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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형제의 비극 -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

Lesley 2013. 12. 7. 00:01

 

 

  우리나라 역사에서나 다른 나라 역사에서나, 외침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애국자와 매국노가 모두 나오곤 한다.

  적극적으로 애국 또는 매국 행위에 나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쉽게 칭찬하거나 쉽게 비난하는 등 간단명료하게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깔린 한 마리 작은 사마귀가 되어, 얼.떨.결.에. 어느 한쪽으로 휩쓸려버린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어떤 심판을 내릴지는 차치하고, 애초에 자신들의 뜻으로 그 행동에 나선 것이 아니기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번 포스트에서 소개하려는 고려 왕족 출신 형제가 그런 사람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왕족이라는 최고위층으로 태어났기에, 태평성대에 태어났더라면 평생 호의호식하며 무난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형제는 몽골의 침략을 받아 조국이 벼랑 끝에 몰려있던 시대를 살았다.  또한 얄궂게도 미천한 백성이 아닌 귀한 왕족의 신분이었기에, 오히려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중심부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주변부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한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이건만,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외적에게 대항하는 쪽' 과 '외적에게 협력하는 쪽' 으로 갈라서서 대치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1. 전란의 시대에 반대편에 서야 했던 형제 -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

 

 

  지난 여름, 고려 원 간섭기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 중 대부분이 현직 고등학교 역사교사인 '이승한' 이라는 작가가 쓴 대중역사서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와 '고려 무인 이야기' 시리즈였다.  그 중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에 대해서는 전에 포스트를 올린 적이 있다.  

  ☞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

      (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

      (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그런데 이 두 시리즈에서 비록 '비중이 별로 없는 조연'(?)으로 나올 뿐이지만, 그래도 내 눈길을 잡아끈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별 관심 없었던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이다.

  승화후는 대몽항쟁기 고려의 왕족으로, 삼별초가 봉기하면서 왕으로 추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삼별초가 봉기한지 1년만에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가 함락되면서, 승화후는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이다.

  영녕공 또한 고려의 왕족인데,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할 때 몽골군 편에 서서 전투에 참여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몽골이 일본 원정에 고려 군사를 동원하려 할 때에, 고려에게 불리한 정보를 몽골 조정에 알려준 적도 있다.  

 

  만일 이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몰랐더라면, 이렇게 따로 포스팅할 생각까지 못 했을 것이다. 

  승화후는 그 유명한 삼별초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정치.군사적 족적을 남기지 못 했다.  한 마디로 존재감이 희미한 인물이다.  그리고 영녕공은 몽골 편에 서서 고려를 괴롭혔던 그 시대의 많은 매국노(우리 역사에서 흔히 '부원배' 라고 하는 무리)  중 하나로만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승화후와 영녕공이 친형제다...!  두 사람은 모두 고려 제8대 왕인 현종(顯宗)의 넷째 아들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의 후손이다.  평양공의 6세손인 청화후(淸化侯) 왕경(王璟)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이 승화후고, 셋째 아들이 영녕공이다. 

 

  지금도 혈연집단은 중요하지만, 그 시절 혈연집단의 중요성은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현대보다 혈연집단 내 결속력이 훨씬 강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혈연집단은 곧 운명공동체였다.  '삼족을 멸한다' 는 말로 대표되는 연좌제가 너무 당연시 될 정도로, 혈연집단 내 어떤 구성원의 행동에 대해서 다른 구성원들도 함께 책임을 져야만 했다.  단지 가까운 핏줄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런 시절이니, 친형제가 국내 정치에서 다른 파벌에 서는 것만으로도 특이한 사례일 것이다. (하긴, 이건 혈족주의와 대가족주의가 상당히 흐려지고, 개인의 성향을 보다 중요시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임.)

  그런데, 나라의 명운이 걸린 몽골에 대한 입장을 두고, 승화후-영녕공 형제는 서로 다른 편에 섰다.(정확히 말하면, 서로 다른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형 승화후는 몽골에 대한 항전을 주장하며 고려 조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삼별초가 왕으로 세운 인물이다.  그리고 동생 영녕공은 적국인 몽골의 편에 서서 고려를 공격한 적도 있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에 관계에 대해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및 '고려 무인 이야기' 시리즈에서 알게 된 후, 다른 자료들을 더 찾아봤다.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서, 이 형제에게 점점 더 관심이 생겼다.  이들의 행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받는지는 차치하고, 대몽항쟁기와 원 간섭기라는 비극적인 시대가 이 형제의 삶을 심하게 얼마나 심하게 비틀어놓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영녕공(永寧公) (上) - 고려를 난처하게 한 고려 왕족

 

 

  이 포스트의 제목과 1번 항목의 제목에서 모두 승화후의 작위와 이름을 먼저 썼지만, 이 형제 중 내가 더 큰 관심을 가진 쪽은 동생인 영녕공이다.

  애초에 영녕공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기에, 영녕공의 형인 승화후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저, 승화후가 형이기 때문에 예우 차원에서 승화후의 작위와 이름을 먼저 썼을 뿐이다. ^^;;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그저 매국노로 밖에 안 보이는 영녕공에게 어째서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

 

 

  ◎ 고려군 총수 문제와 영녕공

 

  내가 영녕공이란 인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1권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속의 한 사건을 통해서다.

 

  1264년, 몽골과의 화친을 위해 고려 제24대 왕 원종(元宗)이 몽골에 갔을 때, 몽골은 고려군의 총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어차피 고려와 몽골간의 화친은 시간 문제였고, 몽골은 벌써 다음 공격 대상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공격할 때 고려군을 동원할 속셈으로, 고려군의 총수를 물어본 것이다.

  당연히 고려는, 남의 나라 전쟁에 고려 군사들이 끌려가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군사수를 가급적 줄여서 답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고려 초기에 비해 군사수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우선,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의 전횡으로 고려의 정규군 체계가 무너졌다.  또한, 7차례나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군대에 들어갈 사람 자체가 줄어서 군대 단위별로 원래의 정원을 채우고 있지 못 했다. 

    

  그런데 당시 몽골에서 지내며 몽골에 귀화하다시피 한 영녕공 때문에, 일이 꼬이게 되었다.

  영녕공이 고려의 직제상 군사수(즉, 실제 군사수가 아닌, 원칙상 있어야 하는 군사수)를 몽골에 미리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몽골에서는 고려에 38,000명의 병력이 있는 것처럼 여긴 것이다.  다행히 원종을 몽골까지 수행한 이장용(李藏用)이 논리정연한 답변으로 반박하여,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다.  하지만 고려의 군사수는 그 후로도 고려 조정을 괴롭히는 문제가 되었다.

 

 

  ◎ 영녕공은 왜 몽골에서 귀화 상태로 살고 있었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영녕공에 대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고려의 왕족인 영녕공이 왜 고려가 아닌 몽골에서 지내고 있었을까?  더구나 당시 고려와 몽골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전쟁 중이었는데...  또한 어쩌다가 적국 몽골에 귀화한 것 같은 상태로 지내고 있었던걸까? 

 

  1241년, 고려 조정은 영녕공을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영녕공은 몽골로 간 후, 일시적으로 귀국한 경우를 빼고는 계속해서 몽골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녕공이 1223년에 태어났으니, 몽골로 떠났을 때 만18세였다.  그러니 고려군 총수가 얼마인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때인 1264년에, 영녕군은 벌써 23년째 몽골에서 살고 있었다.  조국인 고려에서 지낸 세월보다 오히려 적국인 몽골에서 지낸 세월이 더 긴 셈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 또는 대학교 1학년 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볼모라는 위태로운 신분으로 적국으로 가서 23년이나 지낸 것이다. 

 

  그러니 인간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영녕공이 친몽골 성향을 띠게 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적국에서 볼모로 지내는 불안한 처지에 안전도 보장받고 싶었을테고, 이국 생활의 외로움에 지치기도 했을테고, 자신을 적국으로 보내놓고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방치해두다시피 하는 고려 조정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몽골 쪽에서 여러 방법으로 영녕공을 회유하려 들었다.  우선, 몽골 황족의 딸을 아내로 맞게 했다.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들이 몽골 공주들과 정략결혼 한 일이야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고려 왕족 모두를 통틀어 몽골 황족의 딸과 결혼하기로는, 영녕공이 처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몽골은 영녕공에게, 고려에서 포로로 끌려갔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발적으로 원나라로 간 고려인들을 다스리는 관직도 주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이래저래 영녕공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몽골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조정에서도, 자신들이 볼모로 보낸 영녕공이 몽골 황실의 사위까지 되어 몽골의 신임을 받게 되자, 영녕공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3. 영녕공(永寧公) (中) - 왕자를 가장한 볼모

 

 

  그런데 영녕공이 볼모로 가게 된 과정과 그 후의 상황이 어지간한 드라마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 일개 왕족이 왕자를 가장하여 볼모로 가다.

 

  고려는 영녕공을 볼모로 보내면서, 영녕공의 신분에 대해 몽골에 거짓말을 했다.

  즉, 영녕공을 평범한 왕족이 아닌, 왕자라고 속인 것이다. -0-;;

 

  원종의 아버지인 고려 제23대 왕 고종(高宗) 시절인 1235년, 몽골의 3차 침략이 있었다.

  3차 침략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긴 후에 벌어졌는데, 이 때 고려가 입은 피해는 그 전과 비교가 안 되게 컸다.  1차 침략 및 2차 침략 때는 몽골군이 반년 정도 고려를 휩쓸고 난 후 철수했는데, 이 3차 침략은 4년이나 계속되었다.  게다가, 몽골이 그 전에는 공격하지 않았던 전라도 지역까지 공격하면서, 피해 지역 범위도 넓어졌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씨 무신정권의 수장 최이(崔怡 : 원래는 최우(崔瑀)인데 개명했음.)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피하기 위해, 몽골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몽골은 복종의 증거로 고려 국왕 고종이 몽골에 직접 입조할 것을 요구했다.  고려가 그 요구를 받아들이자, 몽골군은 얼마 후 철수했다.

 

  하지만 몽골군이 떠난 후, 고려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고종의 입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최이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에서였다.  사실상 최이 입장에서는, 고종이 몽골로 입조하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왕 대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이가, 신하로서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안위 및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만일 고종이 몽골에 입조하러 갔다가 포로로 억류된다면, 그렇잖아도 강화도 천도로 최씨 무신정권에게서 돌아선 민심이 또 한 차례 동요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고종 지지세력이 고종의 안전을 위해 정말로 몽골에 항복하겠다고 나설 가능성도 컸다.  또한 무신정권 치하에서 꼭두각시 임금 노릇이나 하던 고종이, 몽골에 간 김에 왕정복고를 위해 몽골과 연합하여 최이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질 위험이 컸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몽골에서는 계속 고종을 보내라고 독촉했다.

  고종을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버티다가는 몽골이 다시 침략할지도 모르고...  이런 때 영녕공이 몽골에 볼모로 가게 된다.  앞뒤 상황을 봤을 때, 국왕보다는 한 단계 낮은 지위의 사람을 보내되, 대신 몽골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그냥 입조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볼모로 보내는 것으로 성의 표시를 하겠다는 계획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볼모로 떠나는 사람은 장기간 적국인 몽골에 머물러야 하고, 또 볼모 신세이기 때문에 고려와 몽골 사이가 더 악화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위험한 일에 '진짜 왕자' 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대신 '가짜 왕자' 를 보내기로 한 것 같다.

  그래서 1241년에 청화후의 셋째 아들 왕준이 졸지에 자기 아버지보다도 한 단계 높은 영녕공에 책봉되어(왕자라는 신분에 맞추느라 높은 작위를 준 듯함.), 고종의 아들로 둔갑(!)한 채 볼모로 떠나게 되었다.  

 

  다른 왕족도 많았을텐데, 그 중 영녕공을 가짜 왕자로 뽑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몽골을 속여야 하는 최씨 무신정권이 불안한 마음에, 최대한 '이상적인 왕자의 모습' 에 맞추어 뽑은 것이 아닌가 싶다.  고려사에 의하면, 영녕공은 용모가 무척 아름답고 책을 많이 읽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뛰어났다고 하니 말이다.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에, 공부도 잘 하고, 체육도 잘 하는 엄친아...!)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영녕공은 여러가지로 너무 잘난 탓에 볼모 신세가 된 셈이다. -.-;;

 

  어찌되었거나 영녕공을 왕자라고 속여 볼모로 보낸 일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3차 침략 이후에 이루어진 휴전이, 몽골이 7차례 침략을 하는 중간에 있었던 휴전 중 가장 길었다.  또한, 전쟁기간과 휴전기간을 막론하고 수시로 고려에 와서 온갖 공물을 요구했던 몽골 사신의 발걸음도, 한동안은 뜸해졌다고 한다.  물론 휴전기간이 길어진 가장 큰 원인은 몽골 내부의 권력투쟁이었다.  하지만 왕자를 볼모로 보낸 일로 몽골이 어느 정도는 만족한 것 또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 영녕공의 정체가 발각되다.

 

  영녕공이 볼모로 간지 13년째 되던 해인 1254년에, 결국 몽골이 영녕공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의 아들도 아니고 왕의 아들이라고 속였으니, 그 비밀이 영원히 지켜질 리 없다.  오히려, 그런 엄청난 일을 13년이나 몽골에게 숨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영녕공이 볼모로 간 후에도, 몽골은 화친의 전제조건으로 끈질기게 고종의 입조를 요구했다.

  그에 대해 최씨 무신정권이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몽골은 요구 수준을 낮추어 고종의 큰아들인 태자(훗날의 원종)라도 입조하라고 했다.  하지만 왕위 계승자인 태자가 몽골로 가는 일도 위험부담이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다시 고려와 몽골 간에, 그리고 고려 조정 내부의 고종 지지세력과 최씨 무신정권 간에, 각각 이런저런 줄다리기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진짜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이 아버지와 형을 대신하여 입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안경공이 몽골에 가자, 몽골에서는 안경공을 영녕공의 동생이라고 생각하며 환대했다.  그런데 이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민칭이라는 고려 사람이 나서서, 영녕공이 고종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폭로해버렸다.

 

  하지만 의외로 이 일은 별 탈 없이 무마되었다.  

  얼핏 생각하면, 화가 난 몽골이 화친협상을 당장 중단하고 다시 고려를 공격했을 것 같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도 언젠가는 비밀이 탄로날 것을 생각하고 미리 대비책을 세워두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수습이 된 것이다.

 

  우선, 이미 몽골 황실의 여인과 결혼까지 해서 몽골에서의 기반을 굳힌 영녕공이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영녕공의 정체가 들통나자, 그 당시 몽골 황제인 '몽케 칸' 이 영녕공을 불러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영녕공은  "저는 어려서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왕을 아버지로 왕후를 어머니로 불렀기 때문에, 제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릅니다." 라고 주장했다.  즉, 자신도 지금까지 스스로가 고종의 친아들인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30세도 넘은 그 때에야 겨우 '출생의 비밀'(!) 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미 몽골 편에 선 영녕공이지만, 이 경우에는 고려 조정과 손발을 맞출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일 영녕공 역시 처음부터 몽골을 속이는 계획에 동참했음이 명백하게 밝혀진다면, 영녕공은 결코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볼모로 떠날 때 고려 조정과 입을 맞추었던대로 행동한 듯하다. 

 

  또한, 영녕공을 몽골로 보낸 이래, 고려 조정은 몽골 조정에 보낸 공문서에 교묘하게 수를 써놓았다.

  즉, 몽골 조정에 보내는 공문서마다 영녕공을 고종'친자(親子 : 친아들)' 라고 하지 않고, 고종의 '애자(愛子 : 사랑하는 아들)' 라고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몽케 칸 앞에 불려간 최린이라는 고려 신하가, 이것을 근거로 고려는 몽골을 속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즉, 몽케 칸이 애자와 친자의 차이가 뭐냐고 묻자, 최린은 "애자는 남의 아들을 사랑하며 길렀기 때문에 애자라고 하는 것이고, 친아들이라면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째서 굳이 애자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바꿔 말하자면, 고려는 영녕공이 고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 동안 공문서에서 충분히 밝혔는데, 몽골인들의 독해력이 떨어져서(-.-;;) 지금까지 영녕공을 고종의 친아들로 착각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분명히 궤변인데도, 뭐라고 반박하기 힘든... ^^;;)

 

  물론, 몽케 칸과 몽골 신하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고려 조정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자신들을 속였음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영녕공을 볼모로 보내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려 조정은 기가 막힐 정도로 몽골 조정에 보낸 공문서에서 영녕공이 고종의 친아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피했다.  다시 말해서, 고려가 몽골을 속였다는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려에게 책임을 따질 수가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증거가 있고 없고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음...!)

  결국, 몽케 칸은 이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에 가담한 영녕공에게 "비록 네가 왕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본래 왕족이고, 우리 땅에 오래 있었으니 이제 우리 사람이다." 라고 다독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고려 조정에게 따질 수 없게 된 이상, 또 다시 고려에게 뒤통수 맞는 일이 없도록, 기왕에 자기들 편으로 돌아선 영녕공을 확실하게 끌어안아 최대한 이용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4. 영녕공(永寧公) (下) - 홍복원(洪福源) 집안과의 악연

 

 

  1258년에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김준(金俊)이 새로 집권하면서, 고려와 몽골 사이에 화친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정식으로 화친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마당에, 이미 몽골의 편에 선 영녕공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다름 아닌, 또 다른 매국노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긴 것이다.

 

 

  ◎ 영녕공과 홍복원 사이의 갈등

 

  그 매국노는 홍복원(洪福源)이다.

  홍복원에 비하면, 영녕공은 매국노니 부원배니 하기가 애매하다.  그 정도로 홍복원은 지독하고 철저하게 몽골에 충성하며, 조국인 고려에는 온갖 피해를 다 입혔다.  몽골이 침입할 때마다 홍복원이 길잡이로 앞장선 적이 많았고, 같은 민족인 고려인들에게 몽골인 장수들보다 더 잔인하게 굴었다.  그래서 고려인들이 홍복원을 '주인을 무는 개' 라고 부르며 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더구나 홍복원의 아버지와 아들 역시 몽골에 충성하며 고려를 괴롭혔으니, 홍복원의 가문은 3대에 걸쳐 매국노가 나온 엄청난 집안인 셈이다. -.-;;

 

  홍복원과 영녕공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영녕공이 볼모로 몽골에 가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홍복원의 집에 머물렀다.  이 때에는 홍복원이 영녕공을 후하게 대접해서, 두 사람 사이가 원만했다.  당시 홍복원이 몽골에서 동경총관의 지위를 맡아, 만주 지역에 이런저런 이유로 흘러들어가 있던 고려인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사정 때문에, 몽골 조정이 고려 왕족인 영녕공의 접대 및 감시를 홍복원에게 맡겼던 듯하다.

    

  하지만 영녕공이 단순한 볼모 신세를 벗어나 몽골의 신임을 받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영녕공이나 홍복원이나 모두 고려 출신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고려' 에 관련한 사항에 있어서 몽골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몽골 영역 안에서 고려에 관련된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몽골과 고려 국경지역인 만주에 흘러들어간 고려인들을 말썽없이 다스리는 것이다.  바로 이 고려인 통치 업무 권한을 두고서, 영녕공과 홍복원 사이에 세력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홍복원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영녕공이 몽골에 볼모로 오기 전부터 고려인 통치 업무는 자신의 권한이었는데, 그 권한이 영녕공에게 넘어가게 생겼으니 분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 홍복원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

 

  영녕공과 홍복원 사이의 다툼은 1258년, 홍복원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홍복원이 홧김에 막말을 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홍복원이 경쟁자 영녕공을 저주하기 위해,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서 인형 머리에 못을 박아 땅에 묻기도 하고 우물에 집어넣기도 했다. (고려판 장희빈? -.-;;)  그런데 어떤 고려 사람이 몽골 황제인 몽케 칸에게 이 일을 알리자, 몽케 칸은 사람을 보내 이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홍복원이 영녕공에게 "공은 오랫동안 나에게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참소하기 좋아하는 놈을 시켜 나를 모함하는 것이요?  이는 이른바 기른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무는 격이오." 하고 따졌다.  홍복원의 말인즉슨, 영녕공이 처음 몽골에 왔을 때 자신이 잘 돌봐줬는데, 왜 이제와서 다른 사람을 시켜 몽케 칸에게 모함을 하느냐는 것이다.  워낙 사악한 홍복원이라서 자신이 영녕공을 저주한 사실은 잡아떼고 모함이라고 우긴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영녕공이 홍복원을 제거할 생각으로 모함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홍복원이 홧김에 내뱉은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무는 격이다.' 는 말이 큰 화를 불렀다.  영녕공의 부인, 즉 몽골 황실 출신인 그 부인이, 자기 남편을 개에 비유하며 모욕한 홍복원에게 분노한 것이다.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홍복원이 뒤늦게 후회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화를 참지 못 한 영녕공 부인은 몽케 칸에게 가서 이 일을 알렸다.  그래서 홍복원은 몽케 칸이 보낸 사람들에게 맞아 죽게 되었다.  

 

  다만, 중국의 위키피디아에서는, 홍복원이 살해당하게 된 과정이 우리나라 쪽 기록과는 다르게 나온다.

  우선, 영녕공과 홍복원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 홍복원이 고려 조정에 해를 끼치자 영녕공이 불만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영녕공이 조국인 고려 편을 들어 홍복원과 반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영녕공이 홍복원처럼 사리사욕을 위해 적극적으로 매국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몽골편에 선 후 알게 모르게 고국을 위해 힘을 썼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홍복원이 저주한 대상이, 영녕공이 아닌 몽케 칸으로 나온다.  영녕공이 자신의 부인과 함께 몽케 칸에게 가서 홍복원이 몽케 칸을 저주했음을 알렸고, 이에 분노한 몽케 칸이 홍복원을 죽이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중국 위키피디아 중 '왕준(영녕공)' 항목의 내용이 우리쪽 기록과 다른 이유는, 중국 역사책인 '원사(元史)' 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했기 때문인 듯하다.  해당항목의 참고자료를 보면, 고려사의 기록은 영녕공의 7대조 할아버지인 평양공의 후손에 대해 기록한 부분만 참고했고, 주로 원사의 '열전 고려편' 및 '열전 왕준편' 을 참고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구체적인 사연이야 어느 쪽이 맞든 간에, 홍복원이 영녕공과 갈등을 겪다가 몽케 칸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는 부분에서는 두 나라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그런데 피는 피를 부른다는 말처럼, 영녕공의 승리로 끝난 것 같았던 이 일은 또 다른 원한을 부르게 된다.  홍복원의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큰 원한을 품고, 그 뒤로 사사건건 영녕공과 고려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5. 승화후(承化侯) - 삼별초에게 강제로 추대된 왕족

 

 

  홍복원의 아들이 영녕공에게 본격적으로 복수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기 전에, 영녕공의 큰형인 승화후쪽으로 이야기를 돌려보겠다.

 

  앞에서 승화후를 소개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승화후는 삼별초가 봉기할 때 왕으로 추대된 사람이다.

  이승한의 '고려 무인 이야기' 시리즈에서는, 승화후와 삼별초 모두 고려 조정에 대해 비슷한 입장이었기에 한 배를 타게 되었을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영녕공이 고려에 등을 돌리고 원나라의 편에 선 상태라, 영녕공의 친형인 승화후를 고려 왕실과 조정이 은근히 냉대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든 삼별초가, 자신들처럼 고려 조정과 우호적이지 않은 승화후를 추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뒤 상황을 봤을 때, 승화후가 삼별초에 자발적으로 합류했던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승화후를 협박해서 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나온다.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삼별초가 엄연히 반란군인데, 그런 반란군의 수괴로 추대된 승화후를 특별히 감싸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승화후가 강제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기록이, 고려인들이 쓴 고려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있다.  이것은 승화후가 삼별초에게 협박을 받아 강제로 추대되었다는 게 사실이라는 뜻이 아닐까...

 

  또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 봐도, 삼별초가 여러 왕족 중 하필이면 승화후를 선택해서 추대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삼별초의 봉기에 대해서는, 무신정권의 잔여세력이 왕정복고 후 고려 조정에게 버림받게 되자 최후의 발악처럼 일으킨 반란이라는 시각, 원나라(여기서부터는 몽골이라 하지 않고 새로운 국호인 '원(元)' 으로 표기하겠음.)에 대항해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항쟁이었다는 시각, 그리고 시기별 또는 삼별초 내 계급별로 따로 구분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시각 등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적어도 삼별초 스스로 내세운 봉기의 명분은 '원나라에 굴복하려는 고려 조정에 반대하여 끝까지 원나라와 항쟁한다.' 는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에 대한 항쟁을 주장하며 봉기한 삼별초가, 하필이면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 고려를 공격한 적도 있는 영녕공의 친형을 왕으로 옹립하다니...!  연좌제가 합법적일 정도로 부모자식 및 형제자매가 철저한 운명공동체로 묶여있던 그 시대 관념을 생각했을 때, 영녕공을 왕으로 내세우는 것은 삼별초 스스로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깎아내리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당시 강화도에 다른 마땅한 왕족이 없어서, 삼별초가 어쩔 수 없이 승화후를 옹립했던 것 같다.

  승화후가 삼별초에게 옹립될 당시, 강화도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종은 원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강화도에는 들리지도 않고,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를 단행했다.  아무리 전쟁 중에 최씨 무신정권의 강압으로 천도했다고는 해도, 어찌되었거나 그 당시는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였다.  그런데 40년 가까이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를 사실상 그냥 내팽개친 것이다.  왕이 강화도를 내버린 데 이어서, 마지막 무신정권 집권자인 임유무(林惟茂)가 암살당하는 일이 생겼고, 그 다음에는 삼별초가 봉기했다.  엄청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강화도의 치안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강화도에 남아있으면 별초에 동조하는 무리로 간주되는 상황이라,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다.  조정 대신들과 왕실의 비빈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한꺼번에 강화도를 떠나는 배를 타려고 몰려들어서, 배가 뒤집혀 익사하는 사람이 생기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삼별초는 삼별초대로 강화도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서 활을 쏘아 죽이는가 하면, 떠나려는 사람들을 붙잡아 강제로 삼별초에 합류하게 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20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어났을 정도로, 당시 강화도의 상황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어지간한 왕족들은 이런 무법천지 같은 강화도를 이미 빠져나가 개경으로 가버린 상황이라, 삼별초가 적당한 왕족을 물색하는 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어떤 사정에서인지 미처 개경으로 떠나지 못 한 승화후가 삼별초에게 붙잡혀서, 강제로 추대된 듯하다.

 

  그렇게 승화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으로 추대되어, 아들인 수사도(守司徒) 왕환(王桓)과 함께 삼별초에게 이끌려 전라도 진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6. 홍다구(洪茶丘)의 보복 - 영녕공(永寧公)의 실각, 승화후(承化侯)의 죽음

 

 

  ◎ 매국노 집안에서 태어난 최고의 매국노

 

  홍다구(洪茶丘)는 영녕공과 갈등을 겪다 죽임을 당한 홍복원의 아들이다.

  홍다구는 홍복원이 원나라에 투항하여 귀화한 후에, 원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일찍부터 원나라 군대에 들어가 고려 공격에 참가한 일로, 원나라 조정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매국노인 집안 내력에, 원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기까지 했으니, 처음부터 조국인 고려에 특별한 애착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홍복원이 몽케 칸의 명령으로 살해될 때 형제들과 함께 잡혀갔지만, 몇 년 후에 복권되어 아버지처럼 원나라 안의 고려인들을 다스리는 관직을 맡게 되었다.  아마도, 원나라 조정에서 홍복원 집안이 영녕공보다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했거나, 고려인들을 통치하는데 어느 한 쪽에 힘을 몰아주기 보다는 두 편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종의 이이제이?)

  몽케 칸의 뒤를 이어 새로 원나라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은 홍다구를 무척 총애했고, 홍다구는 그 뒷배를 믿고 고려에 온갖 패악을 부렸다.

 

  홍다구가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아 일일이 쓸 수 없을 정도인데, 특히 1차 일본 원정 때 원정 준비 총책임자로 고려에 와서 끼친 피해가 컸다.

  원정 준비에 동원된 고려 군사들과 백성들을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었던지, 위로는 당시 국왕이었던 고려 제25대 왕 충렬왕(忠烈王)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모두가 홍다구에게 원한을 품었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났을 때, 홍다구가 끼치는 피해가 극심하니 홍다구를 원나라로 소환해달라고 특별히 요청했을 정도다.

 

  2차 일본 원정을 준비할 때 고려가 원나라보다 더 열심히 나선 것도, 홍다구 탓이 컸다.

 

  1차 일본 원정 때만 해도 고려 조정은 원정 준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 쿠빌라이 칸에게 몇 번이나 질책을 받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원정 준비에 들어가는 물적.인적 부담이 엄청났다.  그렇잖아도 무신정권 시대와 원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며, 조정이나 민간이나 모두 만신창이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300척 이상이나 되는 군함을 만들고 몽골인.고려인.한인(남송 백성들)으로 이루어진 4만명 이상의 군대가 먹을 군량미를 모으느라, 고려의 재정은 파탄날 지경이었고 백성들은 줄줄이 굶어죽었다.

  오죽하면, 원정 준비가 너무 느리다며 고려를 닥달하던 원나라조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려 백성들을 구제하라며 쌀 2만석을 무료로 보내줬을 정도다. (병주고 약주고... -.-;;)

 

  그런데 2차 원정 때는 원나라에서 재촉할 것도 없이, 고려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원정 준비에 나섰다.

  2차 원정이라고 부담스럽지 않았을 리 없다.  오히려 몇 년 전 무리해서 1차 원정을 준비한 후유증 때문에, 1차 원정 때보다 더 힘들었다.  그런데도 고려 조정이 원정 준비에 열을 올린 것은, 다른 아닌 홍다구 때문이었다.

  홍다구가 원정 준비에 관여하게 될 경우 그 피해가 엄청나다는 것을, 고려 조정은 지난 1차 원정 준비 때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 칸이 다시 홍다구를 원정 준비 총책임자로 임명하는 상황만은 피하기 위해, 먼저 팔 걷어부치고 원정 준비에 나선 것이다. 

 

  이쯤 되면, 홍다구란 존재는 단순한 매국노가 아니라, 지진이나 태풍 수준의 대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는 홍다구가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외적에게 넘겨주지는 않지 않았으니, 최소한 구한말 이완용보다는 덜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감히 장담한다.  홍다구가 이완용처럼 나라의 주권을 넘겨주고 말고 할만한 지위에 있지 않았고, 홍다구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시기에 이미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화친협상이 제법 진전된 상태라서, 홍다구에게 나라를 통째로 팔아넘길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이완용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완용보다 더 일찍 더 큰 대가를 받고서 나라를 팔아넘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 홍다구, 복수의 칼을 뽑다.

 

  1266년, 홍다구가 영녕공을 참소해서 실각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쿠빌라이 칸의 아들이며 원나라 태자인 친킴(真金)태자는 원나라 조정의 중서령 직위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영녕공은 고려 조정의 상서령이었다.  영녕공이 계속 원나라에서 지낸 것을 생각하면, 상서령이란 관직은 고려 조정에서 영녕공의 위상을 생각해서 명예직으로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서령과 상서령이라는 관직은, 시대에 따라 좀 다르기는 하지만, 동등한 품위이거나 또는 상서령이 중서령보다 품위가 한 단계 높았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해서, 홍다구는 영녕공을 모함했다.

  쿠빌라이 칸에게 "친킴태자는 중서령이고 영녕공은 고려의 상서령이기 때문에, 영녕공이 자신의 품위가 황태자와 똑같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영녕공이 원나라 황태자와 맞먹으려 든다고 걸고 넘어진 것이다.  그러자 쿠빌라이 칸이 분노해서, 영녕공의 군대와 무기를 전부 빼앗았다.

 

 

  승화후의 죽음, 큰아버지를 공격해야 했던 두 조카

 

  그러나 군대와 무기를 빼앗긴 정도는 약과였고, 몇 년 후 영녕공은 큰 비극을 겪게 되었다.

 

  1271년에, 홍다구가 영녕공의 큰형인 승화후를 살해한 것이다.

  그 해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삼별초의 거점인 전라도 진도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별초 세력의 일부는 제주도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대다수는 진도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 와중에 홍다구가 승화후와 그 아들을 죽인 것이다.

  홍다구 입장에서 보자면, 이 일은 일석이조였다.  어차피 삼별초 세력을 없애라는 쿠빌라이 칸의 명령을 받고 공격에 나선 것이니, 본인이 원했든 아니든 삼별초에게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를 죽이는 것은 원나라에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영녕공과 다투다가 죽었는데, 승화후는 그 영녕공의 형이니, 승화후를 죽이는 것은 영녕공에 대한 복수도 되었다.

 

  이 일이 영녕공에게 더 큰 비극이 되었던 것은, 영녕공의 두 아들도 진도 공격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쿠빌라이 칸은 영녕공의 두 아들 신안후(信安侯) 왕옹(王雍), 광화후(光化侯) 왕희(王熙)에게 진도 공격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외세의 침략 속에서 같은 고려군끼리 창칼을 겨누어야 하는 상황만으로도 큰 비극이다.  그런데 두 조카가 자신들의 큰아버지와 사촌형제를 공격하는데 나서야 했다.  아마도 영녕공이 승화후의 친동생이라는 점과 몇 년 전 영녕공에 대해 홍다구가 했던 참소를 생각해서, 영녕공 집안의 충성도를 시험해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녕공은 어떻게든 자신의 형을 살리려고 했다.

  홍다구도 진도 공격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자신을 미워하는 홍다구가 자신의 형 승화후에게 관용을 베풀 리는 없다.  그러니, 자신의 두 아들이 진도 공격에 참가하게 된 것을, 홍다구의 칼날에서 형을 지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던 듯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영녕공은 진도 공격에 나서는 두 아들에게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 고 당부했다.

  하지만 영녕공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녕공의 두 아들과 홍다구는 각각 군사를 이끌고, 진도의 다른 쪽에서 공격을 했다. 그런데 홍다구가 먼저 진도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해서, 승화후와 그 아들을 발견해 죽여버렸다.

 

 

 

6. 끝맺으며

 

 

  영녕공은 1283년에 만 6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1266년에 홍다구의 참소로 쿠빌라이 칸에게 군대와 무기를 빼앗긴 후로는, 세상을 뜰 때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시 정치.군사적으로 특별한 활동을 했던 것 흔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1271년에는 비록 친족간의 비극이기는 했지만, 영녕공의 두 아들이 삼별초의 진도 거점을 함락하는 일에 참가해서 한몫을 했다.  이 일로, 쿠빌라이 칸에게서 최소한의 신임은 회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1274년에 즉위한 충렬왕 시절에, 영녕공과 관련한 간단한 기록들이 고려사에 보인다.  영녕공이 두 아들을 이끌고 와서 충렬왕에게 문안인사를 하며 말을 바쳤다든지,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처음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 영녕공 부부가 충렬왕 부부를 시종했다는지....  특히, 원나라에 간 충렬왕 부부를 시종했을 때, 영녕공이 원래 홍복원이 맡았던 동경총관의 지위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고려의 왕족 신분이며 원나라 황족의 딸과 결혼했다는 점 때문에,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던 것 같다.  비록 이미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되어서, 영녕공이 정치.군사적으로는 다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일은 없었겠지만...  

 

  영녕공이 눈을 감을 때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다음 세상에서는 볼모로 끌려가야 하는 힘없는 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형과 조카를 죽였던 홍다구에 대한 원한 때문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 했을까...  혹은, 그저 파란만장했던 삶이 그래도 무난하게 끝나게 된 것에 안도했을까...

  영녕공이 한 행동의 결과를 보면,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설사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적국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에 침입해서 조국의 군사와 백성들을 죽이고 다치게 한 일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가짜 왕자로 뽑혀 적국에 볼모로 보내진 상황과 원나라에 협력한 일이 본인의 뜻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이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연민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녕공의 형인 승화후 역시 기구하기는 마찬가지다.

  삼별초의 봉기를 정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항쟁으로 보더라도, 협박에 못 이겨 끌려가 삼별초의 왕(물론 제대로 된 왕도 아니고, 허수아비 노릇 하는 왕이었을 것이 뻔한 일임.)이 된 것이 영녕공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다.

  진도로 들어온 홍다구와 그 군사들에게 죽으면서, 승화후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그래도 왕으로 추대된 사람답게 위엄있고 의연한 태도로 죽음을 맞았을까...   혹은, 자신은 삼별초에게 강제로 끌려왔을 뿐이라고 다급하게 설명하며 살려달라 했을까...  아니 어쩌면, 토벌군 중에 자신의 조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가, 눈 앞에 들이닥친 홍다구와 그 군사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 포스트 앞머리에서 썼듯이,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외침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애국자와 매국노가 모두 등장한다.

  애국의 길이든 매국의 길이든 자신의 의지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한 이들은, 비록 그 결과가 나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했으니 여한은 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저 얼떨결에 한쪽에 휘말린 사람들의 경우는 비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스스로의 뜻과 상관 없이 친형제가 서로 적대적인 편에 서야했던 것은, 더 큰 비극이다.

  그나마 승화후와 영녕공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기구한 사연이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나처럼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도 있다.  그 격동의 시대에, 이름도 남기지 못 하고 사라져간 수많은 다른 승화후와 영녕공이 있었을 것이다.  

 

  가끔 역사책을 읽어보면, 역사적 사실에서 큰 의미를 찾느라, 정작 그 역사 속에서 발버둥쳤던 사람들은 묻혀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역사적 사실을 분석하여 그 시대의 의미를 찾고 현대에 거울 삼을만한 교훈을 찾는 일은, 전문가인 역사학도들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처럼 평범하고 나약했던 이들을 찾아서 잠시나마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는 일은, 비전문가인 우리가 맡아보면 어떨까... 

 

 

원 간섭기(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김이령의 '왕은 사랑한다' - 보기 드문 충선왕 관련 소설(http://blog.daum.net/jha7791/15791041)

이승환의 '고려 무인 이야기' / 품절된 책 찾아 삼만리(http://blog.daum.net/jha7791/15791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