제 와서 개발도상국가에게는 자신들의 지적재산권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이것을 '사다리 걷어차기(내가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이용했던 사다리를 남들은 이용하지 못 하도록,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리는 행동)' 로 보고 있다. 

 

  장하준 교수의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 국세청 차장 등을 역임한 고위 경제관료였고, 덕분에 장하준 교수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 시절의 대다수 국민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장하준 교수조차,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해적판 서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 시절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을 생각했을 때 정식으로 번역된 외국서적은 너무 비쌌고, 해적판은 정식 번역판과 내용은 같으면서 값은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는 만일 해적판 서적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 만큼 많은 해적판 서적을 읽은 것이다.  

  사실, 장하준 교수 뿐 아니라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우리나라가 이룬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해적판 서적이 있었다.  대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조차 해적판 서적을 이용해서 선진국의 앞선 학문을 연구했다.  또한 경제성장 최전선에 서있던 기술자들 역시 해적판 서적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선진기술을 습득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해적판 서적이야 말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1등 공신인 셈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역시 해적판 서적인 에이브 88을 떠올렸다.

  당시 에이브 88의 가격이 얼마였는지는 기억하지 못 한다.  아무리 해적판이라고는 해도 88권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꽤 부담되는 가격이었을 것이다.  만일 에이브 88이 저작권자와 협의를 거쳐 나온 정식 번역본이었다면, 우리집에서는 그 전집을 구매할 엄두조차 내지 못 했을 것이다.  정식 번역본이었다면 우리집에서 구입한 가격보다 최소한 서너 배는 더 비쌌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나도 장하준 교수만큼이나 해적판 책에 감사한 마음을 품어야 할 것 같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의 밑바닥에는, 해적판 전집인 에이브 88에서 얻은 온갖 것들이 깔려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