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역린 - 중용 23장과 세월호 침몰 사건

Lesley 2014. 5. 9. 00:01

 

  지난 주말, 4월 말에 개봉한 영화 '역린' 을 봤다.

 

  만일 이 영화가 '평범한 시기' 에 개봉을 했더라면, 이렇게 감상문을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연진이 호화롭고 예고편이 멋들어져서 관객들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놓은 영화였건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완성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개봉 시기가 다른 평범한 때였더라면, 그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하고 실망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평.범.한. 때.에. 개봉했더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공교롭게도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온나라가 들끓는 시기에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일자는 세월호 침몰 사건 전에 정해졌다.  그런데 그 날짜가 세월호 사건 직후였던 탓에, 영화 관계자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월호 침몰 사건과 얽히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참 얄궂은 일은, 전체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이건만,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품게 된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선사해준다는 점이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해서 영화를 봤을 것이다.

  시사회에 응모하여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독립영화 시사회에만 당첨되었다가, 처음으로 큰 자본을 들인 주류 영화 시사회에 당첨되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참석했던 평범한 시사회가 아니라, 영화 상영 전에 미리 주연 배우들을 초대하여 언론들 앞에서 레드카펫 행사까지 치르는 화려한 시사회였다.

  하지만 시사회 당첨 발표가 있기 전에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졌다.  전국민이 유족이 된 것 같은 심정이기에, 모두가 크고 작은 축제성 행사를 취소하고 자중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영화의 시사회도 그렇게 취소되었다.  대신 당첨자들에게 예매권을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이미 세월호 침몰 사건과 얽히게 되었다.

 

 

  이 영화의 최고 장점을 꼽으라면, 영상미를 들겠다.

  이재규 감독은 과거에 TV 드라마 '다모', '더킹 투하츠' 를 연출했고, 영화 '인플루언스' 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 영화와 CF의 만남(2) - 인플루언스(The Influence)(http://blog.daum.net/jha7791/15790940)  세 작품 모두 영상미가 훌륭한 작품들이다.  아마도 이재규 감독이 영상 부분에 있어서 무척 탐미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 역시 영상적인 부분에서는 나무랄 게 없다.  후보정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별 것 아닌 장면에서도 화면이 참 예뻤다.  그리고 온갖 음모가 숨어있는 궁궐의 밤, 흔들리는 촛불과 창호지를 바른 등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등장인물들의 얼굴에 드리우는 음영은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정조(현빈)가 호수 건너편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적을 향해 애깃살을 쏘는 장면이라든지, 영화 끝부분 자객들이 습격을 했을 때 정조가 전각의 문과 기둥을 이용해서 활을 쏘는 장면들은, 잔인하거나 공포스러운 게 아니라 멋지다 못 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만큼 시각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영상적인 부분을 빼놓으면, 위에도 쓴 것처럼 전체적인 완성도가 낮은 편이다.

 

  우선, 줄거리가 산만하고 허술하다.

  1인극이 아닌 다음에야 등장인물이 여럿인 게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그 여러 등장인물 모두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분명히 1회짜리 영화인데도 너무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하드라마 정도의 길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10부작짜리 미니시리즈 정도만 되었어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35분짜리 영화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정조와 정조를 해치려는 노론 및 정순왕후(한지민)의 대결', '정순왕후와 혜경궁(김성령)의 대결', '갑수(정재영)의 비밀', '어쩔 수 없이 음모에 가담하게 된 을수(조정석)의 상황', '갑수와 을수의 어린 시절', '어린 궁녀와 큰 궁녀 이야기' 를 구겨넣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무리인데, 위의 사연들을 종으로 횡으로 연결시키기까지 한다.

  그래서 모든 사연이 다 나오긴 하되, 시간상 모든 사연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듬성듬성 나오게 되어 버렸다.  영화가 보는 이에게 내용을 제대로 설명을 해주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중간에 빠진 부분에 대해 알아서 상상해가며 봐야 하는, 불친절한 영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출연진의 발성과 말투가 거슬린다.

  이 영화 출연진 중에, 소위 발연기라는 혹평 들을 정도로 연기력이 안 좋은 사람은 없다.  다들 중간 이상은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현빈과 여자 출연진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한지민에게서, 그 비중만큼의 연기력을 발견하지 못 한 것이 아쉽다. 

  우선, 현빈을 보자.  분명히 형편없는 연기자는 아니지만, 이 영화 속 정조 같은 역할을 맡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한 것 같다.  사극은 특히나 발성이 중요한데, 그 발성에서 많이 약한 듯하다.  그리고 말투도 사극 말투와 현대식 말투를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속 이병헌과 류승룡의 무게감 있고 안정된 발성과 비교하며 보게 되었다.

  또한 한지민 같은 경우는, 애초에 대본에 현대식 말투를 쓰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오만방자하고 요사스러운 느낌을 강하게 내려고, 일부러 말투를 그렇게 설정한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잖아도 한지민의 얼굴이 너무 귀염성 있게 생겨서 악독한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사극 경험이 풍부한 배우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정순왕후 역할에 어울리는 카리스마 서린 연기력을 뿜어내지 못 한다.  그런데 '~~하나요?', '~~해야죠.' 등의 현대식 말투까지 겹치니, 너무 어색해보였다.

 

 

  이렇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 영화인데도 굳이 감상문을 남기는 까닭은, 이 포스트 앞머리에 쓴 것처럼 세월호 침몰 사건 때문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인재다.

  작게는 세월호의 선장이라는 개인의 무책임함이, 크게는 세월호 소속사라는 기업의 비양심성이 빚어낸 참사다.  적어도 사건 초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끔찍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이 국민들로 하여금 비통해하고 분노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무기력함과 절망까지 느끼게 한 데에는, 국민을 지켜줘야 하는 최후의 보루인 정부조차 이 참사에 한몫 했다는 점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정부가 무능해서 갈팡질팡하느라 구조활동과 사고수습이 엉망이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단순한 무능력함의 문제가 아닌, 여러 겹짜리 정경유착으로 인한 '고의적인 임무 방기' 라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이번 사건이 터진 후, 해외에 거주 중인 유명 블로거들에게 이민 관련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안심하고 자식을 키울 수 없다는 우려와, 우리 국민이 우리 정부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집단적인 이민 충동까지 빚어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내 주위 사람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둔 친구들은 이민을 생각하는 이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떠들어대는 경제대국이니 복지국가니 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식을 잃는 일은 없는 나라여야, 안심하고 자식을 낳아 키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도 여건만 된다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부모라는 입장 때문에, 일단은 자식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친구는 화를 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당연히 뜯어고쳐야지, 모두들 안전한 곳으로 피할 궁리나 하고 있으니 20년 전 삼풍백화점 사건 때나 지금이나 나라가 똑같이 이 모양 이 꼴인 것 아니냐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후자의 의견이 맞다.  온국민이 이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 함께 이 나라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도록 애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워낙 어처구니 없는 참사가 벌어지고 나니, 모두들 우리나라를 조금씩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꿔보자는 의지보다는 '역시 우리나라는 틀렸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식의 집단적인 무기력감 및 열패감에 빠져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작은 것부터 바로 잡아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앞부분에서는 갑수(정재영)의 입을 통해 나오고, 영화 뒷부분에서는 정조(현빈)의 나레이션으로 나오는 중용(中庸) 제23장이 이 영화의 주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지성(至誠)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작고 하찮은 분야에서라도 열심히 노력하고 차근차근 다져나가다 보면, 마침내 성실해져서 겉으로 드러나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 이란 말을 세세하게 풀이한 글이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닌데, 영화를 보던 날 오전에 서울광장에 있는 분향소에 다녀왔다.

  연휴 기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교복 입은 학생들도 서너명씩 함께 와서, 자신들과 같은 또래인 희생자들에게 국화를 바치며 울었다.  

  그렇게 분향소에 다녀와서 영화를 보려니, 영화 속 중용 23장에 담긴 뜻의 무게가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중에 인터넷 포털의 한줄 평을 보니,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완성도에는 실망하면서도, 세월호 침몰 사건과 관련해서 저 중용 23장에 대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오래도록 곱씹어야 할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