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관련 책, 유적지, 기타

2014년 공민왕 사당제

Lesley 2014. 12. 6. 00:01

 

  지난 11월에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공민왕 사당에 가서 '2014년 공민왕 사당제' 를 보고 왔다. 

  공민왕 사당은 지난 3월에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사당문이 잠겨 있어서 아쉬운대로 겉모습만 보고 왔다.  매년 음력 10월 1일에 공민왕에게 제사를 지낼 때만 사당을 개방하기 때문이다.  ☞ 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 - 서울에 남아있는 고려왕의 흔적(http://blog.daum.net/jha7791/15791071)

  그래서 올해 공민왕 사당제 때에는, 내 상황이 된다면 다시 가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올해 음력 10월 1일은 양력으로 11월 22일이다.  그래서 11월 들어서부터 마포구청 홈페이지와 마포문화원 홈페이지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리며, 벼르고 별렀다.  그리고... 마침내 꿈은 이루어졌다...! ^0^ 

 

  대망의 11월 22일 아침, 디카와 우산과 지갑을 넣은 백팩을 들쳐메고서 전철역으로 고고씽~~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려서 사진 찍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날씨가 궂으면 공민왕 사당제 구경오려고 했던 사람들이 귀찮다고 집에서 잠을 자거나 TV 보는 것으로 마음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경쟁자들이 줄어드니, 이 아니 좋을쏘냐~~ ♬) 

  우리집 근처 전철역이 6호선인데, 마침 공민왕 사당 근처 전철역인 광흥창역도 6호선이다.  전철을 한 번도 갈아타지 않고 갈 수 있는 게 편리해서 좋기도 했지만, 공민왕 사당과 나 사이에 뭔가 운명(?) 같은 게 느껴져서 괜히 뿌듯했다. (별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 ^^;;)

 

 

왼쪽에 보이는 형광색 조끼 입은 사람들은 자원봉사자.

(절반은 봉사활동 점수 따러 온 고등학생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이 동네에서 오래 사신 듯한 아줌마나 아저씨.)

 

  제사는 11시부터 시작한다는데, 너무 서둘렀는지 10시 좀 넘어 공민왕 사당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을 떠날 때만 해도 부슬비 정도였던 비가 제법 굵직해졌다.  자원봉사자들이 비를 피해서 사당과 광흥당 바깥에 있는 지붕(벤치 위에 정자처럼 설치한 지붕)에 모여 있기에, 좀 어색하지만 나도 함께 끼여 섰다. ^^;;

  점점 굵어지는 비를 보니, 한 손으로 우산 쓰고 다른 한 손으로 사진 찍을 생각에 난감해졌다.  부슬비 정도라면 입고 있던 야상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면 그만이지만,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옆에 선 자원봉사자들도 "어제까지 멀쩡했던 날씨가 왜 하필 오늘은 이 모양이냐?", "문방구에서 우비 팔텐데 거기 가서 사오자." 등등 한 마디씩 하며 걱정스레 하늘을 쳐다봤다. 

 

 

  자원봉사자들 옆에서 30분 정도 있었는데, 그 분들이 하는 이야기 듣는 재미가 무척이나 쏠쏠했다.

 

  먼저 어떤 아줌마와 아저씨의 100분 토론...!

  60세 정도로 보이는 자원봉사자 아줌마가 진행요원이라는 표찰을 목에 건 50세 전후의 아저씨에게 말씀하셨다.  전에는 공민왕 사당 바로 옆에 있는 쌍용 예가 아파트 자리에 큰 샘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그 샘물을 마시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제사 지낼 때도 그 물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그런 유서 깊은 샘을 메워버렸다면서, 정부가 이렇게 문화유산에 무관심해서야 되겠느냐고 한바탕 성토를 하셨다. (아쉽다, 그 샘물이 지금까지 남아있었으면 좋았을텐데... ㅠ.ㅠ)  거기까지는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셨는데...

  아줌마의 이야기가 샘물을 넘어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에 미치면서, 아줌마와 아저씨 사이에 100분 토론 시작!  아줌마는 아파트 짓는다고 100년, 200년 된 나무를 자르는 것을 허락한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셨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 시절 건축법에는 그런 나무를 보호하게 되어 있지도 않았고, 또 나무가 있던 자리가 사유지인데 정부가 뭘 어쩌겠느냐며, 정부가 사유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셨다.  아줌마는 그게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이냐며 흥분하시고... ^^ 

 

  그리고 공민왕의 죽음에 대해 자원봉사자들이 한 마디씩 얘기하는 것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줌마와 토론 벌였던 아저씨에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자원봉사자가 "공민왕이라는 왕이 노국공주하고 사랑했다는 그 왕 맞죠?"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저씨 왈 "네, 그 양반이 대단한 왕이었는데, 노국공주가 죽고서 너무 슬프게 돌아가셨어요.  독살당했다든가..." (공민왕 독살설! @.@)  이번에는 내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독살은 무슨...  나라 지키려고 일본하고 싸우다 돌아가신 거지." (공민왕 전사설! @.@)       

 

 

드디어 사당문이 열렸다...!

 

  행사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았지만, 관계자에게 허락을 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원봉사자들 옆에 계속 서있기가 어색하기도 했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미리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에 왔을 때는 사당문에 커다란 자물통이 걸려 있었는데, 이 날은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제사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자리를 깔고 차일을 펼치는 등 분주했다. 

 

 

사당 벽에 붙은 제관의 명단.

(누가 썼는지 명필이로세~~ ^^)

 

  제관 명단이 멋들어진 서예 솜씨로 붙어있는데, 10명도 넘는 제관 중 왕씨가 하나도 없어서 의외였다.

  공민왕을 모시는 제사니 만큼, 당연히 개성 왕씨 종친회에서도 참석해서 제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회식 때 어떤 분(마포문화원장이었던가, 와우회 회장이었던가)이 하는 축사를 들어보니, 이해가 됐다.  이 사당제가 과거에는 복잡한 격식을 갖춘 제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민왕을 그저 왕이 아닌, 서강 지역을 지키는 신으로 모시는 무속적인 제사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런 격식을 다 따지기 힘들어졌고, 또 단순한 제사라기 보다는 지역 공동체 사람들이 화합하는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고 한다.  어차피 지역 축제라면, 이 지역 주민 중에 왕씨가 있다면 모를까, 굳이 일부러 왕씨 후손들을 찾아다가 참석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행사 막바지 준비로 어수선한 가운데, 예쁜 장면 하나 포착~

(삼태극 문양이 그려진 전등, 그리고 그 전등을 배경으로 보이는 젖은 낙엽들이 내려앉은 기와가 인상적임.)

 

 

나란히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

 

  역시나, 여기에서도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있다.

  종묘의 공민왕 신당에 걸린 영정을 봐도 그렇고, 공민왕의 영정은 다른 왕의 영정과는 다르게 항상 노국공주와 함께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했던 부부라서, 후세인들에게 세트(?)로 묶인 모양이다.  ☞ 종묘(宗廟)(http://blog.daum.net/jha7791/15791076)

 

 

고증면에서는 꽝(!)인 공민왕-노국공주 영정.

 

  깐깐하게 따지고 들자면, 두 영정 모두 사실적인 면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고려시대 왕과 왕비가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있어서 어색하다.  그리고 40대 중반에 세상 떠난 왕과 30대 초반에 세상 떠난 왕비가 너무 나이들어 보인다. (어려운 시절에 왕 노릇 왕비 노릇 하느라고 마음 고생이 심해서, 폭삭 늙어버린 것일까... ㅠ.ㅠ)

  좀 아쉽기는 한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당대에 그린 영정이 아니고 후대에 상상력 발휘해서 그린 영정이다.  게다가 이 사당이 국가에서 설립한 곳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사당이라서, 정확한 고증을 요구하기도 힘들 듯하다. 

 

 

공민왕 왼쪽에는 최영 장군의 영정도 있음.

 

  공민왕 하면 노국공주 말고도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가 또 있으니, 바로 최영 장군...!

  이래저래 최영 장군이 고생이 참 많다.  살아서 공민왕이 명령하는대로 수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 싸운 것으로도 모자라, 죽어서까지 공민왕 곁을 지키고 앉아 호위 임무를 계속 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영 왈 "전하, 부디 소신에게 휴가를 허하여 주시옵소서~~!" ㅠ.ㅠ)

 

 

이 사당 안의 영정 중 가장 뜬금없는 삼총사의 영정.

(아마도 왼쪽부터 공주-왕자-옹주인 듯.)

 

  노국공주 오른쪽에 있는 영정 속 삼총사는, 다름 아닌 '왕자, 공주, 옹주' 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시츄에이션이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영정이다. ^^;;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사당은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세운 사당이다.  그리고 공민왕을 서강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무속 색채가 짙게 깔린 사당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은 깨끗이 무시(?)하는 게 가능했다.  어쩌면, 평생 아이 문제로 마음 고생했던 부부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자녀를 세 명이나 그려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은, 내세에는 아들딸 많이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행복하게 살라는 기원일 수도 있고...   

 

 

(위) 공민왕과 노국공주 영정 앞에 놓인 날고기.

(아래) 최영 영정 앞에 놓인 날고기.

 

  종묘제례나 서원 등의 제사에만 날고기를 올리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라 놀랐다.

  전에 종묘제례 때 날고기를 제수로 쓴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어째서 익힌 고기 대신 날고기를 쓰는지 인터넷을 뒤져봤다.  고대에는 날고기를 일상적으로 먹었는데, 훗날 사람들이 고기를 익혀먹게 되면서 날고기는 특별한 음식으로 취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나라의 임금이나, 임금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자나 맹자 등 유학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의 제삿상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육회처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썰어서 예쁘게 쌓아놓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한 뭉텅이씩 가져다 놓은 것을 보니...  뭔가 좀... ^^;;

 

  그리고 공민왕 부부에게 바친 날고기와 최영 장군에게 바친 날고기의 양이 다른 것을 보니, 사진 찍다 말고 웃음이 나왔다.

  공민왕 부부 영정 앞에는 백과사전 크기는 되는 큼직한 사각형 찬합 3개에 각각 고기가 가득 담겨 있다.  그런데 최영 장군 영정 앞에는 평범한 크기의 제기 위에 고기 한 덩어리만 덩그라니 있을 뿐이다.  궁궐에 가만히 앉아 있는 왕과 왕비보다는, 평생 전쟁터를 뛰어다닌 장군이 더 많은 단백질과 지방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최영 왈 "뭐 어쩌겠어요. 억울하면 장군 나부랭이 말고 임금 해야죠~~" ^^;;)

 

 

공민왕 사당 옆 광흥당에서 연습 끝내고 나온 제관들.

 

  구의회 의원과 문화원 관계자 등이 제관을 맡았다.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데다가 관록이 붙은 인상들이다.  그래서 저렇게 제복을 차려입으니 어지간한 사극 연기자들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 여기서 잠깐!

  이 블로그는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블로그 주인과 그 밖의 모든 출연자(?)들의 얼굴을 가리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하지만 저 분들 얼굴은 어차피 공민왕 사당제 팜플렛에 다 공개되었고, 저 분들 스스로도 사당제에 온 관람객들이 사진 찍을 수 있게 일부러 포즈까지 취해주기도 하셨으니, 그냥 공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관이 많아서 일일이 얼굴 가리려면 시간이 많이 들고 번거롭다는 귀차니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

 

 

사당제를 치르기 위해 제관 행렬이 출발!

 

 

담을 사이에 두고 이편에서 나가자마자 저편에서 바로 유턴~~ ^^

 

  광흥당이 공민왕 사당 바로 옆인데, 광흥당에서 곧장 사당으로 가지 않는다.

  지역 행사인 만큼 사당제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제관들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사당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이 날은 비가 내려서 저 차림으로 우산도 없이 오래 걸을 수는 없으니, 공민왕 사당과 광흥창을 둘러싼 외벽을 따라 걷는 것으로 대신했다. (동네 한 바퀴 걸어야 하는 것을 50미터 정도 걷는 것으로 끝냈으니, 걷는 것 싫어하는 제관은 복 터졌음. ^^)

 

 

출발한지 2분도 안 되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 제관 일행.

(맨 앞에 선 제관들이 든 초롱이 눈길을 끌고...)

 

 

본격적으로 제사 시작!

 

  제관들이 사당 앞마당에서 공민왕 부부의 영정을 향해 큰절 올리는 것으로 사당제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 제관 중 일부가 사당 안으로 들어가 공민왕 부부 영정 양옆으로 시립하고, 나머지 술잔 올릴 제관들은 안마당에 펼쳐놓은 거적 위에 대기하고 섰다.

 

 

 

술잔 올릴 제관들(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분헌관)은 따로 사당 앞 마당에 대기함.

 

 

 

축문 낭독하는 분.

 

  사극에서 축문 읽는 것을 볼 때마다, 밋밋한 한국어를 어떻게 그렇게 운율감 있게 읽을 수 있는 건지 신기하다.

  이 분은 축문만 읽는 게 아니라, 제관들이 그 다음에 취할 절차를 알리는 역할도 맡았다. (즉, 사회자 역할!)  그런데 다른 제관들이 절차를 알려주는 그 말씀을 못 알아듣고 가만히 서서 눈만 꿈뻑인다는 점이 문제... ^^;;  그도 그럴 것이, 온통 어려운 한자어로 된 제사용어를 요즘에는 거의 들을 일이 없으니, 못 알아듣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그 옆에 계신 다른 분이 쉬운 말로 통역(?)을 해주셨다.

 

 

제사 시작 전에는 나무뚜껑으로 덮여있더니, 이제는 뚜껑을 벗고 자태(?)를 드러낸 위패.

 

  노국공주 위패의 글씨가 공민왕 위패의 글씨보다 훨씬 크다.

  공민왕의 위패는, 한정된 공간에 긴 시호를 몽땅 써넣느라 글씨를 작게 써놓아서 잘 안 보인다. (글씨 쓰는 사람도 작게 쓰느라 고생했을 듯...)  노국공주의 위패는 시호를 짧게 줄여 쓴 덕분에 글씨가 큼직한데 말이다.  이 사당 이름이 '공민왕 사당' 인 것만 봐도 분명히 공민왕이 주인공인데, 위패만 보면 공민왕이 조연이고 노국공중가 주연 같다. ^^;;

 

 

제사 중 절반 이상이 제관들이 술잔을 공민왕 부부에게 올리는 절차로 채워짐.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분헌관이 번갈아가며 술잔 올리는 절차를 거행한다.

  요즘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처럼 간단히 술잔을 올리는 게 아니라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한 사람이 술이 담긴 잔을 사당 안으로 옮기고, 사당 안에서 그 술잔 받아다가 제삿상에 올리고, 그러면 초헌관 등이 절을 올린 후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따로 또 절을 하고...  또 절도 일반 가정처럼 2번만 간단하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3번씩 부복하고 평신하는 것을 반복한다.

 

 

제사 지내는 중간에 폰카로 공민왕 영정을 찰칵~!

 

  위의 사진을 보면 한 사람만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이 묘하게 겹쳐져 찍힌 것이다.

  안쪽에 계셔서 사진상으로는 안 보이는 분이 다른 제관들이 무언가 하느라 자신은 한가한 틈을 타서, 스마트폰을 꺼내 공민왕 영정을 찍으셨다.  그러자 그 옆에 계신 다른 분이 스마트폰에 찍힌 사진 함께 보며 평을 해주고 계신... (네, 요즘은 청년이니 노인이니 할 것 없이 폰카가 대세지요~~ ^^)

 

 

음복례를 치르는 모습. (원샷~~!)

 

  이 음복례가 좀 웃겼다.  

  일반 가정의 제사에서 음복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제사 끝무렵에 제사 음식 일부를 가져다가 먹는다.  그런데 술잔이 일반 가정용 제사 때 쓰는 술잔보다 훨씬 커서, 담당 제관이 한 모금만 삼키고 술잔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사회자가 다 마셔야 한다고 해서, 담당 제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전부 마셨다.  주위 사람들이 쿡쿡거리며 웃고... ^^

 

 

양관의 비녀가 양관 뒤쪽에 치우쳐있다는 것을 이 날 처음 알았음.

 

  무심코 내 앞에 보이는 제관의 뒤통수로 시선을 돌렸다가,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사극에서 볼 때에는, 저 기다란 비녀가 양관 한 가운데를 뚫고 있는 줄 알았다.  즉, 저 비녀를 상투 고정용이라고 생각했다. (상투를 꿰뚫는 비녀~~!)  그런데 이번에 실물을 가까이에서 보니, 양관의 뒤쪽으로 쏠려있다.

  그리고 양관 뒤편 한가운데에 세로로 천하태평이라고 써있는 게 인상적이다.

 

 

역시 임금님 제사에 쓰는 제기라 그런가, 모양이 범상치 않음.

(머리에 달린 뿔을 보니, 아마 소 모양인 듯?)  

 

 

제사를 끝내고, 제관들이 사진 찍으려는 주민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줌.

 

  행사시간이 11시부터 2시까지라고 했는데, 제사는 1시간 남짓해서 끝났다.

  행사 앞부분은 몇몇 지역 관계자들의 축사가 있었고, 실제 제사는 11시 20분 경에 시작해서 12시 20분 정도까지 계속 되었다.  그 다음에 제관들이나 그 밖의 관계자들이 따로 뒤풀이 비슷하게 부녀회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제사 끝나는 것까지만 보고, 공민왕 사당을 떠났음.) 

 

 

 

◎ 전체적인 느낌 및 아쉬운 점

 

  날씨가 궂어서 좀 그랬지만, 알차고 보람있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공민왕 또는 공민왕을 포함한 고려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려 수도 개성이 북한에 있어서 고려 관련 유적을 별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 사당에서 벌어지는 사당제는 그냥 지나치기에 무척 아까운 행사다.

  그리고 지역 전통행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구청 및 문화원 관계자, 부녀회 관계자, 자원봉사차 온 학생들이 뒤섞여 열심히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마을 주민들이 줄줄이 구경나온 것을 보니, 말 그대로 지역주민 화합의 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홍보면에서는 많이 미숙한 편이었다.

  행사 이틀 전까지도 마포문화원 홈페이지에는 '11월 22일 토요일에 공민왕 사당제를 한다' 고만 띄어놓았을 뿐, 구체적인 시간 및 장소는 나중에 공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포구청 홈페이지에는 올해 공민왕 사당제에 대해 아예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결국 두 기관의 홈페이지 들락거리다가 못 참고 마포문화원에 전화를 했더니, 행사 시작 시간이 11시로 정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자세한 시간 및 장소는 추후공지' 라고만 떴다.

  행사 하루 전에야 마포구 블로그에 행사시간이 올라왔지만, 그래도 마포문화원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자세한 시간 및 장소는 추후공지' 상태였다. (혹시 '초지일관' 이란 사자성어가 이런 때 쓰라고 만든 건가요? -.-;;)  그리고 이 포스트를 쓰는 때가 공민왕 사당제가 끝나고 열흘이 다 되어가는 11월 말인데, 지금까지도 '자세한 시간 및 장소는 추후공지' 라고 나온다. (여보슈, 마포문화원 양반!  올해 공민왕 사당제 벌써 끝났거든요? -.-;;) 




 

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 - 서울에 남아있는 고려왕의 흔적(http://blog.daum.net/jha7791/15791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