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관련 책, 유적지, 기타

김이령의 '왕은 사랑한다' - 보기 드문 충선왕 관련 소설

Lesley 2014. 1. 30. 00:01

 

1. 충선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드라마화 될 예정!

 

 

  작년에 원 간섭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그 책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 '왜 지금까지 충선왕의 일생을 다룬 역사소설이나 사극은 없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충선왕은 한 개인으로서도 그렇고 한 나라의 왕으로서도 그렇고,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소설이나 사극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딱 맞는 인물로 보인다.  그래서 충선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나 사극이 없다는 점에 의아함과 함께 안타까움도 느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충선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2011년에 이미 나왔다...! @.@

  어떤 네티즌이 위에 언급한 포스트에 댓글을 달아 알려줬는데,  '김이령' 이라는 작가가 쓴 '왕은 사랑한다' 는 소설이다.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와 인터넷 포털에 뜨는 다른 사람들의 평을 대강 훑어 보니, 내가 몰랐을 뿐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읽은 소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판권이 팔렸기 때문에, 언젠가는 TV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증 따위는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려버리는 요즘 사극을 보면, 벌써부터 어떤 망작이 나올지 걱정이 되는... -.-;;)

 

 

다음넷에 뜨는 '왕은 사랑한다' 시리즈의 깔끔한 이미지.

(그러나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왕은 사랑한다' 는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몇 페이지가 빠진 상태였음. -.-;;)

 

 

  인터넷을 보니 이 소설의 팬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 내 취향과는 좀 맞지 않는다.

  그래서 3권짜리 소설을 읽는 내내, 온전히 몰두하지 못 했다.  차근차근 순서대로 읽지 못 하고 대충 훑다가, 눈에 띄는 부분이 나오면 집중해서 보고...  앞에서 대강 지나친 부분 때문에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다 싶으면,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읽고...  그렇게 책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어수선하게 읽었다. ^^;;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면서, 굳이 포스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흥미도 측면에서는 나와 맞지 않지만, 무척 짜임새 있는 소설이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봐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봐도 그렇고,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정말 꼼꼼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같은 재료라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되는 법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소설의 작가는 훌륭한 요리사다.  작가가 조사한 '역사적 사실' 과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허구' 가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전개된다.  얼핏 생각하면 뻔한 삼각관계 이야기 같지만, 세 사람의 엇갈리는 운명을 충렬왕 및 충선왕 시대의 고려와 원나라의 정치상황에 기막히게 잘 끼워맞췄다.  그래서 지난 여름 내내 읽었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과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를 다시 뒤적여가며, 역사적 사실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2. 충선왕 - 역사 속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고독하고 매력적인 왕

 

 

  '왕은 사랑한다' 의 주인공은 세 명인데, '원(충선왕)' 만 실제 인물이고, 또 다른 남자 주인공 '린' 과 여자 주인공 '산' 은 가공 인물이다.

  세 사람 모두 고려 왕실 사람들인데, 순수했던 10대 초반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나 도타운 우정을 쌓게 된다.  하지만 원과 린이 모두 산을 사랑하게 되면서, 바위처럼 튼튼했던 세 사람의 우정에 균열이 생긴다.  더구나 원이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왕이었기에, 세 사람 사이에 애정문제 뿐 아니라 정치문제까지 얽혀들어 세 사람의 우정은 큰 시련을 맞게 된다.  다행히 어찌어찌하여 해피엔딩(혹은 해피엔딩에 가까운 열린 결말?)이라 할 수 있는 결말을 맞게 된다. 

 

  사실, 로맨스에 방점을 찍고 읽는다면, 충선왕은 그저 비중 높은 등장인물일 뿐이고, 린과 산 두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10년 이상 헤어져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절대 저버리지 않는, 그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들을 갈라놓았던 충선왕을 원망하거나 증오하기는커녕, 오히려 충선왕의 심정을 이해하며 끝까지 우정을 지키는 의리의 화신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처럼 이 소설의 로맨스에 몰입하지 못 한 사람에게, 린과 산은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다...! 

 

  린과 산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우선, 세 주인공 중 하나인 충선왕부터가 그렇다.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라고, 그런 정치상황 속에서 왕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성격이 비틀릴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충선왕의 부모인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역시 그들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충분히 말이 되는 캐릭터다.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약소국의 왕' 과 '남편에게 외면당하는 이국에서 시집온 공주' 라는 상황이라면, 어떤 부부라도 정말로 저렇게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산의 비호를 받아 산의 장원에서 숨어 살게 된 건달들과 유랑민들의 경우도 그렇다.  시대 상황과 그들이 처지를 보았을 때,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충분히 말이 된다.

 

  오직, 린과 산만이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이다.

  차라리 이 소설이 완전한 로맨스소설이었다면, 원래 로맨스소설이 '꿈 같은 사랑' 을 소재로 하는 것이니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로맨스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진지하게,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짚어가며 전개되는 소설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을법한 사실적인 캐릭터이기에, 린과 산 두 사람만 이 소설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산의 캐릭터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래도 린은 그 시대를 사는 올곧고 고지식한 젊은이답게, 한 여자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 시대의 미덕인 주군에 대한 충성, 이 두 감정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그러니 높은 신분과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었다.

  그런데 산의 행동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산은 신분제 사회인 고려에서 왕족의 딸로, 더구나 고려 최고 갑부의 외동딸로 태어나고 자란 몸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신분 낮은 이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는가 하면, 아주 당연하게 재산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  자신의 아버지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은 것에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 그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산의 파격적인 행보를 설명하는 데에는 그 정도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만민평등이 법으로 보장되고 상류층 인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지금조차, 최고위층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다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은가?

  그러니 산이 그런 파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 확실하고도 엄청난 어떤 계기가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소설 속 상황만 봐서는 산의 행동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뿐이다.  (고려시대에도 그 정도인데, 만일 산이 21세기에 환생한다면 모든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겠다며 무력투쟁이라도 벌일지도... -.-;;)

 

 

  그에 비해, 충선왕은 비록 잔뜩 뒤틀려있기는 해도 매우 사실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물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지독한 악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충선왕은 최고 권력자로서의 냉정함, 음흉함, 잔인함을 모두 지니고 있다.  동시에, 삭막했던 성장환경으로 인한 애정결핍에서 나온 지독한 이기심과 소유욕도 갖고 있다.  그래도 왕이 되기 전까지는, 넘지 말아야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곁을 지켜준 린과 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두 친구에게 배신당한 일로, 겨우 억누르던 어두운 본색을 드러내며 폭주하게 된다. (사실, 제3자가 봤을 때는 배신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본인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함.)  그래서 결국에는, 두 친구와 그 밖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큰 상처를 입고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 한 채 방황하게 된다.

  어떤 악행을 하게 된 동기나 원인이 그 악행의 결과를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 충선왕을 둘러싼 상황과 충선왕의 심리 묘사를 보면, 충선왕에 대해 거부감 대신 오히려 연민이 느껴진다.  그만큼 이 소설 속 충선왕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악당이다. 

 

  충선왕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들이, 충선왕의 비(妃)들이다.

  소설 속 충선왕의 비들은 그 누구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 한다.  아니, 행복한 삶은 고사하고, 평범하고 무난한 삶조차 누리지 못 한다.  원래도 왕실이란 곳이 마냥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런데다가 남편 충선왕이 너무나도 피폐하고 공허한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비들은 모두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충선왕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충렬왕과 서로 적대적인 감정만 품고 살았기 때문에, 부자(父子) 관계 그 자체를 혐오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자식이 생기는 것을 기피하고, 결혼을 철저히 정략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면서, 자신의 비들을 불행하게 한다.  누구는 완전히 무시하고, 누구는 철저히 이용하며, 누구는 잔인하게 짓밟는다.  역사 속에서 충선왕에게 총애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 조비(趙妃)와 숙비(淑妃)조차, 이 소설에서는 그저 불행할 뿐이다.  정비(靜妃)만이 이 소설에서 린의 누이동생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여러 비 중 유일하게 충선왕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정비조차도 결국에는 부.드.럽.게. 외면당한다!

 

 

  그리고 '충선왕-산' 의 관계보다는 '충선왕-린' 의 관계에 더 눈길이 갔다.

 

  충선왕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친구 린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던 이유가, 린이 자신의 연적이 되었다는 것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산과 서로 사랑하는 남자가 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충선왕이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충선왕의 소유욕과 자존심을 생각했을 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응징했을 것이다. -.-;;  다만, 잔혹함의 정도가 훨씬 낮았을 것이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에, 그 아름다운 얼굴에 항상 밝은 웃음을 띠고 신분 낮은 이들을 따뜻이 대하며 탐관오리에게 분노했다.

  린과 산이 충선왕에게 끌리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충선왕의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벗인 세자 충선왕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가엾이 여길 줄 알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분노할 줄 아는 세자라면, 장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 훌륭한 임금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충선왕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두 사람조차 알지 못 했다.  겉으로는 언제나 쾌활해 보이기만 하는 충선왕의 마음 밑바닥이, 얼마나 건조하고 피폐한지...  고려의 왕인 아버지는 국정은 내팽개친 채 술과 여자만 탐닉하며, 한참 어린 아내인 왕비에게 무시당한다.  고려의 왕비인 어머니는 가뜩이나 힘들게 사는 백성들을 쥐어짜며 재산 불리기에만 급급하고, 오만방자한 태도 때문에 남편인 왕에게 외면당한다.  자신 때문에 음지로 밀려난 이복 형제자매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잘 해주고 싶지만, 충선왕이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이복 형제자매는 오히려 두려워하며 움츠려들 뿐이다.

 

  이런 삭막한 환경에서 자란 충선왕이 처음으로 마음을 온전히 열고 대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린이다.

  충선왕에게는, 산도 소중한 사람이지만 린은 더욱 소중하고 특별했던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확실한 내 사람' 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가 부모나 형제자매가 아니라, 바로 린이었으니까...  원래 처음이 중요하고, 처음이 특별한 법이다. 

 

  그래서 린에게 더욱 잔혹했던 것 같다.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라면, 어느 정도 실망하고 분노하다가도 시간이 흐른 후에 화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최악의 경우라도, 절교하는 정도로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세자나 국왕으로서는 권력의 생리를 잘 알고 권모술수에 능숙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감정적인 면에 서툴어 유아기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물론, 콩가루(!) 같은 가정환경 때문이다.  그래서 외로움에 찌든 충선왕에게 린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우정을 보여줘야만 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줘야만 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런 린이 충선왕 자신이 사랑하는 산과 서로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린이 자신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린을 버렸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고 잔혹하게...  그러면서도 마치 버림받는 쪽이 자신인 것처럼 슬픔과 배신감을 내비치며...

 

 

  충선왕은 소설 결말 부분에서까지 행복하면서도 여전히 고독했다. 

 

  충선왕은 행복했다.

  자신이 인생 막바지에 큰 곤경에 빠졌을 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그리워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린과는 다른 의미로 연적이 되어버린 충직한 무사가, 역시 린과는 다른 의미의 우정과 충성으로, 자신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으니까...

 

  동시에, 충선왕은 고독했다.

  정치적으로는 고려에서나 원나라에서나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며 간절히 원했던 두 사람만은 결코 옆에 둘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곤경에서 빠져나가게 되었지만, 재기를 꿈꾸기에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정열이 이미 사그라들었으니까...

 

 

 

3. 역사적 사실과 풍부한 상상력의 결합  

 

 

  역사학자와 역사소설가는 '역사적 사실' 이라는 소재를 '상상력' 을 통해 바라본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상상력이 허용되는 범위' 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역사학자에게는 '좁은 범위의 상상력' 만 허용된다. 

  역사학자들은 똑같은 주제를 놓고, 각자 상상력을 발휘해서 서로 다른 주장 내지는 추측을 내놓는다.  하지만 덮어놓고 상상력만 발휘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책이나 유물 등의 '사실적 근거' 와 함께 하는 경우에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허용된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는 000라고 되어 있지만, 아무개가 쓴 문집과 어디서 발견된 비석의 내용을 보니 사실은 XXX일 가능성이 높다.' 라는 식으로 제한된 상상력만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소설가에게는 역사학자보다 '넓은 범위의 상상력' 이 허용된다.

  역사의 큰 줄기를 심하게 휘어놓지만 않는다면, 상상의 나래를 자유로이 펼칠 수 있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창조(!)하는 것도 허용된다.

  그래서 역사소설을 읽을 때는 두 가지 큰 묘미가 있다.  첫째는, 역사학자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역사 속 구멍을 메우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역사를 보며 우리가 안타까워했던 부분을, 좀 더 따뜻한 방향으로 결말이 나게끔 변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역사소설 읽는 재미를, '왕은 사랑한다' 는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 역사소설의 묘미를 제대로 살린 예로, 충선왕의 결혼이 있다.

 

  고려사에 나오는, 충선왕의 여러 비 중 정비(靜妃)순화원비(順和院妃)의 일이 석연치않다.

  충선왕은 몽골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비로 맞기 전에, 이미 3명의 고려인 비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중 정비와 순화원비의 배경을 보면, 두 사람이 충선왕에게 시집가게 된 것이 참 뜬금없다.

  충선왕이 아직 세자의 신분이었고 10대 중반의 나이였으니, 충선왕의 결혼은 당연히 부모인 왕과 왕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비와 순화원비의 친정 모두가, 충선왕의 생모이며 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는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불편한 사이였다...!  즉, 제국대장공주는 원수나 다름없는 집안의 딸들을 며느리로 들이는 것을 허락한 셈이 된다. 

 

 

  우선, 정비(靜妃)의 경우부터 살펴보자면...

 

  정비와 충선왕의 결혼에 대하여, 고려사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287년, 제국대장공주가 13살이 된 아들 충선왕(당시에는 아직 왕이 아니라 세자였음.)을 데리고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떠나는 친정 나들이에 아들만 데리고 갔으면 오죽 좋았겠느냐만은...  친정인 원나라에 바치겠다며 공녀를 뽑아 데려갔기 때문에, 마을마다 딸을 뺐긴 사람들이 통곡하는 비통한 일이 벌어졌다.  공녀 선발이라는 것이 힘 없는 민초 뿐 아니라 지배계층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고려 왕족인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의 딸 역시 공녀로 끌려가게 되었다.

  원나라로 가던 중 온천에서 쉬게 되었는데, 세자 충선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의 측근이 이유를 묻자, 충선왕은 "내가 장차 서원후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이번에 뽑힌 처녀 중 서원후의 딸이 있어서 불쾌하다." 고 대답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아들의 말을 전해듣고, 서영후의 딸을 공녀에서 빼내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충선왕이 관례를 올리게 되었을 때, 서영후의 딸은 충선왕과 결혼했다.  이 서영후의 딸이 바로 정비다.

  이 기록만 보면 '어린 세자의 순수하고 싱그러운 첫사랑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재작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속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에 만나 알콩달콩 풋사랑을 키우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문제는, 이 정비가 정화궁주(貞和宮主)의 친정 조카딸이라는 점이다.

  정화궁주는 원래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의 첫 번째 비였다.  하지만 결혼한지 14년째 되던 해, 남편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게 되면서, 그만 조강지처 자리를 제국대장공주에게 빼앗기고 두 번째 비로 밀려났다.  그런데 정비의 아버지 서원후와 정화궁주는 친남매간이다.  즉, 정화궁주와 정비는 고모-조카딸의 관계가 된다. 

  졸지에 조강지처 자리를 빼앗긴 정화궁주는 속으로는 무척이나 원통했겠지만,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된 상황에서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에게 맞설 힘이 없었다.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자신과 자녀들의 생존을 위해서, 자존심을 다 버리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공주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래서 공주가 충선왕을 낳았을 때는, 축하연회까지 열어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축하주를 바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주가 정화궁주에 대해 워낙 민감하게 구는 통에, 이 축하연회는 엉망이 되어 공주의 환심을 사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훗날 공주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는 감금되는 고초까지 겪게 되었다.  ☞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그러니 정비가 충선왕과 결혼한 일은 무척 이상하다.

  제국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온 이래 계속해서 정화궁주를 경계하며 핍박했다.  그런데 그 정화궁주의 친정 조카딸을 자기 며느리로 맞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세자였던 충선왕이 정화궁주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으려고 진작부터 마음 먹고 있었다는 것도 뜻밖이다.  충선왕은 아버지인 충렬왕과는 어려서부터 갈등을 겪었지만, 어머니인 공주와는 원만한 사이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많은 여자를 두고, 왜 하필이면 어머니가 싫어하는 정화궁주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싶어했을까?

 

  '왕은 사랑한다' 는 그런 의문점을,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잘 메우고 있다.

  이 소설에서 정비는 '단' 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세 주인공 중 하나인 '린' 의 여동생으로 나온다. 

  린은 충선왕의 친한 벗이며 충성스런 측근이다.  그러니 누이동생 단이 공녀의 물망에 올랐다는 것을 세자 충선왕에게 알렸다면, 충선왕은 단이 공녀로 뽑히지 않도록 힘을 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린은 벗이며 주군인 충선왕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안길 수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자신이 마음에 품은 '산' 이 단 대신 공녀로 뽑힐 수도 있기에, 충선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충선왕은 어머니와 원나라로 가는 도중에야 다른 사람을 통해 단의 일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는 린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린의 누이동생이 공녀로 끌려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맹랑한 소년 충선왕은 단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에게 거짓말을 한다.  즉, 그 때까지 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자신이 진작부터 단을 사랑해서 아내로 삼을 생각이었으니 단을 공녀에서 빼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제국대장공주는 아들이 하필이면 정화궁주의 조카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에 기막혀하고 못마땅해 한다.  하지만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라 아들의 부탁대로 단을 공녀에서 빼내어 준다. 

 

 

  다음으로, 순화원비(順和院妃)의 경우를 보자면...

 

  제국대장공주와 악연으로 얽혀있기로는, 순화원비의 친정이 정비의 친정보다 훨씬 심하다. 

  순화원비는 홍규(洪奎)의 딸로, 정비 다음으로 충선왕에게 시집온 비였다.  그런데 순화원비가 충선왕과 결혼하기 2년 전, 홍규의 집안 전체가 제국대장공주 때문에 결딴날 뻔한 일이 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홍규 집안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의 일은 비참하고 처절하다.

  어느 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바칠 공녀를 뽑게 했는데, 그만 홍규의 다른 딸(즉, 순화원비의 언니)이 공녀로 뽑혔다.  홍규는 권력 있는 대신들에게 뇌물까지 주면서 딸을 빼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최후의 수단으로, 의 머리를 깎아 비구니로 만들어버렸다.  설마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간 사람까지 잡아가겠느냐 하는 식의 고육지책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제국대장공주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해서 홍규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비구니가 된 홍규의 딸도 잡아들여 심문을 했는데, 홍규의 딸은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았을 뿐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공주는 더욱 분노해서, 홍규의 딸을 가죽채찍도 아니고 쇠채찍(!)으로 마구잡이로 때리게 했다.  하지만 홍규의 딸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 일로 귀양을 갔던 홍규는, 조정 대신들이 적극적으로 구명에 나서준 덕에 나중에라도 풀려났다.  하지만 홍규의 딸은, 고려에 왔던 원나라 사신에게 공주가 줘버렸다.  홍규의 딸이 아버지를 위해 자백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것에 대해서, 공주가 끝내 분노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국대장공주가 순화원비를 며느리로 맞은 일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순화원비는, 공주의 명령으로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귀양을 갔던 홍규의 딸이다.  동시에, 역시 공주의 명령으로 잔인한 쇠채찍질을 당한 후에 무슨 물건처럼 원나라 사신에게 넘겨진 가련한 처녀의 동생이다.  공주가 그런 순화원비를 며느리로 맞다니...!

  공주가 자신이 홍규 부녀에게 했던 독한 짓을 후회해서, 보상 차원에서 홍규의 또 다른 딸을 며느리로 맞았을 가능성은 0%라고 생각한다.  공주가 그만큼 경우를 알고 인정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테니까... (고려사 제국대장공주편을 읽어보면, 도저히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음.  억지 부리기에, 폭력 휘두르기에, 금품 강탈에...  고려시대판 여자 일진짱 정도로 보임. -.-;;)

 

  역사가 풀어주지 않은 이런 의문점에 대하여, 이 책의 작가는 개연성 있는 상상력으로 채운 답을 내놓았다.

  소설에서는,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과의 정치적인 거래 때문에 순화원비와 결혼한 것으로 나온다.  충선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버지에게서 얻어내기 위하여, 자신도 아버지에게 반대급부 몇 가지를 제공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홍규의 딸을 아내로 맞는 일이다.  

  홍규는 왕실 입장에서는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마지막 무신정권을 세운 임연의 사위였지만, 오히려 왕실의 편을 들면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죽여 무신정권시대를 종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설 속 설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

  소설 속 충렬왕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충성스러운 홍규를 옆에 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홍규가 딸을 공녀에서 빼내려고 출가시켰던 일로 제국대장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홍규를 조정에 불러들일 수가 없는 상태다.  세자 충선왕은 그런 아버지의 심중을 간파하고, 자신이 홍규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홍규는 세자의 장인 겸 왕의 사돈이 되는 것이니,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4. 이 소설의 정체성 - 역사소설? 로맨스소설?

 

 

  내가 이 소설에 대해 감탄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포스팅도 하면서도, 왜 이 소설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 하는가 하면...

  우선,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도, 등장인물들이 '현대식 말투' 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 거슬린다.  또한, 멜로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소설 전체에 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드라마에서나 소설에서나, 그 놈의 멜로 분량이 문제임! ㅠ.ㅠ)

 

  다만, 내가 불만을 느끼는 이런 부분은, 이 소설의 정체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 포스트 앞부분에서 이 소설의 판권이 팔려서 언제가 드라마로 만들어질거라고 했을 때,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감을 잡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로맨스소설에 가깝다.  요즘 사극의 흐름을 보면, 무거운 순수 정통 사극은 외면당하고 있다.  만일 이 소설이 로맨스소설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지 않았더라면, 모 제작사에서 이 책을 드라마로 만들겠다며 판권을 사들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로맨스소설의 특성상, 배경이 과거라고 해도 현대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식 말투를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로맨스소설에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니, '아, 진짜, 이 소설은 무슨 놈의 사랑타령이 이렇게 많은 거야!' 하고 짜증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을 '로맨스소설이다' 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이 소설의 장르는 애매하다.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나 포털에 남긴 후기를 봐도, 누구는 로맨스소설로 또 누구는 역사소설로, 이 소설의 장르를 각각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 '로맨스소설에 가깝다' 느니 '로맨스소설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느니 하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이 소설은 로맨스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진중한 편이고, 그렇다고 역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가벼운 편이어서, 굳이 장르를 말하자면 '역사소설과 로맨스소설의 융합물' 정도로 해야할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모호한 정체성이 이 소설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보고 호평을 하는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소설의 진중함과 사실성, 로맨스소설의 발랄함과 낭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맨스소설에 별 흥미 없는 입장에서는, 로맨스 분량을 과감히 쳐내서 권당 약 500페이지나 되는 것을 권당 400페이지 정도로 압축했더라면, 훨씬 긴박감 넘치지 않았을까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 쓰자면, 린과 산 사이의 멜로 분량은 절반 정도로 줄이고(특히 현대식 말투로 된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랑의 밀어... ㅠ.ㅠ), 마지막 3권에 등장하는 '베키' 라는 인물이 나오는 부분은 통째로 들어냈더라면, 훨씬 좋은 소설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느낀다.

 

 

원 간섭기(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격동의 시대를 산 형제의 비극 -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http://blog.daum.net/jha7791/15791035)

이승환의 '고려 무인 이야기' / 품절된 책 찾아 삼만리(http://blog.daum.net/jha7791/15791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