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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

Lesley 2013. 9. 7. 00:01

 

  지난 포스트에 이어 이번에도  '몽골제국과 고려' 시리즈  2권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에 관해 쓰려고 한다.

  지난 포스트에서는 고려 제26대 왕인 충선왕(忠宣王)에 대해서, 그 출생부터 아버지 충렬왕(忠烈王)과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승리하게 되기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 (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이번 포스트에서는, 충선왕이 고려와 원나라 양쪽의 권력투쟁에 모두 참가해서 승리자가 된 직후부터 죽음까지를 다룰 것이다.

  지난 포스트에 나온 충선왕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벌어진 일만으로도, 충선왕의 인생은 어지간한 소설 주인공보다 파란만장 하다.  하지만 그 후의 삶 또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충선왕의 삶 자체가 원 간섭기라는 평범하지 못한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독특했던 군주, 충선왕(忠宣王) - 下

 

 

  ◎ 장년기(1) - 심양왕(瀋陽王) 책봉과 고려왕 복위 / 희미해진 개혁의 꿈

 

  무종(카이산) 형제의 승리에 큰 공을 세운 충선왕에게는 엄청난 포상이 있었다.

  공신으로 책봉되고, 비록 명예직에 가깝지만 태자(무종의 아들이 아닌, 무종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뜻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새 황제 무종에게 뿐만 아니라 태자 및 태후에게도 온갖 진귀한 장신구와 금은보화를 받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포상은, 충선왕이 '심양왕' 으로 책봉된 일이다.

  심양(瀋陽)은 현재도 그 이름 그대로 남아있는, 중국 동북지방(압록강과 두만강 바로 위부터 러시아 국경까지를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을 말함.  우리에게는 '만주' 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함.)의 중요도시이다.  이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보고 있어서, 우리 역사와도 매우 밀접하다.  과거 우리의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영토였고, 현재는 조선족이 많이 사는 연변 등이 이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고,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서 교통.군사.경제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동시에 민감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도 이 곳에는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약 40년에 걸친 고려와 몽골간의 전쟁 때 포로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고, 고려 사회가 어지러워지면서 유민으로 몰락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새 황제 무종은 충선왕의 공을 치하할 겸, 고려인이 많은 이 특수한 지역을 원활히 통치할 겸,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책봉해서 만주 지역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충선왕 개인으로서는 큰 경사였다. 

  무종이 공신들에 대한 책봉을 할 때 제일 먼저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했을 정도로, 충렬왕의 위상이 높았다.  게다가 훗날 무종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인종(仁宗)으로 즉위해서는, 심양왕(瀋陽王)에서 심왕(瀋王)으로 그 지위를 더 올려줬다.  원나라의 제도상으로는 이 심양왕(심왕)이 고려왕보다도 더 높은 지위였다.

  더구나 심양왕이 된 바로 다음 해에 아버지 충렬왕이 세상을 뜨면서, 고려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처음으로 한반도와 만주(동북지방)를 동시에 다스리는 왕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는 고려왕도 심양왕도 완전히 독립적인 위치의 군주가 아니라, 각각 원나라의 속국과 지방을 다스리는 군주였을 뿐이라는 명명백백한 한계가 있다.  게다가 충선왕이 두 왕위를 겸했던 기간이 몇 년 되지도 않았고, 그 후로는 고려왕위와 심양왕위가 각각 다른 이에게 승계되었다.  또한, 충선왕이 심양왕 지위를 다른 이에게 물려준 후로는, 심양왕 지위가 실질적인 통치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변하기까지 했다. 

  어찌되었거나 충선왕이 심양왕과 고려왕을 겸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특이한 사례다.  다시 말해서 여러가지로 우리 역사에서 특이한 기록을 남긴 충선왕에게, 특이한 기록 한 가지를 더 추가해준 사실이다.  

 

  그런데 고려 입장에서는 이 심왕(심양왕)이라는 지위가 두고 두고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혹은 범죄를 저질러서, 이 지역으로 떠나는 고려 유민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지역이 원나라 속의 고려인촌 비슷한 곳이 되자, 더 많은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이 유민들의 처리와 송환을 둘러싸고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충선왕이 심왕에서 물러난 후 심왕 지위를 계승한 고려 왕족의 후손들이 고려 왕위를 노렸다는 점이다.  원 간섭기가 끝날 때까지, 심왕은 고려왕을 위협하며 고려 조정을 분열시키는 위험한 존재였다.  저자는 심왕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의 3권에서 상세히 다루겠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 기대가 크다.

 

  1308년 34세의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의 죽음으로 고려로 귀국해 복위했다.

  아버지와의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시기로부터 따지면 1년여만이었다.  그리고 1차 즉위를 했다가 조비무고사건으로 폐위되어 원나라로 간 시기부터 따지면 무려 10년만에, 고향인 고려로 돌아온 것이다.

 

  이 2차 즉위는 1차 즉위 때와는 여러가지로 많이 달랐다.

 

  우선, 충선왕의 위상이 1차 즉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아졌다. 

  2차 즉위 때는 원나라에서 무종, 태후(무종과 인종의 어머니인 흥성태후), 태자(무종의 동생으로 훗날의 인종) 각각 사신을 보내 별도로 즉위 축하연을 열어줬다.  그만큼 원나라 황실에서 충선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우대했다.

 

  하지만 충선왕은 1차 즉위 때처럼 고려를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얄궂게도, 충선왕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이 오히려 충선왕이 개혁에 전념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었다.  충선왕의 높아진 위상은 어디까지나 원나라 황실의 신임과 지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충선왕은 지난 10년간 아버지와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즉, 고려의 왕위 계승 문제 및 기타 정치적 중대사는, 고려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충선왕이 고려에 머무는 동안 원나라에서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손 쓸 사이도 없이 왕위를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충선왕은, 고려를 어찌 통치해야 할지 하는 문제보다는 원나라 조정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결국, 충선왕은 10년 만에 귀국한 고려에서 3개월만 머물다가 다시 원나라로 갔다.

  1차 즉위 때와는 다르게 즉위교서를 늦으막하게 반포하더니, 바로 다음 날 서둘러 원나라로 떠난 것이다.  즉위하고 3개월이나 되어 발표한 즉위교서는, 온갖 개혁정책으로 가득 찼던 1차 즉위 때의 즉위교서에 비해 너무 부실했다.  얼른 원나라로 떠나려고 급히 만들어 반포한 것 같은 느낌이다.

 

 

  ◎ 장년기(2) - 숙비(淑妃)와 순비(順妃)

 

  충선왕이 3개월간 고려에 머물면서 한 일이라고는 사실상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아버지 충렬왕의 장례를 치른 것'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숙비(淑妃)와 순비(順妃)라는 두 후궁을 새로 맞아들인 것' 이다.

 

  숙비를 후궁으로 맞은 일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숙비가 원래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0-;;  충선왕은 세자 시절에 아버지 충렬왕이 총애하는 무비 때문에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것이라며, 무비를 죽여버렸다.  그 대신 미모가 출중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자 한 명을 뽑아서, 아버지에게 새 후궁으로 바쳤다.  이 후궁은 숙창원비(淑昌院妃)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고려로 돌아온 충선왕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아버지의 후궁인 숙창원비의 처소에 며칠씩 머무는 등 이상한 낌새를 보이더니만...  장례가 끝내자마자 아예 대놓고 통정한 것이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우탁(禹倬)이라는 강직한 신하가 도끼를 들고 충선왕의 행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도끼를 든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왕의 잘못을 간하겠다는 뜻임.)  하지만 충선왕은 오히려 숙창원비를 숙비(淑妃)로 책봉해서 정식으로 자기 후궁으로 삼아버렸다.  그리고 숙비에게 얼마나 빠졌는지 숙비와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싫어서, 그 해에는 고려의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八關會)를 중지시키기까지 했다. -.-;;

  다만, 현대의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당시의 고려인에게도 충격적이었던 이 사건은, 정작 충선왕 입장에서 보자면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는 의견도 있다.  즉,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오래 살아서 몽골 풍습에 젖었기 때문에, 아버지나 형이 죽으면 그 아들이나 동생이 죽은 이의 여인들을 물려받는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을 따랐다는 것이다.

 

  순비의 경우는, 숙비와는 달리 정략적인 차원에서 후궁으로 삼았다.

  순비 또한 숙비처럼 과부였다가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숙비가 첫번째 결혼 때도 충렬왕과의 두번째 결혼 때도 자식이 없던 것에 비해, 순비는 첫번째 결혼에서 3남 4녀나 되는 자녀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라서 과부의 재혼이 법률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임.  숙비와 순비 말고도 역대 고려 국왕의 후비 중 과부 출신인 사람이 여러 명 있음.)

  사실, 순비는 숙비처럼 미모가 뛰어나지도 않았고 명문가 출신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나라 황실과 인맥이 닿아 있었다.  순비의 딸 중 한 사람이, 원나라에 머물면서 원나라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아마도 고려가 원나라에 바친 공녀였던 듯함.)  그래서 충선왕은 그런 인맥을 이용하기 위해서 순비를 후궁으로 맞았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후궁이 된 숙비와 순비는 사이가 무척 나빠서, 이 두 사람 사이에 여러 사건이 벌어졌다.

 

  먼저 본격적으로 싸움을 건 쪽은, 원나라에 든든한 연줄을 갖고 있던 순비였다.

  이 일은 충선왕이 복위한 다음 해인 1309년에 벌어졌다.  선왕이 숙비만 총애하자, 순비가 모욕감과 질투심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나라 태자에게 총애를 받는 자기 딸에게 연락해서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순비의 딸은 원나라 태자에게 부탁해서 숙비를 원나라로 잡아들일 계획을 세웠다. 

  충선왕으로서는 10년 전에 있었던 조비 무고사건의 악몽이 떠오를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조비 무고사건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어찌어찌 해서 이 일을 막는데 성공했다.

 

  1311년에는, 원나라 귀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고고(姑姑)라는 것 때문에 웃지 못 할 사건이 두 차례나 벌어졌다.

  충선왕은 자신이 아끼는 숙비에게 고고를 하사해달라고 원나라 태후에게 부탁했다.  충선왕을 지지하던 태후는 따로 사신까지 파견해서 고고를 보내줬다.  숙비는 자신이 충선왕에게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과 원나라 태후에게 선물을 받은 사실을 자랑하려고 고고를 쓰고서 연회를 열었고, 고려 조정 대신들은 줄줄이 몰려가 선물을 바쳤다.  고고의 하사로 충선왕의 깊은 총애가 온세상에 드러났으니, 숙비는 거리낌이 없었다.  수시로 사치스런 연회를 열고 호화판 유람을 즐기는가 하면, 원나라 공주와 다름 없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오죽하면 숙비 덕분에 출세한 숙비의 오빠조차 그런 숙비를 말렸을 정도다.  하지만 숙비는 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조차 연회를 열었고, 조정 대신이란 사람들은 그런 연회에 초대받았다고 정말로 참석했다. (숙비나 조정 대신들이나... -.-;;)

  숙비의 위세가 점점 높아지자 순비의 앙심도 점점 깊어졌고, 충선왕은 특별히 총애하지는 않지만 정략적 가치가 있는 순비의 마음을 풀어줘야 했다.  그래서 숙비가 고고를 받은지 10개월 후, 이번에는 충선왕이 원나라 태자에게 부탁해서 순비도 고고를 하사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순비 역시 고고를 쓰고서 연회를 열었고, 조정 대신들은 이번에도 선물을 들고 가서 축하했다. (사이 나쁜 후궁들 사이에 끼여서 이쪽 저쪽 눈치 보며 선물 바치느라 무척 바쁜 조정 대신들... -.-;;)

 

  숙비와 순비가 벌인 고고대첩(?)은 1311년 한 해로 끝나지 않고 몇 년 후까지 이어졌다. 

  순비는 자신도 고고를 받았다고 숙비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숙비가 모친상을 당하고도 연회를 벌일 정도인 '고려판 파티걸'(!)이라고 해도, 앙숙인 순비가 여는 연회에는 당연히 안 가려고 했다.  그러자 1313년에 충선왕이 아들에게 양위하려고 잠시 귀국했을 때, 순비가 숙비의 일로 불만을 터뜨렸다.  입장이 곤란해진 충선왕이 숙비를 설득해서 순비의 연회에 참석하게 했다.

  숙비는 고고를 쓰고 무척 화려한 옷을 입고 갔다.  가기 싫은 순비의 연회에 갈 수 밖에 없으니, 이왕 억지로 가는 거라면 순비의 기나 완전히 꺾어놓자는 의도였던 듯하다.  숙비의 호화로운 차림새를 보고, 순비 역시 질 수 없다는 마음에 더 화려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러자 숙비도 옷을 갈아 입었다.  그렇게 이 연회에서 두 사람이 각각 5번씩 옷을 갈아 입었다. -0-;;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면서, 그 연회에 참석했던 조정 대신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무척 궁금하다.  두 사람이 별도로 연 연회에서야 연회의 주인공에게만 열심히 아첨하면 되겠지만,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는 상황이라면 처신하기가 참 곤란했을 것이다.

 

 

  ◎ 장년기(3) - 전지(傳旨)정치와 아들 살해 

 

  원나라로 돌아간 충선왕은 이른바 전지(왕의 뜻을 관리들에게 전하는 것)정치로 고려를 통치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도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몇 년씩 해외에 머물며 전화나 이메일로 국정을 수행한다면, 다른 정치인들이나 국민들 눈에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이다.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 한 그 시대에, 원나라 대도에서 고려 개경으로 파발을 띄워 왕명을 전달해 국사를 처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충선왕은 계속 원나라에 머물면서, 고려로 사람을 보내 이런저런 정책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한들, 왕이 나라 안에서 철저히 관리.감독을 하며 추진해도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왕이 타국에 나가 있으니, 관료들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거나 임무를 태만히 하는 등 여러가지 폐단이 생겼다.  심지어 충선왕이 믿고서 요직에 임명한 측근들 중에서도, 왕이 원나라에 머무는 것을 기화로 매관매직을 일삼고 부정축재를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또한 충선왕이 원나라에 장기체류하면서 발생하는 비용 때문에 고려의 재정에 무리가 갔다.

  충선왕은 매년 자신의 체류비용으로 베 10만필과 쌀 400곡을 고려에서 가져다 썼다고 한다.  충선왕 때 소금 전매제를 실시해서 1년 세수로 거두어들인 것이 베 4만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쓴 비용은 어마어마한 액수다.  더구나 이것은 매년 정기적으로 가져가는 재물일 뿐, 따로 재물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때면 온갖 특산품을 별도로 거두어서 가져갔다.

 

  결국에는 이 비정상적인 전지정치로 인해 고려 왕실에 또 한 번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충선왕은 1310년 1월에 신하에게 양위 표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복위한지 1년 반 밖에 안 되는 36세의 젊은 왕이 양위를 할 생각을 한 것은, 어떻게든 귀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조정에서 귀국을 요청하는 상소문이 오는가 하면, 원나라 조정에서도 장차 귀국 압력을 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장남이며 세자인 감(鑑)에게 고려의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서 계속 원나라에 남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측근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양위 계획은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는데...

 

  겨우 몇 달이 지난 1310년 5월에 충선왕은 친아들인 세자를 죽였다.  

  세자 감의 출생년도가 미상이기 때문에, 아버지 충선왕에게 죽임을 당할 때의 나이를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충선왕이 36세였고 16세 때부터 원나라에서 숙위했다는 점, 충선왕의 차남이자 세자의 동생인 강릉대군(江陵大君 : 훗날의 충숙왕)이 당시 17세였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세자 감은 18~20세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인 아버지가 세자인 아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영조-사도세자 사건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관련 기록이 많은 영조-사도세자 사건의 경우와는 달리, 충선왕-세자 감 사건의 경우에는 관련 기록이 달랑 한 줄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알 수 없다.  그저 이 책의 저자도 다른 역사학자들도, 충선왕이 양위를 계획했다가 취소하는 과정에서 충선왕 부자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충선왕과 감은 원래부터 불편한 사이였을 것 같다.

  충선왕이 세자를 죽인 사건은,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의 권력투쟁을 떠오르게 한다.  흔히 말하기를, 부모에게 사랑 받고 자란 아이가 훗날 자신의 아이도 사랑할 줄 알고, 부모에게 학대 받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게 된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목숨 걸고 권력투쟁까지 벌였던 충선왕이라면, 좋은 아버지 역할에 많이 서툴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양위 문제가 불거지기 전부터 아들 감과 원만하지 못 하게 지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세자 감의 생모가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자 감의 생모는 비(懿妃)로 추증된 야속진(也速眞)이라는 몽골 여인이다.

  의비는 두 아들을 낳았다.  그 중 장남이 충선왕에게 살해된 세자 감이고, 차남이 나중에 충선왕의 뒤를 이어 충숙왕이 되는 강릉대군이다.

  그런데 이 의비에 대해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다.  감이 세자가 된 일이나 강릉대군이 왕이 된 일이나, 모두 의비가 살아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세자나 왕의 생모라면, 비록 의례적.형식적일 뿐이라도 높은 지위에 책봉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의비는 장남이 세자가 되었을 때도, 차남이 고려의 왕이 되었을 때도, 어떤 지위에도 책봉된 기록이 없다.  죽고 난 후에야 겨우 의비라는 시호를 받았을 뿐이다.  게다가 남편이나 아들이 고려로 귀국했을 때 한 번도 따라갔다는 기록이 없다.  죽은 후에야 시신을 고려로 보내 장례를 치렀고, 그나마 이 장례에 남편 충선왕과 아들 충숙왕이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여러 상황 및 의비의 가계나 신분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보았을 때, 저자의 생각대로 의비는 평민 또는 그보다도 더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충선왕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지만, 충선왕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 했던 것 같다.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의 피를 모두 잇고 태어난 충선왕이라면,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역시 내 추측일 뿐이지만, 자신의 두 아들의 몸에 미천한 피가 흐른다는 사실 때문에 충선왕이 두 아들을 꺼려했던 게 아닐까...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신분제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만 두 아들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두 아들을 번갈아 가며 자기 후계자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애정 뿐 아니라 수치감과 거부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도 느꼈던 게 아닐까...

 

 

  ◎ 장년기(4) - 양위 / 만권당(萬卷堂)

 

  1313년에 결국 충선왕이 양위를 해서, 차남 강릉대군이 고려 제27대 왕인 충숙왕(忠肅王)으로 즉위했다.

  양위가 있기 1년 전에 무종(武宗)의 뒤를 이어 원나라의 새 황제가 된 인종(仁宗)이, 충선왕에게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나라를 몇 년씩이나 비우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국 연기를 요청해서 당장은 귀국을 피했지만, 언제 다시 귀국 명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게다가 충선왕이 양위하기 불과 두 달 전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고려 관리가 원나라 조정에 글을 보내서 충선왕 귀국 운동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 충선왕이 분노해서 주동자들을 잡아들여 벌을 받게 하여, 귀국 운동 자체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고려와 원나라 양쪽에서 귀국 압력이 들어오자, 고려왕의 신분으로는 더 이상 귀국을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양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충선왕은 귀국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위를 했을 뿐, 실제로는 고려 국정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었다.

  그런 충선왕의 의도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가, 양위를 하면서 아들 충숙왕의 후계자를 미리 정해버렸다는 점이다.   즉, 충선왕은 충숙왕에게 양위를 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충숙왕의 세자로 삼아 버렸다.  이 조카는, 충선왕의 이복형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차남인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다.  (충선왕의 이복형이며 충렬왕의 장남인 강양공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중  '충렬왕(忠烈王)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항목의  ◎ 제국대장공주의 막강한 권력 항목)

 

  아버지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했을 때 충숙왕은 20세의 젊은이였다.

  세자가 된 연안군의 출생년도는 미상이다.  다만 충선왕보다 10세 이상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강양공의 차남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사촌인 충숙왕보다 연상이거나 아무리 나이를 적게 잡아도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  이제 겨우 20세 밖에 안 되어 앞으로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무척 높은 왕이, 자기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심지어 나이가 더 많을 수도 있는 사촌을 세자로 두게 된 것이다. -.-;;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진 것은, 충선왕이 새로 왕이 된 아들 충숙왕을 견제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양위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나라에 체류하기 위한 눈가림일 뿐이었다.  충선왕은 충숙왕의 뒤에서 계속 고려의 통치권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충숙왕 입장에서 보자면, 몇 년 전에 자기 형 감이 아버지 손에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아버지에게 대항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아버지 눈밖에 조금이라도 나게 되면, 아버지가 당장 자기를 내치고 사촌 연안군을 고려왕으로 삼을 것 같아서 무척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39세의 한창 나이에 양위를 하는 무리수까지 두었건만, 원나라 조정은 충선왕의 체류를 허가하지 않았다.

  일단은 새로 왕이 된 아들과 함께 귀국하는 수 밖에 없었다.  복위하고 3개월만에 고려를 떠난 뒤, 5년만의 귀국한 것이다.  이 때 귀국길에 동원된 수레가 142채였고, 충선왕을 배웅하도록 인종, 흥성태후, 중서성(원나라 최고 정책 결정 및 집행 기구), 그 밖의 원나라의 주요기관에서 보낸 관리를 모두 합치면 100명이 넘었다.  비록 충선왕 보고 귀국하라고 등을 떠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원나라 황실과 조정이 충선왕을 우대하며 그 예우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년만에 돌아온 자신의 나라에서, 충선왕은 여전히 원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귀국하고 2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 다시 원나라로 가고 싶다고 인종에게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하지만 귀국한지 8개월만인 1314년 1월에 결국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 때 원나라로 가면서 충선왕이 본 고려땅이, 충선왕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고려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두 번 다시 고려땅을 밟지 못 하고 원나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충선왕은 상상이나 했을까...

 

  원나라로 돌아간 직후에 충선왕은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했다.

  사실, 그 전부터 이미 원나라 학자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식으로 만권당을 짓고 조맹부(趙孟頫) 등 원나라 학자들과 이제현(李齊賢) 등 고려 학자들을 모아 문예활동을 펼친 것은 이 때부터다. 

 

  저자는, 충선왕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실록' 185책을 원나라의 사저로 반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때는 아직 복위하기 전으로, 아버지 충렬왕과의 권력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몇 달이 지난 1307년 11월이었다.  이 때 가져간 고려왕조실록을 5년이나 지난 후에야 고려로 반환했다.  1314년에는 고려왕조실록의 요약본을 편찬하게 했는데, 저자는 이 요약본이 함부로 반출할 수 없는 귀중한 원본을 대신해 원나라로 가져가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저자의 해석대로, 5년간 대도에 보관했던 고려왕조실록 원본과 그 후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요약본은, 원나라 학자들에게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데 사용했던 것 같다.  요즘으로 치면, 만권당이 해외의 한국문화원 비슷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또한 충선왕이 만경당 활동을 본격화 한 후 중국 서적이 대규모로 고려에 반입되면서, 남송시대 정립된 성리학이 고려로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중국 강남에서 중국의 경서 10,800권을 사들여 고려로 반입한 일이 있었다.  지금처럼 출판작업이나 서적구입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에, 1만권이 넘는 책을 구입해서 바다 건너로 보내는 것은 큰일이었다.  저자는 이 일을, 원나라 인종의 지원을 받아 충선왕이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나라 태자부의 무관으로 있던 고려인 홍약(洪瀹)이 이 일을 담당했다는 점이 그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홍약은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경까지 가서, 태자부 무관의 임무와 별 상관없는 이 일을 처리했다.  이는 누군가(아마도 충선왕과 인종) 홍약에게 이 일을 처리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리고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 후에 홍약의 요청으로 인종이 4371권의 책을 고려로 보내주는데, 이 책들은 원나라에게 멸망한 남송 황실의 비각에 소장되었던 것들이다.  중국 북부는 일찍이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정복당한데다가, 그 이전에도 벌써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차례로 정복당했다.  하지만 강남(우리가 흔히 '양쯔강' 이라고 하는 '장강' 의 남쪽 지역)은 남송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한족의 학술 및 문화가 융성했고, 성리학이 정립하게 되었는데, 그런 성리학 서적을 포함한 강남 서적 수천 권이 그대로 고려에 전해진 것이다.

 

  만권당은 원나라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일단, 충선왕은 학자들과 '사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만권당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권당에 모여 학문을 연구하며 교류하는 인물들이, 원나라 조정의 관직을 맡고 있는 사람(사실 충선왕 스스로도 원나라 태자의 스승인 태사라는 고위 관직을 맡고 있었음.) 또는 원나라에서 유명한 문인들이다 보니, 의도했든 아니든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 언급된 두 가지 예를 보자면, 과거제 도입과 파스파 사당 건립 문제가 있다.  과거제는 그 전에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지배계층인 몽골족이 반발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 때 만경당에서 활동하던 여러 한족 출신 유학자들의 주도로, 결국 과거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티벳 불교계의 고승이며 파스파 문자 창시자로도 유명한 파스파의 사당을 건립해서 공자과 동급으로 기리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서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만경당에 모인 이들이 유학자다 보니, 충선왕이 유학자들의 입장에 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절은 충선왕 인생에서 절정기였다.

  인종은 충선왕에게 원나라 승상 지위를 맡겠느냐는 제의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정치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자 하는 마음에 사양해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제의를 받을만큼,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의 돈독한 심임을 받고 있었고 능력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313년 고려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1316년에는 심왕의 지위마저 조카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준 상태이건만,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며 여전히 전지를 통해 고려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왕으로 물러선 충선왕이 계속 고려 국정에 관여하는 것은, 당연히 아들 충숙왕과의 사이에 알력을 일으켰다.

  충숙왕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허수아비 임금 노릇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왕이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충숙왕을 둘러싼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충렬왕-충선왕 사이에 벌어졌던 부자간의 권력투쟁이, 충선왕-세자 감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충선왕-충숙왕 사이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 말년 - 실각 / 죽음

 

  1320년, 원나라 인종이 세상을 뜨고 그 아들 영종(英宗)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20살도 안 된 젊은 황제는, 큰아버지(무종)과 아버지(인종) 치세 내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할머니 흥성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영종 세력과 흥성태후 세력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충선왕은 흥성태후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영종 세력의 목표물이 되었다.  충선왕 스스로도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황제와 황실의 안녕을 위해 명산대천의 절을 찾아 향을 피우고 기도하겠다는 것을 명분 삼아 강남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1320년 6월, 충선왕은 금산사라는 절에서 영종이 보낸 신하와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이 때 충선왕을 따르던 고려 신하 중 몇몇 사람은 음독 자살을 하고 나머지는 도망쳐버렸다.  모두들 '지금 이대로 끌려가면 끝이다.'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대도로 압송된 충선왕은 극형은 면했지만, 토번(현재의 티벳)의 사스카라는 머나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유배지 사스카는 대도에서 1만 5천리나 떨어진 변방이었다.  유배지에서 겪을 고생은 둘째치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유배지까지 가는 것만해도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1320년 12월 대도를 출발했는데, 충선왕을 수행하는 자들에게도 이 길은 죽음의 길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방연이란 하급장교와 방원이란 환관(이 두 사람은 형제임.)이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충선왕을 죽이고 도망치려고 음모를 꾸민 사건이 일어났을 정도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대도를 출발한지 10개월이나 지난 1321년 10월에야 겨우 유배지에 도착했다.

 

  충선왕의 실각은 고려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단, 그 동안 충선왕을 믿고 비리를 저질렀던 충선왕 측근들이 벌을 받게 되었다. 

  충숙왕은 그들의 전횡을 못마땅해하면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아버지 충선왕의 눈치를 보느라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충선왕이 권력을 잃었으니, 죄를 지은 충선왕의 측근들을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충숙왕 입장에서도, 충선왕의 실각은 아버지의 그늘에게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충선왕을 제외하면 원나라 황실과 닿는 연결고리가 없는 탓에, 충선왕의 실각으로 충숙왕 자신도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충숙왕도 원 간섭기의 다른 고려왕처럼, 원나라 황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했다.  문제는, 충숙왕비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가 결혼 3년째 되던 해인 1319년(충선왕의 실각이 있기 바로 전해)에 급사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복국장공주의 사망이 남편인 충숙왕의 구타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와서, 원나라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조사를 한 일이 있었다.  어찌어찌 해서 이 일을 겨우 무마하기는 했지만, 원나라 공주를 때려죽였다는 혐의를 받은 충숙왕의 입지는 무척 좁아졌다.  그런데 이제 원나라 황실과 조정에서 우대받던 아버지 충선왕마저 실각한 것이다.

  결국, 충선왕이 고생하며 유배지를 향해 가고 있던 1321년 4월, 충숙왕은 영종의 명령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4년이나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충선왕이라는 바람막이가 사라진데다가, 이 틈을 타고 야심만만한 사촌 왕고(원래 '연안군' 이었다가 충선왕에게 심왕 지위를 물려받은 바로 그 인물.)가 고려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충숙왕은 목숨과 왕위 모두를 위협당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 조정은 충숙왕파와 심왕파로 나뉘어져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1323년에 갑자기 충선왕은 유배형에서 풀려나 대도로 돌아왔다.

  원나라 정계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뜬 흥성태후의 측근들이 영종을 암살하고, 태정제(泰定帝)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충선왕은 이 사건으로 3년만에 대도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돌아왔지만 모든 상황이 이전과 같지 않았다.  충선왕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던 흥성태후와 인종이 모두 세상을 뜬 상황이라, 실각하기 이전만큼 높은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  충선왕은 고려 조정의 혼란을 수습하겠다며 다시 전지정치에 나섰지만, 이미 권력을 잃은 뒤라 충선왕의 명령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충선왕은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아들 충숙왕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1324년에 충선왕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충숙왕은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를 다시 왕비로 맞았다.  그리고 다음해 충숙왕은 억류생활 4년만에 고려로 돌아가게 되었다.

 

  1325년 5월, 공교롭게도 충숙왕이 고려 개성에 도착하던 바로 그 날에 충선왕은 원나라 대도에서 세상을 떴다.

  51년의 인생 대부분을 원나라 대도에서 보냈던 충선왕은, 죽음도 고국인 고려가 아닌 원나라 대도에서 맞았다.  비록 자연사라고는 하지만, 파란만장했던 인생만큼이나 그 죽음의 상황도 극적이다.  아들이 고려 수도에 도착하던 날에, 자신은 원나라 수도에서 죽음을 맞다니...  그렇게 출생부터 사망까지 남달랐던 충선왕은, 죽은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와 묻혔다.

 

 

 

정리하며 - 모순투성이 시대에 모순투성이의 삶을 살았던 왕, 그래서 매력적인 왕

 

 

  먼저번 포스트와 이번 포스트에 걸쳐 다룬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라는 책은, 대중역사서라고는 하지만 절대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일단, 본문만 약 530페이지나 될 정도로 책 자체의 양이 만만찮다.  게다가 안에 담은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을 정도다.  오죽하면 이 책을 인상깊게 봤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조차, 이 책이 너무 세세한 내용까지 다 담아서 좀 지루하다는 점을 단점으로 들었을 정도다. ^^;;

  나는 이 책을 두 번 정독하고서 이 포스트를 썼고, 포스트를 쓰는 내내 수시로 이 부분 저 부분을 다시 들쳐봤다.  하지만 과연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을 얼마만큼이나 소화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수월하게 대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유독 길었던 장마와 그 장마 후에 닥친 폭염으로 고생했던 올해 여름, 이 책 덕분에 그나마 더위를 덜 느꼈던 것 같다.

  두 개의 포스트에 걸쳐 장황하게 설명하고도 사실은 빼먹은 부분이 많을 정도로, 충선왕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하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참 모순투성이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 파란만장하고 모순투성이었던 인생 때문에 충선왕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사실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이 모순을 떠안고 살아간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한 나라의 최고 자리에 있었던 충선왕의 삶이 유독 모순투성이였던 점이, 거부감을 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호기심 및 친숙함과 함께 연민에 가까운 관심까지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충선왕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독특해서, 그 시대 역시 모순투성이다.

  사실, 우리 역사를 보면, 외국의 군사적 침략 또는 정치적 압력으로 위기에 처한 때가 이 때만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벌어진 일로 36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가 있었고, 그 전에는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직접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그 시대에 우리나라가 독립국이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명쾌하게 답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에는 아예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병합당했으니, 분명히 독립국이 아닌 식민지였다.  병자호란 후에는 비록 '삼전도의 치욕' 이라는 일을 겪으며 항복하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거나 조선은 청나라와 구분되는 별개의 국가였다.

  그에 비해, 원 간섭기는 정말 특수하고 복잡미묘한 시대였다.  원 간섭기는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했던 시대로, 당시 고려는 원나라에 완전히 합병된 상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독립국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원나라의 행정기구가 고려에 설치되고 원나라 관리들과 군대가 주둔한 것을 보면 병합된 상태 같기도 한데, 입성책동이 몇 번이나 벌어진 것을 보면 별개의 국가 같기도 하고...)

  보통 이 시대의 우리나라를 '속국' 이니 '부마국(駙馬國 : 사위나라)' 이니 하지만, 그런 용어만으로 이 시대를 다 정의할 수 없다. 워낙 여러가지 요소, 특히나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이 뒤섞여 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일본 원정에 동원되고 원나라에서 요구하는 온갖 공물 및 공녀와 환관을 바쳐야 했으며, 원나라의 결정으로 여러 왕이 폐위되었다 복위되는 등, 굴욕과 고난의 시대였다.  동시에, 온갖 외래문물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우리의 문물을 외부로 내보내는 등, 고려 시대 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서 국제적인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충선왕이란 인물은 이런 모순투성이 시대에 태어나 모순투성이 인생을 살다 간 왕이다.

  충선왕은 사실상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 셈이고, 또한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도 하는 등, 도덕적으로 따졌을 때는 결코 '선한 사람' 이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충선왕에게 거부감보다 관심을 더 느끼는 것은, 충선왕이라는 인물이 모순적인 시대가 낳은 아들이며 모순적인 시대의 상징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독자적인 문화를 간직하던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 온갖 간섭을 받아야 하는 모순적인 시대에, 두 나라의 왕실의 모순적인 결합으로 태어나, 모순적인 인생을 살다간 왕...  한 나라에서는 왕이라는 자리에 오르고 다른 한 나라에서는 황제의 최측근이 되어,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던 왕...  그러나 두 나라 어느 쪽에도 완벽하게 소속될 수 없었던 외로운 왕...  그 왕이 바로 충선왕이다.

 

 

 

덧붙임 - 이 책 속의 오류 좀 짚고 넘어가자면...

 

 

  ◎ '제1장 부마 국왕과 세자' 속 원나라 성종의 연령

 

  '제1장 부마 국왕과 세자' 중 115페이지에서, 원나라 성종이 즉위할 때 40세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한참 뒤에 나오는 '제3장 책량, 혼미한 정치' 중 271페이지에서는, 성종이 즉위할 때인 1294년에 29세, 사망할 때인 1307년에 42세인 것으로 나와 있다.  즉, 같은 책이건만,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오는 성종의 연령이 다르게 되어 있다.

  성종은 1265년도에 출생했기 때문에, 즉위년과 사망년에 만으로 29세 및 42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115페이지의 연령이 잘못된 것이다.

 

 

  ◎ '제3장 책량, 혼미한 정치' 속 오자

 

  1권과 2권 사이의 시간 간격이 너무 길어서 2권을 급하게 출판하느라 교정을 제대로 못 봤는지, 간간이 오탈자가 눈에 띈다.

  그나마 다른 오탈자는 한 번씩만 나오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오자는 책을 읽으면서 눈에 무척 거슬렸다.

 

  '제3장 책량, 혼미한 정치' 중 249페이지에서 254페이지까지, 몇 번이나 나오는 '옥새' 라는 단어가 전부 '옥쇄' 로 표기되어 있다.

  두 단어는 완전히 다른 뜻이다...!  일단, 옥새(玉璽)는 '왕의 도장' 을 말하는 것으로, 국가의 최고권력 및 왕위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리고 옥쇄(玉碎)는 직역하면 '옥처럼 찬란하게 부숴지다' 는 뜻인데, 구차하게 목숨에 연연해 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장렬히 죽는 것을 말한다.

  좀 초점이 다른 이야기인데, 옥쇄라는 말 자체는 원래 특별히 나쁜 단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묘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비겁하게 적에게 항복하지 말고 천황 폐하를 위해 옥쇄하자!' 하며 선동한 것으로도 모자라, 민간인에게까지 옥쇄라는 이름으로 집단자살을 강요하는 만행을 저지른 일로, 이 단어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옥쇄 하면 자연스레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이 떠오를 정도다.  그러니 '옥새' 란 단어와 '옥쇄'란 단어를 더욱 잘 구분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작년에 원 간섭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신의' 가 방영할 때에도 이 옥쇄란 단어와 관련한 문제가 있었다.

  그 드라마에 최영(이민호)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공민왕(류덕환)의 옥새를 탈취하는 장면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상의 사건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님!)  그런데 그 내용을 소개하는 연예 기사마다 줄줄이 '옥쇄' 라고 써놓았다.  관련 기사 중 한두 개만 그랬다면야 네티즌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 저 기사 할 것 없이 죄다 그렇게 나왔다. -.-;;

  그래서 네티즌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글쓰는 게 직업인 기자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요즘 학교에서는 국어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는 거냐', '정치인들이 아륀지 타령하며 영어공론화 따위나 떠들어대니 기자란 사람들도 국어 실력이 이 모양이다.' 라는 댓글을 줄줄이 달며 개탄했더랬다.

 

  내가 구입한 책이 초판의 1쇄인데, 부디 다음 2쇄에서는 이런 오탈자들이 수정되어 나오기를 바란다.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처럼 3쇄까지 찍어내도록, 오류가 그대로 방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원 간섭기(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그런데 책이 많이 팔려야 2쇄가 나오지... ^^;;

  고려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이 책 구입을 강추하겠다!  오탈자가 좀 있고, 워낙 두껍다 보니 2만원이 넘어가지만, 내용이 워낙 충실해서 구입한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원 간섭기(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http://blog.daum.net/jha7791/15790987)

이승한의 '고려 무인 이야기' / 품절된 책 찾아 삼만리(http://blog.daum.net/jha7791/15791171)

이승한의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3권이 드디어 나온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227)
이승한의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 출간, '몽골제국과 고려' 시리즈 완간...!(http://blog.daum.net/jha7791/15791511)

격동의 시대를 산 형제의 비극 -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http://blog.daum.net/jha7791/15791035)

김이령의 '왕은 사랑한다' - 보기 드문 충선왕 관련 소설(http://blog.daum.net/jha7791/1579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