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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 - 서울에 남아있는 고려왕의 흔적

Lesley 2014. 4. 17. 00:01

 

  3월 말에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 에 다녀왔다.

 

  재작년 드라마 '신의' 를 보다가, 뜻밖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고려왕조의 제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을 모신 사당이,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공민왕 사당이 있는 마포구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도성 밖 경기도에 속했다.  하지만 기차도 자동차도 없어서 배가 매우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던 그 시절에, 마포는 서울로 물자를 공급하러 각지에서 오는 배가 도착하던 주요 선착장이었다.  그러니 비록 이 곳이 도성은 아니었다지만 도성의 세력권, 즉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권 정도 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공민왕 사당이 조선왕조의 수도에 있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서울에 공민왕 사당이 있는 것이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선왕조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까지 공민왕의 신당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서울의 또 다른 곳에 공민왕 사당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종묘에 공민왕을 모신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조의 개창이 정당함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쇼(!)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 종묘 안에 있는 공민왕 신당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 종묘(宗廟)(http://blog.daum.net/jha7791/15791076)

 

  그에 비해, 이 민왕 사당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세운 사당이다. 

  지금의 마포구 창전동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공민왕을 서강(西江 : 한강의 일부인 마포강의 하류로, 서강대학교의 이름이 이 서강에서 따온 것임.)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세운 사당인 것이다.  즉, 국가 차원의 정치적 이유가 아닌, 민간 차원의 무속적인 이유에서 지은 사당이라는 데 그 특색이 있다.

 

  먼저, 공민왕 사당을 가는 길을 설명하자면...

  전철 6호선을 타고 광흥창역의 1번 출구로 나간다.  그리고 광흥창역 1번 출구 바로 옆에 있는 쌍용예가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그 아파트의 첫 번째 단지를 통과해서, 도로를 건너 두 번째 단지로 들어간다.  그 두 번째 단지에 있는 108동 뒤편으로 가면, 공민왕 사당이 있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빠끔히 자태를 드러낸 목적지...!

(왼쪽 아파트 건물이 쌍용예가아파트 108동임.)

 

  아파트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한옥이 공민왕 사당일 것 같지만... 아니다. ^^;; 

  저 한옥은 공민왕 사당 바로 옆에 있는 광흥당(廣興堂) 이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이 워낙 아담한 크기라서, 공민왕 사당과 연계해서 각종 문화행사를 치를 목적으로 작년 11월에 완공했다는 광흥당이 더 눈에 띈다. (어째... 집 주인은 행랑방으로 밀려나고 객이 떡하니 안방 차지한 느낌이 드는... -.-;;)

 

 

108동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공민왕 사당이 보임...!

 

  역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바로 앞에 크게 보이는 샛노란 나무로 지은 새 한옥이 광흥당이다.  그리고 그 왼쪽에 자그맣게 보이는(한 마디로 별 존재감 없어 보이는... -.-;;) 오래된 한옥이 공민왕 사당이다.  함께 간 친구가 왼편 구석에 있는 공민왕 사당은 미처 못 보고 정면에 있는 광흥당만 보고서 "네가 조선시대에 만든 사당이라고 해서 오래된 건물인줄 알았는데, 완전 새 건물이네!" 라고 했다. ^^;;

 

 

여기는 공민왕 사당 및 광흥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그런데 공민왕 사당을 관리하는 마포문화원과 공민왕 사당 바로 옆에 있는 광흥당은 서로 손발이 안 맞는 것 같다.

  공민왕 사당이 유명한 문화재가 아니라 인터넷에 자료가 없는 편이다.  혹시 헛걸음 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찾아가기 전날에 마포문화원에 전화를 해서 관람시간에 대해 문의했다.  그러자 전화받은 남자직원 왈 "광흥당 전화번호 알려드릴테니, 거기로 문의해보세요.  전화로 예약하지 않으면 구경 못 해요."

  그래서 예약하려고 광흥당에 전화했더니, 예약은 무슨 예약이냐며 그냥 와서 구경하면 된다고 한다. -.-;;  혹시 예약이란 게 평소 공개를 안 한다는 사당 내부 관람에 관한 것인가 하고, 다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내부 관람은 제사 때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짜잔~~! 드디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공민왕 사당!

 

  사실, 공민왕 사당도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조선시대에 지었던 원래의 건물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서, 그 후에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11월에 완공해서 아직 반년도 안 된 광흥당 건물에 비하면, 그래도 옛스럽고 고즈넉한 느낌이 든다. (광흥당은 너무 새 건물 티가 나서 가까이 가면 니스 냄새가 팍팍 풍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임... ^^)

 

 

사당 앞에 있는 안내판.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양 코 앞에 고려왕조의 왕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진 데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

  서강의 마포 일대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농수산물의 집결지였다.  전국 각지의 농수산물이 서해와 한강을 통해 이 곳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이 곳에 관리들의 녹봉을 보관하는 광흥창을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흥창 창고지기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서 "여기는 나의 정기가 서린 곳이니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번창하리라." 라고 말했다.  공민왕이 생전에 서강의 정자에서 시화를 즐겼다는 데에서 나온 전설인 듯하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서, 공민왕을 서강 선착장을 수호하는 신으로 모시며 매년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선착장 관련한 모든 일들이 무탈하게 잘 처리되었고, 소홀히 지내면 이런저런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한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사당 근처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의 꿈에도 공민왕이 나타났다고 한다.  꿈 속에서 공민왕이 일본군을 크게 꾸짖자 그 다음 날 일본군이 줄줄이 비명횡사 하는 일이 생겨서, 놀란 일본군들이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물론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을 리는 없다. ^^;;  원나라에 대항해서 자주독립의 노선을 걸었던 공민왕이기에, 국가를 수호한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 전설이 생긴 듯하다.       

 

 

사당을 둘러싼 담 옆에 있는 바위(?)에 올라갔더니, 사당이 더 잘 보였음.

(함께 간 친구가 창피하게 뭐 하는 짓이냐며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였음. ^^;;)

   

  한 가지 유감스러웠던 것은, 이 사당이 평소에 개방을 안 해서 사당 안은 보지 못 했다는 점이다.

  매해 음력 10월 1일에 마포문화원, 마포 지역의 정치인들, 고려 왕실의 후손인 개성 왕씨 종친회, 인근 주민들이 함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1년 중 오직 그 때에만 사당을 개방한다고 한다.

  그런데 꼭 그 때에만 개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따지자면, 창덕궁이니 종묘니 하는 곳이 훨씬 중요성이 높다.  그런 중요한 곳들도 평소에 개방을 하는데, 왜 공민왕 사당은 제사 지낼 때만 개방할까?  혹시 불가피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지...

 

 

작년에 공민왕 사당에서 제사를 치렀던 모습.

(출처 : 서울신문 http://media.daum.net/politics/administration/newsview?newsid=20131122030636248)

 

  사진을 보면, 공민왕의 초상화 뿐 아니라 공민왕이 끔찍히 사랑했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도 함께 있다.

  그리고 사진상으로는 안 보이지만, 공민왕 때 큰 활약을 한 최영 장군의 초상화도 함께 있다고 한다.  (드라마 '신의' 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모인 상황... ^^)  그런데 이 사당이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건립한 것이어서 그런지, 초상화에 큰 오류가 있다.  초상화 속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모두 조선식이다. ^^;;

 

 

사당 맞은 편에 있는 200년이 넘은 고목들.

 

  어쩐지 사진이 음산하게(!) 나왔는데, 실물로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가 200년 이상 된 것이라는 안내판을 굳이 보지 않아도, 딱 보기에도 무척 오래된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당이 한국전쟁 동안 소실될 때에도 저 나무들은 무사했던 모양이다.  개혁을 꿈꾸다가 다사다난했던 국내외의 상황과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좌절했던 공민왕...  저 고목들이 그 불행한 왕의 영혼을 수호해주는 지킴이로 보인다면, 너무 감상적인 생각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