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관련 책, 유적지, 기타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숨결이 서린 낙성대(落星垈) - 낙성대공원, 강감찬 생가터

Lesley 2014. 9. 9. 00:01

 

 

  ◎ 낙성대란 지명의 유래

 

  서울 전철 2호선 역 중에 '낙성대역' 이 있다.

  그런데 TV나 인터넷을 보면, 장난 삼아서(주로 서울 거주자) 혹은 오해 때문에(주로 지방 거주자) 이 낙성대를 대학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긴, 서울의 지명이나 대학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낙성대역' 을 서울 전철 6호선의 '고려대역' 처럼 대학 이름을 붙인 역으로 오해하는... ^^

  하지만 낙성대역은 대학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일단, 낙성대의 '대' 가 '대학' 할 때 쓰는 대(大)가 아니라 '터, 곳' 이라는 뜻의 대(垈)다.  낙성대역이 낙성대 지역에 있어서 그런 역명이 붙은 것 뿐이다. (잠실에 잠실역이 있고 혜화동에 혜화역이 있는 것처럼, 실용적이지만 멋은 없는 뻔한 작명... -.-;;)

 

 

  그렇게 낙성대역이라는 역명의 유래는 별 볼 일 없지만, 낙성대라는 지명 자체에는 역사와 전설이 담겨있다.

 

  낙성대는 고려 시대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출생지다.

  강감찬의 집안은 금주(衿州 :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광명시, 의왕시, 군포시 및 서울의 관악구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의 유력한 호족 가문이었다.  그래서 강감찬이 지금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난 것이다.  

 

  강감찬의 활약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고려 현종(顯宗) (中) - 강조의 정변 / 거란의 제2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2)

  고려 현종(顯宗) (下) - 김훈, 최질의 난 / 거란의 제3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3)

 

  고려사에는 별에 얽힌 강감찬의 일화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송나라 사신에 얽힌 사연이다.  송나라에서 온 사신이 고려의 재상으로 있던 강감찬을 보고서 절을 하더니 "문곡성(사람의 운수를 점치는 데 쓰는 9개의 별 중 하나로, 주로 글재주와 관련이 있다고 함.)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바로 여기에 있었구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있었다는 이야기다.  왕이 보낸 사자가 길을 가다가 어떤 집에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봤는데, 알고 보니 그 집 안주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사자가 그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그 아이를 개경으로 데려와 키웠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이야기 모두 강감찬을 하늘에서 내려온 별과 동일시하고 있다.  강감찬이 존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일로 고려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별로 여겨질 정도였나 보다.  강감찬의 생가가 속한 지역에는 원래 다른 이름이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별과 인연이 깊은 강감찬 덕분에, '별이 떨어진 곳' 이란 심오한 뜻이 담긴 낙성대(落星垈)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 낙성대공원 및 강감찬 장군 생가터 가는 길

 

  낙성대역 근처에는 강감찬과 관련한 장소가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1970년대 조성한 '낙성대공원' 인데, 강감찬 장군을 모시는 안국사를 중심으로 전통혼례식장과 도서관 등이 함께 있는 공원이다.  또 한 곳은 '강감찬의 생가터' 다.  유감스럽게도 생가 그 자체는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고, 그 생가가 있던 터만 주택가 한복판에 남아있다.

 

 

낙성대공원 앞 도로변에 있는 안내판(이정표? 지도?)

 

 

  대중교통으로 낙성대공원과 강감찬 생가터를 가려면, 전철 2호선 낙성대역을 이용하는 게 좋다.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로 가거나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위의 안내판 사진 중 1번이 강감찬 생가터고, 2번이 낙성대공원이다. 

 

  만일, 도보로 가려면...

  낙성대역에서 강감찬 생가터까지는 6~7분 정도 걸리고, 더 멀리 있는 낙성대공원까지는 15분이면 갈 수 있다.  거리로만 따지면, 너무 덥거나 추운 날씨만 아니라면 산책 삼아 걸을만한다.

  다만, 강감찬 생가터의 경우,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원래 시간인 6~7분보다 몇 배 더 걸릴 수도 있다.  위에 이미 쓴 것처럼, 강감찬 생가터는 주택가 한 가운데 덩그러니 있어서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지도를 참고하더라도, 나처럼 방향감각 없는 사람은 지도와 실제 거리가 연결이 안 되어 오랜 시간 헤매게 된다. ㅠ.ㅠ  

  다행히, 낙성대공원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로변에 있는데다가, 또 공원이다 보니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어서, 찾기가 수월하다.   

 

  만일, 버스를 이용하려면...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는데, 그 주유소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면 나오는 도로변 제과점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그 정류장에서 '관악 2번' 버스를 타고 서너 정류장만 더 지나서 '낙성대공원, 영어마을'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낙성대공원, 영어마을' 이 하나의 정류소 이름임. 두 정류소가 따로 있어서 두 군데 중 어디에서 내려도 낙성대공원 찾아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님...!)

  강감찬 생가터는 낙성대역에서 걸어가도 6~7분 밖에 안 걸리는데다가, 도로변이 아닌 주택가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  그러니 패스~~~

 

  개인적으로는, 내가 선택한 답사코스(?)를 권하겠다.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버스를 타면 환승요금제 덕분에 버스비를 안 내도 되니까, 관악 2번 버스를 타고 낙성대공원까지 간다.  낙성대공원 구경을 마친 후에 낙성대역으로 걸어서 돌아가면서, 중간에 있는 강감찬 생가터를 들린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코스라고 생각한다. 

 

 

 

  ◎ 낙성대공원

 

  낙성대공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멍하니 있다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지나쳤다. -.-;;

  그래서 한 정류장 지난 서울과학관인지 서울대학교과학관인지 하는 정류소에서 내렸다.  왔던 길로 다시 걸어올라갔더니 영어마을이라는 이름 붙은 건물이 보이는데, 그 곳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낙성대공원이 보인다.

 

 

영어로 된 낙성대공원 표시가 좀 생뚱맞아 보이는... -.-;; 

 

 

영어로 된 낙성대공원 표시 왼쪽으로 가면, 이런 풍경이 나옴.

 

 

  이런저런 시설들이 모여있는데, 강감찬 장군과는 별 상관 없다. ^^;; 

  왼쪽으로는 벤치와 몇몇 운동기구가 있고,  그 앞 공터에는 도시의 무법자 닭둘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오른쪽에 빨간색으로 된 자그마한 건물은 도서관이고, 저 멀리 정면에 보이는 한옥은 전통혼례식장이다. 

 

 

이렇게 강렬한 색깔의 도서관은 처음 봄. ^^;; 

 

 

전통 혼례식장.

 

 

강감찬 장군을 모신 안국사 앞에 있는 홍살문.

 

 

휘호는 나름 멋있지만, 그 밑에 있는 안내판은 영 아니올씨다~~~

 

 

  저 낙성대라는 한자 휘호는, 낙성대를 건립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쓴 것이다.

  휘호만 놓고 보면 특별히 나쁠 게 없다.  서예를 좀 하는 사람들 눈에는 어떨런지 몰라도, 나 같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잘 쓴 글씨로 보인다.  

  그런데 그 아래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 정말 가관이다.  웬 하사? -.-;;  옛날 임금님도 아닌데, 하사라는 말을 쓰는 것이 우습다.  1970년대가 얼마나 권위주의적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듯하다.  '박정희대통령께서는', '유적지를 조성토록 분부하고', '휘호를 하사하시었다' 라니...  이쯤 되면, 조선시대 송덕비 수준이다.  요즘 저런 식으로 유적지 안내판을 만든다면, 언론에서 난리가 날거다.  

 

 

계단 위에 높다랗게 있어서 위압감을 주는 안국사 정문.

 

 

  안국사라고 하면 마치 절 이름 같은데, 여기는 절이 아니라 사당이다.

  즉, 안국사(安國寺)가 아니라 안국사(安國祠)다.  그리고 이 사당은 역사가 그다지 깊지는 않다.  위의 이상한 휘호 안내판 속 내용대로, 1974년에 건립된 젊은(?) 사당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라, 나라를 편안하게 했다는 뜻으로 안국사란 이름을 붙인 듯하다.

 

 

안국사 내부.

 

 

  그런데 안국사 규모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크고 또 그 모습이 이질적이어서, 조금 놀랐다. 

  누구는, 강감찬 장군의 업적이 대단하니 그 사당도 이 정도 규모로 만드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본 사당과는 너무 다른 규모라, 어색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종묘는 안국사보다도 훨씬 규모가 크지만, 대신 그쪽은 많은 왕과 왕비를 합동으로 모신 사당이다.  그러니 1인당 점유면적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강감찬 장군 한 사람의 영혼이 왕이나 왕비의 영혼들보다 더 넓은 곳에서 지내고 있는 셈이다. (혼자서 18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경우와 세 가족이 33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경우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 ^^;;)

 

  그리고 얼핏 보면 전통양식인 것 같은데, 세세히 보면 아니다.

  다른 사당과는 다르게 푸른빛 도는 기와(청와대를 모델로 해서 만든건가? -.-;;), 계단을 높이 쌓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바깥 대문과 본당...  고풍스런 느낌을 찾기 힘들다.  인공적인 분위기가 심하게 풍기고(마치 사극 촬영 세트장 같은 느낌이랄까...), 또한 우리나라 사당이 아니라 외국의 사당 같은 기분도 든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에 아직까지 가본 적이 없다.  혹시 현충사도 안국사와 비슷하게 위화감 느껴지게 만들었을까?

 

 

강감찬 생가터에서 안국사로 이사온 삼층석탑.

 

 

  이 탑은 원래 강감찬 생가터에 있었다고 한다.

  아직 고려시대였던 13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의 업적을 기리려고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에 건립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국사를 지으면서, 안국사 안으로 옮겨왔다.  이 안국사에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삼층석탑 밖에 없는 듯하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안국사의 본당.

 

 

위풍당당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그런데 저 영정은 후세에 그린 것이라, 역사에 기록된 강감찬 장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의 모습을 '체구가 작은데다가 얼굴이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해어져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이 장군이 없었으면 지금 우리나라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정도 미화해서 그려도 괜찮을거라 생각한다. ^^;;

 

 

공원 앞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

 

 

  지금까지 본 장군상 중 제일 마음에 든다.

  다른 장군상보다 생동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다른 장군상을 보면, 근엄하게 칼을 짚고 서있거나, 말을 탄 모습이라도 말이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만들었던데...  이 동상은 앞으로 내달리는 말의 근육까지 보여서 생동감 넘친다.

 

 

 

  ◎ 강감찬 생가터

 

  포스트 앞머리에 쓴 것처럼 강감찬 생가터를 찾느라, 어지간히 헤맸다.

  나처럼 낙성대공원 쪽에서 강감찬  생가터로 가는 경우에는, 일단 '순복음 교회' 부터 찾은 다음에 그 교회를 기준으로 삼아 스마트폰의 지도를 이용해서 위치를 찾는 게 빠르다.  나는 '인헌초등학교' 를 기준으로 해서 목적지 찾다가 헤매고 또 헤매고... ㅠ.ㅠ

 

 

여름 끝무렵이라 수풀이 무성한 강감찬 생가터.

 

 

  생가가 남아있는 게 아니라서, 이 곳을 보존하는 게 여러가지로 곤란하다는 점은 알겠는데...

  하지만 주택가에 덩그러니 놓인데다가 수풀까지 무성하니, 만일 캄캄할 때 여기에 온다면 귀신이 튀어나올까봐 겁이 날 것 같다.  혹은 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불량 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되기 딱일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혹은 뱀이 한 마리 스르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

 

 

일명 '강강찬 향나무' 라고 불리우는 향나무.

 

 

  강감찬 향나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저 나무는 강감찬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강감찬이 어린 시절 올라가 놀며서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는 그 '진짜 강감찬 나무' 는 1987년에 말라 죽었기 때문이다. ㅠ.ㅠ  하지만 강감찬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의미에서, 다른 향나무를 사다가 대신 심었다고 한다.  생가도 없어진 마당에 원래의 향나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무척 아쉽다.

 

 

강감찬 장군에 대한 간단한 소개 및 이곳이 장군의 생가임을 기록한 비.

 

 

어쩌란 말이냐, 이 작명센스를... -.-;;

 

 

  헤매다가 겨우 찾은 강감찬 생가터로 걸어가던 중, 무심코 생가터 옆에 있는 건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강감찬 하우스' 다. -0-;;  바로 옆에 강감찬 생가터가 있으니, 거기에 삘(!)을 잔뜩 받아서 지은 이름인가 보다.  저 건물 이름 도대체 누가 지은걸까...  '강감찬' 과 '하우스' 를 나란히 놓으면 잘 어울린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