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관련 책, 유적지, 기타

원 간섭기(3)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上)

Lesley 2013. 9. 1. 00:01

 

  지난 포스트에 이어, 이번에도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를 소개하려 한다. 

  지난 번에 소개한 것은 '몽골제국과 고려' 시리즈 1권인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이었고, 이번에는 2권인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다.

 

원 간섭기 고려(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작가님, 출판사 사장님, 이 시리즈 출판 속도 좀 높여주시면 안 되나요?

 

 

  그런데 이 시리즈의 출판 속도는,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나를 힘 빠지게 한다.

  1권인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이 2009년 5월에 나왔는데, 2권인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가 2012년 11월에 나왔다.  1권과 2권의 출판일 간격이 무려 3년 6개월이나 된다...! -0-;;  저자의 집필 속도가 거북이 수준인 것인지, 출판사 사정으로 출판이 늦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느려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느릴 수가 있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 속도로 나간다면...

  3권인 충숙왕(忠肅王)에 대한 책은 2016년 5월쯤 나올테고, 4권 충혜왕(忠惠王)에 대한 책은 2019년이 다 저물어갈 때에나 나올 것이다.

  원 간섭기의 왕 중 내가 가장 관심 갖는 공민왕(恭愍王)에 대한 책은 언제 출판될런지, 계산하는 게 무서울 정도다.  공민왕에 앞서 왕이 되는 충목왕(忠穆王)과 충정왕(忠定王)이 어린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뜬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두 왕에 관한 책은 따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즉, 공민왕에 대한 책 앞부분에서, 충목왕과 충정왕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는 것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정하더라도...  공민왕에 관한 책은 무려 2023년에야 출판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럴 수는 없어...! ㅠ.ㅠ)

 

  제발 속도 좀 팍팍 올려줬으면 한다.

  이렇게 늦게 출판되는 데에는, 무언가 불가피한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독자를 생각해서 출판 간격 좀 어지간한 수준으로 조절해주기를 바란다.  (이 독자, 3권 출판을 기다리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고 외쳐봅니다...! ㅠ.ㅠ)

 

 

※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1권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관련 포스트에도 썼지만...

  2권인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에 관한 이 포스트도 책 내용을 그대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 아니다!  사실관계는 최대한 책의 내용을 따르되,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많이 들어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니, 이 포스트에 책 내용과 다른 점이 있다고 따지지 말기를...!

 

 

 

우리 역사에서 가장 독특했던 군주, 충선왕(忠宣王) - 上

 

 

  ◎ 극적인 삶을 산 충선왕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를 다 읽고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 지금까지 충선왕의 일생을 다룬 역사소설이나 사극은 없는걸까?' 였다.

 

  그만큼, 충선왕의 인생은 한 개인으로서나 왕으로서나, 모두 파란만장하고 극적이다.

  국제결혼으로 태어나 부모의 불화 속에서 성장했으며, 어머니에게는 효심이 깊었지만 아버지와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다른 여인 때문이라며 아버지를 탓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정작 자신도 아내와는 심한 불화를 겪으면서 다른 여인들만 아꼈다.  10년에 걸쳐 아버지와 처절한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결국 승리하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큰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작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동시에 조카로 하여금 작은 아들의 왕위와 목숨을 위협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쯤 되면 심리학자나 교육학자에게 매우 유용한 인물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떠하네, 아들의 성장에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이 어떠하네, 올바른 가정에서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네, 자식은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게 되는 경향이 있네, 불행한 가정사는 대를 이어 반복될 가능성이 크네 등의 이야기를 할 때, 구체적인 사례로 들기에 딱인 인물이 아닌가...!

 

  이런 복잡다난한 인생을 살다간 왕이라면, 역사소설 내지는 사극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역사기록이라는 뼈대 위에, 글솜씨 좋은 작가가 상상력이라는 살을 적절하게 발라준다면...  기존의 역사소설이나 사극에서 무슨 곰탕 수준으로 계속해서 우려낸 '영조-사도세자' 또는 '숙종-인현왕후-장희빈' 의 사연보다 몇 배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왜 없느냔 말이다...! ㅠ.ㅠ  원 간섭기가 우리로서는 자랑스럽지 못 한 시대라서 일부러 외면하는건지...  아니면 충선왕에게 흥미를 갖고 있는 소설 작가 또는 드라마 작가가 있기는 한데, 조선시대에 비해서 참고할 수 있는 기록이 워낙 적어서 손 댈 엄두를 못 내고 있는건지...  어느 쪽이든,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 출생 - 남다른 출생과 독특한 인생 

 

  고려 제26대 왕인 충선왕(忠宣王)은 고려 시대 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다른 어떤 시대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왕이다.

 

  충선왕은 1275년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과 그 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충렬왕은 고려의 임금 중 처음으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어머니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의 딸이다.  부모가 이러한 남다른 이력을 지녔기에, 충선왕의 출생 또한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충렬왕은 국제결혼으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국제결혼이 아닌, 정략결혼 말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이름인데, 충선왕의 이름에는 특별한 출생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충선왕은 고려 이름 뿐 아니라 외국 이름도 갖고 있었다.  고려 이름은 원래 원(願)이었는데, 나중에 장(璋)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몽골 이름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 '어린 황소' 또는 '젊은 황소' 라는 뜻임.)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외국 이름을 따로 갖게 된 경우는, 아마도 충선왕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제31대 공민왕 때까지, 고려의 왕은 모두 고려 이름 외에 몽골 이름도 갖게 됨.)

 

  충선왕의 남다른 인생은 이러한 독특한 출생 상황에서 이미 운명지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와 원나라 양쪽의 피를 받고 태어난 충선왕은, 평생 동안 두 나라를 오가며 살았다. 

  친가는 고려 왕실이고 외가는 원나라 황실이기에, 두 나라의 최고 지배층 인사들과 사적이로든 공적이로든 교류하며 살았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왕으로서, 원나라에서는 황제를 옹립한 으뜸가는 공신으로서, 두 나라의 정계에서 활약했다.

  또한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두 나라의 뛰어난 학자들을 초빙하여, 두 나라의 문화교류에 힘쓰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동안, 두 나라 중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소속되지 못 했다. 

  충선왕은 고려에서는 최초로 외국 출신 왕비에게서 태어나 외국 문화에 경도된 이질적인 왕이었다.  반대로 원나라에서는 원나라 변방에 있는 작은 속국의 왕이었다.

  그리고 고려의 국왕 또는 상왕으로 있던 시절 중 불과 1년을 겨우 넘기는 기간만 고려에 머물렀을 정도로, 원나라 생활에 무척 집착했다.  하지만 원나라에 머물기 위해 고려 왕위에서 물러나는 무리수를 두면서도, 동시에 고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도 못 했다.

 

 

  ◎ 아동기 - 아버지와의 갈등 시작

 

  충선왕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을 보면, 충선왕은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하는 등 좋은 왕이 될만한 소질을 갖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겨우 9세의 나이에 신분제 사회에서 최고위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아이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호화로운 옷과 백성들의 초라한 옷을 비교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궁궐의 노비가 궁 밖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 자신에게 바치자 화를 내며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앞날이 기대되는 어린 세자 충선왕이 자기 아버지인 충렬왕과는 무척 껄끄러운 사이였는데,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아버지 충렬왕과 사이가 좋지 못 했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충선왕이 어머니와는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가 40세도 안 되어 세상을 뜨자, 아버지가 무척 아끼던 무비(無比)라는 여인 때문이라며 무비를 죽여버렸다. (그렇다고 무비가 제국대장공주를 암살하거나 한 것은 아님.)  물론 이 일은 부자간 권력투쟁의 성격도 강하기는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사를 종종 일으키는가 하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면 어머니의 영정을 제일 먼저 찾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해서는 절절했다.

  이렇게 어머니와 무척 친밀했기 때문에, 남편 충렬왕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 했던 제국대장공주가 평소 했던 말과 행동(당연히 충렬왕을 비판 내지는 비난하는 내용의 말과 행동이었을 것임.)이 어린 세자 충선왕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둘째, 위에 이미 언급했듯이 어려서부터 사리분별이 분명했기에, 유흥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충렬왕이 툭하면 화려한 연회를 열고 대규모의 사냥을 과도하게 즐겼기 때문에, 민폐가 극심했고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그런데 충렬왕이 또 사냥을 떠난다고 하자, 9세 밖에 안 되는 세자 충선왕이 울면서 "지금 백성들은 곤궁하고 봄 농사가 시작되었는데, 부왕께서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시는가?" 라고 했다.  그리고 평소 충렬왕의 사냥을 부추키던 '박의' 라는 간신의 면전에 대고 "항상 매와 사냥개를 끌고 우리 임금을 따라다니며 아첨하는 자가 바로 이 늙은 개다." 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깊이 박힌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훗날 아버지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 청소년기 - 원나라 숙위(宿衛) 생활

 

  충선왕은 16세 때부터 원나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전에도 부모를 따라 원나라에 몇 번이나 갔지만 길어야 몇 달 체류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16세부터는 그 후의 다른 고려왕이 즉위하기 전에 그러했듯이, 부모와 떨어져 본격적인 숙위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충선왕은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보내게 된다.  16세부터 사망하게 되는 51세까지의 긴 세월 동안, 겨우 2년 반 정도만 고려에서 보냈을 뿐이다.

  한창 민감한 청소년기 및 인생관과 정치관이 확립되는 청년기를 원나라에서 보내면서, 충선왕은 정치적.문화적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경도된 또 다른 이유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인상이 너무 달랐던 점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충렬왕은 향락에 젖은 생활을 하며 국정을 간신들에게 내맡기다시피 했다.  그래서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에게, 아버지로서도 왕으로서도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외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외손자 충선왕이 본보기로 삼을만 했다.  그래서 원나라에 머물면서 쿠빌라이 칸을 존경 또는 동경하는 마음이 커졌을테고, 자연히 원나라에 점점 경도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쿠빌라이 칸의 개인적인 품성과 황제로서의 모습에 대해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막 숙위를 시작했던 때, 즉 쿠빌라이 칸은 76세고 충선왕은 16세였던 때의 일이다.

  쿠빌라이 칸이 충선왕과 대화를 하던 중에 충선왕이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정가신(鄭可臣 : 고려의 문신으로 역사와 문장에 뛰어났는데, 충선왕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했고 원나라에 함께 가기도 했음.)을 불러오게 했다.  외손자인 충선왕과 대화를 할 때, 쿠빌라이 칸은 편한 옷차림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충선왕이 정가신을 데리고 다시 오자, 쿠빌라이 칸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  그리고 "네가 비록 세자라 하나 나의 외손자요, 저 사람은 제후의 신하라 하나 유학자다.  어찌 (나로 하여금)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정가신을) 대하게 한단 말이냐?" 라며 충선왕을 꾸짖었다.  이 날 쿠빌라이 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가신에게 고려의 역사와 풍속, 역대 정치의 잘잘못에 대해 온갖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다.

  쿠빌라이 칸은 정가신의 지식 수준이나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 후에도 정가신의 생각을 자신의 정책에 참고하곤 했다.  교지국(현재의 캄보디아)을 정복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나,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수로를 개척할 생각을 하면서, 정가신의 의견을 물었다.

 

  이런 일화에서 쿠빌라이 칸의 개인적인 모습과 통치자로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최고 권력자가, 자기 직속의 신하도 아닌 군사력으로 굴복시킨 속국의 신하를, 예의를 갖추어 정중히 대한 것이다.  상대방이 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부정적인 영향(고려 내정에 간섭하기, 일본 원정에 강제로 참여시키기, 각종 조공이나 공녀 바치게 하기 등등)을 끼쳤던 것과 별도로, 쿠빌라이 칸 개인의 인품은 보통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가신을 하루 종일 붙들어 놓고 고려의 역사.문화 및 역대 정치를 주제로 질문과 답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76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지식욕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정가신에게 하루 종일 고려의 역사와 풍속을 묻고서 나중에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수로를 개척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자신이 알게된 고려에 대한 지식을 고려 관련 정책에 반영했음을 의미한다.  역사상 많은 통치자들이, 학문적 지식과 실질적 통치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관련성은 인식해도 학문을 어떻게 통치에 연결시켜야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어떤 지역을 통치하려면 그 지역의 역사 및 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러한 지식을 통치에 이용했다. 

 

  충선왕은 16세부터 원나라에서 지내며, 외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이런 쿠빌라이 칸의 모습은 충선왕에게 무척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자연스레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교하면서 아버지에 대해 더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 청년기 전반(1) - 아버지와의 권력투쟁 시작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세상을 뜨고 그 손자인 성종(成宗) 테무르가 즉위했다.

 

  새 황제 성종은 처음부터 충렬왕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다음 해인 1295년에는 21세가 된 고려 세자 충선왕에게, 고려 국왕인 충렬왕 대신 몇 달 동안 고려의 국정을 맡게 했다.  이런 성종의 태도는,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 사이는 물론이고 고려 정계에도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 책의 저자는, 성종이 충선왕 쪽에 힘을 실어준 이유를, 이제 막 즉위한 젊은 황제의 정치적 입장 때문으로 보고 있다.  충렬왕이 국내 정치에서는 실정이 많았지만, 전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는 변경 통치의 파트너 역할을 잘 해냈다.  그래서 쿠빌라이 칸에게 신하로서나 사위로서나 돈독한 신임과 후한 대접을 받았다.  또한 사적으로 따지자면 제국대장공주가 성종의 친고모이기 때문에, 충렬왕은 성종에게 고모부가 된다.  새로운 황제 입장에서는, 전 황제에게 크게 우대를 받았고 자신보다 항렬도 높은 인척인 충렬왕이 정치적으로 거북했기 때문에, 충렬왕을 견제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지금도 대통령이 바뀌면, 같은 당 사람이라도 옛 정부의 사람들을 그대로 두는 것은 여러가지로 곤란하지 않나...)  

 

  1296년에 원나라 대도(大都 : 원나라의 수도였던 현재의 베이징)에서 고려의 세자 충선왕이 원나라의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결혼했다.

  계국대장공주는 성종의 큰형인 진왕(晉王) 카말라의 딸이다.  저자는 이 결혼이 진왕-성종 형제의 모후인 유성황후(裕聖皇后 : 황제가 못 되고 일찍 죽은 친킴 태자의 아내인데, 충선왕에게는 외숙모가 되고 충선왕에게 '이지리부카' 라는 몽골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음.)의 의지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황위계승에서 밀려난 큰 아들 진왕을 다독여서 두 아들 사이에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진왕으로 하여금 고려의 왕위 계승자를 사위로 삼을 수 있게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바로 전해에 충선왕이 아버지 대신 국정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원나라 공주와 결혼까지 하게 되자, 고려 정계의 권력 흐름이 충선왕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에서 충선왕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나라에서 열린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고려로 돌아와 곧 병이 들더니, 돌아온지 겨우 보름만에 세상을 뜬 것이다.  당시 39세 밖에 안 되었고, 먼 원나라까지 가서 아들 결혼도 잘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으니, 누구도 예상 못 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비가 갑작스레 죽었다는 사실 자체로도 큰일인데, 이 큰일은 더 큰일을 불러일으켰다.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한 충선왕이, 아버지가 총애한 여인 무비(無比)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것이라며 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충선왕은 무비와 충렬왕의 측근 내관 6명을 죽이고, 40명이 넘는 다른 측근들을 귀양보냈다.

 

  충선왕이 아버지의 여인과 측근들을 처단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행동일 뿐 아니라, 쿠데타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왕조시대에 최고 통치자인 왕의 승낙 없이 왕의 여인과 측근을 죽이고 귀양보낸다는 것은, 사실상 왕에 대한 무력시위 또는 정변이다.  이것은 분명 정치적인 의도가 섞인 조치였다.  더구나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무비와 측근들의 처단을 연기하자고 했건만, 그런 충렬왕의 의사를 깨끗이 무시한 채 이런 조치를 전격적으로 해치웠다.  왕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당시 세자 충선왕의 권력이 국왕 충렬왕의 권력을 능가했다는 뜻도 된다.

 

 

  ◎ 청년기 전반(2) - 갑작스런 즉위와 갑작스런 폐위

 

  결국 다음 해인 1298년, 충렬왕은 아들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원나라의 성종에게 보낸 양위 요청 표문에서는,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잃어 슬픔이 너무 큰데다가 늙기까지 해서 국정을 돌볼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원래 제국대장공주와의 금슬이 좋지 못 했다는 점, 환갑을 넘은 나이였지만 그 후로도 10년이나 건재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짜 이유라고 보기는 힘들다.

 

  대내외적 상황이 모두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이 양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내적으로, 고려 조정에서 충선왕 지지세력이 불어났다

  위에도 썼다시피 선왕은 아직 세자였던 21세 때 아버지 대신 국정을 담당한 적이 있다.  그 기간은 겨우 몇 달 밖에 안 되었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충선왕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과 희망을 주었다.

  우선, 충렬왕의 측근들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또한, 충렬왕에게 외면당했던 여러 문신과 학자를 우대했다.  그래서 충렬왕 치세 동안 눌려지냈던 많은 사람들이 충선왕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 곁으로 몰려들었다.

 

  대외적으로, 원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충렬왕의 위상은 추락하고 충선왕의 위상은 높아졌다. 

  충렬왕은, 비록 비틀린 형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신정권 시대에 땅으로 곤두박질 친 왕권을 상당 부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런 왕권 강화는 원나라 황실의 사위로서 쿠빌라이 칸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그 원나라 황실의 사위라는 위상이, 장인인 쿠빌라이 칸과 아내인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희미해진 것이다.

  그에 비해, 충선왕은 애초에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로 태어난데다가, 이제는 원나라 황실의 사위까지 되었다.  즉, 원나라와 이중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니 원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충선왕이 충렬왕보다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한창 열정이 넘칠 24세의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보통의 경우, 새 임금의 즉위교서에는 앞으로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식의 일반적이고 뻔한 내용이 실리는 경우가 많다.  혹은 앞으로의 정책에 관한 내용을 담더라도, 정책의 기본적인 방향 정도나 언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자신의 즉위교서에,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27개 조항으로 나누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담았다.  이것은 충선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아버지 충렬왕 시대의 폐단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고, 그 폐단을 타파할 방법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두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그 동안 단단히 벼르며 준비해 둔 개혁안을 밀어붙이려 들었다.

 

  이런 급격한 개혁은, 개혁의 대상이 되는 충렬왕 측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충렬왕 측근들은 그 동안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상황이 되자, 충선왕을 밀어내고 충렬왕을 복위시킬 생각을 품게 되었다.

  물론 왕조시대에 최고 권력자이며 나라의 주인인 왕을 끌어내리려 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들이 역적으로 숙청당할 수도 있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하지만 충렬왕 측근들에게는 무척 다행스럽게도(?) 충선왕의 집안에서 충선왕을 잡아흔드는 일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충선왕과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불화였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하기 전인 10대 시절에 이미 3명의 고려 여인을 비로 맞아들였다.  그 중 조인규(趙仁規)의 딸인 조비(趙妃)가 있었는데,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한 후에도 조비를 무척 총애했다.

  그러자 공주가 질투심에 원나라 태후(공주에게는 할머니이며 충선왕에게는 외숙모인 유성황후)에게 편지를 썼다.  조비가 공주를 저주한 탓에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하고 자신은 멀리 한다는 내용이었다.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에게 부탁해서 공주를 달래도록 하고, 공주의 편지를 원나라로 전달하러 떠나려는 사람에게 뇌물까지 줬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계국대장공주가 보낸 편지가 원나라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기도 전에, 먼저 고려에서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궁궐문에 익명으로 쓴 방이 붙었는데 "조인규의 처(즉, 조비의 어머니)가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며, 왕이 공주는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딸만 사랑하게 한다." 는 내용이었다.  분노한 공주가 조인규는 물론이고 조인규의 처, 여러 아들 및 며느리, 사위까지 전부 잡아들였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원나라 황제 성종에게 이 일을 보고하게 했다.  이른바 '조비 무고사건' 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얼핏 보면 사극에 흔히 나오는 왕의 총애를 둘러싼 궁중 여인들의 암투 같지만, 이 사건의 실상은 권력투쟁이었다.

  문제의 방이 궁궐문에 붙은 시기가, 충선왕이 주도한 관제개혁과 인사발령이 있은지 겨우 10여일 지난 때였다.  그리고 그 인사발령에서, 조비의 아버지 조인규는 시중(신하들의 수장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지위임.)으로 임명되었다.  즉, 새로운 인사발령으로 충선왕의 개혁을 실행할 조직이 완성되었고, 그 조직이 이제 막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그런 시기에 갑자기 그 조직의 수장은 물론이고 수장의 가족까지 한꺼번에 역모에 버금가는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충렬왕 측근들이 충선왕의 개혁정책을 저지하고 충선왕을 왕위에서 밀어내기 위하여, 충선왕의 측근이자 개혁조직의 우두머리인 시중 조인규를 제거하려는 계략을 짠 것이다.  다만, 신하의 입장인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면 오히려 충선왕에게 당할 위험이 크니, 계국대장공주의 질투심과 분노를 자극해 원나라의 힘으로 충선왕을 끌어내리려 한 것이다. 

 

  이 엄청난 사건은 고려 왕실과 조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공주의 편지를 받은 원나라 태후가 사신을 보냈고, 얼마 후 성종도 원나라의 고위관리들과 기마병 100여명을 보냈다.  태후가 보낸 사신은 조비까지 감금했고, 성종이 보낸 원나라 관리들은 조인규 일가를 혹독하게 심문했다.  그 과정에서 이 사건의 본질이 '치정' 이 아니라 '정치' 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연달아 생겼다.

  원나라 관리들은 조인규의 처가 공주를 저주했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만 조사한 게 아니라, 고려 조정의 인사발령 및 관제개혁에 관련된 서류까지 압수해서 조사했다.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실의 금은보화를 보관하는 생성고를 봉쇄하여, 충선왕의 왕권을 사실상 정지시켜 버렸다.

  이 와중에, 위에서 소개한 쿠빌라이 칸의 일화에 나오는 충선왕의 스승 정가신이 갑자기 죽는 일까지 생겼다.  정가신이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책의 저자는, 충선왕 지지파가 벼랑 끝에 몰리자, 충선왕 지지파의 중심인물인 정가신이 어차피 자신도 화를 입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살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마침내 끔찍한 고문을 못 이긴 조인규의 처가 거짓 자백을 했다.  그래서 조인규, 조비, 그 밖의 다른 조인규의 가족이 전부 원나라로 끌려갔다.  

 

  그 후 성종은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에게 사건의 전말을 직접 듣겠다며 소환령을 내렸다.

  충선왕 부부가 원나라로 떠나기 전에, 충선왕과 충렬왕이 모두 참석한 송별연이 열렸다.  그런데 이 송별연에서, 그저 소환령만 가져온 것 같았던 원나라 사신이 갑자기 폐위 조서를 내밀며, 충선왕의 국왕인을 빼앗아 충렬왕에게 넘겼다.  현왕의 폐위와 상왕의 복위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중대한 일이 정식으로 조정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술자리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충선왕이 즉위한 때가 1298년 1월이고 폐위당한 때가 같은 해 8월이니, 겨우 7개월 동안 재위했을 뿐이다.  개혁을 꿈꾸었던 24세의 패기 넘치는 왕은 겨우 7개월만에 권력을 잃고 밀려난 것이다.

 

  충선왕 부자가 왕위를 주고 받은 이 사건은 고려 정치에 큰 악영향을 남겼다.

  우선, 원 간섭기 동안 계속된 왕의 강제적 양위와 폐위의 선례가 되었다.  그나마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를 할 때에는, 비록 주변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위를 했다지만, 스스로 양위하겠다고 나서는 모양새라도 갖추었다.  하지만 충선왕의 폐위 때부터는, 원나라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왕이 양위를 하거나 폐위를 당했다.

  또한, 고려를 원나라에 더욱 복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 후로, 폐위된 충선왕과 복위된 충렬왕 사이에서 10년에 걸쳐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충선왕의 폐위 및 충렬왕의 복위가 원나라의 힘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 후로 계속된 권력투쟁 역시 원나라가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 밖에 없었다.  고려 정치의 중요한 일이 고려 조정이 아닌 원나라 조정에서 결정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관례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 청년기 후반 - 공주 개가 책동 / 원나라의 황위 쟁탈전 참여

 

  충렬왕 지지파는 충선왕을 폐위시킨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 했다.

  충렬왕이 복위했을 때 64세였으니, 그 시대 기준으로는 고령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충렬왕이 세상을 뜬다면 충선왕이 복위할테고, 그러면 충선왕을 왕위에서 밀어냈던 자신들이 보복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충렬왕 지지파는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라는 왕족을, 충선왕 대신 다음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다른 왕족들도 있건만 굳이 서흥후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서흥후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

  충렬왕과 충선왕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왕이 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흥후 역시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충선왕이 폐위된 후 충선왕 부부는 원나라에서 지내면서 별거를 했다.  신혼 때부터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 조비 무고사건과 폐위 사건을 겪으면서 부부 사이가 아예 회복 불가능 할 정도로 악화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충렬왕 측근들은 충선왕의 왕비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에게 반하게 만들어서, 충선왕과 이혼하게 만들고 서흥후에게 개가(改嫁 : 여자가 재혼하는 것)시킬 생각을 한 것이다. (미인계가 아닌, 미남계? -0-;;)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원나라 공주와 이혼을 하면 왕이 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즉, 공주가 충선왕과 헤어져 서흥후에게 개가하면, 충선왕은 자연스레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게 된다.  이것이 고려 관련 역사책에서 '공주 개가 책동' 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충렬왕 측근들은 공주 개가 책동만 벌인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다른 음모도 꾸몄다.

  심지어 빈 종이에 옥새만 찍어서 은밀하게 원나라로 가져간 일도 있었다. (백지 밀서 사건)  충선왕을 음해하는 내용의 문서를 공식적으로 원나라 조정으로 보내려면, 고려 조정 내의 충선왕 지지파가 반발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아무런 내용도 없이 옥새만 찍은 빈 종이를 12장이나 원나라에 숨겨 놓고, 충선왕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즉석으로 그 종이에 적당한 내용을 적어 원나라 조정에 보낸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상황에 따라 적당한 금액 써넣는 백지 수표 비슷한 것인가? -.-;;)

  결국 이 백지 밀서 사건은 실패했다.  문제의 백지 밀서가 원나라 사신 손에 들어가서, 이 음모가 고려 조정과 원나라 조정 양쪽에 다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나라 사신이 백지 밀서를 입수하게 된 과정이 참 어처구니가 없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충렬왕 측근들이 어떤 무장을 원나라로 보내서 백지 밀서를 고려로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원나라에서 고려로 돌아오던 그 무장이, 고려에서 원나라로 돌아가던 원나라 사신들과 마주치게 되면서 그 밀서를 빼앗긴 것이다. -.-;;

 

  공주 개가 책동도 그렇고, 백지 밀서로 음모를 꾸민 것도 그렇고, 그 백지 밀서 음모가 발각된 과정 역시 그렇고, 모두 황당하다 못 해 우습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 터무니없는 음모를 꾸며야 할 정도로 당시 충렬왕 지지파의 마음이 다급했던 모양이다.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며 후원자인 충렬왕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인인데, 자신들의 적인 충선왕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그러니 시간은 충선왕의 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무리수를 두었던 것 같다.   

 

  한편, 충선왕은 폐위 후 원나라에서 다시 숙위를 하면서, '카이산' 과 '아유르바르와다' 라는 원나라 황족 형제와 무척 친하게 지냈다.

  이 형제는 원나라 황제 성종의 작은 형의 아들들이니, 성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그리고 충선왕에게도 외가쪽으로 5촌 조카가 된다. (이 형제의 아버지는 충선왕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친정조카임.)  당시 이 형제는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자였는데, 성종의 황후인 불루간 황후는 다른 황족을 차기 황제로 옹립할 생각이라 이 형제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1305년이 다 끝나갈 무렵, 충렬왕이 생애 마지막으로 원나라에 갔다. 

  성종이 위중한 가운데, 다음 황위를 두고 원나라 조정과 황실이 모두 두 편으로 쪼개져 긴장감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래서 몇 년 만에 재회한 충선왕 부자의 권력투쟁이, 원나라 황실의 권력투쟁과 맞물려 돌아가게 되었다.  충선왕은 당연히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 편에 섰고, 충렬왕 측근들은 그 반대편인 불루간 황후 편에 줄을 댔다.

 

  충렬왕의 측근들은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간 김에, 어떻게든 공주 개가 책동을 성사시키려 했다.

  하지만 충렬왕이 대도에 있는 충선왕의 저택에 함께 머물다 보니, 부자 사이를 이간질 하기가 곤란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충렬왕이 넘어져 치아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이런 사고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충렬왕의 측근들은 이 일로 충렬왕을 부추겼다.  즉, 충선왕이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충선왕을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충선왕과 별거 중인 계국대장공주의 거처로 옮기자고 한 것이다. (공주 개가 책동도 그렇고, 백지 밀서 사건도 그렇고, 계국대장공주의 거처로 옮기게 과정도 그렇고, 충렬왕 측근들의 발상은 상당히 유치함. -.-;;)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충렬왕이 계국대장공주의 거처로 옮겨가자, 충렬왕 측근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원나라 황실과 조정을 상대로 충선왕을 계속 모함해서, 공주 개가 및 왕위 계승 후보자 변경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새로운 왕위 계승 후보자인 '잘생긴 서흥후' 에게 '화려한 옷' 을 입혀서 공주와 자주 만나 친해지도록 주선했다. (잘생긴 얼굴, 화려한 옷...  이건 마치, 왕 후보자가 아니라 연예인 후보자를 선발하는 것 같은... -.-;;)

  마침내 원나라의 좌승상 등 고위 관료들이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에 동의했다.  그리고 공주 또한 서흥후에게 개가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풀리는가 싶었던 공주 개가 책동은, 결국에는 실패했다.

  좌승상과는 달리 우승상은, 공주를 개가시키는 일과 서흥후를 고려 왕위 후계자로 삼는 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분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에 힘을 얻은 충선왕 지지파가 공주 개가 책동을 벌이던 무리를 원나라 조정에 고소하여, 이 음모의 관련자들이 하옥당했다. 

 

  하지만 음모가 실패한 후에도 충렬왕은 귀국하려 하지 않았다.

  공주 개가 책동의 실패로 정국 주도권이 충선왕 쪽으로 넘어갔으니, 그대로 귀국하면 꼭두각시 왕으로 살아야 할 판국이었다.  게다가 아들 충선왕이 자신을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즉, 귀국길에 자신이 탈 배를 충선왕이 몰래 침몰시키려 한다고 생각해서 더욱 귀국을 꺼렸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의심할 정도니 부자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 알 수가 있다.

  나중에는 원나라 조정에서 환송연을 베푸는가 하면 귀국길에 탈 말까지 마련해주는 등 반강제로 귀국시키려 했다.  하지만 충렬왕은 원나라의 권력투쟁 결과에 따라 자신에게도 반전의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일부러 약을 먹어 병에 걸리면서까지 귀국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계국대장공주의 압력으로 공주 개가 책동 관련자들이 석방되어, 충렬왕의 희망이 좀 더 짙어졌다.

 

  그러나 충렬왕의 바람과 다르게, 1307년 원나라 권력투쟁에서 카이산 형제가 승리했다.

  형인 카이산이 무종(武宗)으로 즉위하고,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가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형제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한 충선왕 또한 고려 권력투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충렬왕 측근들은, 충선왕을 독살하려는 극단적인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하지만 충선왕의 음식에 독을 넣을 임무를 맡기겠다며 끌어들인 사람이, 하필이면 충선왕과 은밀히 남녀관계를 맺고 있던 충선왕 저택의 여종이었다. (충렬왕 측근들의 음모는 항상 뭔가 어설프고 이상한... -.-;;)  이 여종이 독살 음모를 충선왕에게 알려서 관련자들은 다 붙잡히고 충렬왕은 대도 근처의 절에 유폐되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얼마 후 원나라 대도에서는, 공주 개가 책동 및 충선왕 독살 미수 사건 관련자들이 전부 참수당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고려의 개경에서도, 고려에 남아 있던 충렬왕 측근들이 충선왕의 명령으로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원나라에서 1년 반이나 머물며 아들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던 충렬왕은, 측근들을 모두 잃은 채 쓸쓸히 귀국했다.  그리고 충선왕 지지파로 물갈이 된 고려 조정에서 이름 뿐인 왕 노릇을 하다가, 1년 2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덧붙임 - 포스트 하나에 다 정리할 수 없는 책

 

 

  어지간하면 포스트 하나로 끝을 내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원래 이 포스트 뒷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라냈다.  그 부분과 그 뒷부분은 다음 포스트에서 소개하려 한다.  즉, 이 책은 크게 5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 중 3장까지를 이 포스트에서 다루었고, 나머지 4장과 5장은 다음 포스트로 넘기려고 한다.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1권인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은 책 제목만 봐서는 충렬왕이 주인공일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책에 나오는 여러 사건별로 주인공이 다르다.  영화로 치면 옴니버스 영화 같은 식이다.  그래서 여러 사건 중 내가 인상 깊었던 사건만 몇 개 뽑아서 각각의 항목으로 독립시켜 포스팅 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2권인 '혼혈왕, 충선왕 -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은 많은 사건의 주인공이 모두 충선왕이다.

  충선왕이라는 사람의 일대기 속에 모든 사건이 망라되어 있다.  만일 몇 가지 사건만 뽑아서 포스팅 한다면, 누군가 생선 머리와 꼬리는 어디다 내던지고 가운데 몸통만 불쑥 내밀며 "고등어는 이렇게 생겼어요." 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가 될 것이다. ^^;;

  거기다가 책의 양을 봐도, 1권은 약 370페이지인데 2권은 약 530페이지나 되어서(둘 다 본문의 양만 따진 것임.), 2권이 1권에 비해 정리하기가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억지로라도 포스트 하나에 모든 내용을 넣으려 했지만, 쓰는 나도 스크롤바 계속 내리는 것에 질린다는 느낌이 드는데, 읽는 사람들은 더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포스트로 나눠 쓸 수 밖에 없다.

 

  그럼, 뒷편은 다음에... ^^;;

 

 

 

원 간섭기(1) - 이한수의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84)

원 간섭기(2) - 이승한의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http://blog.daum.net/jha7791/15790986)

원 간섭기(4) - 이승한의 '혼혈왕, 충선왕-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004)

이승한의 '고려 무인 이야기' / 품절된 책 찾아 삼만리(http://blog.daum.net/jha7791/15791171)

이승한의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 3권이 드디어 나온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227)

이승한의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 출간, '몽골제국과 고려' 시리즈 완간...!(http://blog.daum.net/jha7791/15791511)

격동의 시대를 산 형제의 비극 -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http://blog.daum.net/jha7791/15791035)

김이령의 '왕은 사랑한다' - 보기 드문 충선왕 관련 소설(http://blog.daum.net/jha7791/1579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