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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극 '대왕의 길' - 탤런트 '김수미' 와 '이진우' 에 얽힌 추억

Lesley 2014. 10. 4. 00:01

 

  지난 달, 오래간만에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정말 웃겼던 추억 한 가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덕분에 둘이서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마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저것들 밥 먹다 말고 왜 저래?' 라고 생각했을 듯... ^^;;)  그 추억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1990년대 후반에 방영했던 비운의 사극 '대왕의 길' 부터 설명해야 한다.

 

 

 

  ◎ '대왕의 길' 은 어떤 드라마?

 

  '대왕의 길' 이라고 하면, 1990년대 후반에 드라마를 자주 시청했던 사람이라도 '그게 뭐지?' 하는 경우가 많을 듯하다.

  이 사극 제목이 그렇게 생소한 이유는, 바로 위에서 이 사극을 언급하며 붙인 수식어 그대로 '비운의 사극' 이기 때문이다.  즉, '대왕의 길' 은 시청률이 너무 낮아서 조기 종영한 드라마다. ㅠ.ㅠ  얼마나 인기가 없었으면, 이번 포스트에 올릴만한 변변한 사진 한 장을 구할 수 없을 정도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크기가 너무 작다든지 해서 곤란하다. (반명함판 사진만한 것을 올리기는 아무래도 좀... -.-;;)

  이 사극을 재미있게 봤던 나로서는,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 간다.  꽤 볼만한 사극이었는데, 어째서 조기 조영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을까... 

 

  '대왕의 길' 은 우리나라 사극의 단골 소재인 영조-사도세자 사건을 다루었다.

  원래는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걸친 왕실의 비극과 그 속에서도 꿋꿋이 가야할 길을 가는 고독하고도 심지 굳은 왕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목이 '대왕의 길' 임.)  하지만 시청률이 저조한 탓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으로 종영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통에, 자연스레 정조의 시대는 아예 막도 못 올렸고... -.-;;

 

  이 드라마에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그 당시로서는 참신했다.

  그 때까지 나온 드라마를 보면, 세세한 차이는 있어도 대체적인 내용은 비슷했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 원인 중 50%는 사도세자의 정신병이고, 나머지 50%는 의심과 편애로 똘똘 뭉친 영조의 괴팍한 성질인 것으로 나왔다.  또한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은 남편에게 비극이 닥칠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하지만, 그 비극을 막을 방법이 없어 발만 구르다가 남편을 잃게 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왕의 길' 에서는 사도세자가 경종의 죽음이나 영조의 즉위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비참한 죽음의 원인 중 하나로 나왔다.  또한 혜경궁도 친정 아버지에게 '남편과 아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으니,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버리겠는가?' 라는 말을 듣고 고심하다가, 결국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남편의 죽음을 방관 내지는 묵인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일에서 혜경궁의 태도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논란은 차치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존의 사극과는 달랐다는 점이 흥미롭고 신선했다.  

 

  그리고 쟁쟁한 출연진을 갖추었다.

  뛰어난 정치력을 갖추었지만 어머니의 비천한 출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성격이 비틀려버린 영조 역할은,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박근형' 이 맡았다.  영조의 유일한 아들이면서도 결국 영조에게 미움을 받고 비참하게 죽게 되는 사도세자는, 최근 사극 '정도전' 으로 다시 한 번 큰 인기를 끈 '임호' 가 맡았다.  거기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으로는 '홍리나',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으로는 '정혜선', 영조의 어머니뻘 되는 왕실의 최고어른 인원왕후로는 '김용림', 혜경궁의 친정 어머니로는 '김자옥', 사도세자의 손윗누이 화평옹주로는 '김성령', 영조의 후궁 문숙의로는 '윤손하' 가 나왔다. 

  출연진만 보면 성공이 보장된 듯 보이는 드라마다.  그런데, 이렇게 발연기니 뭐니 하는 연기력 논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화려한 출연진을 갖추고도, 드라마 시청률은 폭삭 주저앉았다.  그렇다고 내용 전개가 축축 늘어지거나 개연성 없거나 했던 것도 아닌데, 시청률이 저조했던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또한,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오프닝 타이틀곡이다. 

  '대왕의 길' 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무척 웅장하면서도 비감 어린 오케스트라 연주곡이다.  음악 사이트를 뒤져보니 방영 당시에는 OST가 나왔던 모양인데, 지금은 방영한지 오래되었고 인기까지 없어서 음원을 구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아쉬운 대로 다른 블로그나 사이트에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게 저용량 음질로 올려놓은 것이라도 찾으려 들면, 그것도 별무소득이다.  '대왕의 길 OST' 혹은 '대왕의 길 주제곡' 이라는 검색어로 찾아보면, 뜬금없이 주현미가 구성지게 부른 트로트곡만 뜬다. ㅠ.ㅠ 

 

 

 

  ◎ '대왕의 길' 에 상궁으로 나온 '김수미' 와 그 정인(!)으로 나온 '이진우'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드라마에서 한상궁 역을 맡았던 김수미('전원일기' 의 일용 엄니 역으로 유명한 그 배우) 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자. 

 

  한상궁은 원래 경종에게 충성을 바치던 사람이다.

  그래서 경종이 영조와 노론에게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영조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한상궁이 사도세자의 보모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어린 사도세자에게 경종과 영조가 얽힌 음모론을 들려준다.  그렇잖아도 아버지 영조를 무척 두려워하던 사도세자는, 경종의 죽음이나 영조의 즉위 과정에 대해 강한 의혹을 품게 된다.  즉, 이 드라마에서는 한상궁이 영조-사도세자 부자 사이를 갈라놓는 데 한몫 한 셈이다.

  그러다가 사도세자에게 음모론을 주입시킨 일이 들통나서 궁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무당이 되어, 재야(?)에서 영조를 끌어내리기 위해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한상궁이 영조를 미워하는 데에는, 경종의 죽음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한상궁은 젊은 시절에 남몰래 연애를 했다...!  한상궁의 정인은, 한상궁처럼 경종의 지지파였던 조정의 어떤 대신이었다.  그리고 이 대신 역을 이진우('명성황후' 의 고종 역 및 '왕과 비' 의 성종 역을 맡았던 그 배우)가 맡았다. 

  새파랗게 젊은데도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 대신은 능력도 출중하고 경종의 신임도 두터웠던 모양이다.  물론, 궁녀 신분인 상궁과 외간남자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만일 들키게 되면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게 되는 엄청난 죄다.  그래도 두 사람은 경종에게 충성한다는 대의명분과 사랑으로 똘똘 뭉쳐 지냈는데...  경종이 갑작스레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정적이었던 그 대신이 그만 처형된 것이다.  그래서 한상궁은 자신이 모시던 왕인 경종 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인 그 대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영조를 거꾸러뜨리겠다며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

 

 

  ◎ 김수미와 이진우의 러브씬 때문에, 친구에게 변태 소리 듣게 된 나 ㅠ.ㅠ

 

  위에 여러 번 쓴 대로 나는 '대왕의 길' 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게 되면, 그 드라마를 보는 것도 좋지만, 그 드라마를 본 사람들과 함께 그 드라마에 대해 열심히 떠드는 재미도 쏠쏠한 법이다.  그런데 도대체가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

  아쉬운 마음에, 문제의 그 대학 시절 친구에게 이 드라마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던 이 친구, 내가 수시로 그 드라마를 칭찬하고 추천하자 '그래? 정말 괜찮은가?' 하며 넘어올 듯 말 듯한 상황까지 갔는데...

 

  '대왕의 길' 이 방영하던 어느 날...

  이 충성스러운(!) 시청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왕의 길' 오프닝곡이 나오기 전부터 TV 앞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그냥 봤는데, 곧 내 드라마 시청 역사상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당시 50세 전후였던 김수미가 맡은 한상궁과 30세 전후였던 이진우가 맡은 젊은 대신 사이에 러브씬이 등장했던 것이다...! -0-;;

 

  우선, 가장 충격적이었던 베드씬(사극이니까 온돌씬이라고 해야 하나? ^^;;)부터 이야기 하자면...

  궁에서 쫓겨나 무당이 된 한상궁은, 원래 신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영조에 대한 뿌리 깊은 한 때문에 없던 신기가 생겨난 건지, 하여튼 범상치 않은 무당이 된다.  그래서 그 신기로 열심히 기도해서 이미 죽은 정인의 혼백을 이승으로 불러낸다.  사실, 그 장면은 꼭 한상궁의 신통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꿈인 듯 환상인 듯 애매모호하게 처리가 된다.

  그게 신기의 효력 때문이든 꿈이나 환상이든 간에, 오래간만에 해후한 두 정인은 애절하게 끌어안으며 방바닥으로 쓰러진다. -0-;;  지금이야 사극에서도 제법 수위가 있는 베드씬이 종종 나오지만, 90년대 사극에서는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함께 방바닥으로 쓰러진 후(꼭 평범하게 눕지 않고 쓰러지듯이 눕는... ^^;;), 카메라가 환한 촛불을 클로즈업 하고서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 장면 그 자체만 보면 특별히 민망할 게 없는데, 문제는 그 장면을 연기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엄마와 아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나이 차이가 지는 김수미와 이진우였으니... ㅠ.ㅠ

 

  그리고 충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장면도 하나 있었다.

  문제의 그 베드씬 전에 나왔던 장면으로 기억하는데, 한상궁이 젊은 시절 그 대신과 밀회를 즐겼던 일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놀랍게도 한상궁의 젊은 시절을, 다른 젊은 여배우에게 맡기지 않고 50세 전후였던 김수미가 그대로 연기했다. -.-;;

  사실, 위에서 설명한 베드씬은 두 배우가 20살 정도 나이차가 난다는 것 때문에 '시각적으로' 너무 어색해서 그렇지,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그럴 듯했다.  그 대신은 젊은 시절에 죽었는데 저승에서 나이가 들 리는 없으니, 죽었던 때의 젊은 모습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한상궁은 정인과 사별한 후 오랜 시간을 살면서 늙은 것이다.  그러니 베드씬에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충분히 말이 된다. (물론,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고 해서, 시각적인 충격이 가시는 것은 아니지만... ^^;;)

  그러나 한상궁의 회상씬은 도무지 어떻게 변호를 해 줄 수가 없었다.  설마, 한상궁이란 사람은 젊은 시절에 이미 지독한 노안이었단 말인가? ㅠ.ㅠ  그나마 그 회상씬이 두 사람이 산책을 하며 정담 나누는 정도였다면, 비록 등줄기로 개미 서너 마리가 지나가는 느낌은 들었을지언정 손발이 오그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수미와 이진우가 예쁜 연못가에서 60년대, 70년대 한국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나 잡아봐라~~' 놀이를 선보였다. -0-;;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옷고름을 입에 대고 암팡지게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김수미와, 그런 김수미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겅둥겅둥 뛰어 쫓아가는 이진우라니...  그 순간, 내 정신줄은 내 머리 속에서 튀어나와 하늘 높이 솟구쳐서, 동남아를 건너 호주를 지나 남극으로 날아가버렸다...! ㅠ.ㅠ 

 

  그 날 드라마가 그렇게 끝나고 떠나버린 정신줄을 미처 되찾지 못 한 채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그 대학 시절 친구였다.  평소 그 친구는 내가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으면 항상 "나야."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그 날 "여보세요?" 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너 변태냐?" 였다. -.-;;  그 짤막한 대꾸로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그 날 그 친구가 '대왕의 길' 을 봤다는 것을...! (타이밍 한 번 기막히네... ㅠ.ㅠ)  

  친구가 말했다.  툭하면 수준 높은 드라마니 뭐니 하더니, 저런 변태 같은 드라마가 뭐가 수준이 높냐고...  나는 그 드라마가 오늘은 좀 이상했지만 평소에는 정말로 수준 높고 괜찮았다고 열심히 해명했다.  하지만 친구는 코웃음만 쳤다. ㅠ.ㅠ

 

  그 러브씬은 우리 두 사람에게 두 가지 후유증(?)을 남겼다. 

  우선, 그 친구는 다시는 '대왕의 길' 을 보지 않게 되었다. -.-;;  그 친구를 '대왕의 길' 팬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나로서는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원래 한 번 박힌 이미지라는 게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솔직히,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만일 내가 별로 마음 내키지 않는 드라마를 친구의 강한 권유로 큰 마음 먹고 봤는데, 대뜸 그런 장면이 나온다면...  아마 그 친구처럼 두 번 다시 그 드라마를 안 볼 것 같다.

  그리고, 그 후로 괜찮은 드라마나 영화를 친구에게 소개할 때면 '수준 높은' 이라는 표현은 가급적 피해야 했다.  내가 "그 영화 진짜 괜찮아.  수준 높거든." 이라고 말하면, 친구가 "아~~ 또 나이 많은 아줌마랑 젊은 남자랑 사랑하는 내용인가 보네~~" 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

 

  지난 여름에 유투브에 떠있는 '대왕의 길' 몇 편을 건너뛰어가며 본 적이 있다.

  올해 인상 깊게 본 사극 '정도전' 에서 정몽주 역을 맡았던 '임호' 가 '대왕의 길' 에서는 사도세자 역을 맡았기 때문에, 모처럼 '대왕의 길' 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워낙 인기 없는 드라마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포털에서 검색해 보니, 의외로 유투브에 주르르 떴다.  그것도 영어자막과 스페인어자막 두 가지 버전으로...  정작 한국에서 방영할 때는 인기가 없었지만,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의 팬을 거느린 모양이다.

  이미 몇 번이나 썼듯이 '대왕의 길' 은 괜찮은 드라마였다.  하지만 괜찮은 작품이었다는 점보다는, 그 친구와의 황당하고도 웃겼던 사연으로,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