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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顯宗) (下) - 김훈, 최질의 난 / 거란의 제3차 침입

Lesley 2014. 6. 19. 00:01

 

 

9. 김훈(金訓), 최질(崔質)의 난 - 문신과 무신의 차별대우 

 

 

  거란과 화친을 맺어 거란의 제2차 침입은 끝났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였다.

  우선, 중요한 화친 조건인 '고려 국왕의 친조' 가 실행되지 않았다.  즉, 화친 조건에는, 고려 현종이 거란에 직접 가서 거란 성종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군을 물러가게 할 임시방편으로 그 조건을 수락한 것이기 때문에, 그 조건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또한 거란의 제2차 침입의 실질적인 원인이었던 강동 6주가 여전히 고려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거란은 계속해서 강동 6주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물론, 고려는 적성국인 거란과의 사이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강동 6주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화친한 후로도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의 국경 지대에서 이런저런 분쟁을 일으켰다.  고려는 거란이 언제까지나 소규모 습격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먼저번 같은 치욕을 겪지 않도록 다시 있을 전쟁에 대비했다.

 

 

  그런데 조만간 전쟁이 터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런 시국에, 황당하고도 기막힌 사건이 터졌다.

 

  전쟁에 대비하려고 군사를 늘리고 무기를 장만하려니,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들어서 국가 재정에 무리가 갔다.

  결국에는 조정 신하들에게 지급할 전시과(田柴科)가 부족해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황보유의(皇甫兪義)와 장연우(張延祐) 등 조정의 고위 문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경군(京軍, 중앙군)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전시과에 충당했다.  

  전시과란, 특정 토지의 곡식 및 땔감의 수조권을 신하들에게 급여로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영업전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영구적으로 지급하는 토지인데, 전시과와는 달리 자손들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즉, 황보유의와 장연우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이, 무신의 재산을 빼앗아서 그 재산으로 문신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법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군비 확장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서 일반 공무원에게 월급을 못 주게 되었다고, 정부가 군인에게 영구적으로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하고 줬던 재산(예를 들면, 일시불로 지급한 연금이라든지 어떤 공로에 대한 포상금이라든지...)을 빼앗아 일반 공무원에게 줄 월급으로 사용한 셈이다. (원래 처음부터 안 주는 것보다, 한 번 줬다가 빼앗는 것이 더 치사하게 느껴지는 법인데... -.-;;) 

 

  무신들은 당연히 이 조치에 큰 불만을 가졌다.

  국가 재정이 부족하여 문신과 무신의 급여를 골고루 줄인다면 모를까, 무신의 재산을 빼앗아 문신에게 급여를 지급한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한 처사였다.  더구나 위에 설명한 것처럼, 이 시기는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라 거란과의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빈발하던 때다.  문신보다는 무신이 훨씬 중요하고, 무신들의 사기를 높여줘야 하는 시기였다.  굳이 차별대우를 하자면, 차라리 무신의 급여는 제대로 챙겨주고 문신의 급여를 줄이거나 나중에 지급하도록 하는 게 맞는 것이다.

  그런데 목숨 걸고 전선에 나가 싸우는 무신들의 재산을 빼앗아 안전한 후방지역에 있는 문신들에게 줬으니, 분명히 문제 있는 조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일이 원인이 되어 현종 5년인 1014년 11월에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 여러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신들이 자신들을 푸대접하는 조정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난입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사태의 발단이 된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묶어놓고 거의 죽을만큼 두들겨 팼다.  그 후에 현종에게 그 두 사람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현종은 이미 궁궐을 장악한 무신들의 위세에 눌려 두 사람을 귀양보내야 했다.

  또한 무신들은 앞으로 일정 지위 이상의 무신은 문신의 직위도 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그 요구 역시 받아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훈, 최질의 난은 의외로 간단하게 끝이 났다.

  왕가도(王可道, 원래는 이씨였는데 김훈, 최질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왕씨성을 하사받았음.)는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에서 서경장서기의 직위를 맡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분개했다.  그래서 현종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해서 반란에 가담한 무신들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1015년 3월, 왕가도와 미리 계획한대로 현종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에 참석한 무신들이 술에 취한 틈에, 왕가도가 군사들을 이끌고 김훈과 최질을 포함한 무신 19명을 죽였다.  김훈, 최질 등의 무신들은 겨우 4개월 정도 권력을 잡았다가 살해당한 것이다.

 

  김훈, 최질의 난은 비교적 쉽게 진압되었지만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이 사건은 훗날 100년이나 계속된 무신정권 시대의 전조라 할 수 있다.  흔히 1170년에 일어난 무신정변의 원인 중 하나로, 고려가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문신에 비해 무신을 지나치게 차별했던 것을 든다.  그런데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150년도 전인 이 시대에, 더구나 태평성대도 아니고 전운이 감돌던 시대이건만, 이미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런 풍조가 무신들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더욱 심해져서, 결국 나중에는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도 이 사건으로 현종과 조정의 문신들이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그 후로는 군부에 대한 처우에 무척 신경을 썼다.

 

  대표적인 예가, 김훈, 최질의 난이 진압되고 불과 4개월 후인 1015년 7월에 있었던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포상이다.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임영함(林英含) 및 군사 1만 2천 5백여 명을 변방을 지킨 공으로 한꺼번에 승진시켰다.  겨우 몇 달 전에는 무신들에게 기왕에 줬던 재산도 빼앗아갔던 일을 생각하면, 1만 2천 5백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승진시키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 많은 사람들을 승진시킴으로써, 가뜩이나 전쟁 준비로 빡빡한 조정의 재정에  비용부담이 더 커졌을 것이다. (승진했으니 급여 등 각종 비용을 더 많이 지급해야 했을 것임.)  그런데도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 경우 말고도 김훈, 최질의 난이 진압되었던 1015년부터 거란의 제3차 침입이 끝난 후까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조정이 군부의 대우에 각별히 신경썼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먼저, 바로 위에 언급한 정신용이 국경을 침략한 거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정신용에게 높은 벼슬을 추증한 것은 물론이고 정신용의 아들에게까지 벼슬을 주었다.  또한 조정에서 전사자의 장례에 곡식과 피륙을 부조하거나, 전사자의 유족에게 곡식이나 토지를 내리거나, 전투에 참여했던 군사들을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씩 한꺼번에 승진시킨 기록이 줄줄이 나온다.

 

  현종과 조정이 군부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는 점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물론 소 잃고 외양간 고쳤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  또한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입은 피해 복구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재정적으로 큰 무리였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국가 재정에 구멍이 뚫렸다는 이유로 무신들을 차별했는데, 그 빡빡한 재정에 더 무리가 가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 후에도 현종과 조정이 계속해서 군부를 홀대했더라면, 불과 3년 후에 벌어진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조정에 불만을 품은 고려군이 적극적으로 싸우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종과 조정이 뒤늦게라도 태도를 바꾼 일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10. 거란(요나라)의 제3차 침입 - 흥화진 전투 / 귀주대첩

 

 

  현종 9년인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전쟁 준비를 미리 해 둔 현종은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조정 신하들 중 혼자서 항복을 반대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로, 역시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았다.  두 사람이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거란군을 막으러 서북쪽으로 떠났다.

 

  강감찬과 강민첨은 흥화진(興化鎭, 현재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흥화진 전투)

  소가죽을 서로 이어 꿰매어 강 상류에 둑처럼 설치해 강물을 막아두었다가,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잔뜩 고인 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러자 많은 거란군이 강물에 휩쓸려 익사하거나 떠내려가고, 살아남은 거란군도 거센 강물에 강 양편으로 나뉘어 우왕좌왕 하게 되었다.  그 틈을 노려 미리 매복해있던 고려 기병 1만 2천명이 거란군을 습격해서 많은 거란군을 죽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소배압은, 고려의 여러 성을 일일이 공격해서 점령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제2차 침입 때처럼 곧장 개경으로 진격했다.  곧바로 개경을 점령해서 고려 국왕과 조정에게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거란군은 서북지역 대부분을 그대로 지나치고 빠르게 남하하여, 현종 10년 1019년 1월에는 개경 바로 앞까지 갔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거란의 제2차 침입 때와는 달리 미리 전쟁 준비를 해 둔 상태라, 그 전처럼 항복할 생각만 하거나 피난을 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종은 개경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전부 개경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역시 개경 인근 지역의 모든 가옥과 곡식을 철거해서, 개경을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즉, 적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을 피하고 철저히 수비에만 집중하되, 적군이 이용할만한 건축물과 식량을 모두 없애버려서 적군 스스로 지쳐서 전쟁을 포기하게 하는 전술, 이른바 청야전술을 쓴 것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이 때 '가옥과 곡식을 철거한다' 는 것을 '들판을 텅텅 비운다' 는 뜻의 청야(淸野)라는 단어로 표현함.

 

  고려의 철저한 청야전술에, 결국 소배압은 개경 점령을 포기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개경 안의 고려군은 어쩌다가 소규모 습격전을 벌이는 것 외에는, 개경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시간만 끌었다.  이런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당연히 거란군이었다.  때는 음력 1월이라 아직 추운 겨울인데 근처에 가옥도 곡식도 없으니, 거란군이 낯선 땅에서 먹고 자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또한, 흥화진에서 고려군에게 크게 당한 후 고려 서북지역의 중요거점을 점령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보급로 겸 퇴로가 확보되지 못 한 점도 문제였다.  더구나 거란군이 개경 코앞까지 갔지만, 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 주력군은 개경으로 오지 않고 계속해서 서북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그대로 시간을 끌다가 개경의 고려군이 앞에서 공격하고 서북쪽에 머물던 고려 주력군이 뒤에서 공격하면, 거란군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고려 한가운데에서 고립되어 몰살당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거란군의 철수는 순조롭지 않았다.

  2월 1일에 거란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느라 귀주(龜州,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를 통과할 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막상막하의 혼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강감찬이 개경의 수비를 도우라며 개경으로 보냈던 김종현(金宗鉉)이 원군을 이끌고 오고, 때맞춰 바람의 방향까지 고려군에게 유리해졌다.  결국, 고려를 침략할 때 소배압이 끌고 온 거란군 10만명 중 겨우 수천 명만 살아서 돌아갔을 정도로, 고려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

   

  며칠 후 고려군이 개선하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 현재의 황해북도 금천)까지 나가서 맞이했다.

  현종은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상을 내렸다.  특히 최고 지휘관인 강감찬에게는 금으로 만든 꽃 8개를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강감찬은 원래 체구가 작고 얼굴도 못 생겼다고 하는데, 거란군을 물리쳤을 때 이미 72세의 노인이었다.  외모만 보아서는 볼품없는 노인이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개선장군이 되었고, 그 개선장군의 백발에 28세의 젊은 왕이 친히 황금꽃을 꽂아주는 광경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군을 환영했던 영파역을, '의로움이 흥하다' 는 뜻의 흥의역(興義驛)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군이 목숨을 걸고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의로움을 떨쳤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이 제3차 침입을 끝으로, 거란은 고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포기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나 제2차 침입 때는, 고려 쪽에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 화친협상으로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이 제3차 침입 때는 고려 스스로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 뒤로 고려가 거란과 사대적인 외교관계를 맺어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당시 고려와 거란의 국력 차이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고려가 거란군과 직접 싸워 승리함으로써, 고려는 거란과의 사대관계 속에서도 고려의 입지를 튼튼히 하며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같은 시대 송나라가 거란에게 밀려 북쪽땅을 빼앗기고 막대한 세폐까지 바쳐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고려는 상당히 선전한 셈이고 괜찮은 조건으로 거란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임.)

 

  참고로, 전몰군인들을 기념하는 현충일의 유래가 바로 이 거란의 제3차 침입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매년 6월 6일경이 24절기 중 망종에 해당하는데, 전통적으로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전사한 장수들과 군사들을 위해 망종일에 대대적으로 제사를 올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현충일을 제정하면서 그 날짜를 6월 6일로 삼은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11. 그 후

 

 

  현종은 거란의 제3차 침입 후로도 12년을 더 고려를 다스렸다.

 

  그 후로는 현종 치세에 큰 군사적 위기는 없었다.

  거란과는 물론이고 그 밖의 북방 야인들과도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  물론 물자가 부족한 야인들이 간간히 약탈에 나서기는 했어도, 그들도 대체적으로는 고려에 입조하고 조공을 바치는 식으로 평화로운 경제교역을 했다.  또한 거란의 제3차 침입 이후로 여진인이나 말갈인은 물론이고, 거란인까지 귀화 또는 망명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이런 평화시기가 도래한 배경에는, 고려의 높아진 위상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가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물리친 일로, 고려의 군사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북방의 여러 부족들이 보복당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려를 약탈하기보다는, 고려와 조공을 통한 공무역을 하는 안전한 쪽을 선호했던 것이다.  또한 현종 치세의 후반기에 여진인이나 거란인들의 귀화 및 망명 기록이 자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외부인들 눈에 고려가 안정적인 나라로 보였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거란과의 전쟁 말고도, 현종 시대에 외국과 관련한 특이한 기록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인 현종 10년인 1019년 4월, 해적선 8척을 나포해서 해적들에게 붙잡혔던 일본인 259명을 일본으로 귀환시킨 일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중 현종 시대의 일본 관련 기록은 이 사건 하나 뿐인 듯하다.

  현종 치세에 거란, 송나라, 여진, 흑수말갈, 탐라(제주도), 우산국(울릉도)에 관한 기록은 자주 나온다.  하지만 일본 관련 기록은 매우 드문데, 수십 명도 아니고 무려 259명이나 되는 일본인이 해적에게 잡혀 끌려가다가 고려에게 구조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니 척이나 특이한 경우다.

  관련 기록이 짤막한 것이 너무 아쉽다.  어쩌다가 고려 측에서 일본인들을 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해적들이 일본인들을 잡아 돌아가는 길에 고려도 약탈하려다가, 거꾸로 고려에게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돌아가는 길에 고려 해역을 지나다가, 고려의 군선과 우연히 마주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이 때 일본인들을 납치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저 '해적' 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여진족으로 보인다.

  보통, 여진족을 몽골족이나 거란족 같은 유목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반농경 반수렵 민족이었다.  그들은 의외로 바다에 익숙해서, 현종 시대 기록만 봐도 자기네 영역과 육지로 이어진 고려 동북지역만 약탈한 게 아니라, 배를 타고 동해를 거쳐 내려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동해를 통해 현재의 강원도 지역인 명주(溟州 : 현재의 강원도 강릉)와 고성(高城, 현재의 강원도 고성)을 침략하는가 하면, 심지어 한참 남쪽으로 내려와야 있는 평해군(平海郡, 현재의 경상북도 울진)을 약탈한 기록까지 있을 정도다...!

 

 

  또 하나는, 현종 20년인 1029년에 있었던 흥요국(興遼國)과 관련된 일이다.

 

  흥요국은 발해(渤海)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이라는 거란의 장수 대연림(大延琳)이 세운 나라다.

  대연림이 발해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발해의 유민들과 여진족들을 모아 거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한 것을 생각하면, 100년이 지난 그 때까지도 발해 부흥 운동이 있었다는 것이 뜻밖이다. 

 

  어쨌거나 1029년 8월에 건립된 흥요국은, 한 달 뒤인 9월에 고려로 사신을 보내 거란과 싸우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고려는 흥요국 일로 거란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서, 11월에 압록강 동쪽에 있는 보장(保障)이라는 거란 영토를 공격해 빼앗으려 했다.  흥요국의 요청대로 흥요국을 도와줄 겸, 고려의 북방 영토도 늘릴 겸, 공격을 감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이 공격에 대한 사연이 하나 나온다.  사실, 이 공격은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는데, 곽원(郭元)이라는 사람 혼자서 강력히 주장해서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곽원은 너무 창피하고 분한 나머지 등창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 곽원이란 사람은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했던 모양임. -.-;;)

 

  12월에도 흥요국으로부터 다시 원조 요청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에, 흥요국을 돕지 않았다.  바로 한 달 전에 거란을 공격했다가 실패했으니, 조정의 여론이 신중론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원조 요청을 거부한 것에 대해 흥요국이 앙심을 품고 고려를 공격할까봐, 국경지대 수비를 강화하기까지 했다.

 

  다음 해인 1030년에도 흥요국은 몇 번이나 원조 요청을 했다.

  그 전해부터 거절당했건만 계속해서 원조 요청을 한 것을 보니, 흥요국 상황이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고려는 끝내 흥요국을 돕지 않았고, 결국 흥요국은 세운지 겨우 1년 남짓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광록(李匡祿)이란 흥요국 사신에 대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기구한 사연을 짤막하게 전하고 있다.

  이광록은 1030년 9월에 원조 요청을 하러 고려에 왔는데, 고려에 온 뒤 흥요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고려에 눌러살게 되었다.  남의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이 자기 나라가 망해버려서 돌아갈 곳이 없어지다니, 정말 기막힌 일이다.  이 사람이 그 후에 고려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래저래 현종 치세는,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민족들과 온갖 일이 있었던 시기다.

 

  현종은 재위 22년째 되던 해인 1031넌 5월, 40세로 세상을 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셈이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그저 그 시대의 의술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못 해서 일찍 사망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워낙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왕이기에, 다른 왕들보다 더 빨리 기력이 쇠진하여 일찍 사망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12. 끝맺으며

 

 

  현종의 인생은 어지간한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귀한 혈통의 부모가 사통하여 출생했기에, 혈통만 보면 역시나 귀한 신분이었지만 출생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출생하자마자 어머니와는 사별하고 아버지와는 생이별했다.  또한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강제로 승려가 되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갑자기 정변을 거쳐 왕이 되었지만, 정변을 일으킨 강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강조의 권세에 눌려지낼 수 밖에 없었고, 강조가 죽은 후에는 이미 거란의 침략을 받은 상태라 급하게 피난을 해야 했다.  또한 피난 도중 적군이 아닌 고려인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일을 다 겪었고 즉위 초기에는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 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왕이다.

 

  우선, 거란의 제2차 침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현종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보면, 현종은 거란의 제2차 침입 기간 동안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당시 현종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이름 뿐인 왕이었기에, 현종의 잘못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든지 현종이 전쟁 중 제대로 대처를 못 해서 수도인 개성이 함락되는 치욕을 겪었다고 비난하기는 힘들 것 같다.

 

  김훈, 최질의 난은 애초에 현종이 일을 잘못 처리한 것이 맞다.

  당시에도 거란과의 사이에 무력분쟁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었고 조만간 큰 전쟁이 또 일어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인데, 무신들의 급여를 빼앗아 문신들에게 주자는 어이없는 조치를 승낙해서, 무신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반란 진압 후에 군부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한 것을 보면, 현종이란 사람은 적어도 잘못의 뒷수습은 할 줄 아는 임금이었던 듯하다.  그저 왕권 강화와 왕의 권위 확립에만 연연해 하는 임금이었다면, 반란의 원인은 생각 안 하고 반란을 일으킨 군부를 그 후로도 계속 백안시하며 홀대했을 수도 있다.  혹은 한술 더 떠서, 제2의 반란을 미리 막겠다면서 군부의 유력한 인물들을 숙청하는 일을 벌였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군부가 어떤 식으로 움직였을지, 그리고 그런 군부의 움직임 때문에 전쟁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비록 소를 잃고서야 외양간을 고쳤다는 점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최소한 소를 잃고서도 외양간을 고칠 생각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거란의 제3차 침입을 훌륭히 격퇴한 일은 현종의 가장 큰 업적이고, 그 일은 고려의 최전성기로 이어졌다.

  경제와 문화라는 것은 평화시기에 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에게 크게 패한 경험 때문에, 그 후로 거란은 고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또한 송나라는 거란의 군사적 압박 때문에, 중국 대륙에 들어섰던 다른 왕조들과는 달리 한반도에 고자세를 취하지 못 했다.  그리고 거란이나 송나라나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기 위해서 고려가 상대편 쪽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런 거란과 송나라의 상황을, 고려는 십분 이용했다.  두 나라 모두와 교류하면서, 거란에게서는 군사적 긴장완화를 얻어냈고 송나라에게서는 각종 문물을 얻어냈다.  그래서 고려는 제18대 왕인 인종(仁宗) 시기에 '이자겸의 난' 이나 '묘청의 난' 을 겪고, 제19대 왕인 의종(毅宗) 때 무신정변이 일어나기까지, 130년에 가까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현종이야말로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출생과 성장기를 거치는 등 불행했고, 정치적으로도 즉위 초반이나 피난 과정에서는 왕권이 불안정해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을 모두 극복하고, 고려 시대 외국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승리를 이끌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고려의 제4대 왕 광종(光宗)과도 묘하게 대비된다.

  광종은 고려를 세운 태조와 강력한 호족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떳떳한 신분으로 태어나, 평탄한 성장기를 거쳤다.  그리고 두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고려 초기 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서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세력을 누르는 과정에서 지나친 독단으로 공포정치를 실행했고, 그 결과 광종 사후에는 그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반동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왕권 확립에 그토록 공을 들였건만, 종의 후손은 불과 아들(제5대 왕 경종)과 손자(제7대 왕 목종)까지만 이어지고 끊겼다.

  그에 비해 현종은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 없이 불행하게 성장했고, 즉위 초반에는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왕으로 대접받지도 못 했다.  현종 재위 중 두 번이나 거란과 전쟁을 치렀으며, 두 번의 전쟁 사이에는 전쟁 준비로 바빴고 전쟁 후에는 전후복구로 바빴다.  현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만큼 고단한 삶을 살다 갔다.  하지만 현종이 그렇게 고생한 덕에 그 후 고려의 최전성기가 열렸다는 점, 그리고 그 후로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모든 고려 왕들이 현종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보면 현종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인 셈이다.  (역시 세상만사는 끝까지 가본 후에 이러니 저러니 평가하는 게 맞는 모양임. ^^;;)    

 

  언젠가는, 현종을 주인공으로 하는 괜찮은 사극 또는 역사소설이 나오기를 기대하겠다.

  사실, 지금까지 현종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이런 인물이 사극이나 역사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될 수 있을까? 

 

 

고려 현종(顯宗) (上) - 우리 역사상 유일한 사생아 출신 왕(http://blog.daum.net/jha7791/15791050)

고려 현종(顯宗) (中) - 강조의 정변 / 거란의 제2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