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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顯宗) (上) - 우리 역사상 유일한 사생아 출신 왕

Lesley 2014. 6. 4. 00:01

 

  전에 고려 제26대 왕인 충선왕(忠宣王)에 관하여 포스팅을 하면서, 충선왕을 사극이나 역사소설의 주인공이 되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그런데 충선왕 만큼이나 사극 또는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어울리는 왕이 또 있으니, 충선왕의 조상인 고려의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

  현종은 그 출생부터 다른 왕들과 많이 달랐다.  현종은 부모의 사통(私通)으로 태어난 아이, 즉 사생아였다.  사실 삼국시대 왕 중에서도, 어쩌면 사생아일지도 모르는 이가 몇 명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불명확하거나 전설 또는 설화 수준이라 '그럴 가능성도 있다' 정도의 추측일 뿐이다.  사생아 출신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기록된 경우는, 우리 역사에서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사생아로 태어난 경우' 와 '서자로 태어난 경우' 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지금과 다르게 축첩이 법제도적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에,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인 서자는 엄연히 '합법적인 존재' 였다. 

  서자는 자기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서자가 그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00가문의 XXX의 자식' 으로 분명히 인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본처 소생의 자식인 적자에 비해서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이런저런 차별대우를 받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생아란, 서자와는 다르게 그 시대의 법제도로도 용인되지 않는 존재다.

  그 시대의 법이 인정해주지 않는 관계의 사람들, 가령 각자 배우자가 있는 남녀, 신분상 맺어질 수 없는 남녀, 미혼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비합법적인 존재' 를 말한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더니, 상대방은 '고려시대는 조선시대보다 남녀관계가 자유분방했으니 상관없는 것 아니냐?' 고 했다.  이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혼전 성관계 또는 혼인 외 성관계에 대해서 '사회 분위기상 너그러웠다' 는 말과 '법률상 인정받았다' 는 말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요즘에는 뱃속의 아기가 혼수품 1순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전임신이 많아졌고, 혼전임신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무척 너그러워졌다.  하지만 어떤 남녀가 혼전임신을 한 것에 대해 그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등이 비난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를 자기네 집단으로 따뜻하게 받아준다고 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절로 '혼인 중의 출생자' 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남녀가 혼인신고를 해서 법적인 부부가 되지 않는 이상, 태어난 아이는 법률적으로 엄연히 '혼인 외의 출생자'(즉, 사생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자 출신의 왕과 사생아 출신의 왕은 완전히 다르다.

  조선시대 영조나 순조는 왕의 첩인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비록 왕의 본부인인 중전에게서 태어난 적자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엄연히 합법적인 신분으로 태어난 경우다.  그 시대의 누구도, 영조나 순조의 아버지가 후궁에게서 자식을 본 것을 비도덕적 행동 또는 불법적인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  사통 관계인 남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고려 현종과 경우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렇게 출생부터 유별났던 현종은, 그 후에도 파란만장하게 살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유년기는 아버지의 귀양지에서 보냈다.  그 후로는 어린 나이에 왕위 쟁탈전에 휘말리면서 강제로 머리를 깎고 출가해야 했다.  반대세력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한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다가 정변이 일어나면서 갑작스레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즉위한지 2년도 안 되어 북방의 거란(요나라)이 침입하면서(거란의 제2차 침입), 고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수도가 외적에게 함락되는 사태를 맞게 된다.  얼마나 상황이 급했던지, 현종은 수도 개경을 떠나 멀리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 속 다른 왕들의 피난보다 훨씬 비참했다.  현종이 정변으로 왕이 되어 정통성이 부족했고 아직 왕권을 탄탄히 하지 못 한 탓에, 피난가는 도중에 침략자인 거란인이 아닌 자신의 백성인 고려인에게 공격당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큰 업적을 세웠다.

  전쟁 대비를 철저히 해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거란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거란군 격퇴로 얻게 된 평화로운 시기는, 고려의 최전성기로 이어지게 된다.  말하자면, 고려 최전성기의 문을 활짝 연 왕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만한다. 

 

 

 

 

1. 출생 - 불륜으로 태어났으나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다.

 

 

  사생아, 특히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사생아라고 하면, 신분이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떠오른다.

  높은 신분의 아버지(귀족이나 왕족)와 낮은 신분의 어머니(노비나 기생 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나 소설에서, 그렇게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난 아이가 온갖 역경을 거쳐 훌륭한 인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고전소설 홍길동 및 드라마 홍길동, 소설 동의보감 및 드라마 허준, 드라마 서동요 등등)   

 

  그런데 현종은 사생아라고는 해도 매우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현종의 부모는 모두 고려 최상류층인 왕실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현종의 아버지는 훗날 현종이 왕이 된 후 안종(安宗)으로 추존된 왕욱(王郁)인데, 고려를 세운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아들이다.  그리고 현종의 어머니는 헌정왕후(獻貞王后)인데, 태조의 아들이며 대종(戴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旭)의 딸이다.

  그런데 안종 왕욱과 대종 왕욱은 모두 태조의 아들로 어머니만 다르다.  즉, 두 사람은 이복형제간이다. (태조는 왜 두 아들의 이름을 발음이 같은 글자로 지어서, 후세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건지... -.-;;)  그래서 현종의 부모인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는 '숙부-조카딸'(!) 관계가 된다.

 

  

<현종 가계도>

 

 

  이런 부모의 관계 때문에, 현종의 가계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부계로 따지면, 현종은 태조의 손자가 된다. (태조 → 안종 왕욱  → 현종 )  또한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조카딸이기 때문에, 헌정왕후-현종은 '어머니-아들' 겸 '사촌누나-사촌동생' 이 된다. -.-;; 

  모계로 따지면, 태조의 증손자가 된다. (태조 → 대종 왕욱 → 헌정왕후 → 현종)  그리고 안종 왕욱이 헌정왕후의 숙부이기 때문에, 안종 왕욱-현종은 '아버지-아들' 겸 '작은 할아버지-조카손자' 가 된다. (너무 복잡한 관계... @.@)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척 이상하고 복잡한 친족관계다.  하지만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고려왕조를 세운 태조의 후손이 된다는 점에서, 혈통만 따지자면 현종은 무척 고귀한 신분이 된다.

 

 

<헌정왕후 가계도>

 

 

  현종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이해하려면, 아버지 안종 왕욱보다는 어머니 헌정왕후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헌정왕후의 가계 역시 아들인 현종의 가계만큼이나 복잡하다. 

  헌정왕후는 어린 나이에 친부모(대종 왕욱 부부)를 모두 잃고, 오빠(훗날의 성종) 및 언니(훗날의 천추태후)와 함께 할머니 신정왕후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언니 천추태후와 같이 고려 제5대 왕 경종(景宗)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태조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천추태후-헌정왕후 자매는 태조의 친손녀고, 경종도 태조의 친손자다.  또한 신정왕후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천추태후-헌정왕후 자매는 신정왕후의 친손녀고, 경종은 신정왕후의 외손자다. (위의 헌정왕후 가계도 참고)  다시 말해서, 천추태후-헌정왕후 자매에게 남편 경종은 친사촌 오빠도 되고 고종사촌 오빠도 된다.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간 것도 모자라서 그 남자가 사촌 오빠라니, 현대인의 도덕 관념으로는 상당히 충격적인... ^^;;)

 

  그런데 천추태후-헌정왕후 자매의 남편 경종이 그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경종에게는 천추태후가 낳은 왕자가 하나 있었지만, 경종이 사망할 때 그 왕자는 겨우 두 살이었다.  그래서 천추태후-헌정왕후 자매의 오빠인 성종(成宗)이 그 왕자 대신 고려 제6대 왕으로 즉위했다.

  헌정왕후의 출생년도가 미상이기 때문에, 경종 사망 당시 헌정왕후가 몇 살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언니인 천추태후가 18세였으니, 헌정왕후의 나이는 아무리 많아봤자 17세였을테고 또는 그보다 더 어렸을 수도 있다.  겨우 10대 중반의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헌정왕후가 천추태후의 언니라는 주장도 있다고 함.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의견대로 헌정왕후를 천추태후의 동생으로 하겠음.)  남편을 잃은 헌정왕후는 궁궐 밖으로 나가 살게 되었는데, 마침 이웃집에 숙부인 안종 왕욱이 살고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어 외로워서 그랬는지, 헌정왕후는 안종 왕욱과 가깝게 지내다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두 가지 생긴다.

  첫째, 위에 이미 설명한 것처럼, 현종의 아버지 안종 왕욱은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에게 숙부가 된다.  즉, 숙부와 조카딸이 사통을 한 것이다. 

  둘째, 헌정왕후는 경종의 왕비였다.  즉, 안종 왕욱은 평범한 여자도 아니고 전 임금의 왕비와 사통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어떤 간 큰 남자가 평범한 여자도 아니고 무려 전직 대통령의 부인과 외도를 벌인 격이니... -0-;;)

 

  첫 번째 문제인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가 숙부-조카딸 관계라는 것은, 의외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일 요즘 시대에 숙부와 조카딸이 성관계를 갖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낳았다고 하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지금과 같은 족외혼이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족내혼이 허용되었다.  특히나 왕실에서는 자신들의 고귀한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여 왕실의 신성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뜻에서, 그리고 다른 가문이 외척이 되어 왕실보다 강력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뜻에서, 왕실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예를 들면, 위의 가계도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고려 제4대 왕인 광종(光宗)은 사촌누이도 아니고 아예 이복누이와 결혼했다!

  광종과 광종의 첫 번째 비인 대목황후(大穆王后) 모두 태조의 자녀들로, 이 부부는 원래 이복남매간이다.  그리고 가계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광종의 두 번째 비인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은 광종의 이복형인 고려 제2대 왕 혜종(惠宗)의 딸이다.  즉, 광종과 경화궁부인도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처럼 숙부-조카딸 관계다.

 

  뿐만 아니라, 헌정왕후의 부모 역시 이복남매간이었다.

  헌정왕후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대종 왕욱이다. (위의 가계도 참조)  그런데 위의 가계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헌정왕후의 어머니는, 태조의 딸인 선의왕후(宣義王后)다. (선의왕후도 남편인 대종 왕욱처럼, 생존시에는 왕후가 아니었고 사후에 추존된 것임.)

  결국, 헌정왕후는 이복 남매간의 결혼으로 태어나서, 나중에 자신의 숙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다. (지금의 도덕관념으로 보자면 고려 왕실은 완전히 막장 집안... -.-;;)

 

  그러나 두 번째 문제인 안종 왕욱이 선왕인 경종의 왕비 헌정왕후와 사통했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었다.

 

  우선, 이 일은 왕실의 명예에 큰 흠집이 되었다.

  헌정왕후는 선왕인 경종의 아내이며, 현왕인 성종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그런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남편 아닌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은, 왕실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즉, 경종과 성종 모두의 권위를 짓밟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임금이며 헌정왕후의 오빠인 성종은, 유학을 무척 중요시해서 고려에 유학을 정착시키려 애를 쓴 임금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자신의 누이가 유학의 가르침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다.  더구나, 나중에 뒤에서 따로 설명하겠지만, 작은 누이동생 헌정왕후 뿐 아니라 큰 누이동생 천추태후도 사통 사건을 일으켰다.  두 누이동생이 번갈아가며 구설수에 오르니, 성종은 오빠로서는 화가 나고 국왕으로서는 정치적으로 곤란했을 것이다.

 

  결국, 헌정왕후와 안종 왕욱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다.

  성종은 숙부인 왕욱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보냈다.  원래대로라면 왕욱과 사통한 헌정왕후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내려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헌정왕후가 곧 사망했기 때문이다.  헌정왕후는 유배를 떠나는 왕욱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를 낳고, 그만 산고로 세상을 뜬 것이다.  그렇게 기구하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현종이다.

 

 

 

2. 유년기 - 궁궐과 유배지를 오가며 자라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는 생이별하게 된 현종은, 성종의 보호 아래 자라게 되었다.

  성종 개인적으로 보자면, 현종은 사촌동생(숙부 왕욱의 아들이니까) 겸 조카(누이동생 헌정왕후와의 아들이니까)가 된다.  현종이 비록 떳떳하지 못 한 관계로 태어난 아이라지만, 어쨌거나 성종에게는 가까운 핏줄이다.  부모 없이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갓난아이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도, 현종은 무시하기 힘든 존재였다.  출생 경위야 어찌되었든 간에, 현종은 부계로도 모계로도 모두 태조와 이어지는 '고귀한 혈통' 을 지닌 아이였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성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 왕위 계승자로 떠오른 인물이, 경종과 천추태후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왕이 되지 못 한 왕자(훗날 성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제7대 왕으로 즉위하는 목종)였다.  그런데 목종이나 현종이나, 부모 모두에게서 태조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은 같았다.  다시 말해서, 현종도 목종처럼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는 셈이었다. 

 

  현종은 2세 되던 해 드디어 아버지 왕욱과 상봉을 하게 되었는데, 고려사에는 이에 관한 서글프고도 극적인 일화가 나온다.

  성종은 유모를 뽑아서 아기 현종을 키우게 했다.  아기가 말을 배울 때가 되자, 유모는 아버지라는 말을 반복해서 가르쳤다.  (아마 유모가 아기를 아버지 곁에서 살게 해주려고 나름 계획을 꾸몄던 듯...)

  그러던 어느 날 성종이 유모에게 아기를 데려오라고 했다.  아기는 유모에게 안긴 채 성종을 쳐다보며 아버지라고 부르더니, 그 다음에는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 성종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또 아버지라고 불렀다.  성종은 아기가 너무 가엾어 눈물을 흘리며 "이 아기가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는구나." 라고 했다.  그리고 아기를 왕욱의 유배지인 사천으로 보내 부자가 함께 살게 선처했다.

  하지만 부자가 함께 지낸 기간은 짧았다.  부자가 상봉한지 겨우 3년만에 왕욱이 어린 아들만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잃은 다음 해인 6세 때,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 해에 현종의 보호자 노릇을 해주었던 성종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성종의 조카이며 경종과 천추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목종(穆宗, 경종-천추태후의 아들)이 고려의 제7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 때부터 어린 현종이 본격적으로 고난을 겪게 되었다. 

 

 

 

3. 소년기 - 생사를 넘나들며 승려 생활을 하다.

 

 

  목종의 즉위하면서 어째서 현종이 고난을 겪게 되었는지 알려면, 먼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천추태후의 정식 시호는 헌애왕후(獻哀王后)다.

  그런데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전(千秋殿)에 머물면서 이미 18세나 된 목종 대신 섭정을 했기 때문에, 천추태후라고 알려졌다. (게다가 몇 년 전 방영했던 채시라 주연의 사극 '천추태후' 때문에 천추태후란 이름이 더 유명해진 듯... ^^)

  위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천추태후는 친자매인 헌정왕후와 함께 경종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경종의 유일한 아들인 목종을 낳았지만, 경종이 세상을 뜰 때 목종은 겨우 첫돌을 넘긴 아기였다.  그래서 경종은 아들인 목종 대신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과 천추태후의 오빠 성종은 복잡하게 얽힌 친인척 사이였다.

  경종과 성종 모두 그 부모들이 태조 왕건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무려 삼중으로 사촌지간이 되었다. (친사촌형제 겸 내외종사촌형제 겸 이종사촌형제... @.@)  게다가 이중으로 처남-매부 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경종은 성종의 두 누이인 천추태후와 헌정왕후를 아내로 맞았고, 성종 역시 경종의 누이인 문덕왕후(文德王后)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종으로서는 어차피 다른 왕족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밖에 없다면, 자신과 몇 겹이나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는 성종에게 물려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야 비정한 권력의 세계 속에서 첫돌을 겨우 넘긴 아들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성종은 목종을 친아들처럼 키워서 훗날 왕위를 물려주기까지 했다. 

 

  남편 경종이 세상을 뜬 후, 천추태후도 동생 헌정왕후처럼 궁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다.

  남편을 잃었을 때 18세 밖에 안 되었던 천추태후는, 헌정왕후처럼 다른 남자와 사통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상대는 천추태후의 외가 친척인 김치양(金致陽)이었는데, 김치양이 승려의 행세를 하면서 천추태후의 처소를 드나들었던 것이다.  성종이 그 소문을 듣고 김치양을 곤장을 쳐서 귀양을 보냈다.

 

  훗날 오빠 성종이 죽고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귀양지에서 불러들여 공공연히 가까이 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목종은 즉위할 때 18세였기 때문에, 그 시대 기준으로는 이미 다 큰 성인이었다.  그런데도 천추태후는 섭정을 맡아 아들 대신 정사를 처리했다.  김치양도 천추태후의 뒷배로 높은 벼슬을 몇 개나 겸임하는가 하면 300칸이 넘는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 사는 등 큰 권세를 누렸다.  목종은 김치양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심약한 탓에 어머니 천추태후의 뜻을 거스르지 못 했다.

 

  나중에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아들까지 태어났다!

  마침 목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 야심을 품게 되었다. 

  보통, 젊은 목종이 자녀를 두지 못 했던 원인을 동성애 탓으로 본다. (목종은 우리 역사에 명확히 기록된 첫 번째 동성애자 임금이었음.)  고려사에 의하면,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남자들을 총애해서 남색 관계를 갖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목종이 정말로 동성애자였던 것인지 궁금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동성애자가 아니라 일탈행위로써 남색행각에 빠졌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어머니와 김치양이 정사를 농단하는 것을 막지 못 했으니, 왕으로서 무기력감과 절망감에 빠졌을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면서, 현종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현종은, 목종에게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였다.  그러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입장에서 보자면, 현종은 자기네 아들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사실은 천추태후와 현종도 매우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천추태후가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와 자매지간이니, 천추태후와 현종은 이모-조카 관계다.  하지만 권력투쟁 중에는 부모-자식 사이에도 피를 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는데, 이모-조카 사이는 큰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12세 밖에 안 되는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아 출가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현종이 머무는 삼각산(현재의 서울 은평구)의 신혈사에 몇 번이나 자객과 독이 든 음식을 보내는 등, 현종의 목숨을 노렸다.  다행히 신혈사에 있던 진관(津寬)이라는 늙은 승려가 현종을 보호해줬다.  진관은 불상 아래에 굴을 파고 현종을 숨어있게 하는가 하면, 궁중에서 보낸 독이 든 음식을 현종에게 전해주겠다고 하고 몰래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현종이 무사히 살아남아 왕이 된 후, 진관에게 은혜를 갚는 뜻에서 신혈사를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이름까지 '진관사' 로 바꾸었다. 

 

  현종은 진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면서, 목종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서찰을 보냈다.

  목종은 어머니와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종을 보호하려 했다.  그래서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고 현종을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세웠는데... 

 

 

고려 현종(顯宗) (中) - 강조의 정변 / 거란의 제2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2)

고려 현종(顯宗) (下) - 김훈, 최질의 난 / 거란의 제3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