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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1~23회) - 오래간만에 보는 수준 높은 정통사극

Lesley 2014. 5. 20. 00:01

   

  지난 1월 4일에 시작했다는 사극 '정도전' 을 4월 초에 들어서야 보기 시작했다. (원래 이 포스트는 4월 중순에 썼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야 블로그에 올리는... ^^;;)

  조선사를 다룬 사극으로는 1990년대 후반에 방영한 '용의 눈물', 사극 전체로 보자면 2000년대 초반에 방영한 고려 시대 배경인 '무인시대' 이후로, 정사의 기록에 충실한 사극이 없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괜찮은 사극을 하나 발견하게 되어, 무척 기쁘다.

 

 

용상 주위에 고려의 공민왕 및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있는데, 정작 용상에 앉은 사람은 정도전...!

(정도전이 왕은 아니지만, 왕을 만들고 새로운 국가의 제도를 정립한 자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메인 포스터.)

 

 

  그런데 역사적 사실에 상당히 충실하고 주제의식도 묵직한 사극이다 보니, 퓨전사극을 볼 때처럼 진도를 빨리 뺄 수가 없다.

  중국의 퓨전사극인 '후궁견환전' 같은 경우는 회당 40분으로 편성된 것을 하루에 4,5편씩 몰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쪽은 양으로는 비슷한 회당 50분짜리인데도, 보통은 하루에 한 회, 많아야 두 회 볼 수 있는 것이 전부다.  양은 비슷한데 두뇌에 훨씬 더 포만감(!)을 줘서 그 이상 보는 것은 무리다. ^^

 

  앞으로도 계속 이 드라마 감상을 올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23회까지 끊어내어 감상을 올리려 한다.  23회까지가 파란만장하게 흘러갈 이 드라마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여기서 끊어내는 게 적당할 것 같기 때문이다. 

 

 

 

1. 드라마 '정도전' = 정통사극 + 명품사극

 

 

  ◎ 퓨전사극 바람

 

  위에 쓴 것처럼, '용의 눈물' 과 '무인시대' 를 끝으로 정통사극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

  제작되는 사극의 숫자가 특별히 줄어들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2000년대 들어 나온 사극이란 것이 대부분 '퓨전사극' 이다.  등장인물이 현대적인 말투로 대화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조선시대 여인은 깻잎머리로, 고려시대 사내는 파마머리로 나온다. -.-;;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옷차림을 보면, 일단 기본적으로는 우리 전통복식이 맞지만 종종 중국풍의 옷도 나오고 아주 가끔은 서양식 옷도 등장한다. -0-;;  내용이 로맨스 위주다 보니,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놓는 것이야 보통이고...

  어차피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드라마를 만들거라면, 차라리 '해를 품은 달' 처럼 가상의 시대와 가상의 인물로 만드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면 역사 왜곡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제작진 입장에서도 보다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굳이 퓨전사극 앞에 '잃어버린 우리 역사' 또는 '우리 조상들의 꿈' 등의 선전문구를 붙이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지난 십여년간 우리 방송계에 퓨전사극 바람이 분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요즘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점, 또한 정통사극 특유의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가 요즘 젊은이들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비해 빡빡한 드라마 제작환경상, 가급적 돈과 시간이 덜 드는 쪽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려는 방송가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아시아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처음부터 해외 수출을 겨냥하고 드라마를 만드는 경우,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해외 수출 없이는 적자인 드라마가 부지기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극은 현대극과는 달리, 그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해외 시청자들은 한국 역사라는 장벽 때문에, 한국의 정통사극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로맨스 쪽에 무게 중심이 많이 실리기 때문에, 한국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해외 시청자들도 편하게 볼 수 있다.  또 비현실적일만큼 낭만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한국 드라마 속 로맨스를 제대로 살리려면, 고증에 충실한 칙칙한(?) 옷보다는 고증 따위 철저히 무시한 알록달록한(!) 옷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 전역에 한국 드라마 바람이 부는 와중에, 정작 한국의 정통사극팬들은 한국 드라마업계에게 왕따(!)를 당하게 된 것이다. (해외 소비자에 더 신경 쓰고 국내 소비자는 호구로 아는 게, 전자제품 회사나 자동차 회사 뿐만이 아니었어...! ㅠ.ㅠ)

 

 

  ◎ 오래간만에 나온, 그리고 한층 발전한 정통사극

 

  이러한 상황에 거의 10년만에 정통사극이 등장했으니, 그것도 명품사극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작품성 높은 사극이 등장했으니, 바로 '정도전' 이다...!

 

 

  내용적으로는, '용의 눈물' 이나 '무인시대' 같은 기존 정통사극의 묵직함과 진지함을 갖추고 있다.

 

  정통사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작진이 사실에 충실하게 드라마를 만들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어지간한 굵직한 사건들은 한번씩 다 짚어주고, 세세한 용어까지 고증에 신경 써서 일부 시청자는 이해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의상 고증에도 무척 신경썼음을 알 수가 있고...

 

  그래서 가공인물인 '양지' 에 대한 이 드라마 팬들의 거부감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양지란 인물을 열심히 연기한 배우에게는 안 된 말인데, 정통사극팬 입장에서는 양지란 인물이 '공공의 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모처럼 정사에 충실한 정통사극이라고 좋아하며 시청했는데, 웬 가공인물이 잠깐 나오는 게 아니라 제법 비중 있게 몇 회에 걸쳐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인 정도전과의 로맨스 분위기까지 솔솔 풍기면서...! (다행히 로맨스까지 흘러가지는 않았음.)  그러니 시청자들이 '뭐야? 이 드라마 정통사극에서 시작하더니 결국 퓨전사극으로 가는거야?' 하며 울화통 터뜨릴 수 밖에... -.-;; 

 

 

  내용 이외의 면에서도, 여러가지로 질이 높다.

 

  우선, 여러 번 나온 전투 장면을 보면, 빡빡한 제작비와 촉박한 시간의 압박 속에서도 제작진이 무척이나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전쟁사나 전술, 무기 등에 해박한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전투 장면에서도 옥의 티를 열심히 찾아내는 모양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나왔던 다른 사극들과 비교해보면, 이 정도면 괄목할만한 수준이다.

  다른 사극을 보면,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수천 명 또는 수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전투였는데, 양쪽 전투 인원이 달랑 20~30명인 경우가 수두룩하다. -0-;;  물론 현실적으로 수천 또는 수만 명의 보조연기자를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은 아는데, 적어도 인원이 너무 적다는 게 시청자 눈에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기존의 사극에서는 무슨 전투를 몸이 아닌 입으로만 하는지, 병사들이 맞붙어 싸우는 장면보다 장군들이 목이 터져라 악을 쓰는 장면이 더 많았다. -.-;;  

 

  또한, '정도전' 속에서 외국인들이 자국 언어로 말하는 것도 사실성 측면에서 마음에 들었다.

  많은 사극에서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너무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나왔다. (옛날 사람들은 전부 외국어 천재였나? -.-;;)  그나마 '대장금' 에서는 명나라 사신의 유모가 조선 여인이라서 그 사신이 조선어에 익숙하다는 설정이라도 있었지,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그냥' 잘 했다.

  그런데 드라마 '정도전' 에서는 명나라 사신들이 중국어로, 황산대첩 때 일본측 장수였던 아지발도는 일본어로 말한다.  일본어 같은 경우는 내가 아는 바가 없어서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중국어는 명나라 사신 역을 맡은 두 배우가 화교 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유창했다. (나중에 인터넷 뒤져봤더니, 실제로 중국어 실력을 갖춘 배우들을 명나라 사신 역할에 캐스팅했다고...) 

 

  그리고 연출과 영상, CG에도 무척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이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결심하고 함주(지금의 함흥)로 이성계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정도전은 함주로 가는 길에,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얼마 전 전투가 끝난 참혹한 들판의 광경을 목격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기로 한 자신의 결심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이 장면은 1회와 15회에 반복해서 나오는데, 같은 장면임에도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1회 도입부에서는, 앞뒤 상황 설명 없이 그 강렬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막 시작한 드라마의 전체 줄거리와 분위기를 시청자들에게 슬쩍 알려줬다.  즉, 이 드라마가 어지러운 고려 말을 배경으로 정도전이란 풍운아가 역성혁명을 꿈꾸는 내용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15회에서는, 드라마의 전반적인 분위기보다는 정도전이란 인물이 혁명가로 완전히 변화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드라마 초반에서 정도전은 고려의 개혁을 열망했다.  고려왕조의 충직한 신하로서 고려의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체제 개혁의 꿈을 버리고, 대신 체제를 뒤엎는 역성혁명의 꿈을 꾸게 된다.  이제 고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어버렸기 때문에,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하늘은 오래 전에 고려를 버렸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평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OST다...!

  퓨전사극의 OST에는 가요 또는 팝페라 형식의 노래가 많이 나오던데, 역시 사극에는 보컬곡보다는 연주곡이 더 잘 어울린다.  바로 위의 사진 속 장면에 깔리는 BGM는 비장미와 웅장함이 넘치고, 드라마 초반에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볼 때나 후계자 문제로 어머니 명덕태후와 갈등을 빚는 장면 등에 나왔던 BGM은 묵직하면서 애잔하다. 

  알고 보니, 드라마 '정도전' 의 OST를 담당한 이가 이필호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이필호 음악감독은 드라마 '서울 1945' 와 '김수로' 의 OST로 진작부터 좋아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 솜씨가 어디 가지 않았다. ^^  이 드라마는 정통사극답게 보컬곡을 쓰지 않아서 OST 발매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꼭 OST를 내주기 바란다.  CD 발매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인터넷으로라도 음원 발매를 해주기 바란다...!  꼭, 꼭, 꼭...!

 

 

 

2. 이성계 -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는 자

 

 

  ◎ 역사 속 이성계, 그리고 이성계의 정체성 문제

 

  역사에 나오는 이성계의 집안 내력은 특이하다.

  이성계 집안은 원래 전주의 호족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고조부 때 어찌어찌하여 지금의 함경도로 흘러갔다가, 대몽 항쟁기에 원나라에 투항했다.  그리고 원나라 벼슬인 천호 직책을 받아 대대로 세습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공민왕이 즉위한 후, 고려는 원나라에 빼았겼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들었다.  그러자 당시 쌍성총관부 천호였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은 원나라가 망해간다는 대세를 읽고, 조상의 나라 고려에 협력하기로 했다.  쌍성총관부가 99년만에 고려의 땅으로 돌아온 데에는, 이성계 집안이 쌍성총관부 공격에 내응한 공이 컸던 셈이다.

  그 때의 공을 바탕으로 이성계 집안은 고려에서 신흥무인세력으로 자라게 된다.  그리고 훗날,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전부터 역사책에서 이성계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마다 드는 궁금점이 있었다.

  과연 이성계는 고려라는 나라에 애착심이 있었을까, 그리고 당시 고려인들은 이성계 집안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성계 집안은 고려에서 원나라로 귀화했다가, 다시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했다.

  물론, 원나라나 고려나 이성계 집안이 정치적.군사적으로 필요하니, 번갈아가며 자신의 세력으로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략적인 측면 말고,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어땠을까?  고려인들이나 원나라인들이나 그런 이성계 집안을 보는 눈이 그저 곱기만 했을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간사하고 몹쓸 집안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현대처럼 그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을 가서 귀화하는 경우도 아니고,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다가 마침내 종주국과 속국으로 운명이 갈린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두 번이나 귀화했다.  냉정히 말하자면, 고려 쪽에서는 "적국에 붙어 벼슬살이 하다니, 저런 더러운 매국노...!" 라고 욕하며 펄펄 뛰고, 원나라 쪽에서는 "자기 동족도 배신한 것들인데, 언젠가는 우리 뒤통수도 칠 수 있어." 라며 은근히 멸시하고 의심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성계의 정체성은 어떠했을까?

  이성계는 이미 고조부 때부터 원나라 벼슬을 하며 원나라에 충성했던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다시 고려로 귀부했을 때 2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집안이 다시 고려로 귀화하는 것을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였을까?  혹시 자신이 고려 사람인가 혹은 원나라 사람인가 하는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았을까?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가 그러한 나의 궁금증을 짚어서 기존의 사극 속 이성계와는 다른, 정체성을 고민하는 새로운 이성계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

 

 

  ◎ 드라마 속 이성계

 

  이 드라마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지배계층 사람들에게 백안시 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원나라로 귀화했다가 고려로 재귀화한 집안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주변인으로 떠도는 이성계.

 

 

  공민왕이 시해된 후 다음 왕위를 놓고, 명덕태후(공민왕의 어머니)와 이인임 사이에서 불꽃 튀는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이 때 어떤 신하가 명덕태후에게 권한다.  동북면에 머물고 있는 이성계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런 이성계를 불러들여 곁에 둔다면 이인임과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명덕태후는 "그 자는 대대로 원나라의 천호를 지낸 부원배의 후손!  믿을 수가 없어요." 라며 단호히 거절한다.  그 신하는, 그래도 이성계 집안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때부터는 고려에 충성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러자 명덕태후는 답답하다는 말투로 반문한다.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니 고려에 붙은 것 뿐이지요.  한 번 했던 배신을 두 번이라고 못 하겠습니까?"

 

  이인임은 명덕태후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있지만, 이성계에게 뿌리 깊은 불신을 품고 있기는 명덕태후와 마찬가지다.

  이성계의 능력을 높이 사는 최영은, 이성계를 왜구 토벌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자고 한다.  그러자 권력욕 강하고 교활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갖고 있기도 한 이인임이 반대하며 말한다.  "이 사람(이인임)이나 대감(최영)에게 고려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숙명이지만, 그 자(이성계)에게 고려는 나이 스무살에 선택한 수단이었습니다.  숙명과 선택의 차이는 아주 큰 것입니다."

 

  자신의 군사적 재능은 실컷 이용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고려인으로 받아주지 않는 고려 지배계층 사람들 속에서, 이성계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제대로 된 고려인으로 인정받으려 애쓰고 참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무시하고 따돌리는 고려 지배계층에게 분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훗날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게 된다.  어쩌면 이인임이 말했던 것처럼 이성계에게 고려는 숙명이 아닌 선택일 뿐이었기에, 나중에 자신에게 더욱 나은 선택을 하며 고려를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3. 이인임 - 간신이며 권신, 그러나 역신은 아닌 자

 

 

  ◎ 역사 속 이인임

 

  이인임은 학문에 뛰어난 편은 아니었는지, 과거가 아닌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빽으로 공무원이 된 셈... ^^;;)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부하는 능력과 세상 살아가는 능력은 다른 법이다.  이인임은 공민왕 시대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입과 최유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공민왕의 자주정책 중 하나인 동녕부 정벌(제1차 요동 정벌) 때에도 공을 세웠다.  즉, 분명히 실력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인임의 진정한 재능은 그러한 군사적 실력이 아니라, 뛰어난 처세술과 정치적 감각이었다.

  특히 사람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려사에 '자기 일당을 요직에 심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니, 문객들이 그 밑에 가득 몰려들어 각자 자신이 가장 후대받는다고 여겼다.' 라고 되어 있을 정도다.  사실, 자기 주위 사람들 각각에게 '내 주위에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믿고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다.' 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상대방의 성격과 심리를 파악하는 통찰력, 싫은 사람에게라도 절대 내색하지 않고 친절히 대하는 자제력을 동시에 지녀야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 속 이인임은, 자기의 부하 노릇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자신보다 지위가 한참 아래이며 적대적 관계인 이성계나 정도전에게도, 항상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존대를 쓴다. (그런데 그런 예의 바른 태도가 더 얄밉고 소름끼치는... -.-;;)

 

 

  ◎ 드라마 속 이인임

 

  이 드라마에서 이인임의 캐릭터는 고려사에 기록된 이인임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오다시피 했다.

  그래서 이성계의 캐릭터만큼 참신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대신 굉장히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의 '사실적' 이란 말은 생생하다는 뜻이기도 하며, 동시에 세속적이란 뜻이기도 하다.  정도전, 이성계, 최영, 정몽주 등 다른 주요인물들은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각자 자기 식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뭔가 해보려고 애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인임은 매우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지독하리만큼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이다.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딱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네.  하나는 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구."

 

 

  부정부패에 찌들었지만 능력은 탁월한 이인임의 캐릭터는, 드라마 속에서 최영의 입을 통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인임의 탐욕과 이기심에 분노하는 이성계을 달래면서, 최영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자(이인임)가 부패한 것은 사실이나, 지금 고려에 그만한 경륜을 가진 자도 없지 않은가?"

 

  드라마 전반부에서는 정도전이 아닌 이인임이 주인공으로 보일 지경이다.

  작가가 이인임의 캐릭터를 워낙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냈고, 배우 '박영규' 의 연기가 너무 실감나기 때문이다.  이 포스트가 드라마 '정도전' 의 1회에서 23회까지의 감상을 뭉뚱그려 담고 있는데, 23회에서 토막을 친 이유가 바로 23회에서 이인임이 몰락하기 때문이다. ^^  이 드라마를 토막 내는데 이인임의 집권과 이인임의 몰락이 중요한 기준이 될만큼, 이인임의 비중과 카리스마가 컸다.

 

 

  드라마 속 이인임은 악역이긴 하지만 무척 매력적이어서, 이모저모 살펴볼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우선, 공민왕 사후 함께 조정의 양대 세력자로 부상한 최영과 비교가 된다.

  최영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의리를 아는 인물이지만, 대신 지나치게 우직한 성격 탓에 정치적 감각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최영은 이성계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보인다.  이성계와 함께 여러 번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전우애도 느끼고 있고, 또 이성계가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귀화 출신이라는 이유로 냉대받는 게 안타깝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인임은 최영과는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 중요시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이지만, 대신 세상과 사람을 보는 통찰력 및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최영이 미처 보지 못 한 이성계 마음 속에 숨어있는 저력(장수로서의 저력이 아닌 정치가로서의 저력)과 울분과 야심을 간파해낸다.  그래서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최영에게 이성계를 경계하라는 말을 한다.  "이 사람이나 대감에게 고려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숙명이지만, 그 자에게 고려는 나이 스무살에 선택한 수단이었습니다.  숙명하고 선택의 차이는 아주 큰 것입니다."

 

  또한, 이성계와도 묘하게 비교가 된다.

  이성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드라마 속에서도 분명히 이인임처럼 썩어빠진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왜구들을 몇 번이나 무찌르고, 공민왕 시대 원나라를 공격해서 북방영토를 늘리고, 조선 개국을 전후해서는 토지 개혁을 이룬, 한 마디로 나라와 백성들에게 득이 되는 행동을 많이 한 인물이다.  게다가 드라마에서는, 힘없는 백성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부하들에 대한 따뜻한 정을 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을 전체적으로 비교하자면, 누가 봐도 이성계가 이인임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고려왕조라는 기존의 체제를 두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성계란 인물은, 고려왕조에서 봤을 때는 분명히 역적이다.  이성계가 아무리 큰 업적을 세웠어도,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신하로서 왕을 폐위하고 살해했으며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인임은 끝없는 탐욕으로 나라와 백성에 엄청난 해악을 끼쳤지만, 최소한 고려왕조에 반역을 기도한 적은 없다.  

 

 

  간신이지만 역신은 아니었던 이인임의 기묘한 캐릭터가 드라마에 잘 묘사된다.

 

  우선, 공민왕의 시해 전후 상황이 그러하다. 

  드라마 속 공민왕과 이인임은 기묘한 정치적 파트너다.  공민왕은 죽은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조정의 반발을 무마하는 데 이인임에게 도움을 받는다.  물론 욕심 많은 이인임이 그냥 공민왕을 도운 것은 아니다.  이인임은 영전 공사와 관련한 더러운 뒷수습을 맡는 대가로, 공민왕의 비호 아래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다.  즉, 공민왕은 무리한 대형 토목공사 진행을 위해 자기 신하의 전횡을 눈감아줬고, 이인임은 부당한 권력 행사를 위해 자신이 모시는 군주가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을 묵인한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이 이인임을 내치고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를 불러들이려 한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의 은밀하고도 떳떳하지 못 했던 관계를 깨뜨리려 한 것이다.  그러자 이인임은, 홍륜이 공민왕을 해치려 나서도록 뒤에서 은근히 유도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공민왕 피살 사건에 이인임이 개입했을 수 있다고 추측하고 있는데, 이 드라마는 그 추측에 좀 더 살을 덧붙인 것임.)  

  공민왕의 시신을 앞에 두고, 이인임은  "소신을 내치시고 기껏 하신다는 것이, 사대부들 따위와 나라를 도모하는 것이었습니까?  소신 권세는 탐했을지언정 전하의 충직한 개로 살아왔거늘, 이것은 너무 심한 처사 아니옵니까? 왜 그러셨사옵니까? 대체 왜...!" 하며 항변하듯이 소리친다.  간신이며 권신이지만 역신은 아니었던 이인임의 입장이 잘 드러난 대사다.

 

  또한 명덕태후는 임종하면서, 이인임에게 종묘사직을 지켜달라 부탁한다.

  명덕태후는 아들 공민왕이 살해된 후 계속해서 이인임과 대립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이인임에게 맡긴 것이다.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니 이제는 이인임을 몰아낼 도리가 없어서, 이인임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인임이 정사를 농단하기는 할지언정, 최소한 고려왕실을 뒤엎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명덕태후 눈에 이인임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려는 욕심을 가진 자로 보였더라면, 절대로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이인임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악당 이인임의 매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장면은, 평범한 사람들이 옳은 것이라 여기는 원칙을 기막히게 자신의 이익과 결부시키는 경우다.

 

  이인임 일당인 임견미와 염흥방이 미곡 투기(!)에 나선 일이 있었다.

  흉년으로 쌀값이 폭등해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게 된다.  그런데 명색이 조정의 대신이라는 임견미와 염흥방은, 구휼 대책이나 쌀값 안정화 대책을 세우는 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오히려 그 기회에 자기네 곳간에 가득찬 쌀을 비싼 값에 팔아 한몫 잡아볼 생각으로, 쌀값이 더 뛰어오르게 뒤에서 농간을 부린다. -.-;;

  그 사실을 눈치챈 이인임이 두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경고한다.  "권세를 오래 누리고 싶으면, 내 말을 명심하세요.  권좌에 앉아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만 다스리면 됩니다.  자기 자신!" 

 

  나중에는 염흥방이, 힘없는 백성에게서는 더 뺏을 토지가 없어서 같은 귀족인 조반의 토지까지 빼앗는 사건이 일어난다. -0-;;

  염흥방이 조반의 토지를 강탈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결국 이인임 일당이 몰락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백성도 아니고 귀족의 땅을 빼앗았으니, 최영이 문제 삼고 나서면서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지게 된다.  이인임이 문제의 그 땅을 조반에게 돌려주라고 하자, 염흥방과 임견미는 그 땅을 돌려주면 최영에게 굴복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라며 반발한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두 사람은 그 기회에 아예 최영을 없애버리자고 한다. -.-;;  그러자 이인임이 말한다.  "정적이 없는 권력은 고인 물과 같소이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되고, 종국에는 권력을 잃고 죽게 됩니다.  권세와 부귀영화를 오래 누리고 싶다면, 정적을 곁에 두세요."

 

  '권좌에 앉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 와 '정적이 없는 권력(즉, 견제세력이 없는 권력)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는 것은 정치를 논할 때 흔히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이인임이 그런 이치 혹은 원칙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에는, 남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즉, 다른 사람들처럼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덕목' 이라든지 또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상생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 때문이 아니다.  '나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영원무궁토록 누리기 위한 처세술 내지는 책략' 으로 생각하고 지킨다.  덮어놓고 욕심을 부리거나 지나치게 반대편을 찍어누르면 오히려 강한 반발을 사서 기왕에 누리던 부와 권력도 잃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법이다.  그러니  부패하더라도 '적당한 수준'(!)으로만 부패해서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려보자는 지혜(?)인 것이다. -.-;; 

 

  이런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인임은 때때로 통 큰 배포를 보여준다.

  이인임 일당이 최영을 몰아내자고 졸라댈 때, 이인임은 최영을 건드리지 말라며 단단히 일러둔다.  명덕태후가 이인임을 견제하기 위해 최영을 불러들이려 할 때도, 이인임은 명덕태후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찬성한다.

  최영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 역시 최영을 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왜구의 습격이 끊이지 않고, 북쪽에서는 명나라와의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그렇게 국방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최영 같은 뛰어난 장군이 고려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최영과 공생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에는 나라를 위한 마음이 아니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다.  즉, 이인임이 최영을 해치지 않는 이유는, 가깝게 생각하면 조국인 고려를 위해서지만, 멀리 내다보면 자신이 뜯어먹을(!) 고려라는 나라가 절대로 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 공민왕 - 사랑을 잃고 개혁에 실패한 왕 / 배우 김명수의 재발견

 

 

  공민왕은 이 드라마에서 겨우 3회까지만 등장하다.

  그나마 2회 끝부분에서 홍륜에게 살해당해서, 3회에서는 시신으로 누워있는 장면 또는 회상 장면으로만 나온다. ^^;;  그러니 사실상 2회까지만 나온 셈인데, 그렇게 짧게 등장하지만 정말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 드라마를 4월 초부터 보기 시작했다.

  1월 초에 시작한 드라마를 3개월이 지나도록 안 보다가 갑자기 보게 된 것은, 유튜브에서 우연히 공민왕이 나오는 부분을 보고 반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역을 맡은 배우 '김명수' 를 그 동안 이런저런 드라마에서 봤다.  나무랄 데 없는 연기력을 지닌 배우지만, 항상 조연급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겨우 두 회차만 출연한 이 드라마에서, 공민왕 말년에 공민왕이 겪은 고뇌를 생생히 표현해냈다. 

  1회와 2회만 놓고 보면, 드라마 제목을 '정도전' 에서 '공민왕' 으로 바꿔야 할만큼 김명수의 연기력이 소름끼치게 인상적이었다...!

 

  드라마 속 공민왕은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짓눌린 상태로 나온다.

  즉위 초반에는, 원나라의 속국 상태인 고려를 당당한 자주국가로 만들겠노라며 열정적으로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고려 권문세족의 반발이 공민왕의 발목을 잡았다.  차라리 자신의 형인 충혜왕처럼 주색잡기에나 몰두하며 제멋대로 살았더라면, 나라와 백성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스스로는 아무 생각없이 살 수 있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무언가 해보려고 발버둥 쳤건만, 국내외의 모든 상황이 뜻한대로 흐르지 않아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좌절을 겪은 왕은, 차츰 의지를 잃고 지쳐갔다. 

 

 

이인임 앞에서 시조를 읊다가, 뒤에 걸린 노국공주 초상화를 돌아보며 애상에 젖는 공민왕.

(이 장면의 연출도 참 좋았음.  특히 조명 쪽으로 공들인 티가 팍팍 나는... ^^)

 

 

  설상가상으로, 단순한 아내 이상으로 사랑하고 의지했던 왕비 노국공주가 세상을 뜨면서, 공민왕은 급속히 무너져버렸다.

  죽은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에만 매달리며, 그렇잖아도 오랜 전란으로 소진된 국력을 고갈시키고 백성들을 괴롭히게 되었다.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끔찍히 아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노국공주 사후에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이 오직 공주의 죽음 그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위에 언급한 이런저런 일이 오랜 시간 계속되면서, 공민왕의 정신은 서서히 피폐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그 동안 쌓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던 것이 아닐런지... 

 

 

이인임을 은밀히 불러들여, 아들 모니노의 세자 책봉에 협조해달라고 하는 공민왕.

 

 

  공민왕이 아들 모니노를 세자로 삼겠다며 이인임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부분은, 작은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가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를 중지하라고 설득하는 장면이 있었다.

  공민왕이 죽은 노국공주를 위해 아방궁 부럽지 않은 영전을 지어야 한다고 하자, 명덕태후가 간곡히 말한다.  "진시황의 아방궁이 백년을 갔습니까, 천년을 갔습니까?  진시황이 죽고 3년만에 흔적도 없이 타버렸습니다."  이 때 공민왕의 얼굴이, 마치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미묘하게 변한다.  그리고 나중에 명덕태후의 말을 곱씹는 장면이 나오기까지 한다.  그래서 정말로 영전 공사 중지를 고려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역사 속 공민왕은 죽기 전까지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공민왕이 일단은 공사를 중지하라고 했다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공사를 재개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다.  그런데...   

 

  공민왕은 영전 공사 중지를 생각했던 게 아니라, 자기가 죽고나서도 영전을 영원히 존속시킬 궁리를 한 것이다...!

  즉, 명덕태후는 '어차피 영원히 남을 영전도 아닌데,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해가며 영전을 지어서는 안 된다' 는 뜻으로 위의 말을 한 것인데, 공민왕은 '영전을 지어서는 안 된다' 는 부분은 쏙 빼놓고 '영원히 남을 영전이 아니다' 는 부분만 골라 듣는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야 자신이 살아있으니 노국공주의 영전을 지킬 수 있지만, 자신이 죽고나면 누가 그 영전을 지킬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모니노를, 갑자기 세자로 책봉하기로 한다.  자신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야만, 자신의 뜻을 받들어 영전을 영원토록 잘 돌볼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듣는 이에게, 말하는 이의 의도와 전혀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기막힌 일... 현실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

  하지만 명덕태후와 조정 대신들이 모니노가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생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반대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인임에게 모니노의 세자 책봉에 협조하라며, 대신 더 높은 지위와 권력을 주겠다고 정치적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이 때, 정도전이라는 변수가 나타나게 된다.

  사실, 정도전은 공민왕 생전에 이미 공민왕에게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공민왕이 살해되기 겨우 얼마 전에야 공민왕이 정도전을 알게 된 것으로 나온다.

  다른 신하들과 다르게 직설적이고 반항아 기질이 농후한 정도전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공민왕의 잘못을 대놓고 지적하며 왕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한다.  그런데 정도전의 무례하기까지 한 강렬한 언행이, 오히려 공민왕의 시들어있던 총기와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공민왕은 미망 속을 헤매던 정신을 추스리고, 정도전과 다른 신진사대부들을 불러모아 다시 한 번 정치 쇄신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 때 공민왕이 정도전에게 하는 "네가 말한 희망이라는 것, 그 놈에게 한 번만 더 속아보겠다." 라는 말이, 그 후 공민왕이 어찌 되는지 뻔히 아는 시청자에게는 정말 먹먹하게 다가온다.  공민왕이 정도전에게 저 말을 하고 불과 며칠 후, 공민왕은 살해되고 고려왕조의 희망은 완전히 끝이 난다.

 

 

 

5. 정도전 - 기존체제 안에서의 개혁가 vs. 기존체제를 뒤엎으려는 혁명가

 

 

  이성계, 이인임, 공민왕을 다 소개한 후에야, 주인공 정도전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게 좀 우습다. ^^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 23회까지는 정도전의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15회에서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가 역사적인 대면을 가진 후 정도전의 비중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정도전' 이라는 드라마 제목에 걸맞는 무게감을 보여주지 못 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정도전은 이 드라마의 1회에서 23회까지 중 대부분의 기간을 귀양살이 및 야인생활을 하며 조정 바깥에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그러니 무슨 일을 할래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마도,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지고 조선왕조 개창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된 후에야, 정말 주인공다운 활약을 하게 될 듯하다.  

 

 

정면돌파 밖에 모르는 올곧았던 젊은 선비에서, 권모술수를 쓸 줄 아는 모략가로 변한 정도전.

 

 

  비록 정도전이 23회까지는 주인공다운 행보를 보여주지는 못 했지만, 대신 한 인간으로서의 변화를 두 가지 면에서 보여준다.

 

  첫째는, '그저 정의감만 불태우던 고지식한 유학자' 가 '냉정한 현실을 깨닫고 냉철한 정치가' 로 변하는 과정이다.

 

  공민왕 재위 시기, 정도전은 학문 수준과 정의감은 높지만 앞뒤 구분 못 하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였다.

  잘못된 세상 속에서 그저 의기와 명분만 앞세우며 덮어놓고 돌진하는 야생마 같은 사람이었다.  이인임은 정도전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꿰뚫어보지만, 아직 너무 미숙하다는 점도 간파한다.  그래서 점잖으면서도 야유하는 말투로 말한다.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세요.  고작 당신 정도가 떼쓴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고작 당신 정도' 라는 소리나 듣던 정도전은, 귀양살이를 하며 완전히 변한다.

  공민왕이 살해된 후 전라도 나주에 있는 부곡(대한민국 학생들이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고려시대의 특수 행정구역이라며 '향, 소, 부곡' 하고 외웠던 바로 그 부곡... ^^;;)에서 1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하며, 현실에 눈을 뜨고 정신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 동안 백성들을 위한다며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맞섰지만, 정작 자신도 책에 담긴 지식이나 알 뿐 힘없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 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 정도전은, 그렇게 싫어했던 이인임의 말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키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힘을 키우기 위해 권모술수를 쓰기 시작한다.  정면돌파 밖에 모르던 외골수 정도전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술수도 부릴 줄 아는 현실적인 인물로 변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얄궂은 일이다.  그토록 싫어했던 이인임으로 인해, 정도전이 이인임형 인물로 변하게 된 셈이니 말이다.

 

  둘째는, '고려의 개혁을 꿈꾸던 충성스런 신하' 가 '새 왕조의 개창을 꿈꾸는 반역자 또는 혁명가' 로 변하게 되는 과정이다.

 

  정도전이 함께 역성혁명의 대업을 이루자고 하지만, 이성계는 계속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야심만만한 이방원(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훗날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이 됨.)이 정도전에게 묻는다.  왜 역성혁명을 주저하는 자신의 아버지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느냐고.  그 때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한 대답이, 정도전 스스로가 어째서 '고려의 개혁' 대신 '새 왕조의 건립' 으로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한 답도 된다.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가 혁명을 꿈꾸겠느냐?  너희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세 치 혀가 아니라 실패다."

 

  한 때 정도전의 희망은, 부패한 권문세가를 조정에서 내몰고 신진사대부들의 힘으로 고려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 즉 체제내의 개혁이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를 올렸지만, 번번히 이인임 일파에게 묵살당했다.  그 다음에는 공민왕과 의기투합했지만, 공민왕이 살해당하면서 오히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몇 번에 걸친 개혁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기존 체제가 너무 썩은 나머지 개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꿈꾸는 자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역성혁명을 주저하며 고려를 개혁하려는 이성계 역시, 자신처럼 개혁의 실패라는 뼈아픈 경험을 해야만 혁명 쪽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드라마에서는 정도전이 처음부터 새 왕조의 제왕으로 이성계를 점찍었던 것이 아니다.

  정도전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명망 높던 두 사람, 즉 최영과 이성계를 저울에 올려놓고 누가 자신과 대업을 이룰 수 있는지 무게를 잰다.  처음에 정도전이 찾아간 사람은 최영인데, 여기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정도전이 최영을 찾아갔을 때, 마침 몇몇 미곡 상인들이 최영 앞에 끌려온다.

  폭등한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정에서 정한 값으로만 쌀을 판매하게 했는데, 그 미곡 상인들은 더 높은 값으로 쌀을 팔다가 잡혀온 것이다.  최영은 일벌백계로 삼겠다면서, 곤장을 무려 100대씩이나 치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정도전이 끼여든다.  그 상인들이 조정의 명령을 어겼다지만 하루에 겨우 몇 됫박이나 파는 소상인이니, 가벼운 벌을 내리는 것이 맞다고 충고한다.  즉, 요즘으로 치면, 법을 위반했지만 중범죄가 아닌 생계형 범죄일 뿐이고 범죄로 인해 취득한 이익도 많지 않으니, 가벼운 처벌을 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무장 출신답게 엄격하고 꼬장꼬장한 최영은,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며 엄한 벌을 고집한다.  즉, 최영은 상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따져, 그에 걸맞는 벌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법을 위반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중요시하며, 다른 상인들에게 본보기로 삼기 위해 작정하고 엄중한 벌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백성보다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냐고 묻자, 최영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허면 아니란 말인가?  나라가 있어야 백성도 있는 것일세." 라고 대답한다.

  이 때 정도전은 '이 사람은 뼈 속까지 고려인이다!' 하고 깨닫는다.  평생 고려에 충성하며 목숨 걸고 전쟁터를 누볐던 노장군에게, 그저 하루 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며 몇 푼 더 챙기고자 비루한 짓을 하는 딱한 백성보다는 고려라는 체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최영이라는 카드를 미련없이 버리고, 이성계와 손잡기로 한다.  집안 내력이나 그 동안 괄시받은 경험 때문에, 이성계는 고려라는 체제에 별 애착이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성계를 만나러 함주로 가는 길에, 정도전은 처참한 고려 내 상황을 목격한다.

  그리고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하늘은 오래 전에 고려를 버렸다.' 라고 역성혁명의 결심을 새삼스레 다시 굳힌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마주하며 '이 자와 함께 고려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 자와 함께 난세를 끝장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다.' 라고 속으로 부르짖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도전은 결코 '이 분을 모시고 고려를 무너뜨릴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도전이 원하는 자는 자신과 나란히 서서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지, 자신의 위에 군림해서 자신에게 어딘가를 가르키며 나아가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왕으로 옹립하려는 자를, 자신의 위에 선 자가 아닌 자신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가는 동지로 생각했다는 점...  이러한 정도전이기에, 훗날 조선 개국 후 재상 중심의 정치제제를 정착시키려 애쓰다가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자 하는 태종 이방원과 부딪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6. 맹자 - 정도전의 사상과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책

 

 

  공민왕 사후 정도전이 나주의 부곡으로 귀양을 떠날 때, 절친한 친구 정몽주가 귀양지에서 읽으라며 유학 경전인 '맹자' 를 선물한다.

  처음에는 이 장면이 그저 드라마상의 설정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제로도 정도전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정몽주에게 선물받은 맹자를 탐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맹자는 험한 귀양살이 경험과 함께, 정도전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맹자는 공자와 함께 유학의 양대 성인으로 불리지만, 공자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사상가이며 정치가였다.

  그런 맹자의 사상을 담은 맹자라는 책 역시, 자연히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보다 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  고등학교 시절 한문 선생님도 지나가는 식으로, 맹자의 내용이 현실적이다 못 해 좀 과격하기까지 하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다.  맹자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구절만 봐도, 정말 맹자가 담고 있는 내용이 과격하긴 과격하다.

  정도전이 고려왕조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결심을 하며 읽은 대목이 다음과 같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고, 무왕이 주왕을 죽이고 주나라를 세웠는데, 신하였던 자가 왕을 죽이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인(仁)을 해치면 적(賊), 의(義)를 해치면 잔(殘), 잔적(殘賊)한 자는 임금이 아니다.' 

  그리고 소리내어 말한다.  "잔적한 임금을 죽이고 성이 다른 임금을 세우는 것, 그것은 패륜도 찬탈도 아니다."

 

 

  위의 대목은 맹자 중  '양혜왕 장구 하(梁惠王 章句 下)' 편에 나오는 것을 축약한 것인데, 원문 및 해석본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齊宣王 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제선왕 문왈 탕방걸 무왕벌주 유제)

  제나라의 선왕이 묻기를, "탕왕이 걸왕을 죽이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였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孟子對曰 於傳 有之

 (맹자대왈 어전 유지)  

  맹자가 대답하기를, "전해내려오기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曰臣弑其君 可乎

 (왈신시기군 가호)

  (제나라의 선왕이) 말하기를,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는 것이 괜찮은 겁니까?"  

 

  曰賊仁者 謂之賊 賊義者 謂之殘 殘賊之人 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왈적인자 위지적 적의자 위지잔 잔적지인 위지일부 문주일부주의 미문시군야)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을 해치는 사람을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사람을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자는 필부라고 하니, 필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 했습니다."

 

 

  결국, 왕이 인자하지도 의롭지도 못 하면 그 사람은 왕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 죽여도 괜찮다는 말이다...! @.@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개념이 확립된 현대의 시각으로 봐도, 맹자의 내용은 상당히 과격하다.  현대에도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을 때 프로파간다로 앞에 내세울만한 내용이다.  가령, 국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당성 없는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나름 명분으로 삼을만하지 않은가?

 

  맹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300년 전 사람이다.

  사람을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게 너무 당연시 되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로 여겨지던, 까마득한 시대를 살던 사람이다.  그런 맹자가 지금 봐도 과격해 보이는 내용의 책을 썼고, 그 책을 옛날 지식인들이 필독서로 생각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러한 맹자의 사상이 역성혁명을 통해 기존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던 이에게는 무척이나 유용했겠지만, 그 새 왕조의 후세 임금들은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도 궁금하다.  다른 누군가가  그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킬 때, 명분으로 내세우기 딱이니 말이다.  설마, 그저 '그러니 왕은 백성들을 인자하고 의롭게 대해야 하는 것다.' 는 일반론 정도로만 생각했을까?  

 

 

 

7. 정도전과 정몽주 - 현재의 친우, 미래의 정적

 

 

  이성계의 집에서 술자리가 벌어진다.

  이인임을 몰아내고 이성계가 조정의 2인자인 수문하시중(지금의 부총리)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흥겨운 자리다.  그런데 얄궂게도, 이 즐거운 자리는 지금까지 한 마음으로 뭉쳤던 이들이 장차 분열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자리가 된다.

 

 

작가의 뛰어난 이야기 구성과 PD의 훌륭한 연출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명장면.

(똑같이 口자로 시작했는데, 한 사람은 史로, 또 다른 사람은 忠으로 결말지었음.)

 

 

  일의 발단은, 정도전이 술자리의 여흥을 북돋기 위해 글씨로 유희를 선보이겠다고 나선 일이다.

  정도전은 먼저 '입 구(口)' 자를 쓰고서, 이인임 일당에게서 몰수한 재산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라고 말한다. (즉, 口는 굶주린 백성의 입)  그리고 그 口자 위에 '사람 인(人)' 자를 겹쳐 쓰면서,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이성계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人은 장차 역성혁명을 위해 반드시 얻어야 하는 민심)  그렇게 정도전이 붓을 놓고 "소생이 대감께 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 완성된 글자는 '역사 사(史)' 자다. 

  즉, 표면적으로는, 이제 높은 관리가 되었으니 가난한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해서 덕망 높은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라는 충고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민심을 얻어서 장차 새 왕조를 개창하는 새로운 역사를 이루라는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암시를 오직 이성계만 명확히 알아듣는다.  아버지 이성계보다 야심은 넘쳐흐르지만 정도전의 속마음을 아직 정확히 알지 못 하는 이방원은,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지란(이성계의 여진족 출신 의형제로, 훗날 조선 건국에 협력해서 개국공신이 됨.)과 정몽주는 아예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 한다.

 

  그 다음에는, 정몽주가 정도전의 뒤를 이어 글씨 유희에 나선다.

  시작은 정도전과 같이 '입 구(口)' 자였다.  그런데 口 자 위로 세로획을 그어 '가운데 중(中)' 자를 쓰며, 수문하시중 자리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시청자는 정몽주가 최종적으로 쓰려는 글자가 무엇인지 눈치챌 것이다.  정몽주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뜻으로, 中자에 '마음 심(心)' 자를 덧붙여서 '충성 충(忠)' 자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 이것이 소생의 바람입니다." 라고 말한다.  미소를 머금고 두 눈을 반짝이며...

  정몽주야 그저, 조정의 2인자로 우뚝 서게 된 이성계에게 앞으로도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충신이 되라는 덕담의 의미로 忠자를 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忠자를 보는 이성계의 눈빛은 흔들리고, 정도전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위) 막연하게나마 뭔가 눈치챈 듯한 표정으로 정도전이 쓴 '史' 자를 내려다보는 이방원.

(아래) 순수하게 기쁨과 희망을 얼굴에 드러내는 정몽주, 미래의 비극을 예감한 듯 굳어버린 얼굴의 정도전.

 

 

  그렇잖아도 정도전은 처음 이성계를 찾아 함주로 가는 길에 정몽주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고려를 위해 함께 무언가 해보겠다고 의기투합하던 때를 회상하며, 이제 자신은 정몽주처럼 고려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세상을 위해 나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부터 어렴풋이나마, 둘도 없는 친구 정몽주와 적으로 갈라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몽주가 고려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담아내어 쓴 忠자로 인해, 정도전의 염려가 한층 짙어진 것이다. 

 

  23회 마지막 부분에서는, 명나라가 고려의 철령 이북을 자기네 영토로 삼겠다고 고려에 통고하면서, 고려 조정에 파란이 일어난다.

  고려 멸망과 조선 개국의 기폭제가 된 위화도 회군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제, 북쪽으로는 원나라에게 빼았겼던 영토를 수복하고 남쪽으로는 왜구를 격퇴하며 개경에서는 이인임을 몰아내는데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쳤던 이성계와 최영이, 서로에게 칼날을 겨눌 날이 머지 않았다.  공민왕의 죽음으로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고려왕조의 몰락도 더 가속화 될 것이고...  친형제 같았던 정도전과 정몽주도, 각자 자신이 썼던 글자처럼 史의 길과 忠의 길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23회까지 그러했듯이, 24회부터도 긴박감 넘치는 전개와 높은 수준을 계속 유지해주기를 바란다.

  지금까지만 보면 명품사극이 분명한데, 중간에 흐지부지 되어 버리면 너무 아쉬울 듯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방송사들이 그냥 그런 사극을 일년에 서너 편씩 만들어내기 보다는, 차라리 '정도전' 수준의 대하사극을 일년에 딱 한 편만 만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양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아니라, 질로 승부하는 시대다...!  

 

 

정도전(24회~34회) - 꽃이 피려면 누군가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http://blog.daum.net/jha7791/15791080)

정도전(35~40회) -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려왕조(http://blog.daum.net/jha7791/15791093)

정도전(41~50회) - 피범벅이 된 새 왕조, 그리고 마지막(http://blog.daum.net/jha7791/15791088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http://blog.daum.net/jha7791/15791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