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늦가을 2박 3일짜리 부산-김해 여행을 다녀오면서 기차 안에서 읽은 책을 소개해보려 한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 살았던 심복(沈復)이라는 사람이 쓴 자서전 성격의 수필 '부생육기(浮生六記)' 다. 중국어권에서는 유명한 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책이다. ^^;; 무척 심오하고 난해해 보이는 제목과는 다르게, 어떤 옛날 부부의 따뜻하고 소박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 제목만 보고 겁먹지 말고 기회 있으면 한 번 읽어보시라~~! ^^
1. 부생육기와 나와의 끈질긴 인연
아무래도 이 부생육기란 책과 나 사이에는, 껌딱지(!) 수준의 끈끈한 인연이 있는 듯하다.
7, 8년 전에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중국에 거주하던 어떤 한국인 블로거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 블로거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그런데 마침 현지에서 사귀게 된 중국친구 중에 대학에서 중문학을 가르치는 이가 있어서, 그 중국친구에게서 이 책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줄거리를 포스팅해놓은 것을 보고 '그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시절에도 이런 부부가 있었어? 독특하네.'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그런데 중국 하얼빈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2009년에, 또 다른 블로거의 글에서 이 책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 블로거의 대만 여행기 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문학가이자 비평가인 임어당(林語堂, 린위탕)의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임어당이 부생육기의 저자 심복의 아내이자 부생육기의 여주인공이기도 한 운(芸)에 대해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뛰어난 여인' 이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호기심이 좀 동해서, 친구이자 푸다오(과외) 선생이었던 진쥔에게 임어당과 부생육기에 대해 말했다.
그랬더니 진쥔이 바로 다음 푸다오 시간에 부생육기를 사들고 나타났다. (속으로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며 당황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 그 날 진쥔이 부생육기 제1장을, 내 중국어 수준에 맞춰 쉽게 번역해서(중국어책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상황이라니... ^^;;)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가며 읽어줬다.
처음 부생육기를 알게 된 블로그 포스트를 접했을 때는 짤막한 줄거리만 읽어서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책 속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접하니 느낌이 많이 달랐다. 진쥔은 뒷부분도 나중에 마저 읽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흐지부지 되었다.
나중에 귀국을 한 후 어떤 책을 찾으려고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이쯤 되면 이 책과 나 사이에는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원래 계획에 없던 그 책을 덥썩 사들여서, 작년 부산-김해 여행 때 기차 안에서 읽은 것이다.
2. 심복과 운 - 하늘이 맺어준 부부
부생육기가 유명한 책이라니 얼핏 생각하면 저자인 심복도 대단한 사람일 것 같다.
옛날 유명한 책의 저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쟁쟁한 정치가나 사상가 혹은 문학가일 것 같은데... 뜻밖에도 심복은 이 책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특별한 족적을 남기지 못 했다. 아니, 오히려 이 부생육기란 책이 훗날 우연히 발견된 덕분에, 옛날에 심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했음이 겨우 알려졌다. 심지어 몇 년도에 사망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복은 그 시대 수많은 필부 중 한 사람이었다.
심복은 청나라 때인 1763년 소주(蘇州)에서 선비계층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래도 출생년도는 부생육기 속에 나온 덕에 알려졌음.)
하지만 선비계층이라고 해서 상류층 사람이었나보다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심복의 집안은 가난해서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드는 과거시험 준비는 감히 엄두도 못 냈다. 심복의 아버지도, 심복도, 그저 막우(지방 관료가 각종 업무 처리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을 말함. 즉, 사적인 비서나 사무직원 비슷한 직업임.) 일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과거시험을 쳐서 관직에 나가는 것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어느 정도 쌓은 학식으로 시골 마을에서 훈장 노릇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 정도 되었던 셈이다.
심복과 그 아내 운은 원래 친척지간이었다.
심복에게 운은 외숙부의 딸이었고, 운에게 심복은 고모의 아들이었으니, 두 사람은 내외종 사이였다. 원래 심복에게는 코흘리개 시절 약혼한 이가 따로 있었지만, 그 약혼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외가 친척인 운과 다시 약혼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후궁견환전' 에서 황제와 황후의 관계를 봐도 그렇고, 청나라 때의 소설인 '홍루몽' 을 봐도 그렇고, 청나라는 조선과는 다르게 친사촌만 아니라면 내외종 또는 이종 간에는 결혼이 가능했던 모양임.)
심복 부부는 천생연분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몸소 보여주는 부부였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중국 역시 유교 이념과 대가족 제도 속에서 살던 옛날에는, 부부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애정이 아니라 예의 및 법도였다. 하지만 세상 어떤 일에나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다. 부생육기에 나오는 심복-운 부부가 바로 그 예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다.
훗날 운이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 23년의 세월 동안, 심복과 운은 정신적으로 깊이 교감하며 두터운 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함께 시를 감상하고, 그림을 수집하고, 화초를 키우고, 뱃놀이나 축제구경에 나서고, 달밤에 단 둘이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등 가난한 살림 중에도 부부애를 이어갔다. 사실, 연애결혼이 일반화 된 현대에도, 이 부부처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같은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부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3. 시대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행복하게 지낸 부부
심복 부부가 아직 혼인하기 전인 13살 때(두 사람은 동갑이었음.) 이 어린 약혼자들에게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
운의 친척 언니가 혼인을 하게 되어, 심복도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가서 혼례에 참석했다. 심복이 한밤 중에 무척 시장해하자 외가의 여종이 이런저런 먹거리를 가져다 주었지만, 모두 입에 안 맞아 먹을 수 없었다. 그 때 운이 심복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운의 방으로 가보니, 심복 입맛에 딱 맞는 죽과 나물이 차려져 있었다. 심복이 좋아라 하며 막 먹으려 했는데...
갑자기 운의 친척 오빠가 찾아왔다. 운이 당황해서 잠자리에 들 참이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방문을 닫아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 오빠는 기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심복이 죽을 먹으려 하는 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운을 놀렸다. "아까 내가 너한테 죽을 달라고 할 때는 없다고 하더니, 몰래 숨겨두고서 네 서방님한테만 줄 생각이었구나."
이 일을 알게 된 일가 친척들은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창피해진 운은 숨어버렸고, 심복은 심복대로 무안한 나머지 화가 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두 사람은 그 때까지 격의 없이 지냈는데, 이 일이 있고나서는 심복이 외가에 갈 때마다 운이 슬그머니 심복을 피하곤했다. (귀여운 것들~~ ^^)
두 사람은 18세 되던 해에 혼인했는데, 그 시대 사람답지 않게 신체접촉에 개방적인 편이었다.
오랜 시간 헤어졌다가 만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집안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마주치는 것 뿐인데도, 만날 때마다 어디 가느냐고 반갑게 물으면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혹시 청나라는 같은 시대의 조선보다 부부간의 신체접촉에 관대했던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부부라도 침실 이외의 곳에서 신체접촉을 피했던 것은, 조선이나 청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심복은 부생육기에서, 두 사람이 그렇게 손을 잡을 때마다 다른 식구들이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고 했다. 즉, 다른 식구들 몰래 순간의 짜릿함을 즐긴 것이다. ^^
운이 남장(!)을 하고서 남편과 함께 밤나들이에 나서는 모험을 즐긴 적도 있다.
마을에 큰 제사 겸 축제가 열렸는데, 그 시대 관습상 여자는 마음대로 나가 구경할 수 없었다. 심복은 아내가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옷과 모자로 남장을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두 사람은 사촌형제로 꾸미고서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사연이 또 재미있다. 두 사람이 어떤 젊은 부인을 만나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이 자기 발에 안 맞는 커다란 남자용 신발을 신고서 서둘러 부인 쪽으로 움직이다가 그만 넘어질 뻔했다. 몸이 휘청하자 넘어지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붙잡는다는 게, 얼떨결에 그 부인의 어깨를 잡게 되었다. 남녀가 유별한 시절인데 외간남자(?)가 유부녀 몸에 손을 댔으니, 부인 옆에서 시중 들던 할멈이 웬 미친 놈이냐고 소리치며 펄펄 뛰었다. ^^;; 심복이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하는데, 일이 너무 커지는 듯하자 운이 얼른 모자를 벗어 자신도 여자임을 밝혔다. 덕분에 모두 한바탕 크게 웃고, 심복 부부는 그 부인에게 맛있는 간식까지 대접받았다.
두 사람이 몰래 달밤에 뱃놀이를 즐긴 일도 있다.
심복이 조문을 가는 길에 중국의 유명한 호수인 태호를 건너게 되었는데, 운도 태호를 무척 보고싶어 했다. 두 사람이 모의(?)를 해서 마치 운이 친정에 볼 일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는, 함께 태호로 가서 뱃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밤이 되자 뱃사공의 딸까지 끌어들여서, 그 뱃사공 딸이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부부는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지화자~ ♬ 좋구나~ ♪ ^^)
어지간히 신나게 놀았던지 그만 소문이 나버렸는데, 소문이란 게 퍼지다 보면 엉뚱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심복 친구의 부인이 그 잘못된 소문을 듣고는 운에게 와서 귀띔해주었다. "며칠 전에 호수에서 당신 남편이 기생(!)을 두 명이나 끼고 앉아 술을 마셨다는데, 알고 계세요?" 라고... ^^;; 운이 "그럼요, 그 두 여자 중 하나가 바로 저에요." 라고 사정을 설명하자, 그 부인은 안심하고 재미있어 하며 돌아갔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부부는 소박하고도 낭만적인 멋을 즐겼다.
심복네 형편상 고급 차를 사지 못 하고, 질이 떨어져 향이 좋지 않은 저렴한 차만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슬기로운 운은 그런 찻잎을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담아서 저녁에 연꽃 속에 넣어두었다. 밤이 되면 연꽃 봉오리가 오므라들면서, 찻잎 주머니는 밤새 연꽃 안에서 연꽃향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면 심복 부부는 다음 날 은은한 연꽃향이 스며든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의외로, 한국의 로맨스 소설 또는 신문의 칼럼 등에서 자주 인용됨. ^^)
4. 그러나 시대의 한계과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 한 부부
하지만 불행히도, 두 사람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대가족 제도하에서는 개개인의 감정이나 취향보다는 집안 전체의 안녕, 명예, 부가 더 중요시되는 법이다.
위에 예로 든 두 사람의 데이트(!) 행각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하고 낭만적 감성이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심복 부부의 자유로운 성격은, 엄격한 가법으로 다스려지는 대가족 제도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심복 부부는 선량하고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지만, 금전 문제나 인간관계 같은 현실적인 방면으로는 무능한 편이었다. 그러니 부부 사이에는 애정이 넘쳐서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대가족 안의 다른 사람들과는 계속해서 부대낄 수 밖에 없었다.
우선, 이 부부를 평생 괴롭혔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원래도 가난한 집안인데, 현실적인 능력이 부족한 심복 부부가 살림을 물려받으면서 더 가난해졌다. 그러자 일가친척 사이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나오게 되고, 심복의 부모도 아들 부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은, 명색이 큰아들 큰며느리인 심복과 운이 가난한 집안 살림을 일으키지는 못 하고, 서화 수집이니 화초 키우기니 하는 일에만 정신을 쏟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심복의 동생도 돈 문제를 일으키며 심복 부부를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동생이 큰 빚을 지고는, 집안 어른들의 추궁을 피할 생각에 애꿎은 형수(운)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래서 심복의 부모는, 운이 다른 식구들 몰래 빚을 진 것도 모자라 시동생을 모함하기까지 했다며 괘씸하게 여겼다. 심복이 아내의 편을 들면서 심복까지 미운털이 박혀서, 심복 부부는 내쫓기다시피 분가해야 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오해가 풀려서, 두 사람은 겨우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운이 그 시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글을 깨우쳤다는 점까지 말썽의 소지가 되었다.
운의 시아버지는 다른 지방에 가서 막우 일을 하느라, 집에 있는 아내(즉, 운의 시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많았다. 마침 며느리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하니, 아내가 보내는 편지를 며느리에게 대필하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자, 운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편지를 이상하게 써서 오해가 생겼다고 여기고 대필을 그만두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자신이 시킨 대필을, 며느리가 하찮게 여겨서 제멋대로 그만 두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래도 혼나고 저래도 혼나고, 뭘 어쩌라고... ㅠ.ㅠ)
심복은 아내의 글재주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내에게 시를 쓰라고 격려해주고 아내의 시를 감상하며 평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심복도 이 때만큼은 부모와 아내 사이에 끼어 어지간히 괴로웠던 모양이다. 부생육기에, 차라리 운이 다른 여자들처럼 글을 몰랐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라면서, 역시 여자는 아무런 재주 없는 게 덕이라고 한탄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운이 '시아버지의 첩'(!)을 구해주려고 나섰다가 시어머니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부생육기에서는, 그저 운이 앞뒤 말을 매끄럽게 맞추지 못 해서 시어머니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봉건적인 시대의 남자인 심복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 원인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즉, 며느리인 운이 시어머니 몰래 시아버지의 첩이 될 사람을 알아봤다는 사실 자체가 시어머니를 분노하게 했던 것 같다. (시아버지의 첩자리 알아보러 다니는 며느리라니, 요즘 시대 같으면 TV 뉴스에 크게 나올 법한 이야기임. -.-;;)
여기에서도 심복 부부의 처세술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시아버지의 첩을 들이는 것은 결국에는 시어머니도 알게 될 일이다. 그러니 첩을 들이는 게 원래 시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시어머니에게 솔직히 말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원래도 남편이 첩 들이는 것을 좋아할 본처가 없는데, 거기에 며느리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까지 더해졌으니, 시어머니가 분노할 수 밖에 없다. 혹은 며느리인 운 대신 아들인 심복이 그 일에 나섰더라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엄연히 다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심복은 자신도 다른 지방에 나가있다는 이유로 집에 있던 아내에게 그 일을 맡겨버렸고, 운 역시 시아버지와 남편 뜻이 모두 그러하다는 이유로 그 일을 맡아 진행했으니...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처세술에 능숙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부창부수라고 부부가 똑같이 인간관계에 많이 서툴렀다. -.-;;
게다가 운의 건강이 좋지 못했다.
운은 원래도 허약한 편이었던 것 같은데, 하나 밖에 없는 친정 동생이 가출해버린 뒤로 하혈을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다. 가뜩이나 가난한 살림에 환자까지 생겼으니 집안 형편은 나날이 힘들어졌다. 약값은 약값대로 들고, 집안 사람 중 누군가는 병간호를 맡아야 했다.
원래 집안 사람들과 잘 지냈더라면 상황이 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잖아도 이런저런 일로 일가친척들이 심복 부부를 못마땅해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운의 병 때문에 계속해서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되자, 나중에는 집안 사람들 모두가 운을 싫어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운이 남편에게 첩을 구해주려다 실패한 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자면, 어떤 여자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자기 남편에게 첩을 구해준다는 것은 막장 드라마 같은 사연이다. ^^;; 부생육기만 읽어서는, 운이 그저 그 시대 현모양처의 역할에 충실해서 남편에게 좋은 첩을 구해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행간의 의미를 따져 살펴 보면, 운이 어떤 마음으로 남편에게 첩을 구해주려 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건강이 나빠진 운이 스스로가 오래 살지 못 할 것을 알고, 혹은 자신의 몸 상태로는 집안 살림을 꾸려갈 수 없다는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고, 남편에게 자신을 대신할 여자를 구해주려 했던 것 같다.
실제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운은 어떤 기생을 남편의 첩으로 낙점했고, 심복 역시 그 기생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기생과 이야기가 잘 되어, 운은 그 기생을 의자매로 대하기까지 했는데... 그만 그 기생이 기생어미의 뜻에 따라 돈 많고 권세 있는 집안의 첩으로 들어가버렸다. 운은 그 기생이 약속을 어긴 것에 너무 실망해서, 한동안 진정되었던 하혈 증세가 다시 악화될만큼 건강을 해쳤다. 그리고 심복의 부모는 뒤늦게 그 사정을 알고, 며느리가 천한 기생 따위와 알고 지낸다며 며느리를 더 미워하게 되었다.
운의 오랜 투병생활에, 심복이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줬다가 빚독촉까지 당하게 되면서, 집안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자 심복의 아버지는, 며느리는 아녀자의 도리를 안 지키고 기생 같은 천한 여자와 사귀고, 아들은 명색이 선비인데 소인배와 어울려 빚이나 지고 다닌다며,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라고 화를 냈다. 하지만 심복 부부인들 그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방도가 있을 리 있겠는가...
할 수 없이 14살된 딸은 친척집에 민며느리로 보내고 12살된 아들은 가게의 점원으로 보낸 후, 부부끼리만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하다시피 집을 떠나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부부는 한 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꾸리지 못 하고 형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며, 친척과 친구에게 돈을 빌려 사는 구차한 생활을 이어갔다.
1803년에 23년 동안 심복의 사랑스러운 아내이며 충실한 친구였던 운은, 객지에서 심복 한 사람만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심복은 소중한 아내가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다 40세를 겨우 넘긴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 슬퍼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의좋은 부부는 백년해로를 못 하는 법이라는 옛말까지 떠올리며 한탄했다. 그리고 '매화를 아내로, 두루미를 자식으로 삼다' 는 옛글을 본따서, 스스로에게 '매일(梅逸, 매화를 여의다)' 이라는 호를 붙였다. 심복에게 아내는 한 떨기 매화 같은 존재였다는 뜻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운이 세상을 뜨고 몇 년 안 되어 이 부부의 외아들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죽은 후 제사를 지내줄 아들이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기에, 심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내에 아들까지 다 잃은 심복을 딱하게 여긴 어떤 친구가, 심복에게 첩을 한 사람 붙여줬다. 하지만 부생육기에 '그 후로 춘몽에 빠져 대충 살며 언제 꿈에서 깨어날지 몰랐다' 라고 쓴 것을 보니, 그 후로 심복은 실의에 빠져 그저 되는대로 살았던 듯싶다.
5. 기타 - 부생육기 일부분에 대한 위작론, 부생(浮生)과 고려 태조의 유언
'부생육기(浮生六記)' 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모두 6개의 장(육기, 六記)으로 구성되어 있다.
1877년 소주의 한 노천 책방에서 부생육기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제1장에서 제4장까지만 있었다. 훗날 제5장 및 제6장도 발견되어, 1936년에 처음으로 6개의 장 전체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그런데 뒤에 발견된 제5장 및 제6장에 대해서는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먼저 발견된 앞의 4개의 장과 문체가 다르기도 하고, 날짜상 모순된 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단 심복이 쓴 원래의 책은 분명 6개의 장으로 구성된 것이 맞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부생육기 중 5장과 6장은 심복이 아닌 누군가가 쓴 것을, 어떤 목적에서인지 심복의 글로 둔갑(?)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사실, 내용상으로도 제1장~제4장과 제5장~제6장은 너무 달라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다. 제1장부터 제4장까지는 아내 운과의 즐겁고 슬펐던 추억을 중심으로 해서 그 밖의 다른 식구나 친구들과의 사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제5장에서는 갑자기 유구국(琉球國 : 류큐국,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의 기행문이 나오고, 제6장에서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 같은 것이 나오는 게, 좀 뜬금없다.
그래서 현재 출판되는 부생육기가 6개의 장을 모두 수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부생육기를 심복과 운의 사랑 이야기로 기억할 뿐, 제5장 및 제6장은 별개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나 역시 이 포스트에 제5장 및 제6장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 부분은 주마간산식으로 대강 읽어서 기억도 잘 안 남. ^^;;)
또한 이 책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책 제목에 나오는 '부생(浮生)' 이란 말을 고려사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부생이란 말은 '허무한 인생' 또는 '덧없는 인생' 이란 뜻인데, 아마도 불교쪽에서 나온 단어인 것 같다. 심복이 평생의 지기였던 아내 운과 사별한 후, 적적하다 못 해 허무하기까지 한 자신의 인생을 부생이란 말로 표현해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자전적 수필을 부생육기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고려사 중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세상을 뜨며 남긴 말 중에, 공교롭게도 부생이란 말이 나온다. 주위 사람들이 태조의 임종을 지키면서 통곡하자, 태조는 오히려 웃으면서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이러하다.(浮生自古然矣)" 라는 말을 남기고 곧 숨을 거두었다.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영웅호걸조차,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보니 결국 인생이 한 바탕 꿈처럼 부질없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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