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Lesley 2015. 7. 2. 00:01

 

  오래간만에 고려사 관련 책에서 벗어나 조선사 관련 책으로 관심을 돌려봤다.

  사실, 이 책들은 다른 책을 구입하려고 인터넷서점에 접속했다가 우연히 보고서 충동구매(!) 한 것들이다.  그러나 막상 구매하고서는 1년 넘게 책장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환향녀를 소재로 한 단막극을 보고서, 갑자기 삘(!)이 꽂혀 후다닥 읽게 되었다.

  모두 역사학 교수로 있는 한명기라는 작가가 쓴 책인데, 하나는 두 권짜리로 된 '역사평설 병자호란'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를 소개하려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푸른역사' 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두 권으로 된 이 책은 '푸른역사' 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와 푸른역사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있나 보다.  지난 몇 년 동안 고려사에 푹 빠져서 고려사 관련 책을 여러 권 구입해서 읽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대부분이 푸른역사에서 나온 책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조선사 관련 책을 구입했더니, 그것조차 푸른역사에서 나온 책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푸른역사 관계자분이 이 블로그 방문하신다면 질문드리겠습니다.

  이승한 작가의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제3권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겁니까?  제2권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이 나온지 벌써 2년 반이 지났습니다...!  올해 안에는 나오는 겁니까?  제3권 기다리느라 목이 늘어날 지경입니다...! ㅠ.ㅠ

 

 

 

  각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서...

 

  위에 쓴대로, 한동안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역사평설 병자호란' 을 읽게 된 계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작년 12월에 단막극을 한 편 봤는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 여자, 즉 흔히 환향녀라고 하는 여자들의 한을 소재로 한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를 보고서 병자호란 때 끌려갔던 조선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구입한지 1년이 넘도록 읽지 않았던 책을 펼쳤다.  단만극(2) : 환향 - 쥐불놀이(http://blog.daum.net/jha7791/15791166) 

  처음에는 전쟁 중 포로로 잡힌 이들에 대한 부분만 골라 읽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흡인력 있는 내용이라 1권을 다음날 새벽까지 붙들어가며 다 읽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나머지 2권까지 끝장(!)을 냈다.  그래서 병자호란 때 끌려간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부분만 따로 정리해서 전에 포스팅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비극 - 피로인, 환향인, 환향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5)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서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군주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다른 나라 군주에게 무릎 끓고 항복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치욕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항복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 항복에 이르게 된 배경과 과정을 더욱 치욕적으로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병자호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다음과 같다.  '조선 조정이 사대주의에 찌든 나머지, 다 무너져가는 명나라만 하늘처럼 떠받들고 청나라는 만만하게 여기다가, 청나라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결국에는 항복했다.' 라고 말이다.  그저 청나라에게 군사적으로 밀려서 항복한 것 뿐이라면, 우리가 병자호란에 대해 느끼는 치욕감의 정도는 훨씬 덜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항복만 한 게 아니라, 자존심 내던져가며 명나라에게 굽신거리다가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이 너무나 비굴했다.' 라는 사실에 치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광해군 = 중립외교, 인조 = 친명배금외교' 라고 알려진 공식(?)이 틀렸음을 지적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한동안 서점가에 보였던 '000를 위한 변명' 같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책의 내용은 결코 '사실은 인조가 자주의식 투철한 임금이었는데, 사악한 의도를 가진 무리의 흑색선전 때문에 사대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가 아니다.  분명히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인조 자신과 서인을 주축으로 하는 반정공신들)은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멸시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친명배금적인 생각은 인조와 반정공신들 뿐 아니라, 당시 신분고하 또는 당색을 막론하고 조선인 전체에게 퍼져있었다.  심지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적절히 중립을 지켜 재위기간 동안 전쟁을 피했다는 평가를 받는 광해군이나, 병자호란를 전후해서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계속해서 주장했던 최명길조차, 명나라는 선진문화를 지닌 국가로 생각하고 청나라는 비천한 오랑캐 무리라고 여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선 지배층의 마음 속에 명나라가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병자호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다못해 조그마한 동네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먹고살기 위해 싫은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 보이고 다정한 태도 취하며 친분을 유지하는 법이다.  하물며 냉정한 국제관계 속에서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입장이라면, 자신의 감정이나 사상 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가며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친북좌파니 반미정권이니 하는 비난을 받았던 김대중 정권 및 노무현 정권 때에도, 우리나라는 미국이 원하는대로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해외파병을 결정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던 외환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사실상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IMF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국방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뜻을 거스릴 경우 안보면에서 당장 큰 문제가 생기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21세기에도 여전히 색깔론을 내세우는 박근혜 정권이,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 일당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과 눈에 띄게 친밀히 지내고 있다.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 현실을 생각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큰 수출시장을 가진 중국과 틀어진다면 가뜩이나 힘들어진 경제가 아예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난 몇 년 간 계속되고 있는 일본과의 역사문제 및 영토문제에서, 한국과 중국의 입장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도 있고...)

 

  중요한 것은 인조 정권의 감정적인 부분이나 사상적인 부분이 아니라, 정책적인 부분이다.

  조선 조정이 명나라를 얼마나 숭상하고 청나라를 얼마나 멸시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해 '실제로 어떠한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했는가' 가 중요하다.  또한 그러한 조선조정의 외교정책이 '명나라 및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만큼이나 효과를 발휘했는가' 도 중요하다. 

 

  의외로, 병자호란 이전까지 인조 정권이 취한 외교적 자세는 광해군 정권 때의 외교적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친명배금을 반정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 회의를 할 때에도, 명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툭하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청나라를 공격해서 청나라에게 빼앗긴 명나라 영토를 되찾겠다.' 고 다짐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와 싸우겠노라는 다짐은 말 그대로 다짐으로 끝났을 뿐, 실행으로 옮겨진 적은 거의 없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야 청나라 쪽에서 먼저 조선 영토로 침략해 들어온 경우니, 조선도 수비 차원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 경우를 제외하면, 인조 재위 시절에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인 적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히려 중립외교를 내세웠던 광해군 시절에,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1만5천명이나 되는 조선군을 보내 명나라가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도왔음.) 

 

  친명배금을 내세운 인조 정권이 청나라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못 한 이유는, 조선 내부 상황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바로 다음 해에 '이괄의 난' 이 터지면서 수도인 한양이 함락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런저런 반란이 있었지만,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피난을 떠난 경우는 오직 '이괄의 난' 때 뿐이다.  그만큼 '이괄의 난' 은 엄청난 사건이었고, 나중에 어찌어찌 진압하기는 했지만 그 여파가 컸다.  그렇잖아도 조선 내부에 인조를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발하는 세력이 제법 있었는데, 인조반정에 함께 참가했던 이괄마저 인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여담이기는 하지만, 이괄의 난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필이면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용한 군대가 조선의 북방수비를 맡은 최정예 군대였기 때문이다.  반란에 가담한 북방수비대가 와해된 것은 조선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괄의 난 이외에도, 직접 군사를 일으키는 정도까지 가지 않았을 뿐 크고 작은 역모가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적발되었다. (정말 역모로 볼 수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저 정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거나 비판을 했을 뿐인데 역모로 몰린 경우도 많았음.)

  조선 내부가 이렇게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인조 정권은 속마음이야 어땠는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수 없었다.  결국, 인조 정권은 입으로만 친명배금을 부르짖었을 뿐, 실제로는 청나라의 요구 중 상당수를 수용하는 등 광해군 시절과 별로 다르지 않은 외교적 태도를 보였다.

 

  인조 정권의 모순적인 외교적 태도는, 원래도 불안정했던 인조 정권의 기반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애초에 인조 정권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주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광해군의 중립외교노선' 에 대한 비판이었다.  즉,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많은 희생을 치른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와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명분과 대의에 어긋나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그토록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비난했던 인조 정권 역시 광해군 정권과 별 다를 것 없는 외교노선을 취했으니, 말 그대로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입으로는 친명배금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광해군과 같은 외교노선을 취하는 인조 정권의 이중적인 모습이 가증스러웠을 것이다.  반대로 광해군을 반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친명배금을 내세운 인조 정권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광해군과 똑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을 보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간관 등 젊은 관료, 성균관 유생, 재야의 선비 등 사대부 상당수가 인조 정권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조 정권이 광해군 정권과 비슷한 외교적 태도를 보였는데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터진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당시 급변하는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조선은 '종속변수' 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선 역시 동북아시아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북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끼칠만한 변수이기는 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라는 '독립변수' 의 움직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 을 끼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명나라와 청나라는 두 마리 고래였고 조선은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였다.  두 마리 고래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면, 새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싸움에 휘말려 등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질리도록 배운 '강대국에게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로 인한 비애.)

  설사 광해군이 계속 보위를 지켜서 그 후로도 중립외교노선을 밀고나갔다 한들, 반드시 청나라의 침략을 피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친명배금을 내세우는 인조가 즉위했다고 해서, 무조건 청나라의 침략이 기정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요동치던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조선은 두 강대국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불가피한 전쟁이었으니, 인조와 반정공신들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는 걸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병자호란이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사대주의적 외교정책' 때문에 발발했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만, 동시에 인조 정권이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보인 무책임한 자세에 대해서 냉정히 비판하고 있다. 

 

  전쟁 그 자체는 조선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더라도,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계속해서 밀리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조선도 곧 겪을지도 모르는(그리고 결국에는 겪게 되어버린) 청나라의 침략에 미리 대비해야 했다.  그래야 청나라의 침략을 격퇴하거나, 혹은 결국 항복을 하더라도 국가와 백성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좀 더 나은 항복조건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테니...    

 

  그러나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조 정권은 애초에 쿠데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탓에 권력기반이 불안정했다.  더구나 정권이 수립되고 약 2년 동안, 대외적으로는 '기존 국제질서 속 강대국' 인 명나라에게 인정을 받지 못 했고(친명배금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는 인조의 즉위를 2년이나 인정하지 않았음.), 대내적으로는 위에 쓴 것처럼 이괄의 난을 비롯한 온갖 변란에 부딪쳤다.

  그러자 인조 정권은 불안해진 나머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에도 부족한 시간과 인력과 물자를 내부 반란 대비에만 쏟아부었다.  즉, 자신들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근거지인 한양과 그 주변 방어에만 골몰하며, 정작 청나라가 침략하면 제일 먼저 쑥대밭이 될 평안도와 황해도의 수비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의 정예군을 많이 잃어 전쟁 대비에도 부족해진 군사력을, 과거 광해군 정권에서 일했던 이들이나 재야세력에 대한 사찰 및 탄압을 하는 용도로 썼다.

 

  그렇게 인조 정권에게 버림을 받았던 평안도 지역 중에서도, 특히나 청천강 이북 지역은 병자호란 발발 이전부터 이미 무법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군대를 이끌고 평안도 가도에 주둔하면서, 마치 점령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청천강 이북의 관민 모두에게 온갖 피해를 끼쳤다.  게다가 청나라 군대는 청나라 군대대로, 모문룡을 치기 위해서라는 구실을 내세워 수시로 청천강 이북 지역에 출몰했다.  조선 영토에서 명나라 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번갈아가며 활개치고 다녔고, 그 와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겼지만, 조선 조정은 그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 했다.  심하게 말하면, 당시 청천강 이북 지역은 조선 영토라고 말하기 힘들 만큼 조선의 주권이 미치지 못 했던 것이다.  

 

  인조 정권은 전쟁이 터지기 전 뿐 아니라 정말로 전쟁이 터졌을 때도, 무책임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방어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평안도와 황해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양 바로 위에 있는 경기도 북부지역(임진강 부근)의 방어마저 포기했다.  그저 강화도로 피난할 생각만 하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들을 이미 침략받은 지역으로 보내 싸우게 하지 않고 자신들이 머물 한양 및 강화도 부근의 수비에만 투입했다.  그런 조정의 태도는 청나라 군사들의 창칼에 그대로 노출된 백성들의 반감을 사서, 다시 민심이 악화되고 정권이 흔들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저자가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하여 출판한 이 책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쿠데타로 집권해서 정통성이 부족한 나머지 강대국의 승인에만 매달리고,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에만 힘을 쏟으며 재야세력에 대한 사찰과 함정수사만 일삼았던 정권...  기존의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와중에, 기존의 강대국과 새로 등장한 강대국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했던 약소국의 처지...  20세기 중후반에 우리가 겪었던 일과 놀라우리만큼 흡사하고, 21세기 초반인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 소름끼칠 만큼 비슷하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나 보다.  역사의 교훈을 깨닫지 못 하는 민족은, 수백 년 전 조상들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정치인들이 똑같은 실수를 더는 되풀이 하지 않고, 조상들의 실수를 거울 삼아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단만극(2) : 환향 - 쥐불놀이(http://blog.daum.net/jha7791/15791166)

병자호란의 비극 - 피로인, 환향인, 환향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5)

한명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http://blog.daum.net/jha7791/15791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