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관련 책, 유적지, 기타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Lesley 2013. 8. 14. 00:01

 

  원 간섭기 시절의 고려에 대한 책 중 두번째로 읽은 것이 '이승한' 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이다.

  일단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로 원 간섭기에 대한 개요를 머리 속에 그려넣은 후, 원 간섭기 때의 고려왕을 한 명씩 다룬 책으로 넘어온 것이다. (대충 간을 본 후에 각개격파 하기? ^^)

  ☞ 원 간섭기 고려(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먼저, 이 책의 표지부터 살펴보자면...

 

  표지 위의 오른쪽 끝에 '몽골 제국과 고려 ①' 이라고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즉, 이 책은 '몽골 제국과 고려' 라는 시리즈 중 1권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 시리즈는 2권인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까지 나와 있다.

  아마도 원 간섭기의 고려왕을, 한 명 당 한 권의 책으로 다룰 모양이다.  다만, 충목왕(忠穆王)과 충정왕(忠定王)은 별도의 책으로 다루지 않고, 그 앞의 왕인 충혜왕(忠惠王)이나 그 뒤의 왕인 공민왕(恭愍王)에 관한 책에서 간단하게 언급할 가능성도 있다.  충목왕과 충정왕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그나마 몇 년 밖에 재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은 한 권에 한 명의 왕의 시대를 담는 게 원칙인 듯하다.

 

  표지 아래 왼쪽에 커다랗게 써진 제목만 봐도 '충렬왕(忠烈王)' 의 시대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앞에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 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최초로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고 본격적으로 원의 간섭을 받게 되는 충렬왕의 시대를 다루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고려시대 전체를 한 권으로 다룬 대중 역사서에서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에 대해서 '원이 일본 공격에 나서면서 고려를 강제로 참여시켰기 때문에, 고려의 피해가 막대했다.' 식으로 겨우 몇 줄로만 언급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전쟁 준비 과정에서 고려의 물적. 인적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구체적인 수치로 설명하며, 결국 일본 원정이 두 번 다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었고 그 영향은 어떠했는지도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쿠빌라이칸의 일본 원정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원정 말고도, 굉장히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 몽골 제국의 엄청난 정복 사업, 쿠빌라이 칸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칸이 되고 원(元)을 세우게 된 과정, 남송(南宋)에 대해 벌인 끈질긴 공격, 고려와 원이 강화를 맺게 되는 과정 및 그 과정에서 벌어진 무신정권의 종말과 삼별초의 난, 원의 요구로 고려가 일본 원정 준비를 하게 되면서 겪은 인적.물적 손해, 원의 간섭이 고려에 미친 정치.경제.사회.군사적인 영향 등 참 다양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방대한 내용을 여기에서 전부 다룰 수는 없으니, 내가 관심 갖고 봤던 부분 위주로만 몇 가지 써볼까 한다.

 

  솔직히, 이 책이 가장 중요한 소재로 잡고 있는 일본 원정보다는, 다른 소재들에 더 눈길이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른 것들 위주로 쓸 수 밖에 없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  또한, 책의 내용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나 느낌도 상당히 많이 들어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겠다. (이 책을 읽어본 다른 사람들이 '아니, 이 책에 이런 내용도 있었어? 난 본 적 없는데?'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참 난감할 듯... ^^;;) 

 

 

 

 쿠빌라이 칸과 원종(元宗)의 만남

 

 

 

  ◎ 미래의 몽골 칸과 미래의 고려 왕의 첫 만남

 

  1259년 12월 즈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몽골의 쿠빌라이 칸과 고려 원종의 첫 만남은, 우리 역사에서 무척 중요하고 극적인 사건이다. 

 

  고려가 몽골에게 침략받고 있던 이 시절, 아직 태자 신분이었던 원종은 고려의 제23대 왕인 아버지 고종(高宗) 대신 몽골로 친조를 하러 갔다.

  원래 몽골은 고려 국왕의 친조를 강화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고종이 고령에 병환까지 겹쳐 움직이기 힘들었기 때문에, 태자인 원종이 대신 간 것이다. (결국 고종은 원종이 떠나고 2개월만에 승하했고, 고려는 원종이 귀국해서 즉위할 때까지 10개월 동안 왕위가 비는 사태를 맞이하게 됨.)

  우리 역사에서 외국과 전쟁을 하다가 불리해져서 강화를 맺은 적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국왕(또는 원종처럼 국왕에 버금가는 인물)이 외국까지 제 발로 찾아가 강화를 청한 예는, 아마도 이 때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비참한 사건인 셈이다.

 

  하지만 친조는 순조롭지 않았다.

  말이 좋아 '강화' 지 사실상 '항복' 하러 간 셈이니 그렇잖아도 비참하고 서글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나 했으면 조금 나았을텐데, 원종 일행은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선, 몽케 칸(몽골 제국의 제5대 칸으로, 당시 몽골 제국의 지배자)이 별 진척이 없는 남송 공격에 직접 나서겠다며, 당시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떠나 현재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쓰촨성)으로 떠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원종 일행은 몽케 칸을 찾아 대도(大都 : 지금의 중국 수도인 북경으로 훗날 원나라의 수도가 됨.)와 경조부(京兆府 : 당나라 때 수도인 장안으로, 현재 산서성 서안)를 거쳐 먼 길을 가야 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교통이 발달한 현대에도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중국의 북경을 거쳐 서안까지 가는 것은 무척이나 먼 거리다.  그런데 고생해서 겨우 찾아갔더니만 그 사이 몽케 칸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다 있나... -0-;;)

 

  그렇게 원종 일행은 고려를 떠나 반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득 없이 대륙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몽케 칸의 동생인 쿠빌라이가 남송 공격을 중지하고 북상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몽케 칸의 명령으로 남송을 공격하던 쿠빌라이가, 몽케 칸이 세상을 뜨자 황위 계승전에 뛰어들기 위해 군대를 돌린 것이다.  그래서 원종 일행은 이미 죽은 몽케 칸 대신 쿠빌라이를 찾아가는 것으로 친조를 대신했다. 

 

 

  ◎ 어째서 원종은 쿠빌라이 칸을 찾아갔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원종이 굳이 쿠빌라이를 찾아간 이유가 뭘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때 쿠빌라이는 아직 정식으로 '칸' 이 되지 못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몽케 칸이 갑작스레 죽은 후, 몽케 칸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칸이 되겠다며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내전 초기였던 이 때에는, 정통성 측면에서나 군사력 측면에서나 쿠빌라이가 다소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원종은 아릭 부케 대신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의 저자 이한수는 이것을 '정략적인 결정' 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원종이 당시의 정세를 보고 결국에는 쿠빌라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일부러 쿠빌라이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다만,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기에 쿠빌라이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자, 독자 여러분,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세요~~' 라는 뜻인가... -.-;;)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이승한은 이것을 '불가피한 선택' 으로 보고 있다

  즉, 앞뒤 상황을 보았을 때, 원종은 몽케 칸이 이끌던 우익 군단에게 거부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역대 칸 중 몽케 칸이 고려를 가장 심하게 공격했으니, 그런 몽케 칸 휘하의 우익 군단 역시 고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주인으로 받들던 몽케 칸이 고려와 강화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죽었으니, 우익 군단이 원종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게 우익 군단에게 거부당하는 처지에, 우익 군단이 지지하는 유력한 칸 후보자 아릭 부케를 찾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좌익 군단을 이끌던 쿠빌라이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원종이 쿠빌라이를 선택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훗날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새로운 칸이 되었으니, 원종은 썩은 동아줄 대신 튼튼한 동아줄을 잘 골라잡은 셈이다.  어차피 강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미래의 승리자와 미리 인연을 맺어두는 것이, 강화 협상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 원종이 경쟁자 아릭 부케가 아닌 자신을 찾아오자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다.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는데, 이제 태자가 스스로 항복해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라며 무척 기뻐했다.  칸 자리를 두고 목숨을 내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마당에, 외국 태자가 강화를 청하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쿠빌라이 입장에서는 '봐라, 외국에서는 벌써 나를 몽골 제국의 칸으로 보고 있다!' 하며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인 아릭 부케 쪽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울만한 호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훗날 쿠빌라이 칸과 원종이 사돈지간이 되는 것에는, 이 반가웠던 첫 만남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런지...)

 

 

 

삼별초(三別抄)의 난

 

 

  이 책의 2장 제목은 분명히 '1차 일본 원정' 인데, 무신정권의 종말과 삼별초의 난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 삼별초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대몽항쟁에 앞장선 군대였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속 설명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실린 삼별초에 관한 기술을 보고 많이 당황스러워 할 것이다.

  사실, 이 책 뿐 아니라 고려시대에 관한 다른 많은 책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공무원 시험용 교재나 백과사전 같은 책만 들쳐봐도, 삼별초의 실상이 학창시절 배웠던 것과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어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서라지만, 교과서 속 삼별초의 모습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야 다양할 수 있다고 하지만, '객관적 사실' 을 부정하는 수준의 해석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삼별초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군대이기도 했지만, 최씨 무신정권을 위한 사병 집단이기도 했다...! 

  무신정권이 자리 잡으면서, 각 권신들이 이끄는 사병이 불어나고 정규군 조직은 와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조직인 삼별초가 수도인 개성의 치안 유지 및 국방 경비까지 맡게 되면서, 원래의 정규군은 더욱 유명무실해졌다.  삼별초가 정규군 역할을 하게 되면서 기존의 정규군이 숫자도 질도 낮아진 것이, 훗날 몽골과의 전쟁에서 고려군이 밀리게 된 원인 중 하나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삼별초가 정규군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최씨 무신정권의 경호나 최씨 무신정권의 정적에 대한 감시 및 암살 등  '사병으로서의 임무' 를 중단한 것은 아니다.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라는 성격은 무신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도, 삼별초의 주요 임무는 육지를 휩쓰는 몽골군과 적극적으로 싸워 몽골군을 고려 영토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강화도의 방위(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신정권 방위... -.-;;) 및 육지에서 조세를 수취하는 일에 더 주력했다.

 

 

  놀랍게도, 최씨 무신정권은 그 긴 세월 동안 몽골의 침략을 당하면서도 전국적인 동원령을 내린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삼별초를 앞세워 몽골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무신정권은 몽골에 항복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싸우지도 않았다.  국가의 독립성과 민족의 자주성을 지킬 생각이라면, 전국적으로 거병해서 죽기 살기로 몽골과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양쪽의 군사력 차이가 너무 심해서 어차피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면, 가엾은 백성들 목숨이라도 살릴 수 있도록 일찌감치 항복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최씨 무신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항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항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들어앉은 강화도 수비에만 힘쓰며, 그 난리통에도 수시로 화려한 연회를 즐겼다. -.-;;  그러다가 몽골군의 공격이 너무 심해진다 싶으면 적당히 굽히며 강화를 청하고, 몽골군이 물러나면 다시 '우리는 강화 따위는 모른다' 식으로 행동해서 몽골의 재침입을 불러일으켰다.  무신정권이 몽골에 대해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사이, 육지 전체가 몽골군에게 철저히 유린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육지에서 몽골군과 목숨걸고 싸웠던 사람들은, 최씨 무신정권이 키워낸 삼별초가 아니라 얼마 안 되는 지방군이나 천대받던 백성들이었다. 

  고려시대의 지방군은 중앙군과 다르게 병농일치제, 즉 현대의 의무병제 비슷하게 편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방군 = 백성' 이다.  결국 몽골군에게 학살당한 것도 백성, 몽골군과 목숨 걸고 싸웠던 것도 백성이란 뜻이다.

  그러다 보니, 대몽항쟁 기간 내내 전국 각지에서 고려 조정(정확히 말하자면, 최씨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반란과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들이 죽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만 안전한 강화도로 들어가버린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는 전쟁 중에도 계속되는 최씨 무신정권의 수탈에 지친 나머지,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는 기막힌 일까지 벌어졌다.

 

 

  ◎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다?

 

  1269년 6월, 마지막 무신정권을 세운 임연(林衍)이 당시의 국왕인 원종을 폐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몽골에 갔다가 귀국하던 태자(훗날의 충렬왕)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다시 몽골로 돌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몽골의 압력 덕분에 원종은 5개월 만에 복위했다.  원종이 왕위를 되찾은 것은 몽골의 도움 때문이니, 강화도에서 나오라는 몽골의 요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폐위했던 무리를 그냥 둘 수도 없었다. (단, 이 때는 임연이 갑자기 죽어서, 그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권력을 승계한 상황이었음.)

 

  결국 1270년 5월, 원종은 몽골에 입조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를 단행했다.

  일단 강화도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의논하며 추진한 것도 아니고, 귀국하는 길에 강화도로 사자를 보내 일방적으로 개경 환도를 명령한 것이다.  환도가 이렇게 급히 추진된 데에는 귀국할 때 함께 온 몽골군의 강한 압력도 한몫 했다.

  원종은 이렇게 개경 환도를 명하는 동시에, 따로 몇몇 사람들에게 밀명을 내려 개경 환도에 반대하는 임유무를 없애라고 했다.  결국, 환도 명령이 강화도 조정에 접수된 지 사흘만에 임유무는 암살되었고, 100년을 이어온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도 막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환도 결정에 무신정권 붕괴까지 겹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데,  곧이어 삼별초가 봉기하는 일까지 겹치면서 강화도는 아수라장이 된다.

  원종이 강화도에 있던 사람들에게 어서 빨리 개경으로 오라고 재촉하면서, 강화도에 남는 사람은 반란군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배가 뒤집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강화도를 떠나려다가 삼별초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기도 하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원종의 밀명에 따라 임유무 암살에 참여한 사람 중 상당수가 삼별초의 지휘관들이었다. -.-;;

  즉, 삼별초는 몽골과의 화친을 위한 개경 환도에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경 환도를 추진하는 원종의 명령으로 개경 환도를 반대하는 세력을 없앤 것이다!

 

 

  ◎ 삼별초는 왜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었는가?

 

  개경으로 환도하라는 왕명이 강화도에 막 전달되었을 때만 해도, 삼별초는 분명히 원종에게 협력했다.

  그렇다면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개경 환도가 아니라 따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삼별초의 경제적 불만이다. 

  저자는, 삼별초가 강화도의 국가 소유 창고를 무단점거하면서 삼별초의 난이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강화도는 섬이다 보니 원래 물자가 적었고, 더구나 이 때는 전쟁 중이었다.  그런데도 강화도 천도 초기에, 최씨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인 최우(崔瑀, 나중에 개명해서 최이(崔怡)라고도 함.)는 허구한 날 조정 대신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열며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다.  그것도 모자라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까지 만들게 했다.  육지가 몽골군에게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육지에서 조세를 걷어 바닷길을 통해 강화도로 운반했기 때문에, 물자를 그렇게 펑펑 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최씨 무신정권의 제3대 집권자인 최항(崔沆) 때부터 강화도는 심한 경제난을 겪게 된다.  강화도가 쉽게 함락되지 않자, 몽골군이 강화도에 대한 경제 봉쇄 작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즉, 강화도로 향하는 뱃길로 이용되는 연안 지역을 집중공격하여, 조세나 그 밖의 물품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다.  무신정권을 제외한 왕실, 조정, 백성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몽골과 강화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될 정도로, 몽골군의 경제 봉쇄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조정 관료들조차 녹봉을 제대로 못 받아 곤란한 상황이었다니, 일반 백성들의 처지는 더욱 나빴을 것이다. (사람이 일단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따라서 삼별초 역시 그 때부터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 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제 원종의 밀명을 받아 공을 세웠으니 그에 따른 보상(특히, 경제적 보상)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아무런 보상이 없자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종이 왜 자신에게 협력한 삼별초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 나오는 두번째 원인을 보자.)

 

  둘째, 원종의 삼별초 혁파 조치다. 

  원종은 삼별초를 해산하려 들었다.  100년간 계속된 무신정권 시대에 왕이 폐위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더구나 원종 스스로도 임연에게 폐위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러니 원종 입장에서는, 무신정권이 양성했고 무신정권을 뒷받침 했던 삼별초란 군대는 잠시 이용할만한 가치는 있어도 결국에는 혁파해야 할 집단이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삼별초대로, 자신들이 원종에게 협력했으니 이제 자신들은 무신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가의 정식 군대로 완전히 탈바꿈 하여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원종은 자신들을 해산하려고 한다니,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셋째, 원종이 신하를 보내 삼별초의 명부를 탈취했다. 

  이 책의 저자는 명부 탈취의 목적을 삼별초 군사들을 일본 원정에 동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몽골은 고려에게 일본 원정에 쓸 1만명의 군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무신정권의 전횡과 몽골과의 전쟁으로 고려의 정규군 체제가 무너진 상태라 도무지 그 숫자를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멀쩡한 군대로 남아있던 삼별초의 인적 사항을 파악해 일본 원정에 동원할 목적으로 삼별초의 명부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다만, 전에 읽은 다른 책(어떤 책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에서는, 삼별초의 가족과 친척을 몰살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즉, 연좌제가 너무 당연시 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의 명부를 입수하여 누가 삼별초 소속인지 확인한 후 삼별초의 일가친척을 전부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 해석이 맞든 간에 삼별초 입장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기 나라 전쟁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죽는 일이나, 자기 일가친척이 떼죽음당하는 일이나,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 일본과 연합하려다 실패한 삼별초 / 삼별초의 몰락

 

  이 책 덕분에 새로 알게된 사실 중 하나는, 삼별초가 일본과 교섭하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큰 위세를 떨쳤던 삼별초는 곧 궁지에 몰린다.

  삼별초는 개경 환도가 있었던 1270년 5월 강화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8월에는 전라도 진도로 내려가서 본격적으로 고려 조정과 몽골에 저항했다.

  하지만 1271년 5월에 원나라(1271년에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원(元)' 으로 바꿈.)와 고려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펼치자, 삼별초는 진도를 잃고 제주도로 옮기게 된다.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기면서 세력도 크게 줄어들고 식량난까지 겹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러한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해서 일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연합하려는 것은 삼별초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고려 조정과 삼별초는 번갈아가며 일본 조정과 연락을 취했다.

  삼별초가 일본과 접촉하기 전인 1268년, 고려 조정에서 먼저 일본에 국서를 보낸 일이 있었다.  다만, 고려 조정 스스로 원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일본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쿠빌라이 칸의 입김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국서란 것이, 원나라와 쿠빌라이 칸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일본과 원나라가 국교를 튼다면 일본에게도 분명히 이득이 있을거라고, 일본을 유혹(!)하는 내용이었다.

  반대로 몇 년 후인1271년 삼별초 측에서 일본에 보낸 문서는, 원나라를 야만스럽다고 욕하며 조만간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나중에는 일본에게 식량을 좀 팔라는 제안과 함께 구원병 요청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오랫동안 고려와 정부 차원의 교류를 하지 않아서, 고려의 사정에 어두웠다.

  당시 일본에서는 삼별초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합법적인 고려 조정을 표방하며 보낸 삼별초 측의 문서와, 그 보다 몇 년 전에 '진짜 고려 조정' 에서 보낸 국서를, 모두 같은 조직(즉, 고려 조정)에서 보낸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다 보니, 한 조직이 보낸 두 개의 문서 내용이 너무나 다른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수상쩍은 문서에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하여튼 삼별초에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과 협력한다는 계획은 결실을 못 봤고, 그 후로도 삼별초는 2년 가량을 더 버텼다.

  식량 확보를 위해서 전라도 지역의 조운선(漕運船 : 국가에 세금으로 바칠 곡식이나 포목을 운반하는 배)을 수십 척씩 나포해서 수천 석의 식량을 탈취하는가 하면, 경상도 마산과 김해를 공격해서 건조 중인 군함을 50여척씩이나 불태우기도 했다. (당시, 마산과 김해는 일본 원정을 위한 전초기지였음.)  그래서 삼별초를 반란군으로 규정한 고려 조정도 고려 조정이지만, 삼별초 때문에 일본 원정 준비에 차질을 빚게 된 원나라에서도, 삼별초 진압에 고심하며 열을 올렸다.

  결국, 1273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고려 조정과 원나라가 1만여명의 군사와 160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제주도를 함락시켜, 삼별초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충렬왕(忠烈王)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결혼

 

 

  ◎ 결혼 추진 배경

 

  고려 왕실은 무신정권 치하에서 허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원나라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하게 된다.

  나중에 고려가 원나라에 보낸 청혼문서를 보면, 오래 전부터 정략결혼을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계획이 본격화 된 때는 1269년에 있었던 원종 폐위 사건이다.  이미 저 위에서 쓴대로, 원종은 임연에게 폐위되었다가 원나라의 개입 덕분에 복위했다.  원종과 원종의 장남인 태자(훗날의 충렬왕)는 이 일을 통해, 허약해진 왕권만으로는 무신정권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동시에, 그 대단한 무신정권조차 원나라에게는 쩔쩔맨다는 사실 또한 새삼 느꼈다.

  그래서 원나라의 후원을 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원나라와의 사이를 돈독하게 할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고려 태자와 원나라 공주를 결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공교롭게도 쿠빌라이 칸 역시 고려와의 정략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고려 왕실에 힘을 보태줌으로써, 고려를 일본 원정에 동원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남송과 결탁할 위험도 있는 임연을 고립시키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려 왕실을 원나라의 영향권에 꽁꽁 묶어 두기 위해서였다.   

 

 

  ◎ 어렵게 성사된 결혼

 

  하지만 정략결혼이기에 최대한의 정략적인 효과를 거두어야 하니, 간단히 성사될 리 없었다.

  1270년 2월, 폐위되었다가 복위한 원종이 자신의 폐위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중서성으로 청혼문서를 보낸 것이 최초의 청혼이다.  쿠빌라이 칸은 그 전에 고려로 파견한 사신을 통해 은근히 고려의 청혼을 유도했다.  하지만 막상 고려쪽에서 청혼을 하자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한 발자국 물러서는 조심스런 모습을 보였다.

  1271년 1월에, 이번에는 쿠빌라이 칸에게 직접 보내는 표문으로 다시 청혼을 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쿠빌라이 칸이 고려 왕실을 완전히 믿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즉, 어쩌면 고려 왕실이 원나라와 전쟁 중인 남송 또는 한창 기세등등하던 삼별초와 내통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쿠빌라이 칸이 의심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에 보낸 원나라 군대의 식량을 고려 조정이 제대로 공급 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을거라는 해석이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판다고, 원나라의 도움 없이는 안위가 위태로운 고려 왕실 측에서 결혼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고려가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청혼하는 사이, 무신정권은 무너졌다.  하지만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대와 관리들, 그리고 원나라에 빌붙어 고려를 쥐어짜는 매국노들 때문에, 고려 왕실은 여전히 큰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 결혼 문제에 매달리게 된다.

 

  1271년 6월에는 태자를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기까지 했다. 

  인질이라지만 포로가 아닌, 고려쪽에서 자발적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유학생 비슷한 신분이었다.  원나라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태자를 원나라로 보내어, 쿠빌라이 칸의 의심과 불만을 잠재우고 원나라 고위층과의 친목을 도모하여, 결혼을 성사시키려 한 것이다.

  태자가 원나라에 간지 4개월만에 결혼 승낙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고려 측에서 이 결혼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고, 쿠빌라이 칸이 결혼 자체는 물론이고 결혼 승낙마저 정략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 칸의 계책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번에도 결혼하는 데 실패한 태자가 1272년 2월에 귀국했을 때, 태자는 몽골식 머리모양(辮髮, 변발)을 하고 몽골식 옷(胡服, 호복)을 입고 있었으며, 지지부진한 일본 원정 준비를 자기가 주도하겠다며 동분서주했다.  이게 모두 원나라의 환심을 사서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서였으니, 그렇게까지 해서 이 결혼에 매달려야 했던 고려 왕실의 처지가 눈물겨울 지경이다.

  원나라에 대해 어지간히 성의 표시를 한 태자는 1272년 12월에 또 다시 원나라로 가서 1년 반 이상을 체류했다.  그리고 그 동안 삼별초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고 일본 원정 준비도 거의 끝났다.

 

  1274년 5월, 드디어 태자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쿠틀룩켈미쉬) 공주, 즉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원나라 대도(원나라의 수도, 현재의 북경)에서 결혼했다.

  몇 년 만에 어렵게 성사된 결혼이었다.  신랑은 39세로 이미 오래 전에 결혼해서 아들딸을 몇 명이나 둔 처지였고, 신부는 16세였다. (사실 이 책에는 공주가 17세라고 되어 있는데, 같은 저자가 쓴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에는 16세로 되어 있고,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에도 16세로 되어 있음.  아마 16세가 맞는 듯함.) 

  결혼 한 달만에 원종이 세상을 뜨자, 태자가 급히 귀국해서 고려의 제25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 왕이 '충(忠)' 자 돌림인 왕 중 첫 번째인 충렬왕(忠烈王)이다. (사실, 충렬왕의 할아버지 고종이나 아버지 원종도 원나라에게서 忠자가 들어가는 시호를 받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충렬왕 때부터 원나라 시호를 쓰고 있음.)

 

 

  ◎ 최초의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의 죽음과 즉위 문제로 먼저 귀국했고, 제국대장공주는 몇 달 후에 고려로 왔다.

  충렬왕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까지 마중을 나가 공주를 개경으로 데려왔다.  문무백관은 개경 교외까지, 왕실의 비빈들과 재상급 대신들의 부인들은 궁궐 문밖까지 나가 영접했다.  이쯤 되면, 왕의 행차보다 더 격이 높은 행차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공주의 행차가 개경으로 들어왔을 때 개경 백성들이 "태평시대가 다시 왔다." 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얼핏 생각하면, 오랜 기간 고려를 침략해서 수많은 고려인을 살육했던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원통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태평시대가 왔다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긴 전란 동안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적국의 공주가 자기 나라의 왕비가 되었다는데, 다시 전쟁이 일어날 일 없다는 것만 생각하며 기뻐했을까...  또한, 백성들이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두고 안전한 강화도에 가만히 있기만 했던 무신정권에 대해서, 백성들의 원한은 얼마나 높았을까... 

 

 

  ◎ 제국대장공주의 막강한 권력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 공주로는 최초로 고려 왕비가 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역대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 중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의 위세가 유독 대단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공주가 고려를 복속시킨 원나라 황제의 친딸이라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제국대장공주 이후에도, 몇 대에 걸쳐서 원나라 공주들이 고려 왕실로 시집을 왔다.  하지만 모두 황제의 친척을 뽑아 공주로 책봉한 경우였을 뿐, 황제의 친딸은 제국대장공주의 경우가 유일했다.  더구나 제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인 쿠빌라이 칸이 그냥 평범한 황제도 아니고, 고려를 복속시킨 당사자였으니...

  남편이며 왕인 충렬왕조차, 자기보다 23살이나 어린 아내이며 왕비인 공주를 통제하지 못 하고 눈치를 볼 지경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책에는 안 나오는데, 신하들과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주가 충렬왕을 욕하며 지팡이로 때린 적도 있음.  그리고 이 일은 야사나 설화를 수록한 책에 나오는 기록이 아니라, 엄연히 정사인 '고려사(高麗史)' 에 실린 기록임. -.-;;)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은 왕과 조정의 중신들 모두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공주가 고려로 오고 몇 년 안 되어, 왕실의 여인들이 관련된 큰 사건이 두 번이나 터졌다.  모두 누군가 거짓으로 꾸민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며, 공주가 자신의 측근들을 시켜 심문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충렬왕의 조강지처였던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갇히는 일이 벌어졌다.

  정화궁주는 종실의 딸로, 충렬왕이 태자로 있을 때 결혼해서 14년간이나 정비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제국대장공주가 새로 시집오면서 정비 자리에서 밀려나 두번째 비가 되어버렸고, 그 밖의 여러가지로 공주에게 핍박 받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그런데 익명의 투서 때문에 공주를 저주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다행히, 신하들이 공주에게 정화궁주의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간청하고 해명해서, 무사히 석방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화궁주 소생인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는 충렬왕의 적장자로 태어났는데도 세자가 되지 못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공주에게 밀려났듯이, 자신 또한 공주가 낳은 이복동생(훗날의 충선왕)에게 밀려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복동생이 세자가 된 후에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충청도에 있는 절로 출가까지 했다가, 4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는 충렬왕의 계모인 경창궁주(慶昌宮主)가 폐서인이 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충렬왕을 저주하고 자기 아들을 공주와 결혼시켜 왕위에 앉히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 신하들이 유죄가 불확실하다며 만류했지만, 공주가 경창궁주 모자의 재산을 적몰할 것을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그런데 그 적몰한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지 않고 공주가 다 차지해버렸다. (요즘으로 치면, 어떤 사람이 내란음모죄로 기소되었는데, 유죄가 확실하지 않은데도 그 사람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그 몰수한 재산을 대통령 부인이 꿀꺽 삼켜버린 격임. -.-;;)  그래서 일부 학자는 이 사건을 경창궁주 모자의 재산을 노린 제국대장공주 쪽의 음모인 것으로 해석할 정도다.  

 

  공주 뿐 아니라, 공주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이들이 고려의 정치나 사회에 끼친 해악도 만만찮았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원나라의 공주답게, 공주는 몽골인, 탕구트인, 위구르인, 고려인 등 다민족적인 수행단을 이끌고 왔다.  그들은 공주의 위세를 등에 업고서, 고려와 원나라 양쪽 조정으로부터 높은 관직을 받고, 남의 재산을 가로채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뇌물을 받는 등 온갖 말썽을 일으켰다.  특히, 인후(印侯)라는 몽골인은 워낙 많은 이들의 원한을 사서, 나중에 인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기뻐하며 축하할 정도였다. -.-;;

 

 

 

끝맺으며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포스트는 각 장의 내용 중 내가 크게 관심 갖고 읽었던 것을 하나씩 뽑아 정리한 것이다. 

 

  이 포스트에서 '일본 원정' 에 관해서는, 다른 것들을 설명하면서 부가적으로만 언급했다.

  사실, 이 책의 제목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만 봐도, 이 책의 가장 큰 소재는 일본 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들이 어떤 식으로든 일본 원정과 연결이 된다.

  하지만, 정작 이 포스트에서는 일본 원정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일단, 너무 방대한 내용이라, 정리하자면 포스트 한 편으로는 어림도 없고 서너 편은 써야 할 것 같아서 도저히 쓸 엄두가 안 난다.  또한, 맨 윗부분에 이미 썼지만, 내가 일본 원정보다는 삼별초나 충렬왕의 결혼 문제 등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일본 원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정리하려 들자면, 그것만으로도 벅차서 삼별초니 충렬왕의 결혼 문제니 하는 것은 건드리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관심 있어 구입하려는 사람에게 일본 원정 부분도 꼼꼼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분명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관심도에서 다른 것들보다 아랫순위로 밀렸고, 또 양이 워낙 많고 내용도 깊어서 내가 포스팅 할 엄두를 못 냈을 뿐이다. 

  일본 원정을 위해 원나라에서 고려를 얼마나 압박했으며, 고려는 고려대로 그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일본 공격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은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 전부 생생하게 묘사된다.  전쟁에 동원된 군사, 군함, 군량미의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 이런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고, 고려, 원나라, 일본 모두의 기록을 인용하고 비교해가며 설명해준다. 

 

  또한, 원 간섭기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몽골(특히, 칭기스 칸 때부터 쿠빌라이 칸까지의 시기)의 역사 또는 동양의 전쟁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저 우리가 고려-원나라 관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고려, 일본, 남송을 상대로 한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 영향 등이 자세히 나오기 때문이다.

 

 

 

원 간섭기(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이승한의 '고려 무인 이야기' / 품절된 책 찾아 삼만리(http://blog.daum.net/jha7791/15791171)

이승한의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3권이 드디어 나온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227)

이승한의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 출간, '몽골제국과 고려' 시리즈 완간...!(http://blog.daum.net/jha7791/15791511)

격동의 시대를 산 형제의 비극 -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http://blog.daum.net/jha7791/15791035)

김이령의 '왕은 사랑한다' - 보기 드문 충선왕 관련 소설(http://blog.daum.net/jha7791/1579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