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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Lesley 2015. 7. 20. 00:01

  먼저번 소개한 '역사평설 병자호란' 의 저자가 쓴 또 다른 책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를 소개하려고 한다.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7) 

 

 

 

책 이미지가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는 전에 소개한 '역사평설 병자호란' 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라는 제목에 걸맞게, 임진왜란을 '조선 대 일본의 전쟁' 이 아닌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관계를 변하게 만든 전쟁' 이라는 부분에 무게중심을 두고 설명한다.

 

  시간 순서를 따지자면, 선조-광해군-인조 시대의 외교정책을 다룬 이 책을 먼저 읽고서, 인조 시대만 다룬 '역사평설 병자호란' 을 읽는 게 맞다.

  하지만 만일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역사평설 병자호란' 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좀 지루하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먼저 봤다면 같은 저자가 쓴 '역사평설 병자호란' 도 으레 지루한 책이겠거니 생각하고 안 봤을 것이다. (가능성 80% 이상! ^^;;)  그러니 보기에 한결 수월한 '역사평설 병자호란' 을 먼저 본 게 다행한 일이다.  이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가 지루한 편이기는 했어도 분명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역사평설 병자호란' 만큼 즐겁게 읽지는 못한 이유는... 

 

  우선 '내용의 구성' 과 '문장 호흡' 의 차이 때문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 은 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즉, 애초에 다양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신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재글을 모은 것이라, 문장의 호흡도 짧은 편이고 전체적인 구성도 간단명료하다.  그래서 나 같은 역사 비전공자가 읽기에 수월하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는 문장의 길이가 제법 긴 편이고, 책의 구성이나 내용을 보면 대중역사서와 전공서적의 중간 정도 된다.  그래서 술술 읽히거나 독자의 흥미를 자아내는 편이 아니다.  

 

  또한 두 책은 편집면에서도 많이 다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 은 문장 사이의 간격이 넉넉해서 보기 편하다.  차라리 한 페이지당 문장을 몇 줄 더 넣어 전체 페이지수를 줄이고, 그 만큼 책값을 낮췄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은 그렇잖아도 가볍게 읽히는 책이 아닌데, 가독성까지 좋은 편이 아니다.  문장 간격 조절과 폰트 선택을 잘못한 듯하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9년도에 처음 출간된 책이건만, 어째서인지 80년대 냄새가 솔솔 풍긴다. (출판계에도 복고풍이 유행인가?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첫 번째 부분은 선조 시대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에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게 되면서,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관계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 때부터 명나라에게 사대외교를 했다지만, 그 사대외교라는 게 지금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부정적 의미의 사대외교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실리적인 외교태도 혹은 외교정책이라 할 수 있었다.  명나라와의 현실적인 국력 차이를 냉정히 인정하여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대우해주는 대신, 조선 북쪽지방의 군사적 안정 및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은 조선에게 여러모로 큰 이득이 되었고, 명나라는 무역손실을 줄이기 위해 조선이 파견하는 조공사신의 횟수나 규모를 줄이려 했을 정도임.)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원조하면서, 현대의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굴욕적이고 맹목적인 의미의 사대외교로 변하게 되었다.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이라는 명분 때문에, 현실적인 외교정책이었던 사대외교가 마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명나라는 어째서 조선 파병을 결정했을까? 

  명나라가 파병을 결정하며 내세운 명분은, 그 동안 명나라에게 충실히 사대의 예를 다하던 조선이 위기에 처했으니 종주국으로서 돕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타국의 전쟁에 개입할지 여부를 생각하면서, 이타적인 이유만 고려하는 순진한 나라는 없다.

  명나라의 진정한 참전 이유는 '명나라의 안보' 였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조선을 도울 수 밖에 없다는 논리, 즉 순망치한의 논리가 깔려있었다. 

 

  그 당시 명나라의 해안지역도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은 일본을 위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은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명나라의 동쪽(요동지방 및 산동지방)을 지키는 울타리로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 군대가 짧은 기간 동안 조선 북부지역까지 치고 올라갔다.

  만일 일본군이 조선을 병합하게 된다면, 명나라 동쪽의 울타리가 뚫리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일본이 조선의 인력과 물자까지 동원해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방을 공격하거나 황해를 건너 산동지방을 공격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결국에는 요동 및 산동에서 가까운 편인 명나라 수도 북경마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남의 나라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명나라 안보에도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은 명나라 조정에서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 상황이 안팎으로 어지러워서 쉽게 참전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조정이 환관들과 유학자 출신 관료들로 나뉘어 사사건건 정쟁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조선에 파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로 또 다시 국론이 분열되었다.  원군을 요청하는 조선 사신이 몇 번이나 먼 길을 오가는 동안, 명나라 조정은 격렬한 논쟁을 반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파병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이란 이기든 지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임진왜란에 개입한 대가로, 명나라는 국가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조선 파병이 약 50년 후 명나라가 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신종)는 정작 명나라 정치는 돌보지 않았으면서, 명나라에 엄청난 부담이 되는 조선 파병은 밀어붙였다.  그래서 명나라 사람들이 '고려(조선을 의미함.)의 천자' 라는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닌 빈정대는 의미의 별명임.)  

  명나라는 조선 파병으로 입은 막대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조선에게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얻어내려 했다.  이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재조지은' 이었다.  즉, '우리가 일본의 침략으로 망해가던 너희 나라를 다시 세워주었으니, 너희도 마땅히 우리에게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냐' 하며 조선을 압박한 것이다.

 

 

  그런데 재조지은의 관념이 조선에 확산된 데에는, 명나라 뿐 아니라 조선의 임금인 선조도 한몫 했다.

 

  임진왜란 동안 선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선조는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고,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되어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 바로 밑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살육당하는 백성들을 외면한 채 명나라로 망명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나 생각했다.  당연히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선조를 임금답지 못 한 임금으로 보게 되었다.  선조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자, 임진왜란 와중에 조선 내부에서 역모가 일어나는가 하면 선조의 퇴위를 종용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그런데 선조가 그토록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행태를 보이는 동안, 재야의 선비들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웠다.  당연히 의병장들은 백성들의 인망을 얻게 되었다.  의병장들의 용감한 행적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선조의 위상은 의병장들과 비교되어 더욱 초라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논공행상을 하면서, 선조는 고의적으로 의병장들의 공적을 깎아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전쟁 중에 자신보다 훌륭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의 공적을 평가절하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의병장이 세운 군사적 성과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그 공적을 의병장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돌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격퇴하고 나라를 지켜낸 것을 전부 명나라 군대의 은덕으로 돌려버렸다.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의병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지는 않고, 그렇잖아도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려 벼르고 있던 명나라의 콧대만 잔뜩 높여준 것이다.  이런 선조의 태도는 재조지은이라는 관념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명나라 군대의 참전은 정치적.외교적인 변화 뿐 아니라 경제적 변화도 불러일으켰다.

 

  명나라는 조선보다 상업이 발달해서 일찍부터 화폐(은)를 사용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군사들도 급여를 은으로 받고 있었다.

  화폐를 쓰는 명나라 군대가 대규모로 조선에 들어오자, 그들에 대한 군량미나 각종 물품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조선도 화폐경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물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물교환을 하던 조선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화폐경제에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화폐를 사용하고 명나라 군대 주둔지 근처 등에 상점을 설치하는 문제로, 조선 조정과 명나라 군대 수뇌부는 몇 번이나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그래도 명나라 군대와 접촉하면서 조선인들도 차츰 화폐라는 것의 유용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나중에 인조가 즉위한 후 상평통보를 주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원래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은 공무역(조공무역) 위주였지만,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사무역이 급증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조선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쓸 군량미 및 기타 물자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명나라 요동지방에서 식량 등 물자를 수입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다른 나라에서 대규모의 물자가 들어오면서, 그 전까지는 공무역 중심이었던 두 나라의 무역 관계가 일대 변화를 맞게 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대폭 늘게 되었고, 사람과 물자가 한 곳으로 몰리자 자연스레 숙박업 등도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부작용도 나왔다.  우월한 위치에 있던 명나라 상인들이 조선인에게 불량품을 팔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에 물건을 강매하는 말썽이 생겼다.  그리고 아직 전쟁 중이건만, 조선 지배층 중 일부 지각없는 무리가 명나라산 비단옷 등의 사치품을 사들이는 폐단도 나타났다.   

 

 

  또한 이 책을 보고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요즘으로 치면 이민자(정확히 말하자면, 난민 출신 이민자)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전쟁 중에 먹고사는 게 막막했던 많은 사람들이, 명나라 군대 주둔지에서 하인이나 현지처 역할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게 되자,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보다는 명나라에서 사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나선 것이다.  그렇잖아도 전쟁 때문에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되니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조선인이 명나라로 간 것은 명나라 쪽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명나라도 사정이 엉망이라 많은 농민들이 거지 또는 도둑이 되어 떠도는 판국인데, 다른 나라 사람까지 받아줄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은 조선인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만리장성의 산해관 바깥에 머물게 했다.  그 후 산해관 바깥에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수시로 전투를 벌인 것을 생각하면,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겠다며 말도 안 통하는 명나라로 떠난 그 사람들의 운명이 순탄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거꾸로, 명나라 군사 중 일부가 귀국하지 않고 조선땅에 뿌리내리기도 했다.

  명나라 상황도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생스럽게 먼길을 행군해서 돌아가느니 차라리 조선에 머무는 쪽을 택하고 탈영하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명나라는 그런 탈영병들을 체포해서 넘겨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구했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명나라 탈영병들을 선별적으로 명나라에 넘겼다.  임진왜란 동안 명나라 대포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 탈영병 중 대포나 화약의 제조기술을 지닌 자들에게는 벼슬과 집을 주고 조선여자와 혼인까지 시켜주면서 조선에 자리잡게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외국인 중 단순노동인력은 안 받고 고급기술인력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민정책을 편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광해군 시대를 다루고 있다.

 

  광해군은 오랜 세월 세자 자리에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큰 활약을 했건만, 불안하게 즉위했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세자로 있는 광해군 대신 늦둥이로 얻은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뜻을 보였다. (광해군은 서자였음.)  광해군은 선조와는 달리 임진왜란 동안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 한 일로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선조는 의병장들의 공적을 깎아내린 것과 같은 이유로, 친아들인 광해군조차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로 보고 꺼린 것이다.  그런 선조의 태도 때문에 광해군은 불안정한 처지에 있다가 겨우 즉위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도 광해군이 선조의 첫째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 및 국왕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그저 조선에 대한 입김을 키울 생각으로만 딴지를 건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명나라 상황이 조선 상황과 묘하게 비슷해서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만력제에게는 황후 소생의 아들은 없고 후궁 소생의 아들만 여러 명이 있었다. (즉,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까지 후궁 소생의 아들만 잔뜩 둔 선조의 상황과 같았음.)  만력제는 셋째아들을 가장 아껴서 태자로 삼고 싶어했지만, 명분을 중요시하는 신하들은 마땅히 첫째아들을 태자로 삼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이 와중에 광해군이 조선의 새 국왕이 되었다.  명나라 신하들 입장에서 보자면, 선조의 첫째아들이 아닌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한다면, 만력제의 첫째아들을 태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만력제의 큰아들을 지지하는 명나라 신하들이 번번히 광해군의 책봉에 반대하고 나섰다.

  광해군 입장에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일로 명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진 상황에서, 명나라의 승인은 꼭 필요했다.

 

 

  할 수 없이 광해군은 비공식적인 방법, 즉 명나라 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책봉을 받게 되었다. 

 

  위에 쓴 것처럼 명나라는 은을 화폐로 쓰고 있었는데,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부터 명나라에서 은의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그 부작용으로, 세금의 명목상 액수는 그대로인데 실질적인 액수는 오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눌려 유랑하거나 민란을 일으켰지만, 부패한 지배층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귀해진 은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어짰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착취할 수 있는 은의 양이란 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 관료들은 새로운 착취대상을 찾게 되었는데...

 

  부패한 명나라 관료들의 눈에 새로운 보물섬(!)이 들어왔으니, 바로 조선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은, 보통의 경우 화려한 연회나 대접받고 고급 백저포(하얀색 모시)나 선물 받는 정도로 만족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로는 재조지은을 앞세우며 너도 나도 은을 요구하게 되었다.  더구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 조선 조정이 광해군의 책봉을 받아내려 명나라 사신에게 매달렸기 때문에, 뇌물을 요구하기에 더욱 유리해졌다. 

  교통과 치안이 안 좋던 시절이다 보니, 그 전까지는 명나라 관료들이 조선으로 가는 사신으로 뽑히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조선으로 가는 사신이 되겠다며 권세가에게 뇌물까지 바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밑천 들여 얻어낸 사신 자리니, 들인 밑천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것을 뽑아내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몇몇 예만 살펴봐도, 당시 명나라 사신들의 탐욕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알만하다.

  광해군의 국왕 책봉 문제로 조선에 왔던 유용이란 사신은 출발하기 전부터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놓으면 기필코 10만 냥의 은자를 얻으리라." 하고 큰소리 쳤다.  그리고 조선에 와서는, 자신에게 밥을 안 줘도 되니 대신 은을 달라고 했을 정도다.  그렇게 악착같이 은을 요구해서 마침내 6만냥이나 되는 은을 챙겨가는 데 성공했다.

  광해군 아들의 세자 책봉 문제로 왔던 염등이란 사신도 만만치 않았다.  홍수 때문에 다리가 떠내려가서 임진강을 못 건너게 되자, 그에 대한 손해배상금(무슨 손해? -.-;;)으로 은 천냥을 요구하기도 했다.  염등도 조선을 떠날 때 수만 냥을 챙겼는데, 이 때 염등에게 줄 은이 모자라서 조선 조정이 전국의 토지 1결 당 쌀 1말씩 임시세금을 걷었을 정도다. 

 

  이렇게 막대한 은이 명나라로 흘러들어간 것은,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겪고 폐위된 원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노선을 취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거리를 두려 한 것은,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사고 마침내 반정의 빌미가 되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외교문제 말고도, 은의 유출로 인한 재정문제와 민심이반 또한 심각했다.  처음에는 광해군의 책봉이라는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뇌물을 쓴 것인데, 그만 그 일이 선례가 되어 그 후로는 외교현안을 처리할 때마다 은을 뇌물로 주는 게 당연하게 굳어졌다.  이런 상황은 아직 임진왜란의 상흔을 다 떨치지 못한 조정과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 말고도 조선 재정을 바닥나게 만든 일이 또 있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탓인지, 광해군은 왕권강화에 무척 집착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 소실된 궁궐을 줄줄이 재건하는 등 대형토목공사를 여러 건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의 삶이 여전히 힘든데도, 왕권의 존엄함을 보이기 위해 엄청난 재물이 드는 공사를 밀어붙이면서 민심을 잃은 것이다.

 

 

  광해군 시절 외교사안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선군 파병 문제다. 

 

  명나라는 청나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청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는데, 재조지은을 앞세워 조선에게도 파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파병을 피하려고 했지만, 명나라의 압력에 눌리고 조선 조정의 여론에 밀려서 파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명나라를 돕게 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심하전투('사르후전투' 또는 '살리호전투' 라고도 함.)에서 청나라 군대에 투항했다.  

 

  이 부분에 대해, 광해군이 사전에 밀명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있다. 

  즉, 광해군이 어쩔 수 없이 파병을 하면서 강홍립에게 '적당히 싸우다가 기회를 봐서 투항하라.' 고 밀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홍립이 심하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청나라 군대에 몰래 연락을 취해 투항하겠다고 알린 후, 전투가 끝난 후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만일 광해군이 정말로 투항하라고 명령했고 강홍립과 청나라 사이에도 미리 투항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심하전투에서 조선군이 큰 인명손실을 입은 게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15,000명이었는데 심하전투에서 9,000명 가까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즉, 전사자가 생존자보다 훨씬 더 많다.  미리 투항하기로 약속한 상대편을 그렇게 닥치는대로 죽였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저자는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투항한 게 아니라, 상황을 보고(즉, 명나라-조선 연합군이 철저히 패해서 승산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투항한 것으로 본다.  광해군이 투항하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설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해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내놓은 정치공세 비슷하게 본다. 

 

 

  세 번째 부분은 인조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인조반정이 벌어진 직후, 뜻밖에도 명나라는 인조의 즉위에 대해 적대감과 의구심을 드러냈다.

  얼핏 생각하면, 명나라가 인조반정을 두 손 들어 반겼을 것 같다.  명나라 입장에서 보자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한 광해군은 박쥐 같은 사람이고,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반대한다' 는 명분을 내세우는 인조야말로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인조가 왕위를 '찬탈' 했다며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일단 명나라 역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국가였기 때문에, 임금에게 마땅히 충성을 바쳐야 할 신하들이 오히려 임금을 폐위했다는 점에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념적인 이유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아는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지만, 당시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을 '명나라에게 충성하고 순종했다' 고 평가했다.

 

  실제로는 중립외교정책을 펼쳤으면서 명나라 조정이 조선은 명나라 편이라고 믿게 만들만큼, 광해군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군대나 물자를 지원해달라고 요구할 때면, 그 요구를 어떻게든 거절하려 했고, 거절할 수 없으면 지원 수준을 최대한 낮추려고 애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사신을 자주 파견해서 조선이 아직도 임진왜란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 했음을 최대한 어필(!)했다.  즉, 명나라 조정에 '조선도 명나라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하지만 조선의 처지가 너무 어렵다 보니 도저히 도울 수가 없다.' 라는 인식을 심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청나라에 투항했는데도, 명나라는 화를 내기는커녕 조선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명나라에 대해 할 도리를 다 했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심하전투의 패배로 명나라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건만, 조선이 원병을 보낸 것에 대해 상을 주네 마네 하는 논의까지 했다. (물론, 조선에게서 다시 군사 지원을 받으려고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책략이기도 했음.)

 

  그러니 명나라 조정에서 보았을 때, 인조는 '명나라에 충성하는 광해군'(!)을 내쫓은 괘씸한 자였다.

  그런 인조와 반정세력이 내세우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반대한다' 말은 명나라 조정에게는 그저 의심쩍게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조선과 가까운 요동의 관리들에게 조선 상황을 알아보게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아예 장사꾼으로 위장한 첩자를 조선에 투입하기도 하는 등, 조선의 정확한 사정을 알아내려 했다.

 

  결국, 인조가 명나라에게 책봉을 받는데 2년이 걸렸다!

  명나라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외교정책을 펼친 광해군이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친명외교를 내세운 인조나, 명나라에게 인정받는데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인조가 책봉을 받기 위해 명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줘야 했다는 점도, 인조가 내쫓은 광해군과 같았다.  국왕은 광해군에서 인조로 바뀌었지만, 엄청난 양의 은이 명나라로 유출되는 폐단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나중에는 국가가 비축해둔 은만으로는 도무지 뇌물로 줄 액수를 맞출 수가 없어서, 사대부들에게 따로 은을 걷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에게 책봉을 못 받았다는 약점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휘둘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모문룡은 청나라를 치겠다는 구실로, 군대를 이끌고 조선 평안도의 가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와 거의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선 평안도의 백성들을 착취하고 함부로 해치는가 하면, 그런 짓을 말리는 평안도 및 황해도 지방의 수령들을 제멋대로 잡아다가 곤장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려면 모문룡이 주둔한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모문룡은 사신의 통행을 차단하거나 명나라로 보내는 국서의 내용을 트집 잡으면서, 청나라와 싸울 군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조정에게서 재물을 두둑히 뜯어내곤 했다.  인조가 책봉을 받지 못 하는 동안에는, 조선에 머무는 모문룡의 말 한 마디에 명나라와의 관계가 더 틀어질 위험이 있어서, 조선 조정은 모문룡에게 쩔쩔 맬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명배금을 내세우며 집권한 인조는 광해군 시대의 외교정책을 거의 계승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내부에서도 인조 등 반정세력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강해서 역모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고(이 부분은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7) 참조.), 위에 쓴 것처럼 즉위 초기에 명나라와의 관계도 순탄치 못 했기 때문에, 청나라를 적대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조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답습했는데도 병자호란이 터진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것처럼 인조의 친명배금 외교노선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 내부 사정의 변화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병자호란보다 앞서 터진 정묘호란은, 청나라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척박한 북쪽땅에 위치한 청나라는 농산물이나 옷감 같은 생필품을 풍요로운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조달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무역이 끊겨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 대신 조선에게서 각종 물자를 얻어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나라는 명나라는 병합 대상으로 생각했지만(그리고 나중에 정말로 병합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굳이 병합할 의도가 없었다.  다만, 조선에게서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받아내고 두 나라 사이의 무역도 확대하려는 '경제적인 목적' 에서 조선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정묘호란은 청나라가 우세한 전쟁이었는데도, 조선과 청나라가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비.교.적. 괜찮은 조건으로 화의를 맺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또한 정묘호란 후에도 조선은 계속해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36년 청나라가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맺자고 요구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지켜나갔던 중립외교는 파탄이 났다.

 

  1633년, 명나라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청나라로 투항한 사건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투항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 수군을 거느리고 홍이포까지 갖고서 청나라로 갔다.  그 동안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내내 우세했으면서도, 명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승리' 는 거두지 못 했다.  청나라에는 수군이 없다는 점, 그리고 명나라가 홍이포라는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다는 점, 그 두 가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수군과 홍이포가 동시에 청나라 손에 들어온 것이다.  두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하게 되자, 청나라는 명나라와 운명을 가르는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명나라와의 전면전이 결정되면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정책도 온건책에서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그 동안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청나라는 못마땅해 하며 따지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용인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청나라가 조선에게 바라는 가장 큰 것이 경제적인 이득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욕구만 충족된다면 그 밖의 사안은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명나라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청나라 입장에서도 나라의 명운을 통째로 걸어야 할 만큼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중요한 전쟁 중에 불거질지도 모르는 돌발상황을 미리 막을 필요가 있었다.  즉, 후방에서 공격받을 위험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조선을 확실히 복속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는 것에 만족했지만, 이제는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입장에서 보자면,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도무지 수용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동안 청나라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조차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굴욕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줬다.  하지만 친명배금을 명분 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인조와 반정공신들로서는, 청나라와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자기들 스스로 내버리는 짓이었다.

  결국,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갈라설 것을 결정했고, 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까지 이어져오던 중립외교는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후 청나라의 10만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며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그리고 인조는 조선의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 임금에게 무릎 꿇고 항복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의 포인트 

 

  선조-광해군-인조 시대 한중관계의 키워드는 '재조지은' 이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재조지은은 기존의 건전했던(?) 한중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선조-광해군-인조 시대는 각각 재조지은의 형성-변형-복구 시기에 해당한다. 

 

  심하전투(사르후전투 또는 살리호전투)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투항한 것은,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청나라와 최선을 다 해 싸우지 말고 상황을 봐서 청나라에 투항하라고 미리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보다는, 심하전투가 청나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조선군도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게 되자, 강홍립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투항한 것으로 본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조 때의 외교적 태도는 광해군 때의 외교적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것은,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청나라를 적대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입으로만 친명배금을 외쳤을 뿐, 실제로는 청나라에 대해 광해군 시절과 별다를 것 없는 외교적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도 병자호란이 터진 것은, 청나라 사정이 변해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 역시 변했기 때문이다.       

 

 

단만극(2) : 환향 - 쥐불놀이(http://blog.daum.net/jha7791/15791166)

병자호란 최대의 비극 - 피로인, 환향인, 환향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5)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