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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35~40회) -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려왕조

Lesley 2014. 7. 14. 00:01

 

  ※ 이 드라마는 6월 말에 이미 종영(!)했는데, 이 포스트는 35회에서 40회까지 본 후에 쓴 것임.

 

  34회 마지막 부분은 정몽주가 본격적으로 정도전을 쳐낼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었다.

  ☞ 정도전(24회~34회) - 꽃이 피려면 누군가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080)

 

  이제 고려라는 낡은 수레는 마지막 한 바퀴를 힘겹게 움직이는 것으로 그 수명을 다 하려 한다.

  고려는 50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움직였다.  그래서 그 움직임에서 나온 관성으로, 이미 동력이 떨어졌는데도 좀 더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관성조차 바닥이 났다.  이제는 정몽주 등 몇몇 충신이 죽을 힘을 다 해 바퀴를 잡고 힘을 쓴다고 해서, 계속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1. 정도전과 정몽주 - 세 번째 괴물의 탄생

 

 

  ◎ 정치의 소임은 절충과 화합인가, 아니면 정의 실현인가?

 

  친형제나 다름 없던 정도전과 정몽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의 만고충신' 과 '조선의 개국공신' 으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첫 번째 격돌은, 이색의 재등용을 두고 벌어진다.

  정몽주는 역성혁명파와 맞서기 위해, 일단 조정에서 세력을 불리기로 한다.  그래서 공양왕과 은밀히 의논을 해서, 정도전에게 쫓겨난 스승 이색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기로 한다.  물론 정도전은 반대한다.

  두 사람이 이성계 앞에서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장면은, 두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보여준다.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벗이며 동지였지만, 이제 두 사람의 정치관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들어보면 분명히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는 것인데,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고 이성계만 바라보며 각자의 주장을 펼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제 두 사람은 논쟁을 벌일 때조차 얼굴을 맞대지 않을만큼, 사이가 멀어졌다.

 

정도전 : "이색이 판문하부사가 되면 그를 따르는 사대부는 물론,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권문세가와 사찰, 왕실, 대지주가 결집하게 될 터!  그리 되면 사전혁파를 위해서 지금보다 더 큰 희생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정몽주 : "삼봉(정도전)은 지금 정치를 포기하고 전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치의 소임은 절충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을 서슴치 않는 것은 야만이란 말입니다." 
정도전 : "정치의 소임은 세상의 정의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수백 년간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밥버러지들과 절충이라니요?  야합이고, 불의이며, 백성들에 대한 배신입니다."

 

  사실, 딱히 어느 쪽이 틀리다고 말하기 힘들다.

  논리적으로는, 그리고 정의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정도전이 옳다.  옳지 않은 것을 뜯어고치겠다는데, 그리고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며 백성들을 못 살게 구는 무리를 처단하겠다는데, 어떻게 그것을 틀리다고 비난할 수 있겠나...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정몽주의 말도 일리가 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디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딱딱 아귀 맞춰서 돌아간다던가...  잘못된 것을 한꺼번에 다 뜯어고치자는 정도전의 생각은, 얼핏 생각하면 정의로운 생각 같지만 자칫 잘못하면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훗날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는 선죽교(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

정도전은 여전히 정몽주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정몽주.

 

 

  이 드라마 속 정도전은 역사 속 정도전과는 다르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몽주에 대한 끈끈한 정을 끊어내지 못 한다.

  그런데 그게 역사 왜곡이라는 생각보다는, 어쩌면 정말로 저랬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이 개연성 있게 묘사된다. 

 

  정몽주도 정도전을 소중히 생각했지만, 정도전에게 정몽주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실, 정도전이라고 정몽주가 결코 자신들과 손을 잡지 않을 것임을 몰랐을 리 없다.

  정도전처럼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 더구나 10대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서 정몽주의 성품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이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정몽주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역성혁명을 몇 번씩이나 망칠 뻔하면서도, 끝까지 정몽주와 같은 편이 될 수도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놓지 못 했다. 

  정몽주는 특유의 온화한 성품으로 스승이나 동문들에게 애정과 신뢰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정적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존중을 받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어린 시절부터 무척 직설적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 받기 딱 좋은 성격이었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을 보면, 정도전의 모습은 한 마디로 '진짜 재수없는 아이' 임. -.-;;)  그래서인지, 스승과도 좀 거리가 있는 것 같고 동문들 사이에서도 정몽주만큼 인정받지는 못 하는 것 같다.  그런 모난 성격의 정도전을 유일하게 따뜻하고 변함없이 대해준 이가 바로 정몽주다.

 

  그래서 다른 정적을 몰아낼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도전이, 정몽주에게만큼은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던 듯하다.

  정도전에게 정몽주는 너그러운 형이고(물론 배우들의 외모로 보아서는 결코 정몽주가 형으로 보이지 않지만... ^^;;), 둘도 없는 벗이며, 장차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을 때 만백성의 화합을 이룰만한 인품과 경륜을 갖춘 이상적인 정치가다.  그래서 아무리 괴물로 변한 정도전이라지만, 정몽주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했던 듯하다.  

 

  젊은 시절의 정도전과 정몽주는 어떤 면에서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올곧은 성품이며 소신을 지키는 심지 굳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단지, 자신의 소신을 밀고나가는 데 있어서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정도전은 직설적이고 과격한 성격이라, 악한 무리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에 비해 정몽주는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반대편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코 한 배를 탈 수 없다.

  타고난 성격과 출신 배경과 성장한 후의 경험이 달라서, 두 사람이 품은 뜻의 바탕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  바로 그것이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정도전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불의로 가득찬 고려를 무너뜨리려 한다.  하지만 정몽주는 비록 여러가지로 불합리한 점이 많은 고려지만, 그래도 고려라는 틀 안에서 모두가 상생하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설득하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코 상대방에게 설득될 수가 없다.

  한 사람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고려를 없앨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일단 고려가 존속한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 세 번째 괴물로 변한 정몽주

 

  먼저번 감상문에서 정도전이 이인임의 뒤를 잇는 두 번째 괴물이 되었다고 했다.

  ☞ 정도전(24회~34회) - 꽃이 피려면 누군가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080)

 

  그런데 이제는 정몽주마저 괴물로 변한다.

 

  유백순이란 사람이 올린 상소로 조정에 파란이 인다.

  위화도 회군 및 폐가입진을 비난하며, 정도전이 이성계의 뒷배를 믿고 전횡을 일삼는다고 탄핵하는 내용이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가 유백순을 사주해서 상소를 올리게 한거라고 의심한다.  그런데 의외로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과 폐가입진의 대의를 부정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유백순을 곤장을 때려 귀양보낸다.  즉, 여기까지만 보면, 정몽주가 이 상소 사건과 아무 상관 없는 것만 같다.

  역성혁명파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해하는데, 곧 정몽주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다.  유백순을 미끼 삼아 정도전을 쳐내려는 계략인 것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이 최고 실력자 이성계의 측근이면서 부적절하게 처신해서 그런 분란이 생긴거라고 주장하며, 징계 차원에서 정도전을 지방직인 평양부윤으로 보내기로 한다.

 

  역성혁명파 대부분이 정몽주에게 당했다며 분노하지만, 이성계와 정도전은 순순히 정몽주의 처결에 따른다.

  두 사람 모두 어떻게든 정몽주만은 같은 편으로 품고 싶어서, 정몽주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정몽주의 체면을 살려주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몽주의 사정을 봐준다고 해서, 정몽주가 고마워하며 역성혁명파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을 거꾸러뜨리려고 한다. 

 

 

변해가는 제자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말리지도 못 하는 스승 이색.

스스로의 변화에 자괴감과 슬픔을 내비치는 제자 정몽주.

 

 

  이색은 유백순 사건이 정몽주의 계략임을 눈치챈다.

  이색은 정몽주가 역성혁명파의 기세를 꺾은 것이 기쁘기보다는, 올곧기만 했던 정몽주가 권모술수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이 마음에 걸린다.  정몽주는 그런 스승에게 눈물 젖은 눈으로, 고려를 지키기 위해 원리원칙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신념을 버린 아픔을 토로한다.  그리고 다른 동문들도 그런 정몽주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어지러운 세상이 흠 잡을 데 없던 고귀한 선비 하나를 괴물로 만든 셈이다.  절대권력을 지닌 괴물 이인임과 싸우기 위해 정도전이 괴물로 변했듯이, 이제는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괴물 정도전과 싸우기 위해 정몽주도 괴물이 된 것이다. 


이색 : "유백순의 일은 수시중(정몽주의 관직명) 자네가 계획한 것인가?"
정몽주 : "송구합니다.  대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색 : "몽주야, 내 더는 묻지 않으마.  허나 이것 하나만은 유념해야 하느니라.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흙탕물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을 상징함.)이라 하였다.  처한 곳이 더럽게 물들어도, 군자는 무릇 깨끗함을 잃지 말아야 하느니라.  싸우는 것은 좋으나, 몽주 너다움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알겠느냐?"
정몽주 : "하오나 스승님, 그러기에는 저들은 너무 강하고 소생은 너무 나약합니다."
이색 : "몽주야."
정몽주 :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소생 또한 괴물이 될 것입니다."

 

 

"나의 죄목은 무엇인가?"

"천한 신분을 숨기고 관직에 올라, 귀천의 예법을 무너뜨리고 종사를 기망한 죄일세."

 

 

  자신이 한 말처럼 정몽주는 괴물이 되어, 괴물 같은 짓을 저지른다.

 

  정도전의 혈통상 약점을 잡아 정도전의 숨통을 죈 것이다.

  정몽주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서출이다.  하지만 적서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고려시대라서, 그런 혈통이 정도전의 관직 생활에 공식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몽주가 우현보에게서,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단순한 서출이 아니라 노비 소생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조선 개국 후, 우현보는 정도전에게 정치보복을 당해 여러 아들을 잃게 됨.)

  정몽주는 이제 단순히 정도전을 조정에서 축출하려는 게 아니라, 노비의 후손이라는 굴레를 씌어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든다.  오랜 시절 함께 해 온 벗이기에, 정도전이란 인물이 얼마나 의지가 강한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삭탈관직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정도라면, 언젠가 재기해서 또 역성혁명을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니 신분제사회에서 치명적일 수 밖에 없는 '천출' 이라는 낙인을 찍어 완전히 재기불능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정몽주가 권력으로도 무력으로도 정도전에 비해 열세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싸울 수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의 정몽주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마치 도덕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온화하고 상생과 중용의 길을 추구하던 정몽주가, 이제는 권모술수만으로도 모자라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다니...  정몽주에 의해 체포될 때 정도전의 표정을 보면, 체포되어서가 아니라 정몽주가 그렇게 변한 것에 더 놀라는 듯하다. 

 

 

정도전의 참혹한 모습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모질게 정도전을 처단하려는 정몽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몽주를 필사적으로 설득하려는 정도전.

 


정몽주 : "나를 보자 하였다지?  천출임을 이제 자복하겠는가?"
정도전 :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것인가?"
정몽주 : "천만에."
정도전 : "허면 나는 천출이어야 하는 것이군."
정몽주 : "그렇네.  이런 방식, 자네가 즐겨 쓰던 것 아니었던가?"
정도전 : "맞네.  해서 자네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 역시 잘 알고 있네.  자네를 내가 이렇게 만들었네.  미안하네, 포은."

정도전 : "대업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성계 대감의 확고부동한 뜻이네.  나에게 대역죄를 물어 죽이려면 이 시중도 함께 죽여야 할 터, 자네에게 그런 힘이 있겠는가?"
정몽주 : "여지껏 단 한 번도 힘이 있어 싸운 적은 없었네.  내가 믿는 것은 오로지 대의!  내게 힘이란 게 있었다면, 그것은 대의네."
정도전 : "자네의 대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게.  대의의 반대편에는 불의가 아니라 또 다른 대의가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란 말이네!"
 
(사실 이 말은 모순임.  정도전 역시 정몽주나 이색 등 온건파의 대의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니...)
정몽주 :
"그래서 나라를 파괴하라는 수작마저도 대의라 이름 붙이려는 것인가?"
정도전 : "하늘이 버린 나라였어!  백성을 버린 나라였고!  그런 썩어빠진 나라를 수호하는 것을 과연 대의라 이름 할 수 있겠는가?"
정몽주 :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닥치게!"

 

 

 

2. 이성계와 정몽주

 

 

  ◎ 이성계를 온전한 고려인으로 대해준 사람, 정몽주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뿐만 아니라 이성계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전쟁 중 적국인 원나라로 귀화한 부원배 집안 출신, 그리고 원나라가 다 망해가자 다시 고려로 역귀화한 지조 없는 집안 출신.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몇 번이나 전쟁터에 나가서 큰 전공을 세워도, 이 두 가지 꼬리표는 계속해서 이성계를 쫓아다녔다.  고려의 지배계층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성계를 경원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를 같은 고려인으로 따뜻하게 대접해준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최영과 정몽주다.

 

  그 중에서도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더 깊은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

  물론 최영과의 정도 끈끈했지만, 최영과는 전쟁터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라는 인연이 있다.  즉, 친해질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에는 어떤 교집합도 없다.  한 사람은 무장 출신으로 변방의 전쟁터만 떠돌았고, 또 한 사람은 전도유망한 유학자로 중앙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친분이 생길 이유는 고사하고, 정몽주 입장에서는 이성계와 친하게 지내는 게 앞날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 속에서 이성계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이인임과 그 일당은 물론이고, 이인임과 대립각을 세우는 명덕태후에게도 위험인물로 찍힌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정몽주는 항상 이성계를 동등하게 대해줬고, 이성계는 그런 정몽주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정도전만큼이나 정몽주를 같은 편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처음에는 그저 그 동안의 정과 의리 때문에 정몽주를 잡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몽주가 스스로에게 왕을 폐위한 간악한 신하라는 오명을 씌우면서까지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 하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장차 자신이 세우려는 새 나라에 정몽주 같은 충성스런 신하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임금으로서의 소망까지 품게 된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소망에 연연해하는 아버지 이성계가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운 이방원.

 

 

  사실, 정몽주를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그런데도 이성계와 정몽주가 그 불가능한 꿈을 붙잡고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감정에 휘둘리는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방원, 조준, 남은 등 다른 역성혁명파도 정몽주가 대단한 인물인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몽주에 대해 아주 특별한 우정이나 의리는 품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몽주의 성품상 정몽주는 절대로 역성혁명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와 정도전은, 사실은 자신들도 마음 밑바닥에서는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계속 부정하며, 정몽주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 한다.  


이방원 : "삼봉(정도전) 숙부와 정몽주 모두를 갖으려는 마음이신거 압니다.  하오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한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을 수 없듯이, 아버님의 하늘에도 두 사람 모두 빛날 수는 없는 겁니다."

이성계 : "방원아, 이 애비가 맹글라는 하늘에는 말이다, 해와 달이 사이 좋게 함께 떠있을거다.  처음엔 티격태격 쌈박질도 하고 난리를 쳐대겠지만, 그래도 이 애비는 끝까지 넉넉히 품고 갈기다.  내 반드시 두 사람 다 품고 간다."
이방원 : "아버님."
이성계 : "그럼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겠지비."

 

 

  ◎ 서로를 친우이자 동지로 남기고 싶지만, 결국 정적이 될 수 밖에 없는 두 사람  

 

  이성계는 그 동안 무리해가면서 정몽주를 배려해줬다.

  정몽주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정몽주만은 다치지 않게 하려 애를 쓰며 몇 번이나 정치적인 양보를 했다.  그리고 다른 역성혁명파 사람들의 불만과 우려를 무릅쓰고, 정몽주를 수시중(현재의 부총리에 해당함.) 자리에 앉혀 조정을 맡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몽주는 그런 이성계의 배려를, 오히려 정도전을 숙청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성계가 고향에서 아내의 장례를 치르느라 개경을 비운 사이, 정몽주는 정도전의 몸에 노비의 피가 흐른다며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힌 죄로 고문을 가한 것이다.  이성계로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일 것이다.  정몽주를 그냥 친한 사람이 아니라 학식과 인품이 높은 사람으로 존경했기에, 배신감이 더 컸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며 파국을 맞게 되는 이성계와 정몽주.

 

 

  그런데 정몽주 역시 이성계에 대해서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정몽주가 보기에는, 정도전이야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지만, 우직하고 순박한 이성계는 정도전의 꾐에 빠져 역성혁명 같은 허무맹랑한 말에 솔깃했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이 정성을 다 해 설득하면, 이성계만은 다시 고려의 충성스런 신하로 돌아올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일로 정몽주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이성계에게 그런 설득이 통할 리 없다.  

  정도전을 석방하라는 뜻으로 평소와 다르게 무례한 태도로 나오는 이성계에게, 정몽주는 반드시 정도전을 죽이겠노라고 너무나 담담히 말한다.  그러자 이성계는 전쟁터에서 만나 싸우는 적하고도 정이 생기는 법이라며, 어떻게 40년 지기를 죽이려 하느냐고 정몽주를 격렬히 비난한다.  서로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기에, 감정이 격해지며 서로에게 강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두 사람.

 

정도전 : "40년지기 삼봉과 포은은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각자의 대의에 함몰된 두 마리의 괴물이 있을 뿐입니다."

이성계 : "내 분명히 얘기하겠소.  내는 무슨 수를 써서든 임금, 왕 할거우다.  가서 내 역적이라고 떠들고 마음대로 해봅소!  내 이성계가 어떤 놈인지 똑똑히 보여주겠소."
정몽주 : "이제보니, 그 놈의 대업이 여러 사람을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려."

이성계 : "야! 정몽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왕씨는 500년씩이나 해처먹은 임금 자리, 내는 하면 아니되는거니?"
정몽주 : "아니됩니다!"

이성계 : "아니되긴 뭐 안돼?  내 더 잘 하고, 내야말고 백성들 더 잘 보살피겠다는데!  야, 네가 뭔데 아이 된다는거니?"
정몽주 : "아니된다 하지 않소이까!"

 

 

 

3. 정몽주의 죽음

 

 

  ◎ 마지막 만남 - 정몽주와 정도전 / 정몽주와 이성계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 이성계가 사냥을 떠났다가 낙마해서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터진다.

  그 정보를 입수한 정몽주와 공양왕은, 이성계를 없애려고 자객을 보내지만 실패한다.  비록 이성계 암살 계획은 실패했지만, 그 후로 재빨리 이성계 일파를 체포해서 투옥하거나 유배보낸다.  이성계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이성계의 수족을 모두 잘라내고, 마지막에는 이성계마저 처단할 생각인 것이다.  당연히, 이성계 일파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정도전의 사형을 서두르려 한다. 

 

 

우정과 증오로 점철된 이승에서의 인연으로, 이별주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러나 인생은 예측불허라서, 두 사람이 예상했던 것과 반대의 모습으로 이별하게 됨.

 

 

  공양왕에게서 정도전의 참수형 명령을 받아낸 정몽주는, 정도전과 자주 가던 계곡 정자 앞에서 마지막 술자리를 마련한다.

  두 사람의 남다른 인연과 정도전의 민본사상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없었더라면 좋았을거라 생각한다. ^^;;  픽션이라서 거부감을 느꼈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드라마니 어느 정도의 허구가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다른 허구 부분에서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워낙 개연성이 탄탄한 드라마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두 사람의 우정이 너무 이상적이고 완벽하게 그려저서, 도무지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재현과 임호, 두 배우의 연기는 일품이었음!) 


정몽주 : "어찌하여 살려달란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네는 나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한사코 그렇게 하지 않았었네.  사정을 봐주었으니, 이제는 나더러 온정을 베풀어달라 졸라볼 수 있지 않은가?"
정도전 : "나는 자네가 따라주는 이 술 한 잔이면 족하네.  고맙네, 포은."

정몽주 : "내가 귀양가던 자네에게 맹자를 권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정도전 : "그런다 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네.  내 스승은 맹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니까.  나주로 유배를 가서 영춘이란 자를 만났네.  그 옛날 처음 귀양을 갔을 때 징발당해 죽은 줄만 알았는데, 여전히 씩씩하게 잘 살아있더군. 수재동도 마찬가지.  왜구가 폐허로 만들어버린 마을인데, 다시 사람들이 살고 굴뚝에 연기가 나더군."
정몽주 : "그들이 자네의 스승이란 말인가?"
정도전 : "그렇네.  참으로 나약해보이지만 더없이 끈질기고 강인한 존재, 그게 백성들일세.  해서 나는 믿네.  이번이 아니되면 그 다음, 그 다음이 아니되면 또 그 다음!  언젠가 진정한 백성의 나라가 이 삼한 땅에 세워질거라고 말일세."
정몽주 : "이보게, 삼봉.  편히 가시게."
정도전 : "건승을 비네."

 

 

(위) 마지막까지 정몽주를 붙잡고 싶었던 이성계.

(아래) "나 이성계는, 이 순간부터 당신 정몽주와는 절연이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역성혁명파 숙청이 성공할 것 같은 시점에, 이성계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찾아가겠다고 하자, 공양왕은 위험하다며 말린다.  이성계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자신들이 이성계 주위 사람에게 한 일이 있으니,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몽주는 가만히 있으면 대세가 이성계 쪽으로 완전히 기울 것이라며, 이성계와 담판을 짓겠다고 기어이 이성계의 집으로 떠난다. 

 

  이성계는 지난 번 만남으로 자신들이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음을 확인했으면서도, 막상 정몽주를 보니 다시 붙잡게 된다.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정도전의 석방을 요구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성계의 태도와 말투만 봐서는 영락없는 협박이지만, 사실은 여전히 정몽주에게 같은 편이 되어 달라고 손을 내미는 내용이다.  그냥 정도전을 풀어주라고 하는 게 아니라 "가서 손잡고 삼봉과 함께 이리로 오시우다." 라고 한다.  가서 정도전의 손을 잡고 오라, 즉 '나는 아직도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와 함께 하고 싶다' 라는 뜻이다.

  그 뒤로도 절절한 설득이 이어진다.  자신이 왕이 되면 부귀영화나 탐하면서 남들을 짓밟을까봐 반대하는거냐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왕이 되어도 나랏일은 전부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맡길거라고, 그러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수많은 적군을 가차없이 죽였던 고려 제일의 무장이 그렇게 눈물로 호소한다.

 

  정몽주도 자신에 대한 이성계의 진실한 마음에는 흔들리는 듯 하지만, 역성혁명에 대해서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나 이성계는, 이 순간부터 당신 정몽주와는 절연이다!" 는 말이 이승에서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어 버린다.  그 말을 내지른 이성계나 듣는 정몽주나, 모두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표정이다. (이성계 역을 맡은 배우 유동근의 연기력이 정말 엄청남...! ㅠ.ㅠ)

 

 

  ◎ 고려 마지막 충신의 죽음

 

  한편, 진작부터 역성혁명을 위해서는 정몽주를 없애야 한다는 뜻을 밝혔던 이방원이 나선다.

  정몽주가 자신들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이성계와 정몽주의 대화를 밖에서 엿들은 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설득에 나서기로 한다.   그토록 정몽주에게 연연해하는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서다.  동시에, 역성혁명파가 더 이상 정몽주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정몽주를 어찌할지를 이제 그만 결정내리기 위함이기도 하다.


 

"한 번쯤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몸을 맡기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네가 말하는 역사의 흐름은 결국 역류, 반역일 뿐이니라."

 

 

  그 동안 정몽주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던 이방원이, 모처럼 정중한 태도로 정몽주를 대한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 깨진다.  "숙부님!  제발, 한번만 꺽어주십시오." 라는 이방원의 말이, 마치 '제발 나로 하여금 당신을 해치게 않게 해주시오.' 라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시세를 따를 정몽주였으면, 이미 진작에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읊은 하여가에 대해, 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보이며 읊었다는 단심가...  그 유명한 일화를 이 드라마에서는 좀 다르게 각색한다.  정몽주는 이방원의 면전에 단심가를 읊지 않고, 단심가를 적은 종이를 주며 이성계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정몽주가 자리를 뜬 후, 이방원은 단심가를 읽고나서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선지교(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이들에게 최후를 맞게 된 정몽주.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과거 정도전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착잡해 할 때,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이 다가온다.

  자객 중 하나로 온 조영규가, 대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용서해달라는 이방원의 말을 전한다.  그러자 정몽주는 "방원이에게 전하거라.  고려의 충신으로 죽게해주어 고맙다고.  이제 너희의 대업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찬탈이 되어버렸다고." 라고 답한다.  앞부분에 방점을 찍고 들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절개를 지키려는 충신의 고고함이 드러나는 말이다.  하지만 뒷부분에 방점을 찍고 들으면, 살해당할 순간에도 자신의 죽음이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시킬 것임을 계산하는 냉철함이 드러나는 말이다. 

 

  이성계가 단심가를 읽으며 괴로워하던 그 시간에, 정몽주는 선지교 위에서 처참히 죽는다.   

  그리고 선지교(善地橋)란 이름은,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대나무 한 그루가 그 절개를 상징하듯이 솟아난 일로 선죽교(善竹橋)로 바뀐다.

 

 

결코 잃고 싶지 않았던 벗의 참혹한 시신을 안고 대성통곡하는 정도전.

 

 

(위) "숙부님." / "나를 두번 다시 숙부라 부르지마라."

(아래) 아들에 대한 분노를 주체 못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성계.  

 

 

  정도전과 이방원의 관계는 이 일로 확실한 악연이 된다.

  역사 속 정도전과 이방원이 정치관이나 세자 문제 등 정치적인 이유에서 정적으로 갈라서는데 비해, 이 드라마에서는 정몽주의 참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이해해달라고 하지만, 정도전은 냉랭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아마도, 조선 개국 후 두 사람이 정적으로 갈라져서 목숨을 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는 것을, 보다 극적으로 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또한 이 일은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투쟁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정도전이 그 동안 여러 정적을 숙청했다지만, 모두 탄핵을 거쳐서 유배를 보내거나 사형시키는 합법적인 방법을 썼다.  한 번도 암살 같은 비합법적인 방법을 쓴 적은 없었다. (물론 죽임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합법적으로 죽으나 비합법적으로 죽으나 마찬가지겠지만... -.-;;)

  하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나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암살 같은 어둠의 방법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좋게 말하면 결단력 있는 것이고, 나쁜게 말하면 괴물로 변한 정도전보다도 더 잔인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각자 원하는 바가 너무 다르다는 점을 극명히 보여주기도 한다.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의 건설자' 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정해진 절차를 제대로 밟아,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그게 눈 가리고 아옹 식의 뻔한 형식일지언정, 새 나라의 기틀을 빠른 시간 안에 잡기 위해 정당성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새로운 나라의 권력자' 가 되고 싶었다.  아직 역성혁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자신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똑똑하고 과단성 있고 냉철한 젊은이의 가슴 밑바닥에는, 스스로도 모르는 야심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이목 따위 간단히 무시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한편, 이성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아들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이방원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위해 한 일인데도 자신만 질책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중적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역성혁명이라는 엄청난 일을 벌이면서 피를 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누구나 뻔히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외면한 채, 아버지와 역성혁명파 모두를 대신해서 손에 피를 묻힌 자신만 책망하고 있으니... 

 

이성계 : "그 사람(정몽주)이 이 애비하고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이방원 : "예, 압니다.  삼봉 숙부와 더불어 아버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입입니다.  하오나 대업의 적이라는 것도 압니다."

 

이방원 : "소자가 아니라 아버님의 욕심이 그리 만든 것입니다!  대업과 정몽주를 모두 갖겠다는 것, 피흘리지 않고 왕씨의 용상을 물려받겠다는 것, 그 자체가 허무맹랑한 욕심이었단 말입니다!"
이성계 : "아가리 닥쳐라!"
이방원 : "하나만 여쭙지요.  정녕 아버님의 마음 속에는, 정몽주를 제거하겠다는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으셨습니까?  소자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아버님께서 정몽주를 죽이셨을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결코 용상을 포기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어쩌면 이방원의 말처럼, 이성계의 마음 한 구석에는 정몽주를 제거해야겠다는 뜻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아직은 정몽주를 아끼는 마음이 정몽주를 해치고자 하는 마음보다 더 컸을 뿐...  시간이 흘러 정몽주로 인해 역성혁명이 계속해서 방해를 받았다면, 정몽주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분노와 실망감으로 정몽주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원은 이성계를 대신해서 정몽주의 피를 손에 묻힌 셈이 된다.  자신의 속마음을 아들이 정확히 짚어냈기에, 아들의 그 말에 유독 더 분노했는지도 모른다. 

 

 

 

4. 고려왕조의 종말

 

 

  ◎ 해가 지는데 밤이 오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역성혁명파를 막아내던 마지막 방파제 정몽주가 무너짐으로써, 이제 고려왕조의 종말은 기정사실화 된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정몽주의 죽음으로 심한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져 정치 일선에서 물러선다.  정도전은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고, 이성계는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집에 칩거한다. (이 부분은 이성계와 정도전의 인간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해서, 두 사람을 미화했다는 느낌도 드는...)

  역성혁명파의 두 지도자가 역성혁명에서 손을 떼어 버리자, 답답해진 역성혁명파는 자신들이 앞장서서 바람을 잡기로 한다.  즉, 이성계가 원하든 말든, 자기들이 새 왕조 개창의 판을 벌여놓고 이성계를 옹립하기로 한 것이다. 

 

 

대비전으로 몰려가 공양왕을 폐위하는 교서를 내려달라고 정비를 압박하는 역성혁명파.

 

 

  망해가는 나라의 왕실 사람치고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만은, 정비의 운명은 정말 기구하다.

  세상을 뜬 노국공주만 오매불망 생각하는 공민왕에게 시집와서 험한 일 겪더니,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500년 왕조를 끝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아무리 허수아비 신세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실 최고 웃어른이다.  그런데 강압에 의해서라지만, 자신의 손으로 3명이나 되는 왕을 잇달아 폐위시키고 남의 손에 종묘사직을 넘기게 되었으니...

  폐위 교서를 요구하는 신하들에게, 정비는 대체 몇 명의 임금을 갈아치워야 직성이 풀리겠느냐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멸망은 이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든 종묘사직을 지키자던 공양왕에게 정비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해가 지는데 밤이 오는 것을 어찌 막겠습니다.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라고.

  

 

임금으로서 권위도 체면도 다 버리고, 망해가는 종묘사직을 살려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공양왕.

 


  공양왕이라고 고려의 멸망과 이성계의 등극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막상 일이 닥치자 충격에 빠진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모르지 않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성계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공양왕과 이성계는 군신의 관계를 떠나서, 두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손들까지 대대손손 서로 해치지 않는다.' 는 요지의 동맹을 맺자고 제의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신하에게 애걸복걸하는 태도로 동맹을 맺자고 매달리다니, 그래서 이 부분이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엄연한 사실이다...!  정말 굴욕적이고 비참한 일이지만, 공양왕으로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왕위와 목숨만 위태로운 게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고려왕조가 자신의 대에서 문을 닫을 판국이 아닌가...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구나.  500년 왕씨의 사직이 이 왕요의 대에서 결단이 나다니..."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사정해야 하는 굴욕을 참으며 이성계를 만나겠노라 버티던 공양왕 앞에, 폐위 교서가 도착한다.

  왕위에 오르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건만 이성계 일파의 손에 강제로 옹립되었다가, 역시 이성계 일파의 손에 강제로 폐위된 것이다.  그렇게 500년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려왕조의 멸망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명색이 500년이나 이 땅을 지배한 왕조인데, 그런 왕조가 무너질 때 제대로 된 군사적 저항이 없었다는 게 놀랍다.  누구는 그것이야말로 조선 개국이 정당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역성혁명파의 정치적 역량이 대단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무력이 아닌 정치력으로 왕조를 교체하여, 거의 피를 흘리지 않는 역성혁명을 이룬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드문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성혁명파의 정치력이 뛰어났다는 쪽보다는, 고려왕조가 그만큼 마지막 한 방울의 피마저 다 짜내어진 산송장 상태였다는 쪽의 느낌이 더 강하다.  고려왕조를 위해 되든 안 되든 군사를 일으켜 저항할만한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것은, 고려왕조가 이미 회생불능의 상태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이성계나 정도전 같은 인물이 없었더라도, 고려왕조의 멸망은 역사적 필연이었던걸까...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적

 

  드라마가 여기까지 진행되면서 큰 역할 없이 항상 사건 중심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있던 하륜, 정도전과의 관계도 애매했던 그 하륜이 마침내 전면에 등장할 조짐이 보인다.

 

  하륜은 이색의 제자인 신진사대부이면서, 동시에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인임 편에 섰고, 이인임의 몰락 후에는 정몽주 편에 섰다.  내내 정도전의 반대편에 속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인임이나 정도전처럼 자신의 의지를 밀고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성도 내버리고 괴물로 변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서, 그 동안은 정도전의 '정적' 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륜은 좋게 말하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온화한 인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새처럼 이쪽 저쪽 유리한 편에 붙는 인물이다.

  어느 쪽 평가가 맞든 간에, 온건한 처신 덕분에 타인에게 깊은 원한을 사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편에 선 사람에게도 적당히 사정을 봐주는 관대함(혹은 처세술?)을 갖추고 있다.

  그런 면은 드라마에서 여러 번 나왔다.  이인임이 집권하던 시절, 이인임 편에 섰으면서도 이인임이 정도전이나 다른 신진사대부를 쳐낼 때 너무 심하다고 항의하거나 말리기도 했고, 정도전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할 때에는 정도전 아내에게 생활비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또한 정도전이 동문들과 완전히 척을 진 상태에서도, 다른 동문들과는 달리 하륜만은 정몽주에게 꼬박꼬박 '사형' 이라고 부르며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다.  정도전이 정몽주의 묘소를 알려달라며 굳이 하륜을 찾아온 것도, 하륜이 다른 옛 동문들과 달리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몽주의 묘소 앞에 나란히 선 하륜과 정도전.

(이 때만 해도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될거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을 것임.)

 

 

  그렇게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위해 질주할 때에는, 동지도 적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있던 하륜이다.

  그런 하륜이 조선 개국 후에는 이방원 편에 서서, 정도전과 정말로 정적이 된다.  그러니 두 사람이 정몽주 묘소 앞에 서있는 장면은 두 사람의 얄궂은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엮어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정도전이 과거에 둘도 없는 벗이며 정적이었던 정몽주의 묘소 앞에서, 장차 자신의 정적으로 떠오를 하륜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이 드라마의 작가와 PD는 정말 천재인 모양이다...!) 

 

하륜 : "애초에 이성계를 점찍은 연유가 무엇입니까?  모름지기 통치자는 냉정하고 집요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평군(이인임)처럼 말입니다.  이성계가 덕망을 갖춘 영웅인 것은 틀림없으나, 한 나라의 임금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권력에 대한 의지도 확고해보이지 않습니다."
정도전 : "그래서 그 분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음 세상의 임금은 덕망을 갖추고 순진한 영웅이면 충분합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륜 : "무슨 뜻입니까?"

정도전 "..." 

 

 

정도전과의 정치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이방원.

 그리고 그런 이방원을 유심히 바라보는 하륜. 

 

 

  이방원은 고려왕조가 이미 멸망했건만 계속해서 왕위를 거부하는 아버지 때문에 속을 태우던 중, 정도전을 발견하고 반가워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정몽주의 죽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패인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두 사람의 정치적인 생각도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륜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한쪽에서 조용히 들으며, 이방원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진다.  이방원이 하는 말 속에서 이방원이란 인물의 성격과 생각과 처지를 읽고서, 자신의 새로운 주인으로 이방원을 점찍은 듯하다. 

  

정도전 : "갑자기 포은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진 것이냐?"

이방원 : "소생은 지나간 일에는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이방원 : "숙부님께서 아버님을 설득해주십시오.  벌써 수일째 나라에 임금이 없습니다."
정도전 : "어디 임금만 없다더냐?  주군을 따르던 민심도, 대업의 정당성도 허깨비처럼 사라져버렸느니라.  내 천추의 한이 있다면, 너를 대업에 동참시킨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두마.  나를 숙부라 부르지마라."
이방원 : "피흘리지 않는 대업은 몽상입니다!  숙부님께서 추구하는 선위는 요순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대업은 새로운 권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권력은 칼, 정적의 선혈이 배인 칼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고려가 존속했던 때 헤어졌다가, 고려가 망한 때 다시 만난 정도전과 이성계.

 

 

  정도전이 돌아올 때까지 이성계가 옥새를 거부했다는 드라마상의 설정은, 하나의 상징인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정몽주의 죽음으로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정도전 없이는 결코 시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랄까...

  40회 끝부분의 예고편을 보니, 다음 41회에서는 결국 이성계가 보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정몽주로 상징되는 '권력 승계의 정당성' 과 '화합과 상생의 정치' 가 정몽주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린 이상, 조선 개국 후의 상황도 첩첩산중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고려는 정도전과 이성계 손에 무너졌고, 이제 정도전과 이성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에 대한 업보를 짊어진 채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을...  

 

 

정도전(1~23회) - 오래간만에 보는 수준 높은 정통사극(http://blog.daum.net/jha7791/15791078)

정도전(24회~34회) - 꽃이 피려면 누군가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080)

정도전(41~50회) - 피범벅이 된 새 왕조, 그리고 마지막(http://blog.daum.net/jha7791/15791088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http://blog.daum.net/jha7791/15791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