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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顯宗) (中) - 강조의 정변 / 거란의 제2차 침입

Lesley 2014. 6. 12. 00:01

 

 

4. 즉위 - 정변으로 인한 갑작스런 왕위 계승

 

 

  1009년에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키면서, 목종과 현종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은 폐위되었고, 현종은 18세의 나이로 고려 제8대 왕으로 즉위했다.

 

  목종은 종묘사직이 왕씨에게서 김씨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현종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김치양 일파에 맞설 수가 없어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강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강조는 고려 초기 유력한 호족이었던 신천 강씨 집안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 당시에는 도순검사 직위를 맡아 많은 군사를 이끌고 서북지방(평안도 지역)에 나가 있었다.  목종은 강조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개경으로 병력을 끌고와서 자신을 호위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고려사에 의하면, 목종이 강조에게 도움을 받으려 한 일이 묘하게 꼬이면서 전혀 엉뚱한 결과로 치닫게 되었다.

 

  강조는 목종의 명령대로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가던 중, 예전에 조정에서 쫓겨난 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조정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조정을 원망하고 있어서 강조에게 거짓말을 했다.  즉, 목종이 매우 위독한 상태인 것을 틈타서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역모를 꾀했는데, 군대를 이끌고 있는 강조가 자신들에게 대항할까 걱정이 되어 왕명을 사칭해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강조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경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군대를 돌려 서북면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에는 강조의 아버지가 강조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목종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역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어서 나라를 바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조가 다시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가던 중에, 목종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왕명 없이 군사를 일으킨 모양새가 되어 고민을 하는데, 부하들이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멈출 수 없다고 주장하자 부하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개경으로 진격해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개경의 궁궐로 맞아들여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고려사에 나오는 강조의 정변에 관한 설명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우선, 강조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람들의 의도가 불명확하다.

  조정에 원한을 품었다는 게, 당시의 임금인 목종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건지, 아니면 권력을 쥐고 있던 천추태후-김치양 일파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건지,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조정에 원한을 품은 것과 강조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강조가 첫 번째 출병을 했다가 조정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말만 듣고 회군했다는 것도 석연찮다. 

  강조는 강력한 호족 집안 출신인데다가 정변을 성공시켰을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고, 목종의 밀명을 받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김치양과 대항하려고 개경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 강조의 위상과 강조가 처한 상황을 보면, 강조에게도 틀림없이 여러 정보원이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교류하던 정계나 군부의 실력자들도 있었을테고, 여기저기에 풀어놓은 첩자들도 있었을테고...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 또는 군사행동을 하려는 지휘관에게는, 정보가 매우 중요하니 말이다.

  그런데 왕의 안위와 정권의 향방 같은 중대사에 관하여, 그렇게 간단히 속아서 병력을 쉽게 돌리다니...  이것은 너무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목종이 죽었다고 믿고 두번째 출병을 감행했다가, 목종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오히려 목종을 폐위해버렸다는 부분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고려사의 기록만 본다면, 왕명 없이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셈이 되었으니 반역자로 몰릴까봐 두려워서, 할 수 없이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켰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미 전에 목종의 밀명(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서 김치양으로부터 목종을 지키라는 밀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도 강조의 두번째 출병이 반란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그렇게 높았을지 의문이다.  

  물론 강조의 거병이 실패했다면, 목종이 김치양의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강조를 희생양으로 삼아 '강조가 단독으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 라고 발뺌했을 수도 있다.  정치란 그만큼 비정한 것이니까...  하지만 결국 거병은 성공했다.  목종의 밀명을 받아서 김치양의 무리를 제거했다고 말하면, 거사의 정당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그리고 강조는 간신을 몰아내고 임금을 지킨 충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을 불러들였던 목종을 폐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샀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래서 강조의 정변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다.

 

  우선, 강조가 처음부터 정변을 일으킬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강조의 행동과 결국 목종을 폐위시킨 결과를 보았을 때, 강조가 처음부터 역심을 품고 움직였다는 것이다.  즉, 조정이 천추태후-김치양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혼란한 것을 보고, 만만찮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강조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런데 마침 목종이 개경으로 군대를 끌고와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하자,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처음에는 신라계 세력이 강조를 끌어들였는데, 강조가 신라계 세력의 통제범위를 넘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에 의하면, 천추태후-김치양 지지파는 황주(黃州, 현재의 황해도 황주로, 천추태후를 키워준 할머니 신정왕후의 친정)와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 등 북방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 세력이었고, 반대파는 동경(東京, 현재의 경주로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 왕욱의 외가)를 기반으로 하는 옛 신라계 세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라계 세력이 자기네 핏줄을 이은 현종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강조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강조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서 신라계 세력의 행동대장 노릇이나 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신라계 세력의 원래 목적은 '김치양 무리를 없애고 현종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는 것' 이었지만, 강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목종을 폐위시켜버리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그래야 자신이 신라계 세력이 짜놓은 판에 뒤늦게 끼여들어 한 자리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주도하는 주인공이 되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신라계 세력은 강조를 엄청나게 과소평가했다가 뒤통수 제대로 맞은 셈이다.

 

 

 

5. 목종의 피살 - 현종의 정통성 문제

 

 

  어쨌거나 정권을 탈취한 강조는 곧 숙청 작업에 나섰다.

  먼저 김치양과 그 무리들을 죽였다.  이 때, 김치양과 천추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과 목종의 동성애 상대였던 유행간도 살해당했다. 

  다음은 목종 차례였다.  하지만 그래도 목종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이었던 사람이라서, 세상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당장 죽일 수는 없었다.  일단은 목종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 '나라를 양보한 사람' 이라는 뜻임 -.-;;)으로 봉하고, 천추태후와 함께 궁 밖으로 내보냈다.

 

  폐위된 목종은 남은 생을 조용히 보내겠다며 어머니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떠났다.

  충주로 내려가는 여정은 여러가지로 처량했다.  강조에게 타고 갈 말을 내달라고 요청했더니 달랑 한 마리만 보내줬다. (목종 보고 걸어가라는 건지, 아니면 천추태후 보고 걸어가라는 건지...)  그래서 할 수 없이 민가에서 따로 한 마리를 더 구해야했다.  그런가 하면 노자도 없었는지, 목종이 입었던 옷을 벗어 음식과 바꿔야 할 정도였다.  아무리 쫓겨난 왕이라지만, 교통편이나 여행비 등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도 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 와중에도 목종은, 자신이 그런 신세가 된 이유 중 하나인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목종은 왕자로 태어나 자라서 왕으로 살았기 때문에, 시중받는 것에만 익숙할 뿐 시중드는 법은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천추태후가 밥을 먹겠다고 하면 목종이 직접 그릇을 받들어 시중을 들었고, 천추태후가 말을 타려고 하면 고삐를 잡아주었다고 하니, 대단한 효자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목종은 목적지인 충주 근처에도 가지 못 했다.

  목종 일행이 적성현(積城縣, 현재의 경기도 연천)까지 갔을 때, 강조가 보낸 자들이 쫓아와서 목종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강조가 보낸 자들은 처음에는 목종에게 독약을 주면서 마시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목종이 그 독약을 거부하자 그 날 밤에 목종을 살해했다.  강조가 그 자들에게, 만약 목종이 순순히 독약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면 죽여버린 후에 조정에는 자살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목종이 자기 목을 칼로 찔러 자살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갔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목종의 목을 칼로 찌르는 방법으로 살해했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김치양의 전횡으로 제대로 된 임금 노릇을 못 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목종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목종은 죽은 후에도 수모를 겪었다.

  목종을 살해한 자들은 문짝을 뜯어내 대충 만든 관 속에 목종의 시신을 안치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모시던 왕이었는데, 너무 매정하고 잔인한 처사였다.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잃은 천추태후가 고향인 황주로 돌아간 후, 목종의 시신은 적성 근처에 묻혔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은 나중에 거란(요나라)에서 목종의 피살에 대해 따졌을 때에야 목종이 자살한 게 아니라 피살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목종 피살 사건에 대해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고 한다.  즉, 목종의 불행한 최후는 조정 뿐 아니라 민간에까지 다 소문나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다른 나라인 거란에서조차 목종이 강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명색이 고려의 임금인 현종 혼자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현종 역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 속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사람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난 목종이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는, 현종 스스로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목종이 살해된 일에 현종이 얼마만큼이나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의 아니게 목종의 왕위를 빼앗은 셈이 되었으니, 이왕 원수지간이 된 이상 자신도 살아야겠기에 목종 살해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을 수도 있다.  혹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죽이려 했을 때 목종은 자신을 보호해주려 애썼으니, 자신도 목종의 목숨만큼은 지켜주고 싶었지만, 강조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탓에 살리지 못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강조의 위세에 눌려 찬성이니 반대니 아무런 의사 표명을 못 하고, 목종이 살해당하는 것을 묵인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목종의 피살은 현종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었다.

  현종의 왕위 승계에 정통성 문제가 불거졌다는 것은 참 얄궂은 일이다.  원래는 현종이야말로 가장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 후보자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목종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있는 왕족 중 태조의 혈통을 가장 많이 이어받고 목종과 가장 가까운 왕족이 현종이었다.  그리고 목종 스스로도 현종을 자기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렇게 가장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 후보자였던 현종이, 이제는 반역자에게 옹립된 정통성에 문제 있는 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당시 고려의 민심은 강조와 현종에게 적대적이었다.  사람들은 쫓겨났다가 살해당한 목종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정변을 주도한 강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강조의 손에 얼떨결에 즉위한 현종에게까지 반감을 보였다. (이런 민심의 동향이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는, 아래에 나옴.)

 

 

 

6. 거란(요나라)의 제2차 침입 - 강조의 죽음 / 개경의 함락

 

 

  그렇잖아도 정변으로 왕이 바뀌어 모든 게 어수선하기만 한 상황에서, 전쟁의 조짐까지 보였다.

  거란(요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신하인 강조가 임금인 목종을 죽인 죄를 따졌다.  물론, 거란 조정에서 남의 나라 왕이 피살된 일에 정말로 슬퍼하고 분노한 나머지, 대신 원수를 갚아주려 그랬을 리는 없다. -.-;;  원래 고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참이었는데 마침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자, 그 일을 고려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 뿐이다.

 

  고려는 성종이 다스리던 993년에 이미 거란의 제1차 침입을 겪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거란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했다.  조정 대신 중 거란과 맞서 싸우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항복론과 할지론(고려의 영토 중 북부지역을 거란에게 떼어주고 거란을 달래서 전쟁을 끝내자는 주장)만 놓고 논쟁을 벌일만큼, 모두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다. 

  다행히 탁월한 외교 능력을 갖춘 서희(徐熙)가 항복론과 할지론 모두 안 된다고 주장하며, 직접 거란 군대로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서희 덕분에 거란 군대가 침략을 중지하고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고려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까지 획득했다! (어쩌면 서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관인지도... ^^) 

 

 

  그런데 현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010년 11월에 거란이 제2차 침입에 나선 것이다.

 

  제2차 침입 때의 거란의 태도를 보면, 제1차 침입 때와는 달리 끝장을 보겠다는 기세였다.

  40만명의 거란군을 이끌고 온 사람은, 거란의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거란의 황제인 성종(고려 성종과 헷갈리면 안 됨. ^^;;)이었다.

 

  거란이 겉으로 내세운 침략의 명분은 목종을 살해한 강조를 징벌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첫째, 제1차 침입 때 고려가 차지하게 된 강동 6주가 두 나라 사이에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에, 강동 6주를 빼앗으려 했다.  둘째, 고려가 거란의 적인 송나라와 비밀리에 교류하는 것을 알고,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으려 했다.

 

  강조가 3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북 지역으로 나가서 거란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해서 포로가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막상 강조를 포로로 잡게 되자 자신의 신하가 되라며 회유했다.  그러나 강조는 잔인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거란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절하다가, 결국에는 처형당했다.  강조가 목종은 배신했어도 최소한 고려는 배신하지 않은 셈이다.

  고려 최고의 권력자로 떠올랐던 강조는, 그 막강한 권력을 잡은지 겨우 2년도 안 되어 그렇게 살해되었다.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왕까지 바꾸고 많은 이들에게 욕을 먹었나 생각하면, 참 허무한 일이다. 

 

  어쨌거나 강조의 패전으로 고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강조가 이끌던 30만명의 군사가 고려의 주력군이었는데, 그 주력군이 거란군에게 패하면서 고려 서북지역은 사실상 그대로 뚫려버렸다.  서북 여러 지역의 지방군들이 분투했지만 남하하는 거란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거란군은 전쟁을 빨리 끝낼 생각으로, 어지간한 지역은 공격하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치면서 매우 빠르게 개경 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서북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서경(현재의 평양)에서 거란군에게 패전했다는 소식은, 고려 조정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 때처럼 고려 조정은 또 다시 항복론으로 들끓게 되었다.

 

  오직 강감찬(姜邯贊) 한 사람만, 일단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당장의 위기를 피한 후에 전열을 정비해서 거란과 싸우자고 주장했다. 

  다행히 강감찬의 주장대로 항복하지 않고 피난을 떠나기로 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일 그 때 다수의 의견대로 고려가 거란에 항복해버렸으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어쩌면 지금 우리의 국적은 한국이 아닌 중국이 되었을 수도 있다. -.-;;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렸을 12월 28일, 현종은 두 왕후와 겨우 50명 정도의 호위군사, 그리고 역시 얼마 안 되는 신하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 일행이 개경을 떠나고 사흘만에, 개경은 거란군에게 점령당했다. 

  고려가 건국된 이래 이런저런 전쟁을 겪었지만, 수도인 개경이 외적에게 함락된 것은 처음 겪는 참사였다.  공교롭게도 거란군이 개경으로 들어오던 날이 현종 2년(서기로는 1011년)의 정월 초하루, 즉 설날이었다.  새해를 맞아 한창 흥겨워야 할 설날에, 거란군이 불을 지른 탓에 개경의 궁궐과 태묘와 민가가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7. 피난 (1) - 현종을 따르지 않는 신하와 백성

 

 

  현종의 피난길은 유독 다사다난했다.

  원래도 피난이라는 것은 힘들고 우울한 일이다.  또 우리 역사 속에서 현종 말고도 여러 임금이 피난살이를 경험했다.  그런데 거란의 제2차 칩입 때 현종이 겪은 피난은, 다른 시대 다른 임금들의 피난과 비교했을 때 유별나게 비참하고 위험한 일이 많았다.

  우리 역사 기록 중 조선시대의 기록이 가장 많고 자세하며, 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가장 많다.  그러다 보니,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을 때와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을 때의 상황이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조선시대 선조와 인조의 피난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일이었던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그런 선조나 인조조차, 고려 현종에 비하면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제법 위엄을 갖춘 편안한(?) 피난생활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많은 신하들이 현종을 호종할 생각은 안 하고 각자의 안위만 챙기며 도망쳐버렸다.

  현종이 개경을 출발할 때, 조정의 그 많은 신하 중 겨우 10명 정도가 따라갔던 모양이다.  그나마 피난길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서 그 얼마 안 되던 사람들도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현종의 곁을 지킨 신하는 지채문(智蔡文)채충순(蔡忠順) 등 몇 명 되지 않았다. 

 

 

  이렇게 신하들이 현종을 나몰라라 한 것은, 현종의 정통성 문제와 취약한 권력 기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자기 자신부터 챙기게 되는 인간의 본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임진왜란 때의 선조나 병자호란 때의 인조와 비교해봐도 현종의 상황은 유별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니 신하들이 그저 자기 목숨 챙기느라 현종을 나 몰라라 한 것 보다는, 현종의 정통성과 권력기반이 허약했던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현종이 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했기에, 상당수 신하들이 마음 속으로는 현종을 제대로 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나마 그 정변이 현종 스스로 주도한 것이었다면, 현종이 권력을 장악해서 억지로라도 신하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반정을 앞장서서 이끄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의 인조처럼 반정에 직접 참여하기라도 했다면, 어느 정도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강조가 정변을 성공시킨 후에 그저 '모셔온' 왕이었을 뿐이다.

 

  신하들 눈에 현종이 믿음직해 보였을 리 없다.

  현종 대신 정권을 잡았던 강조가 거란군에게 잡혀죽었고, 현종은 강조가 쥐었던 정권을 장악할 틈도 없이 허겁지겁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즉, 현종은 강조라는 강력한 보호자도 잃었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권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하들은 허수아비 같은 왕과 함께 피난을 가봤자 온갖 고생만 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신하들의 생각이 상당 부분 옳기도 했던 것이, 현종은 피난길에 온갖 고생과 수모를 다 겪었다.  다행히 비참한 결말을 피했을 뿐...

  그리고 참 얄궂게도, 피난길 내내 현종을 위협한 자들은 침략군인 거란군이 아니라 '고려 내부의 적' 이었다.  현종을 제대로 된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조정 신하 뿐 아니라 지방 호족이나 백성 중에도 많았던 것이다.

 

 

 

8. 피난 (2) - 피난 초기에 벌어진 여러 사건

 

 

  피난 동안 있었던 일이 너무 많아, 여기에 일일이 다 쓰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피난 초기에 있었던 일만 소개하려고 한다.  사실, 초기에 벌어진 일만 소개해도 너무나 파란만장하다. -.-;;  그리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군은 피했지만, 정작 고려인들에게 공격을 당한 일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조선의 선조나 인조도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일로 민심을 잃었지만 기껏해야 욕을 잔뜩 듣거나 돌팔매나 당한 정도였지, 현종 만큼 큰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았다.

 

  피난 첫날 적성현(積城縣, 현재의 경기도 연천)의 단조역(丹棗驛) 지나면서, 처음으로 그런 내부의 위협에 부딪쳤다.

  군졸과 역인(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신분상 평민이지만 사실상 천민 대우를 받았음.)들이 활을 쏘며 현종 일행을 공격했다.  그러자 지채문(위에 쓴대로, 채충순과 함께 피난 내내 현종의 곁을 지킨 신하)이 나서서 그들에 맞서 활을 쏘며 현종을 보호했다.

  그런데 적성이란 지역이 공교롭게도 목종이 살해당한 곳이다...!  군졸이나 역인 같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감히 왕을 공격할 정도였으니, 적성의 민심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목종이 살해되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들었던 적성 사람들이, 현종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지채문의 활약으로 무사히 적성현 단조역을 통과해서, 피난 첫날 오후창화현(昌化縣, 현재의 경기도 양주)까지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떤 향리가 왕을 위협하는 일이 벌어졌다. (향리라고 해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의 아전을 생각하면 안 됨. 이 시절의 향리는 전보다는 권력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지방의 유력자였던 호족을 말함.)  그런데 그 이유가 정말 황당하다.  그 향리가 현종에게 자기 이름과 얼굴을 아느냐고 물었는데 현종이 못 들은 척 하자, 그 향리가 화를 내며 현종을 위협한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현종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못 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있다.

  창화는 현종이 강제로 승려 생활을 했던 삼각산(현재의 서울 은평구)과 바로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그 향리를 비롯한 창화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현종의 '별볼 일 없던 시절' 을 뻔히 알기에, 왕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창화는 목종이 살해당한 적성과도 무척 가까운 지역이니, 그 곳 민심 역시 목종에 대해 동정적이고 현종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을 것이라 한다. 

  래서 전에 승려로 살던 현종을 만난 적이 있던 향리가, 감히 먼저 현종에게 아는 척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너 같은 게 무슨 왕이냐?' 또는 '네가 감히 우리 왕을 내쫓아 죽였단 말이냐?' 식으로 시비를 걸기 위해서였을 것임.)  그러자 현종은 그런 불경함에 기분도 상하고 자신의 비참했던 시절을 아는 이와 대화하기도 싫어서 못 들은 척 했고, 그렇잖아도 현종을 우습게(또는 괘씸하게) 여겼던 향리가 발끈해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의견이 맞다면...  적성, 삼각산, 창화 일대의 사람들 눈에는, 현종은 하늘 같은 임금님이 아니었다.  그저 강조의 정변이라는 로또에 당첨되어 인생역전에 성공했을 뿐인 벼락출세자, 또는 가엾은 목종의 왕위를 빼앗인 천하의 나쁜 놈이였던 셈이다.

 

  하지만 해가 져서 더 움직일 수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창화의 향리에게 그 수모를 겪고도 피난 첫날 밤을 창화현에서 그대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밤 내내 적들이 들이닥치는 등 위협이 끊이지를 않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적' 이란 거란군이 아니라, 창화의 향리가 이끄는 무리 또는 그에 동조하는 무리였다.  그렇잖아도 오후에 그 향리가 위협할 때 현종을 호종하던 신하 중 여러 명이 도망쳤다.  그런데 밤에 또 다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나마 얼마 안 남은 사람들도 신하니 궁녀니 할 것 없이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도망쳤던 사람들 중 몇 명은 다음 날 변명을 늘어놓으며 다시 돌아오기는 했음. -.-;;) 

  그래서 현종 옆에는 현종의 왕후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지채문과 채충순 외 너덧 명의 신하, 두 명의 시녀만 남았다.  지채문이 밤새 왔다갔다 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한 덕분에, 겨우 그 밤을 무사히 넘겼다.

 

  피난 둘째날인 다음 날 새벽에 도봉사(道峯寺, 현재 서울 도봉산에 있는 도봉사)로 적들을 피해 몰래 옮겨갔다.

  그런 후에 지채문이 상황을 살펴보겠다며 도봉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현종은 지채문마저 도망쳐버릴까봐 두려워하며 못 나가게 했다.  지채문이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필시 저를 죽일 것입니다." 라고 맹세하자, 현종은 그제서야 지채문이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나중에 지채문이 돌아오자 현종이 무척 기뻐하며 문 밖까지 직접 나가 맞이했다고 하니, 현종은 지채문이 나가는 것을 허락하고 나서도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무척이나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한 나라의 왕이란 사람이 신하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칠까봐 두려워하다니, 정말 처량하다 못 해 비참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럴만도 한 것이, 피난 떠나기 전에도 피난을 떠난 후에도 많은 신하들이 도망쳐버렸다.  게다가 피난 첫날 터진 여러 번의 위험을 모두 지채문 덕분에 넘겼으니, 현종은 자기 곁에 남은 몇 안 되는 신하 중에서 지채문만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개경이 거란군에게 짓밟혔던 피난 셋째날에 광주(廣州 : 현재의 경기도 광주)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아서 혼란한 와중에 헤어진 건지, 아니면 만일을 대비해서 일행을 두 패로 나누어 따로 움직이다가 그렇게 된 건지, 그만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도 지채문이 나서서 두 왕후를 찾아왔다. (피난 내내 문제가 터질 때마다 지채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음!)  현종이 왕후들을 찾고 기뻐하며 왕후를 위해 사흘 동안 광주에 머물렀다는 것으로 봐서, 두 왕후가 험한 피난길에 지쳐 많이 힘들어했던 것 같다. 

  참고로,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는 이복자매 사이로, 두 사람 모두 현종의 유년기 때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던 성종의 딸들이다.  즉, 현종의 부계로 따지면 현종에게 5촌 조카딸(사촌형의 딸들이니까)이 되고, 현종의 모계로 따지면 현종의 내외종 누이(외삼촌의 딸들이니까)가 된다.  궁 안에서 공주로서, 왕후로서 편히 살았던 두 사람에게 피난길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원정왕후는 이 때 하필이면 임신 중이었다...! 

  거란군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 급한 피난길인데도 광주에서 사흘간이나 머물기로 결정한 것은, 어쩌면 임신한 원정왕후의 몸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피난 행렬이 공주(公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까지 내려갔을 때, 공주에서 원정왕후의 외가인 선주(善州,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 및 구미)까지 가깝다면서 현종은 원정왕후를 선주로 보냈다.  임신한 원정왕후를 데리고 계속해서 여기저기 떠도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전에도 두 왕후를 떠나보내자는 논의가 있었다.

  공주에까지 가기 전 양성현(陽城縣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에 도착했을 때, 유종(柳宗)과 김응인(金應仁)이라는 신하들이 두 왕후를 각자의 고향(여기에서 고향은 외가를 말함.)으로 보내자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채문이 "(전략)...진실로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왕후를 버리고 살 길을 찾는 짓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대성통곡까지 하는 등 격렬히 반대했다.  현종 역시 지채문의 말이 옳다며 왕후들을 떠나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유종과 김응인이 왕후들을 떠나보내자는 의견을 내놓았던 게, 왕후들을 걱정해서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급한 피난길에 몸이 약하고 임신한 사람까지 있는 여자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귀찮은 짐덩어리를 떼어놓자는 심보였던 것 같다. -.-;;  만일 정말로 두 왕후를 위해서 떠나보내려 했다면, 더구나 원정왕후가 임신해서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함께 피난 떠난 사람들 모두가 뻔히 알고 있었을텐데, 지채문이 대성통곡까지 하면서 반대했을 리가 없다.

  다른 신하들이 현종을 버리고 도망칠 때 끝까지 현종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만 봐도, 지채문은 무척 충성스런 신하이며 의리를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왕후를 버리고 살 길을 찾는 짓을 차마 할 수 없다' 고, 즉 나머지 사람들만 살자고 피난길을 서두르기 위해 두 왕후를 버릴 수는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채문은 현종이 아직 조정 대신, 호족,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왕으로 인정 못 받는 처지인 점도 고려했던 것 같다.

  그렇잖아도 목종이 살해당한 일 때문에, 민심은 현종에게 비우호적이었다.  그런데 현종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 왕후를 내버리고 떠났다는 식으로 소문이 난다면, 민심이 더 싸늘하게 변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진실로 인의에 따라 행동하여 민심을 수습해야 할 때' 라고 하며, 당장의 위기만 생각하지 말고 훗날의 일을 내다보며 사람의 도리를 지켜 민심을 끌어모아보자고 현종에게 간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왕후들을 떠나보내자는 의견을 냈던 유종과 김응부, 이 두 사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정말 구차하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 일행이 천안부(天安府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이 나머지 일행보다 미리 가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놓겠다고 했다.  그렇게 먼저 떠난 두 사람은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0-;;  그 후로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 중의 혼란함 속에서 살해당했거나 굶어죽었거나, 혹은 살아남았더라도 왕을 버리고 도망치는 중죄를 지어서 감히 세상에 나오지 못 했던 모양이다.

  그런 두 사람의 마지막 행적을 봐도, 두 왕후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두 왕후를 외가로 떠나보내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그 후에도 현종 일행은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리고 전해 12월 28일에 떠났던 개경에, 거란군이 철수한 뒤인 2월 23일에야 돌아갈 수 있었다.

 

  고려는 거란에게 화친을 청했고, 거란 또한 고려의 요청에 응했다.

  얼핏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거란군이 이미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킨 마당에, 그대로 고려를 더 밀어붙여서 항복을 받아내지 않고 화친 요청에 순순히 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거란군도 전쟁을 계속 할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거란이 개성을 점령했을 때 현종을 포로로 잡았더라면, 원했던대로 고려에게 항복을 받고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이 이미 남쪽으로 피난을 가버려서 장기전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거란군은 개경을 하루라도 빨리 점령할 욕심에, 고려 서북지방의 주요거점을 일일이 점령하지 않고 곧장 개경으로 진격했다.  고려의 주력군은 이미 격파했다지만, 서북지방 여기저기에서 고려의 지방군이 끈질기게 기습전을 펼치고 있었다.  시간을 너무 끈다면, 서북지방의 고려군들이 결집해서 거란군이 내려왔던 길을 막고, 전라도로 피난간 현종도 그 곳에서 군대를 모아 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거란군은 고려 한복판에서 남북으로 협공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거란군을 하루 빨리 철수시키려는 고려의 상황과, 고려에서 고립되는 상황은 피하려는 거란의 상황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화친이 성사되고 거란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거란의 제2차 칩입이 종결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우선, 거란과 화친 교섭을 맡아 전쟁을 끝내는데 큰 공을 세운 하공진(河拱辰)이 있다.

  하공진은 화친을 성사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돌아오지 못 했다.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억류되어 거란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거란에서는 하공진을 후하게 대접해주며 회유했는데, 하공진은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하면서 고려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거란에서는 하공진의 충성심과 절개를 높이 사서 계속 설득했지만, 하공진이 완강히 거부하자 결국에는 죽여버렸다.  고려사에는 거란인들이 하공진을 죽인 후 간(!)과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양규(楊規)김숙흥(金叔興) 역시, 무능한 조정 대신들과는 달리 나라를 위해 행동으로 나섰던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서북 지역을 방어하던 중에, 철수하던 거란군을 얼마 안 되는 군사로 여러 차례 습격했다.  이미 두 나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는데 어째서 거란군을 공격했나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당시 수많은 고려인이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중앙에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몇 번이나 기습전을 벌이며 활약해서, 3만명이 넘는 고려 백성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많은 백성을 구하고, 결국 두 사람은 장렬히 전사했다.

 

 

고려 현종(顯宗) (上) - 우리 역사상 유일한 사생아 출신 왕(http://blog.daum.net/jha7791/15791050)

고려 현종(顯宗) (下) - 김훈, 최질의 난 / 거란의 제3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