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1일에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었다.
'자본력을 앞세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의 기세에 밀려 고사 직전까지 몰린 동네서점을 구하자' 는 취지를 지닌, 얼핏 보기에는 무척이나 정의로운(!) 제도다. 그러나...!!! 모두 아는 것처럼 도서정가제의 좋은 취지는 저 높은 하늘 위에 둥실 떠있을 뿐이고, 현실은 시궁창이다. -.-;;
이제 평소 책을 즐겨 읽던 사람들은 전보다 인상된 책 가격에 부담을 느껴 책 구입을 덜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잖아도 책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던 사람들은 책값이 오르면서 더욱 더 책을 외면하게 생겼다. 도서정가제에 대해 잘 모르는 어떤 네티즌이 그런 댓글을 달았다. "책값이 비싸지면 안 사고 도서관 가서 보면 되는 거 아니냐. 꼭 책 안 읽는 것들이 책값이 비싸네 어쩌네 한다." 고. 문제는 공공도서관에서 구입하는 책까지 도서정가제의 대상이 되면서, 원래도 한정된 예산으로 책을 사들이던 도서관이 앞으로는 신간을 구입하기가 더 곤란하게 되었다. (총체적 난국... -.-;;)
오죽하면 도서정가제를 두고 제2의 단통법이라는 빈정거림이 인터넷에 나돌까... 정부 당국자는 이제 막 시작한 제도니 좀 더 지켜봐달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돌아가는 꼴을 봐서는 좀 더 지켜본다 한들 별 볼 일 없을 듯 하다. -.-;;
어쨌거나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인터넷서점들이 말 그대로 '폭탄세일' 에 나섰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마음대로 할인을 할 수가 없으니, 그 전에 창고에 쌓여있는 재고를 털고가려는 의도다. 그래서 11월 내내 인터넷서점 홈페이지에는 책을 저렴하게 사려는 사람들의 접속이 줄을 이었다. 특히나 도서정가제 시행 이삼일 전부터는 접속량이 폭주해서 대부분의 인터넷서점 홈페이지가 줄줄이 다운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 사재기 소동이 벌어진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나 역시 11월 들어 며칠에 한 번씩 알라딘 홈페이지를 뒤적였다. 그러나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50~90%나 할인해주는 책은 '애초에 인기가 없는 책' 또는 '이미 팔릴 만큼 팔려서 더는 수요가 없을 것 같은 책' 이다. 내가 평소에 찜해놓고 보관함 리스트에 올려놓은 책 중에는, 그렇게 대대적으로 할인하는 책이 없다. 그리고 전에 사놓기만 하고 미처 못 읽은 책도 아직 대여섯 권이나 있는데, 저렴한 가격에 솔깃해서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산다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인터넷서점의 할인행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니, 나 역시 이번에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드디어 낚였네, 낚였어... -.-;;)
알라딘에서 '도서정가제 시행 전 마지막 대대적인 할인행사' 라는 광고성 이메일을 몇 번이나 보냈고, 인터넷에 접속해 보면 사람들이 미친 듯이 책을 사들이고 있다는 기사가 줄줄이 떴다. 그러다 보니, 그 때까지도 구매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나 혼자만 '시대의 도도한 흐름'(?) 밖으로 밀려난 느낌이 들었다. 세상 모두가 나에게 "이 바보야, 지금 사야지! 왜 너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야?" 라고 외치는 느낌이랄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그 느낌을 아시나요? ^^;;)
그래도 그 때까지는 내가 정신줄 내팽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도서정가제 시행일까지 시간이 남아있어서,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고를 수 있었다. 그래서 할인률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관심분야에 속한 책인지 아닌지에 더 중점을 두면서, 저자의 약력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을 꼼꼼히 읽으며 골랐다. 그렇게 3권을 구입한 것으로 멈출 뻔했는데...
막상 도서정가제가 시행하는 그 주가 되자, 갑자기 책베개와 5만원 이상 구입하면 준다는 탁상용 달력에 삘이 꽂혔다. -.-;;
9월인가 10월인가, 알라딘에서 5만원 이상의 도서를 구입하면 증정품으로 줬던 책베개.
그런데 11월이 되자 단독구입이 가능한 상품으로 독립(?)했음.
(출처 - 알라딘 홈페이지 http://www.aladin.co.kr/home/welcome.aspx)
책베개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무척이나 탐을 냈다.
하지만 사은품에 홀려서 별로 관심없는 책을 구입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포기했더랬다. 그런데 도서정가제 시행하던 그 주에 알라딘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그새 책베개만 단독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순간, 머리 속에서 에밀레종 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어떤 소녀의 모습과 부르짖음이 떠올랐다.
바로 이 소녀의 모습, 그리고 "어머! 이건 꼭 사야해!" 라는 부르짖음... ^^;;
위의 두 가지 책베개 중 '장서의 괴로움' 을 골랐다.
'오카자키 다케시' 라는 일본 작가가 쓴 '장서의 괴로움' 을 읽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책의 앞표지 및 뒷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따온 저 책베개 위의 문구를 읽어 보니,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혈액이 정체되면 몸에 안 좋듯이, 지적 생산을 위한 책도 쌓이고 정체되면 좋지 않다. 그러니 책 놓을 공간이나 돈 문제를 떠나, 스스로의 지혜를 위하여 현명한 장서술이 필요하다.' 는 내용인가 보다.
지금의 내 상황과 딱 맞아 떨어져서 눈길이 갔다. 이왕 구입한 책은 가급적 처분하지 않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지만, 정말이지 이제는 책을 놓을 공간이 없다. 책장 두 개는 다 찼기 때문에, 박경리의 '토지' 시리즈는 옷장 위에 놓인 사과 담는 종이박스 속에 들어가있고, 어떤 책들은 책상 위에 탑처럼 쌓여있다. ㅠ.ㅠ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미 몇 번이나 읽은 책 또는 별로 감명 받지 못 한 책을 헌책방으로 떠나보내곤 한다. 그래서 나에게도 현명한 장서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장서의 괴로움' 책베개를 골랐다.
지름신 강림에 부채질을 한 탁상용 달력.
(출처 - 알라딘 홈페이지 http://www.aladin.co.kr/home/welcome.aspx)
그런데 지름신은 와도 혼자 안 오고 쌍으로 온다. -.-;;
책베개만 하나 달랑 구입하려니 뭔가 허전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도서정가제라는데... 그래, 이왕 책배게 사는 거, 다른 것도 저렴할 때 사는 거야! 그리고 5만원 이상 구입하면 달력도 준다잖아!' 하고 마음 먹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마냥, 도서정가제의 소용돌이 속으로 풍덩 몸을 내던졌다. (BGM : 서태지의 하여가 中 '난 그냥 네게 나를 던진거야 예예예예예~~' -.-;;)
막상 그리 마음 먹고 나니, 도서정가제까지 겨우 이틀 남았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되며 조급함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 두 팔 걷어부치고 제일 저렴한 90% 할인 도서부터 훑으면서, 조금이라도 눈에 띈다 싶으면 마구잡이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저인망 어선이 마구잡이로 물고기 쓸어가는 식으로 마구마구...!) 그렇게 바구니에 쌓인 책이 60권 가까이 되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바구니에 넣은 책을 하나씩 클릭해가며 옥석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5권을 구입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책을 읽는 것 자체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책을 구입해서 소유한다는 것에도 뿌듯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번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구입한 책이 처음에 3권, 그 다음에 5권이었으니, 지금 같아서는 내년 여름까지는 새 책을 살 일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 앞날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겨우 두어 달 지나서, 또 다시 어떤 책 혹은 증정품에 홀려서 또 미친 듯이 인터넷서점 홈페이지를 뒤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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