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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 고려 후기의 혼란이 낳은 전설 속 괴수

Lesley 2016. 12. 3. 00:01

 

  '불가사리' 란 고려 후기에 창조(?)된 것으로 알려진 전설상의 괴수다. 

  내가 불가사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 본 만화책(우리나라의 여러 전설과 설화를 소재로 한 것)을 통해서였다.  그 만화책을 보기 전까지, 불가사리라고 하면 바다에 사는 별 모양의 기괴한 해양생물만 떠올렸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이었던가 아니면 재작년이었던가, 북한영화 '불가사리' 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을 때 만든 괴수영화다. (단, 작업 중간에 신상옥 감독이 탈북했기 때문에 완성은 다른 이가 했다고...)  1980년대 영화다 보니 특수효과는 우뢰매 수준이지만, 의외로 줄거리나 짜임새는 괜찮은 편이었다.

  원래, 불가사리 그 자체든 영화 불가사리에 대해서든 굳이 블로그에 쓸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요즘 어지간한 영화 뺨 칠 정도로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상황을 보니, 문득 불가사리 이야기가 떠올라 이렇게 포스팅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읽은 만화책 속 불가사리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신돈이 역모로 처단되면서, 신돈이 승려 출신이라 다른 승려들도 줄줄이 잡혀가게 되었다.

  이 때 한 승려가 자기 누이의 집으로 피신했다.  누이 부부는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승려를 다락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끼니 때에 맞춰서 밥만 넣어주며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못 하게 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좁은 다락 안에 가만히 있으려니, 승려는 당연히 심심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식사 후 그릇에 붙은 밥풀때기를 모아 손가락으로 이겨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 무언가가 바로 불가사리다.


  불가사리는 처음에는 그냥 작은 모형이었을 뿐인데, 얼마 후 놀랍게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쇠붙이를 먹으며 자라기까지 했다...!

  밥풀로 만든 불가사리가 어쩌다가 생명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평범한 음식은 안 먹고 쇠붙이만 먹으면서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처음에는 그 승려 누이네 집에 있는 숟가락이나 바늘 등 소소한 물건을 먹더니, 덩치가 커지면서 점점 더 많은 식량(쇠붙이)를 찾아 집 밖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듣도보도 못 한 괴수가 나타나 가마솥이고 농기구고 닥치는대로 먹어치우자, 백성들은 겁에 질렸다.  군사들이 출동해서 불가사리를 없애려 들었지만, 칼이나 창으로 찔러도 상처 하나 안 나고 오히려 그런 무기마저 먹어치우면서 더 크게 자랐다.


  이 때 우리나라 전설 상당수가 그렇듯이 어떤 승려가 해결사로 등장했다.

  그 승려는 오직 불로만 불가사리를 없앨 수 있다며 불가사리를 없앨 계책을 알려줬다. (그런데 이 승려가 불가사리를 탄생시킨 그 승려인지 또 다른 승려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 -.-;;)  불가사리는 쇠붙이를 먹어 온 몸이 쇠로 되어 있으니, 쇠를 녹일 수 있는 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승려의 계책대로, 불가사리가 출몰하는 곳에 온갖 쇠붙이를 잔뜩 쌓아놓았다가, 불가사리가 나타나 그 쇠붙이를 먹을 때를 노려 매복해있던 군사들이 한꺼번에 불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불가사리는 불꽃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거대한 쇳덩어리로 변해 죽었다.



  그런데 전설이란 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보니 여러 버전이 나오게 마련이고, 불가사리 전설도 마찬가지다. 


  먼저, 불가사리를 탄생시킨 사람이 승려가 아닌 버전이 있다.

  전쟁에 끌려나간 남편이 몇 년이나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남편을 빼앗아간 나라에 대한 원한을 담아 밥풀을 빚어 불가사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혹은,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살던 여자가 삯바느질을 하던 중에, 웬 정체불명의 벌레가 나타나 여인의 손에 들린 바늘을 먹어버리더니 다른 쇠붙이까지 먹어치우는 불가사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 없이 외롭게 살던 노부부가 외로움을 달래고자 밥풀로 불가사리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한, 불가사리의 이름과 불가사리 퇴치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버전이 있다.

  불가사리는 원래 '불가살(不可殺) + 이' 에서 변형된 말이라는데, 그렇다면 '죽일 수 없다' 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火) + 가살(可殺) + 이' 로 보아서 '불로 죽일 수 있다' 는 뜻도 된다.  다시 말해서 불가사리란 이름 자체에 '이 불가사리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지만 불을 이용하면 죽일 수 있다.' 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불가사리 퇴치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있다.  위에 소개한 불을 이용해서 없앴다는 이야기 외에도,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자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조가 바뀐 후에 불가사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정말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다양한 불가사리 전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불가사리의 등장 시기가 혼란했던 고려 후기라는 점이다.

  고려 후기는 말 그대로 난세였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의 극심한 탐학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중국에서 쳐들어온 홍건적과 일본에서 쳐들어온 왜구 때문에, 백성들이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다.  당연히 백성들은 절망과 공포와 분노와 좌절에 휩싸이게 되었다.  온갖 큰일이 줄줄이 터지는 상황에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불가사리란 괴수가 사람들 입에서 입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결국, 불가사리는 혼란의 시대와 불안정한 사람들의 마음이 낳은 셈이다. 

  이런 불가사리 전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전해져서 속담으로 정착되기까지 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못된 행패만 부리는 사람을 가리켜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 혹은 '불가사리 쇠 집어먹듯 한다.' 라고 빗대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사리 전설이 만들어진 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 했고 국민들의 교육수준도 전반적으로 낮았던 탓에, 백성들의 복잡한 심사가 상상 속 괴수로 나타났다.  하지만 21세기의 국민들은 불가사리란 괴수를 상상하기에는 너무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다.  그래서 불가사리 대신 각종 음모론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상식과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온갖 지식과 논리를 총동원해서 그 이유를 찾으려 든다.  그런데 줄줄이 터져나오는 일이 전부 비정상적인 일이니, 그 이유로 추측되는 것들 또한 비정상적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양반들은 대중이 함부로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 퍼뜨린다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대중에게 납득할만한 이유나 설명을 내놓았다면, 이렇게 온갖 추측이 판을 칠 리가 없다.  지금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온갖 추측 혹은 음모론은 모두, 난세를 만들어낸 정치인의 탐욕 및 뻔뻔함과 그 난세 속에서 피어난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이 낳은 21세기판 불가사리다.


  벌써 한 달 넘게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고려시대 불가사리는 불로 퇴치했다는데, 21세기에 등장한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 같은 무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퇴치할 수 있는 걸까?  하루 빨리 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