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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41~50회) - 피범벅이 된 새 왕조, 그리고 마지막

Lesley 2014. 8. 8. 00:01

 

  이번 포스트가 드라마 '정도전'의 마지막 감상문이다.

  앞서 쓴 세 편의 감상문과는 달리, 41회에서 50회까지에 대해서는 선뜻 쓸 마음이 들지 않아 미적거리다가 겨우 썼다.  조선 개국 후를 다루는 41~50회가 고려말기를 다룬 1~40회만큼 흥미진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조선 개국 후를 다루는 41~50회에서 김이 빠졌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등장인물을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 끝부분에서 배우들 연기가 흐트러졌다는 뜻은 아니다.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자기 몫 이상을 해내는 것이 이 드라마 최고의 장점이니까.  다만, 주인공이 아니지만 주인공만큼이나 강한 개성을 내뿜던 매력적인 인물들이 줄줄이 하차한 탓인 듯하다.  이인임, 정몽주, 최영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두 사람만큼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역시나 입체적으로 잘 표현된 우왕, 임견미, 윤소종, 이색 등이 줄줄이 퇴장하면서(사실 이색은 조선 개국 후에도 몇 번 나오지만 비중이 팍 줄었으니...), 드라마의 전체적인 긴장도가 떨어졌다.

 

  또한, 대본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애초에 대본의 소재가 되는 조선 개국 후의 사건들이 고려말기의 사건들에 비해 극적인 면이 떨어지는 편이다.

  1~40회에서는 '다 망해가는 나라'에 어울리게 온갖 극적이고 막장스런(!) 사건이 나온다.  죽은 왕비를 잊지 못 한 나머지 신하에게 후궁들을 범하게 하려는 공민왕에, 출생에 대한 의혹(이것이야말로 지금의 우리 드라마가 시청자들 눈길 끌기 위해 가장 자주 쓰는 방법 아니던가...!)에 시달리는 우왕에...  거기에 온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이인임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사건하며, 세 명의 왕이 번갈아가며 즉위했다가 폐위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또한 황산대첩과 위화도 회군 및 개성 시가전 등의 스펙터클하게 표현된 사건까지...  사실 고려말기에 벌어진 사건들은 드라마가 아닌 역사책으로 접해도 무척 흥미진진하다.  

  그에 비해  조선 개국 후에는, '제왕 중심의 정치 대 재상 중심의 정치' 라든지 '외교정책에서의 강경론 대 온건론' 라든지 하는 이념적인 사건들이 주를 이루었다.  분명히 후대의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일들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극적인 재미는 고려 말기에 벌어진 사건들보다 못하다.  물론 '제1차 왕자의 난' 처럼 극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그 일은 마지막 회에 나온 사건이니...

 

  하지만 어찌어찌 해서 결국 이 마지막 감상문을 쓰게 되었다.

  50편짜리 드라마를 40편에 대한 감상문까지 써놓고 마지막 10편에 대해서는 안 쓴다는 것은, 줄곧 열심히 뛰다가 결승선 10미터 앞두고 멈춰버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밥이 되었든 죽이 되었든, 끝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어떻게 그럭저럭 주저리 주저리 잘 쓰게 되는... ^^)

 

 

1. 세자 책봉 문제로 파국을 맞은 이방원과 계모 강씨 

 

 

  세자가 되고자 하는 이방원, 이방원을 견제하는 정도전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한 후, 누구를 이성계의 후계자로 삼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원칙대로라면 이성계의 큰아들인 이방우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방우는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초야에 묻혀살다가, 조선이 개국한지 몇 년 안 되어 세상을 떴다.  그래서 세자 후보로 떠오른 사람이, 이방우가 없는 이상 서열이 가장 앞서는 둘째 아들 이방과(훗날의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와 조선 개국에 공을 제일 많이 세운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의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이다.

 

  이성계가 세자 책봉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모두 한 마디씩 한다.

 

배극렴 : "예로부터 세상이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시국이 어려울 때는 공이 많은 이를 세운다 하였사옵니다."
조준 : "적장자를 따지자면 차남 영안군(이방과)이, 공을 따지자면 정안군(이방원)이 적임일 것입니다."
정도전 : "세자는 장차 이 나라의 군왕이 될 국본!  나라와 공 이전에 덕을 갖춘 자여야 할 것이옵니다.  부디 왕자들 중에 가장 어진 이를 택하여 국본에 앉히시옵소서."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는데, 정도전의 의견은 나머지 두 사람과는 그 의도가 다르다.

  배극렴과 조준은 그저 '서열로는 이방과, 공으로는 이방원' 이라고 세자 후보를 꼽았을 뿐이다.  하지만 정도전이 '덕을 갖춘 자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 고 한 것은 누군가를 세자 후보로 천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바로 이방원)를 세자 후보에서 제외하기 위함이다.  정도전 입장에서는, 정몽주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방원에게 개인적 원한도 품고 있고, 과격하고 야심만만한 이방원의 정치적 성향도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왕자라면 모를까 이방원만은 절대로 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 역시, 정도전이 '덕' 이라는 미덕을 유독 강조한 것이 이방원 같은 잔인무도한 자는 절대 안 된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듯하다.  그리고 자신 역시 정몽주 살해 사건으로 이방원을 꺼리게 되었고, 또한 이방원 말고도 아들이 넘쳐흐르는(!) 상황이라, 정도전의 말대로 이방원을 세자 후보에서 제외한다.

 

  이방원도, 정도전이 자신을 세자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정도전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도전의 지지를 받지 못 하는 것은 큰 타격이다.  그래서 이 난국을 뚫을 방법을 생각해낸다.  바로 자신과 돈독한 사이인 신덕왕후 강씨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변수로 등장한 신덕왕후 강씨 

 

  실제로도, 이방원과 강씨는 원만한 관계였다가 조선 개국 후 세자 책봉 문제로 갈라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세자 책봉이라는 '정치적인 부분' 에서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 에서도 잘 그려낸다. (이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가, 한때는 친밀한 사이였던 사람들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갈등하고 반목하는 관계로 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것 아니던가...!) 

 

  이방원의 생모는 신덕왕후 강씨가 아니라 신의왕후 한씨다.

  한씨는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으로 6남 2녀나 되는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명문가 출신이며 젊고 총명한 강씨만큼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는 못 했다고 한다.  남편이 개경에서 강씨와 부부의 정을 나누며 강씨의 내조를 받아 역성혁명의 길을 나갈 때, 한씨는 홀로 고향을 지키며 외롭게 살아야 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는 한씨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마치, 이성계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선 후에는, 한씨라는 사람이 이성계에게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방원은 그런 생모의 처지에 강한 연민과 분노를 느끼며, 자신과 잘 지내보려 애쓰는 강씨를 거부한다. 

 

  그러던 중 위화도 회군 때 이방원과 강씨의 관계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우왕과 최영은 군사력으로는 이성계와 맞서기 힘드니, 강씨와 그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 이성계를 압박하려 했다.  이방원은 그 사실을 알고 강씨와 이복동생들을 구하러 간다.  강씨와 이복동생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질이 되면 아버지 이성계가 곤란한 처지가 되기 때문에 구하러 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이방원이 관군의 칼에 맞을 상황이 되자, 강씨가 스스로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이방원을 감싼 것이다. (물론 이 사연은 드라마상의 설정임.)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무사했는데, 이 일로 이방원은 강씨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은 강씨를 냉랭하게 대했건만, 강씨는 자신을 진심으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로 이방원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강씨를 어머니로 깍듯이 대접했다.

  그래서 이방원은 세자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제는 다정한 사이가 된 강씨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는 강씨가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정도전이 아무리 방해하고 나서도 세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위) 도움을 요청하는 이방원과, 이방원의 말을 듣고 미처 몰랐던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급히 계산(!)을 하는 강씨.

(아래) 강씨가 이방원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을 예견하는 하륜.

 

 

  강씨 입장에서는 이방원과 이방과 중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가 곤란한다.

  이방원의 부탁을 거절하면 이방원에게 원망을 듣게 되고, 그렇다고 이방원의 부탁을 들어주면 이방과에게 원망을 듣게 될 테니까.  또한 원칙대로 서열을 따지자면, 첫째 이방우가 없는 이상 둘째 이방과가 세자가 되는 것이 맞다.  그래서 강씨가 선뜻 도와주겠다고 말하지 못 하고 망설이자, 이방원이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펼치며 열심히 설득한다.   

 

강씨 : "허나, 세자는 적장자가 되는 것이 동서고금의 상례 아니더냐?"
이방원 : "적장자 승계의 원칙은 방우 형님께서 자취를 감추는 순간 이미 깨진 것이옵니다.  방과 형님은 단지 연장자일 뿐, 형제들 중에 누가 세자가 되더라도 상례를 어기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옵니다."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이방원이 자신을 지지해달라며 형제 간의 서열을 부정한 것이, 오히려 강씨의 가슴 밑바닥에 숨어있던 야심을 일깨우는 결과를 초래한다.

  강씨도 사람인데, 이왕이면 자신의 친아들 중 하나가 세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서른살을 넘긴 어엿한 성인이며 서열도 위인 왕자들이 줄줄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10대 초반이며 서열로도 끝인 자신의 두 친아들이 세자 자리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안 되겠거니 하고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이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서열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고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방원은 자신이 다섯째 밖에 안 된다는 서열상의 약점을 희석시킬 의도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방원의 말이 강씨에게는 전혀 다른 뜻으로 들린다.  첫째 이외의 서열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반드시 다섯째인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하는 법도 없다.  강씨가 낳은 일곱째 이방번과 여덟째 이방석이라고 해서 세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한 사람이 있다.

 바로 이방원을 새 주인으로 점찍은 하륜이다.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 민제에게 미리 경고까지 했다.

 

하륜 : "세자가 되고 싶다면 배극렴과 조준에게 도움을 청하고, 중전마마를 멀리 하라 일러주십시오."
민제 : "무슨 말씀입니까?"
하륜 : "인지상정입니다.  중전마마도 사람이시니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습니까?"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느냐는 하륜의 말은, 이 상황을 아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요약한 말이다.

  강씨가 도움을 요청하는 이방원을 외면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세자로 밀었다고 해서, 이방원에 대한 강씨의 감정이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동안 강씨가 이방원에게 여러모로 마음을 썼다지만, 애초에 그 마음의 크기가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강씨에게 이방원은 '아들 비슷한 존재' 일 뿐 결코 '아들' 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들 비슷한 존재' 보다 '아들' 을 우선시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강씨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와 나이 차이가 10살도 안 나고 한 지붕 아래에서 산 적도 없는 의붓아들에게 진정한 모성애를 느끼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저 남편인 이성계와의 관계 때문에, 이성계의 다른 가족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했을 뿐이다.  사실, 자신에게 차갑게 구는 사람에게 다가서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심지어 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즉, 강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방원에게 최선을 다 한 것이다.

 

  그러나 강씨를 어머니로 받아들인 이방원에게, 강씨의 행동은 뼈아픈 배신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차라리 이방원이 강씨와 계속해서 껄끄럽게 지냈다면, 강씨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는 것에 대해 분노는 했을지언정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훗날 벌어진 제1차 왕자의 난 때, 강씨 소생 왕자들과 공주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세자인 이방석이야 결국 살아남기 힘들었겠지만, 적어도 이방번이나 경순공주의 남편은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 눈물을 흘리며 속내를 토로하는 이방원과 역시 눈물 지으며 듣는 강씨. 

(아래)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이방원과 경악하는 강씨.

 

 

  친아들인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해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강씨가, 그만 중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하는 처지가 된다.

  세자 책봉으로 강씨와 멀어졌던 이방원이 뜻밖에도 문병을 온다.  다른 이들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 있게 된 자리에서, 이방원은 강씨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한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난 강씨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마치 하늘의 선녀가 하강한 것만 같았다고, 그런 강씨가 자신의 친어머니였으면 하고 간절히 원했다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쩌면 소년 이방원에게 강씨는 첫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코흘리개 시절의 첫사랑은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모성 또는 부성을 갈망하는 심리와 뒤섞이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방원은 8남매나 되는 많은 형제자매 속에서 자라느라, 어머니의 정을 독차지 한 적이 드물었을테니 말이다. (이방원의 권력욕 넘치는 모습을 봤을 때, 어린 시절 다른 사람의 관심을 자신에게 쏠리고자 하는 욕구도 보통은 아니었을 듯...)

 

  아련하고도 아름다웠던 기억을 돌이킨 후, 곧 이어지는 강씨에 대한 애증어린 속내... 

 

이방원 : "허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머님의 행복이 화령에 홀로 계신 내 친어머님에게는 눈물이고 고통인 것을 알았습니다.  해서 미워하려 했었습니다.  어마마마의 아들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미워하려 했었습니다.  그리 나두셨어야지요!  아바마마께서 회군을 하시던 날, 소자가 관졸의 칼에 맞아 죽든 말든 모른 척 해야 했습니다.  소자의 어머님이 되어서는 아니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놓고선 어찌하여 방석이를 택한 것이옵니까!  왜요, 왜!"

 

  처음 듣는 이방원의 진솔한 이야기에, 강씨 역시 회한이 드는지 눈물을 흘린다. 

 

이방원 : "하오나 소자, 어마마마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만 생각을 해보니, 그게 어마마마의 탓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 놈의 권력, 그 빌어먹을 권력의 탓인게지요!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게 권력이라는데, 국본의 자리를 앞에 놓고 배아파 낳은 자식 챙기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어마마마.  덕분에 소자, 이제 마음이 아주 홀가분합니다.  이제는 아무런 죄책감도 미련도 없이 국본을, 보위를 도모할 것입니다."   

 

  마음 아픈 표정을 지으며 이방원의 말을 듣고 있던 강씨의 눈빛이 확 달라진다.

  그저 다 죽어가는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으려 왔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방원에게서 무서운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방원이 국본을 도모한다면, 지금의 국본인 자신의 친아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이방원 : "기억나십니까?  멀게만 느껴지던 시절, (이 붓주머니는) 어마마마와 소자의 마음이었습니다.  내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아 방석이를 그리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이방원은 예전에 강씨에게 선물로 받았던 붓주머니를 돌려준다. 

  명나라로 떠나는 이방원을 위해 강씨가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만들었다는 그 붓주머니를 받고서, 이방원은 무척 감동하며 고마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붓주머니를 갈갈이 찢어서 강씨에게 되돌려준다.  그 붓주머니처럼 이복동생인 이방석도 끝장내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원래 처음부터 적이라 생각한 이에게 당하는 것보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더 뼈아픈 법이다.  비록 그 배신이라는 것이, 상대방 또는 제3자가 보기에는 배신이라 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래서 이방원은 머리로는 강씨가 친아들을 더 위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강씨와 이복동생에 대한 정과 의리를 칼같이 끊어낸다.

 

 

 

2. 다시 부상하는 요동정벌론


 

  요동정벌론 - 상황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 혹은 정도전의 자기부정? 

 

  조선 개국 후 승승장구하던 정도전에게 큰 문제가 생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정도전이 추진하는 부국강병책이 명나라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라고 조선 조정에 압력을 행사한다.  동시에, 정도전과 정치적 갈등을 겪는 이방원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은근히 조선 조정의 내분을 조장한다.

  그렇잖아도 정도전은, 세자 책봉 문제와 사병 혁파 문제로 이방원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왕자들까지 적으로 돌린 상황이다.  국왕인 이성계와 세자인 이방석이 정도전을 지지하고 있다지만, 이성계는 점점 노쇠해지고 있고 세자는 아직 어리다.  정도전이 최고의 권력을 잡고 있다지만, 그 권력 기반이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명나라에서는 아예 정도전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니... 

 

  결국, 정도전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요동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내놓게 된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이란 말을 입에 담자, 경악하는 조정 대신들.

 

 

  정도전은 요동정벌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조선이 결코 만만치 않는 나라임을 보여, 명나라에게서 유화적인 외교적 태도를 이끌어내려 한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요동정벌을 준비하는 것을 명분 삼아서 자신의 정적인 여러 왕자들의 사병들을 모두 관군으로 흡수하여, 벽에 부딪친 사병 혁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정도전의 생각대로만 된다면야 그야말로 탁월한 계책이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동시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계책이니까.

 

  문제는, 정도전이 다른 조선건국 세력과 함께 과거에 요동정벌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점이다.

  고려 말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했을 때, 조선건국에 앞장선 강경파 사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온건파 사대부조차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물론 아무런 이유없이 반대한 것은 아니다.  비록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람들은 비굴한 태도라고 욕을 했지만, 사대부들은 현실적인 여건을 근거로 해서 논리정연하게 반대했다.  그런데도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강행하자, 강경파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고 나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때 요동정벌에 반대했던 한 세력의 우두머리 정도전이, 이제 와서 오히려 요동정벌에 앞장선 것이다.  정도전이야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자기부정이며 아전인수라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궁궐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대놓고 이죽거린다. "이게 뉘신가 했더니, (요동정벌을 주장한) 최영 장군의 현신이셨구려." 라며.

 

  정도전이 이방원의 심복이 된 이숙번과 요동정벌에 대해 주고받는 말은, 그런 정도전의 모순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숙번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권력자(정도전)에게 돌진하는 혈기방장한 청년 관료다.  당사자인 정도전이 봐도 그렇고, 제3자인 하륜이 봐도 그렇고, 이숙번은 놀라우리만큼 젊은 시절의 정도전과 닮았다.  드라마에서 정도전이 이숙번을 처음 만났을 때 잔인하리만큼 철저히 응징했던 것은, 어쩌면 이숙번을 보니 지금은 잃어버린 젊은 시절의 자신이 연상되어서, 자신이 변했음을 새삼스레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도전 : "요동을 취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보는가?"
이숙번 : "그렇습니다."
정도전 : "어째서?"
이숙번 : "무모하고 무책임하고 부당하며 불가능한 몽상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 : "불가능한 몽상이라?  이거 제법 싹수가 있는 자라 여겼더니, 평생 모사꾼이나 하다 죽을 밥버러지였구만."
이숙번 : "대감, 말씀을 삼가하십시오!"
정도전 : "그 옛날 자네처럼, 혈기 하나만 믿고 설쳐대던 어떤 밥버러지가 있었네.  결국에는 벼랑 끝까지 내몰렸고, 그러던 어느 날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게 되었지.  그 순간부터 부족하나마, 밥값 정도는 하고 사는 처지가 되었네.  자네도 밥버러지 신세를 면하고 싶다면, 불가능한 꿈 하나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사시게."

 

  얼핏 보면, 온갖 풍파 다 겪고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생 선배가, 한참 어린 천방지축 후배에게 쓴맛 나는 충고를 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정도전의 심각한 자기부정이며 모순이다.  고려 말 사대부들이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했을 때, 최영이 요동정벌을 고집했던 이유가 바로 지금 정도전이 이숙번에게 말한 그 '불가능한 꿈' 때문이었다.  어디 최영이라고, 당시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요동정벌을 추진했겠는가...   최영이 정치적 감각이나 외교적 안목이 부족했다고 해도, 명색이 수십 년간 전쟁터를 누빈 장수이며, 오랜 기간 조정 일을 맡았던 고위 관료였다.  최영 역시 고려의 상황이 여러가지로 어렵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라의 자존과 미래라는 꿈을 위해 무리해가면서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과거 최영의 꿈이었던 요동정벌을 똑같이 추진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하다.

  처음에 정도전은 올곧고 정면돌파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이인임처럼 변해서 온갖 음모와 술수에 손을 대더니, 마침내 이인임처럼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인임처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역성혁명의 걸림돌이었던 최영, 그 최영이 이루지 못 했던 꿈을 대신 꾸게 된 것이다.  이인임처럼 변하면서 인간미를 잃되 이인임과 같은 권세를 누리더니, 최영처럼 변하면서 조국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되 최영과 같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변해가는 과정이란, 참으로 기묘하다.  정도전의 모습은 어찌 보면 현실과 이상 속에서 고뇌하는 혁명가로 보여 대단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초심을 잃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도전이란 한 사람에게서, 현실적인 정치가와 이상적인 혁명가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 그가 적으로 삼았던 이인임과 최영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참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다.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 되는가... 

 

  요동정벌을 두고 고려 조정에서 벌어졌던 논쟁이, 불과 10년만에 조선 조정에서 되풀이 된다. 

  이 부분도 무척 기묘한 느낌을 준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요동정벌을 두고 정전과 조준이 주고받은 설전은, 수백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도 비슷한 논쟁거리와 연결이 된다.

  바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국방 정책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군비확장 및 미국의 보복조치로 인한 큰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더라도, 당당히 자주국방을 추진해서 미국의 속국이라는 비아냥을 피할 것인가...  혹은 강대국들 사이에 끼인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힘이 보잘 것 없다는 현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경제적 풍요라는 실리라도 취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미국의 외교 및 군사 정책을 따르며 국방의 상당부분을 미국에게 의존할 것인가...

 

정도전 : "전하, 더 이상의 인내는 의미가 없사옵니다, 요동정벌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조준 : "그래도 참아야 하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과 마찰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옵니다.  불의를 당했다 하여 소국이 대국을 범하려 드는 것은, 당장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처사이옵니다."
남온 : "좌정승(조준)은 대체 어느 나라 재상이란 말입니까?"
조준 :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조선의 재상입니다!"
심효생 : "그런 분이 어찌 이처럼 굴욕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이오이까!"
조준 : "전하!  조선이 놓은 형세를 직시하시옵소서!  바다의 왜국, 북방의 오랑캐, 배로 사흘거리에 명나라가 있사옵니다.  이러한 조선이 살아남는 방도가 정녕 무력이겠사옵니까?  결단코 아니옵니다.  중원의 대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천하의 질서는, 냉엄하고 비정한 것이옵니다.  설사 명나라가 굴욕을 요구해와도 참고 또 참으면서, 사대의 예를 정착시킬 방도를 찾아야 하옵니다.  이것이 조선의 숙명이옵니다."
정도전 : "그 역겨운 소리 집어치우지 못하겠소이까!"

 

 

후손들에게 당당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요동을 정벌하자는 정도전.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자는 조준.

 

 

  무척 어려운 문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적절하고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기에, 어느 쪽은 맞고 어느 쪽은 틀리다고 섣불리 말하기 힘들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양쪽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니, 머리 맞대고 잘 의논해서 양쪽 주장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타협을 이루어보시오.' 인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부국강병의 이상을 꿈꾸는 정도전은 마지막으로 조준을 설득하다 안 되자, 조정에서 물러나든지 아니면 아예 죽음을 각오하라며 협박을 한다.  자신과 다른 뜻을 지닌 자를 매국노로 매도하며 쳐내려는 강경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는 조준은, 정도전의 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위험한 망상으로 치부한다.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를 무조건 위험한 과격분자로 매도하며 무시하는 소극적인 현실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수백년 전 조선에서도, 그리고 수백년 후 대한민국에서도,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는 타협과 상생의 길을 찾지 못 하고 팽팽한 평행선 위를 내달린다. 

 

정도전 : "우재(조준), 도와주시게.  나는 요동의 땅덩어리에 눈이 먼 패권주의자가 아닐세.  민본의 이상을 포기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조준 : "어째서 그렇습니까?"
정도전 : "민본이 무엇인가?  민생일세.  민생의 최대 적은 무엇인가?  외적일세.  나라도 없이 떠도는 요동 오랑캐를 복속시키고, 옛 강토를 수복하여 국부의 원천을 늘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하여 책봉이나 구걸하는 껍데기 사대가 아니라 천하질서의 일원으로서 당당한 사대를 해보자는 이 사람 생각이 정녕 민본에 반하는 것인가?" 
조준 : "이 사람이 들어본 궤변 중에 가히 최고라 할만하군요.  어떠한 미사여구와 명분으로 포장하더라도 전쟁은 전쟁!  요동정벌은 한 정치가의 불가능한 이상을 실험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동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도전 : "한 달간 말미를 주겠네.  그 안에 용퇴를 하든가, 아니면 묏자리를 봐두시게." 
조준 : "대감의 모습이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영락없는 괴물입니다
."

 

 

(위) 요동정벌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마지막으로 조준을 설득하는 정도전.

(아래) 조준에게, 망상에 빠져 백성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람으로 비난받는 정도전. (이 때 정도전의 표정이 상처받은 표정임.  역성혁명의 동지조차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속상했던걸까?)

 

 

 

3. 하륜의 계란전략 - 독은 독으로 다스려야 한다 / 수준 높은 개그(?)


 

  제1차 왕자의 난의 주역 중 하나인 이숙번은, 이 드라마가 다 끝나가는 중에 등장한다.

  그래서 많이 등장하지 못 하지만, 그래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위에 이미 쓴대로, 이숙번이란 인물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전의 정도전을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려 말 최고의 권신인 이인임 앞에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쓴소리를 하던 젊은 날의 정도전처럼, 애송이 이숙번도 젊은 혈기와 정의감만으로 정도전의 앞길을 가로막고 진법훈련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숙번 : "명나라 황제가 우리 조선을 믿지 못 하여 전하에 대한 책봉을 미루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불요불급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도전 : "자네의 기개는 가상하나 생각은 아직 덜 여문 듯하이.  국방은 국가의 기본 소임이거늘 어찌 하루라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만 비켜서시게."
이숙번 : "국방은 구실일 뿐이지요?  속내는 거추장스런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기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정도전 : "뭐라?"
이숙번 : "소인 사병을 혁파하려는 대감의 대의에는 찬동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라 안의 문제.  지금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오니, 진법 훈련을 미루어주십시오."
이숙번 : "한때나마 나도 자네처럼, 패기만 믿고 객기를 부리던 시절이 있었느니라.  그 때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 줄 것이니, 이만 비켜서게."
이숙번 : "제 발로 비킬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막아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객기를 부려보셨다니 대감께서도 잘 아실 것 아니십니까?"

 

  정도전은 말 그대로 복날 개 패듯이 이숙번을 폭행한다...!

  냉철한 정치가로 변한 뒤로 보기 힘들었던 평정심을 잃은 모습이다.  왜 그런 과격한 짓을 했는지는, 나중에 남은과 주고받은 말에 그 답이 있다.  자신이 꿈꾸는 대업을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이성계는 얼마 못 살 듯하고 세자는 아직 어리기만 하니,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아마 동서고금의 여러 혁명가 또는 개혁가가 저지른 공통된 실수일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고상하고 원대한 뜻을 품고 있어도, 주위에 그 뜻을 이해해주며 따라와주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니 혁명 또는 개혁이 진척이 안 되어 점점 초조해진 나머지, 민심이나 여론을 무시하고 혼자서만 앞으로 내달리게 된다.  그래서 훗날 역사가들에게는 대단한 인물이라 평가받게 되지만, 정작 살아있을 당시에는 과격분자로 매도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 하게 된다.

 

 

(위) 냉정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이숙번을 두들겨패는 정도전과,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숙번.

(아래) 정도전의 과격한 모습에 놀라는 남은과, 쓰러진 이숙번을 눈여겨보는 하륜.

 

 

  하륜은 이숙번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고, 이숙번을 이방원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한다.

  이 부분이 참 기발하면서 재미있다.  정도전처럼 하륜 역시, 이숙번이 젊은 시절의 정도전과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런 이숙번을 정도전을 때려잡을 무리에 끌어들였으니...  정도전을 정도전 비슷한 이숙번으로 친다는 것은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 식의 전략이고 할 수 있다.

 

 

하륜의 계란전략(?)은 이 드라마에 나온 정적을 무찌르는 전략 중 가장 해학적이었음! 

 

 

  이숙번이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를 내려고 가다가 하륜과 마주친다.

  역시, 그 옛날 정도전이 이인임을 탄핵하는 상소를 냈던 것처럼, 이숙번도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를 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단 관리가 최고 권력자를 탄핵하는 상소가 먹힐 리가 있나...  하룻 강아지가 아무 것도 모르고 호랑이에게 덤비는 격일 뿐이다.  하륜이 그런 이숙번의 상소를 다짜고짜 빼앗아 읽더니 혀를 찬다.

 

하륜 : "이런, 이런...  내 이럴 줄 알았으이.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유분수지, 이 따위 걸로 정도전이 탄핵될 것이라 여기시는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네 신세만 망칠 뿐일세."
이숙번 : "허면 권신 하나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잠자코 쳐다만보라는 말입니까?"
하륜 : "자네 참으로, 보면 볼수록 옛날의 누구와 많이 닮았네 그려."
이숙번 : "누구말입니까?"
하륜 :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했던 사람.  헌데 신기하게도 나중에는 정말 바위를 부숴버리더군."
이숙번 : "(자신이 쓴 상소를) 이리 주십시오."
하륜 : "어허~"
이숙번 : "대감!"
하륜 : "성격이 호탕하고 의리가 깊어, 또래 관료들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신망이 아주 높다지?"
이숙번 : "소생의 뒤를 캐고 다니셨습니까?"
하륜 : "자, 이건 내게 맡기고, 자네는 얼른 가서 자네만큼 똘똘하고 대책없는 계란, 계란들을 모아보시게."

이숙번 : "무슨 말입니까?"
하륜 : "우리도 바위 한 번 깨보자는 말이지.  옛날의 삼봉 정도전처럼!"

 

 

(위) 거적을 깔고  1인 시위를 벌이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갈 처지가 된 이숙번.

(아래) 바로 그 순간, 이숙번의 시위에 동참하려고 우르르 몰려온 '똘똘하고 대책없는 계란떼(?)'...!

 

 

  이성계와 이지란이 종종 벌였던 술자리 장면과 함께, 이 계란전략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몇 안 되는 개그 장면이다.

  하지만 술자리 장면이 그저 재미있기만 한 개그를 보이는데 비해, 계란전략 장면은 수준 높은 개그를 보여준다.  정도전을 닮은 인물로 정도전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발상도 그렇고, 과거 정도전이 이인임을 결국 거꾸러뜨렸던 방식대로 이번에는 정도전을 끌어내리자는 발상도 그렇고. ^^

 

 

 

4. 제1차 왕자의 난 - 최후의 승자 이방원 / 역사 속으로 사라진 풍운아 정도전

 

 

  마침내 이방원이 무력정변을 일으킨다.

  후세에 '제1차 왕자의 난' 이라 불리우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그 막을 올린 것이다.  노쇠한 이성계는 병석에 누워있고, 정도전 일파는 남은의 집에 모여 술자리를 벌이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방원은 그렇게 정적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전격적으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정변을 불과 하룻밤만에 성공시켰으니 이방원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대단하기는 하다. 

 

 

무기고와 삼군부를 기습해서, 중앙 군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이숙번과 하륜.

 

 

늙고 병든 사자의 피맺힌 절규.

(이성계 역을 맡은 배우 유동근의 연기는 정말 굉장함.)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아들을 죽이고 싶은 이성계지만, 늙고 병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순간 이성계는 과거에 정도전이 했던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을 죽일 생각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려 할 때, 이성계는 그래도 어떻게 아들을 사지에 보낼 수 있냐며 망설였다.  그 때 정도전이 말했다.  "언젠가 전하의 손으로 정안군을 베는 비극적인 날이 올지도 모르옵니다.  차라리 명나라로 보내시옵소서."  아마, 차라리 정도전의 말을 들을 것을 그랬다고, 속으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후회했을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되어 마주앉은 이방원과 정도전.

 

 

  잔인하니 야심만만하니 해도, 어쨌거나 그 자리까지 올라온 이방원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정도전에게 그 동안 원한을 품었던 것은 품었던 것이고, 정도전이란 인물의 능력은 아깝게 여긴다.  그래서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회유한다.  자신과 손잡고, 정도전이 그토록 원했던 민본의 나라를 함께 만들자고 설득한다.

 

이방원 : "대업이 목전에 와있다 하지 않았소이까?  신하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망발만 철회하시오.  자존심만 버린다면 대업을 성취할 수 있소이다.  그대가 누구요?  대업에 미쳐있던 사람이었소."
정도전 :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재상정치 없이는 민본의 대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방원 : "어째서 그렇습니까?"
정도전 : "임금은 이씨가 물려받지만, 재상은 능력만 있다면 성씨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 같은 정씨, 조씨, 강씨, 최씨, 박씨, 이 나라의 성씨를 모두 합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
이방원 : "뭐라고 합니까?"
정도전 : "백성이다."

이방원 : "!"
정도전 : "왕은 하늘이 내리지만, 재상은 백성이 낸다.  해서, 재상이 다스리는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보다 백성에게 더 가깝고 더 이롭고 더 안전한 것이다."
이방원 : "이 나라의 주인은 군왕이오."
정도전 : "틀렸다,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이방원 : "허면 그대가 생각하는 나라의 임금은 뭐요?"
정도전 :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
이방원 : "!"
정도전 : "이제 내가 너의 신하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알겠느냐?"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 했네." / "삼봉, 이제 됐네.  자넨 할만큼 하였어."

(이 장면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함께, 영상의 때깔이 참 좋더구만... ^^)

 

 

  죽어가는 정도전은  꿈인 듯 환상인 듯 정몽주의 모습을 본다.

  정적으로 갈라선 채로 이승에서 헤어졌던 두 사람이, 저승에서 다시 만나 함께 손을 잡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내 생각에는, 이 드라마 작가의 '현실 인식' 과 '바람' 이 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를 쓴 정현민 작가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냈는데, 다른 정치 이념과 정책을 내세우는 여러 당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노동운동을 그냥 지지하는 게 아니라 아예 노동운동에 투신했을 정도면, 작가는 이 모순 많은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꿈을 품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다가 노동운동가라는 야인의 처지로는 변혁을 일으키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국회라는 제도권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  보수세력이고 진보세력이고 간에, 정치하는 것들은 죄다 그 놈이 그 놈이구나 하는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환멸 속에서도, 언젠가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공존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 한 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 희망을 담아, 생전에는 친우였지만 정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사후에나마 굳게 서로의 손을 붙잡는 장면을 집어넣은 게 아닐런지...

 

 

 

5. 권력의 무상함 / 그 후로도 계속 될 피바람

 

 

이방원의 칼에 묻은 정도전의 피를 손으로 잡고 증오와 분노를 터뜨리는 이성계.

자신을 철저히 증오하고 부정하는 아버지에게 충격을 받은 이방원.

 

 

  역성혁명을 함께 이룬 동지 정도전과 사랑하는 막내 아들 이방석을 잃은 채, 이방원과 마주하게 된 이성계. 

  이성계는 아들의 칼에 흐르는 정도전의 피를 손과 얼굴에 묻힌 채, 아들에 대한 증오심을 터뜨린다.  이방원은 이방원대로, 역성혁명 과정에서 가장 공이 큰 아들인 자신을 저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다. 

 

이방원 : "너무 노여워 마시옵소서.  이게 다 아바마마 때문이 아니옵니까?  애시당초 철딱서니 없는 어린 아이를 세자로 삼아서는 아니되었단 말입니다!  오늘의 이 아수라장은 아바마마께서 초래하신 일이란 말입니다."
이성계 : "그래, 내 잘못이다.  방석이를 세자에 앉혔을 때, 그 때 너를 죽였어야 하는건데!"


  이방원은 정치적 야망이 큰 것과는 별도로, 감정적으로는 상당히 여리고 미숙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계모인 강씨와의 관계에서도 그랬는데, 이 때 아버지 이성계와 주고 받는 말을 봐도 그런 면이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마치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력정변을 일으킨 것만 같다.  물론,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동지와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죽여놓고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이란 게 어디 그렇게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던가...

  무력정변을 일으킬 때 아버지의 분노를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닐텐데, 막상 아버지 입에서 "그 때 너를 죽였어야 하는건데!" 라는 말이 나오자 마음에 크게 상처 입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 대놓고 어깃장을 놓는다.  그리고 이방원이 그럴수록, 이성계도 지지않고 왕이 될 이방원의 앞날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는다.

 

이성계 : "저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더냐?"
이방원 : "네, 탐이 납니다.  소자 미칠 듯이 탐이 났사옵니다!"
이성계 : "저 용상에 앉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이방원 : "어찌 되옵니까?"
이성계 : "사람들이 적으로 보일 뿐이지!  언제 내 모가지를 따고 용상을 차지할지 모르는 적 말이다!  지옥의 불구뎅이지!  많은 사람들 마음 새카맣게 타버리게 하는 지옥의 불구뎅이지!  근데 삼봉만은 달랐지비.  삼봉의 눈동자에는, 그 눈동자에는 적어도 욕심은 없었지비!  삼봉이 있어, 이 애비가 여태까지 숨쉬고 있는거다."
이방원 : "설사 저기가 불구덩이고, 해서 소자 한 줌 재로 변한다 해도, 가질 것이옵니다.  저기에 앉아서 세상을 호령하고, 소자가 꿈꾸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이성계 : "이 애비가 전에도 말했었지비.  니는 임금감이 아이라고!  니 같은 놈이 저 용상에 앉으믄, 네 놈은 온 세상을 피로 물들게 할 놈이다!"

 

 

(왼쪽) 원했던 절대권력을 손에 넣고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 하는 슬픔에 눈물을 보이는 이방원.

(오른쪽) 권력의 화신처럼 변해버린 아들의 모습에 연민과 슬픔을 드러내는 이성계.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 사이에, 권력을 막 움켜진 자의 허탈함과 권력을 막 잃은 자의 허탈함이 오간다.

  아버지의 용상에 앉은 이방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권력은 얻었지만 아버지를 영원히 잃었다는 슬픔이 아닐까...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들에게 악담을 퍼붓던 이성계는, 인간미를 잃은 아들의 모습에 애처로움을 드러낸다.

 

이방원 : "어떻사옵니까?  소자 제법 군왕다워 보이지 않사오니까?"

이성계 : "..."
이방원 : "어찌 말씀을 아니 하시는 것이옵니까?  소자가 임금처럼 보이지 않느냐, 여쭙고 있지 않사옵니까?"
이성계 : "어쩌다 이렇게 됐니?"
이방원 : "아바마마, 임금의 재목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용상을 차지할 힘을 가진 자가 임금의 재목인 것이고, 이 용상에 앉은 자가 바로 임금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성계 : "방원아."
이방원 : "아바마마, 소자 언젠가는 아바마마처럼 이 용상에 앉아서 세상을 호령할 것입니다.  하오나 소자, 아바마마 같은 임금은 아니될 것이옵니다.  아바마마와 삼봉의 시대는 이제 끝이 났사옵니다.  이제는, 소자의 세상이옵니다.  지켜보시옵소서."

 

  그렇게 이방원은, 아버지의 시대가 끝났다고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세상을 지켜보라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속내를 감추지 못 한다.

 

 

  이 드라마의 결말부에서는 그 동안의 모든 사건을 나레이션으로 정리하면서, 동시에 그 후의 일을 슬쩍 보여준다.

  우선, 훗날 이방원이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이 비춰진다.  그리고 이방원이 조선에서 정도전이란 이름을 지워내면서도, 정작 정도전이 생각해냈던 정책 대부분을 채택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줬음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무척 의미심장한 부분이 짧지만 확실하게 나온다.  바로, 이제 막 즉위식을 올린 듯한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모습이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던 민씨는, 마침내 뜻을 이루자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궁궐을 둘러본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냥 기쁘기만 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런 민씨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방원의 표정은 심상치 않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쳐다보는데, 마치 '다음 사냥감은 바로 당신이야.' 하는 것만 같다.  이방원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민씨의 친정식구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아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정말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원경왕후 민씨.

그러나 다음 숙청의 목표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민씨를 바라보는 태종 이방원.

 

 

  결국, 숙청의 피바람이 이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동시에 끝난 것이 아니다.  드마라 속 최후의 승자 이방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피의 숙청을 일으킬테니까. 

 

 

 

6. 끝맺으며

 

 

  이 드라마는 100점 만점에 95점을 주고 싶은, 정말 잘 만든 사극이다.

  배우들 연기도 멋졌고, 웅장하며 비감 넘치는 OST도 나무랄 데 없었으며, CG나 영상미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본의 완성도가 훌륭했다....!  드라마라는 것도 결국 '이야기' 이기 때문에, 일단은 대본이 탄탄해야 좋은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다.  작가가 실제로 정치 쪽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권력의 냉혹함과 허망함, 그리고 그런 권력의 흐름 속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성장하고 타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사극 같은 경우는 사실성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붙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정사에 상당히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서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잘 살렸다. 

 

 

  다만 열악한 드라마 제작 여건상, 뒤로 갈수록 시간에 쫓겨 만든 티가 나는 것이 좀 아쉽다. 

 

  먼저, 드라마 초반부에 나왔던 탐미적(!)인 연출을, 후반부에서는 거의 보지 못 했다.

  특히나 1,2회에서 공민왕이 명덕태후, 이인임, 정도전 등과 실내나 감옥 등에서 독대하는 장면은, 제작진이 엄청나게 시간과 공을 들인 게 드러나는 명장면들이었다. (특히나, 공민왕이 다정가를 읊다가 뒤에 있는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돌아보던 장면...!)  그런데 그 후로는 실내 또는 야간 장면에서 그 정도로 조명을 적절히 그리고 세심하게 사용하지 못 한 듯하다.

 

  또한 마지막회에서 정도전이 남은에게 요동정벌을 포기할 뜻을 비추는 장면은, 차라리 없는 게 훨씬 좋았을 것이다. 

  작가는 그 장면으로, 정도전이란 인물이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였음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요동정벌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서 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백성들을 지옥 같은 전쟁터로 이끌 수 없어서 요동정벌 계획을 접고 자신을 희생하려 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전혀 말이 안 되는건 아니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드라마를 전개하려면 마지막회인 50회에서가 아니라 늦어도 48회 정도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어야 했다.  마지막 회를 딱 한 회 남겨둔 49회까지도,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무조건 요동정벌을 고집하던 사람이 정도전이다.  그런데 별안간 요동정벌을 접겠다고 나서니, 열심히 드라마를 보던 이 시청자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  만일 그 전에 정도전이 요동정벌이 정말 최선의 길인가 깊이 고민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몇 번 보이기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별안간 요동정벌을 포기하겠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거라면, 정도전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나와야 했다.  즉, 나라를 위한 일과 대다수 백성을 위한 일이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요동정벌군에 징발된 백성들이 사지에 끌려가기 싫어 발버둥치거나, 아버지나 아들 또는 남편이 요동정벌에 동원되는 것을 보면서 통곡하고 분노하는 남은 가족들의 모습 정도는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도전이 그런 광경을 보면서, 스스로가 항상 '민본' 을 강조했는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고 고뇌하는 장면도...

  그렇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정도전이란 캐릭터를 끝까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요동정벌을 주장하다가 죽는 것으로 그리는 게 나았을 것 같다.  

 

  그렇게 뒤로 갈수록 시간에 쫓기어 급하게 만든 티가 나기는 했어도,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둔 드라마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가 나오는 장면은, 드라마라기 보다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극적인 2인극 말이다.  서로에 대한 증오를 폭발시키면서도 그 밑바닥에 상대에 대한 연민이나 미련을 숨기지 못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방원이 불러일으킬 피바람이 드라마 종영 후로도 계속 될 것임을 슬쩍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이런 명품 드라마를 매년 몇 편씩 보게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앞으로 KBS가 정도전 같은 정통사극을 1년에 한 편씩 제작하기로 했다고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소문대로 1년에 한 편씩만 이 수준의 사극을 보여준다면, KBS에 내는 수신료가 아깝지 않을 듯하다. ^^

 

 

정도전(1~23회) - 오래간만에 보는 수준 높은 정통사극(http://blog.daum.net/jha7791/15791078)

정도전(24회~34회) - 꽃이 피려면 누군가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080)

정도전(35~40회) -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려왕조(http://blog.daum.net/jha7791/15791093)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http://blog.daum.net/jha7791/15791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