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류덕환의 발견(8) - 연극 '웃음의 대학'

Lesley 2014. 2. 7. 00:01

 

  지난 달 마지막 날이었던 설날 저녁, 몇 년만에 연극을 봤다. (연극아, 너랑 나랑 만난 게 얼마만이냐... ㅠ.ㅠ)

  연극은 영화에 비해 자주 접하기 힘들다.  연극표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항상 돈이 문제지, 그 놈의 돈...! ㅠ.ㅠ)

  영화야 인기작과 비인기작을 막론하고 표가 균일가(!)인데다가, 만원 이하의 가격이다.  또 영화 할인 혜택이 있는 카드를 이용하면, 표 가격이 5,000~6,000원까지 낮아진다. 

  하지만 연극은 다르다.  비인기작은 그나마 좀 저렴한 편인이고, 또 이렇게 저렇게 할인을 받으면 영화와 비슷하게 만원 안팎으로 볼 기회가 있다.  그러나 인기작은 가격이 워낙 비싸게 책정되어서, 할인을 받아도 3만원을 가뿐히 넘어버린다. ㅠ.ㅠ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마음이 끌리는 연극을 발견해도, 영화를 볼 때처럼 선뜻 지갑을 열 수 없게 된다.  

 

  설날 저녁에 본 연극이 바로 '웃음의 대학' 이다.

  작년 11월에 시작한 연극인데, 표 가격 때문에 볼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큰 마음 먹고 봤다.  연극을 영화처럼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호사(?)를 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설날은 우리나라 최대 명절이니, 그 날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류덕환' 을 향한 팬심을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다는 이유도 있고... ^^;;

 

 

'작가' 역(포스터 아래)과 '검열관' 역(포스터 위)을 각각 3명의 배우가 맡고 있음.

 

 

  내가 관람한 것은 류덕환(작가)-서현철(검열관) 출연분이다.

  원래는 류덕환-송영창 출연분을 보려고 했다.  류덕환의 경우, 드라마 '신의' 및 '신의 퀴즈' 에서 워낙 인상적으로 봤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배우다.  그래서 작가 역은, 류덕환 이외에는 아예 고려를 하지 않았다.  다만, 송영창의 경우는, 내가 그 배우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검열관 역을 맡은 배우 중 눈에 익은 이가 송영창 뿐이었다. (아무래도 익숙한 쪽이 편한... ^^;;)

  그런데 류덕환-송영창이 출연하는 2월 1일은, 함께 가기로 한 친구에게 사정이 있어서 곤란했다.  그래서 류덕환-서현철이 출연하는 1월 31일, 즉 설날의 공연을 보기로 했다.

    

  '웃음의 대학' 은 일본의 영화, 드라마, 연극 각본가 및 감독으로 활동 중인 '미타니 코키(三谷幸喜)' 의 작품이다.

  미타니 코키란 이름은, 이번에 이 연극을 보러가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름을 모르던 대학 시절에, 이 사람의 또 다른 작품을 비디오 테이프로 본 적이 있다.  1997년도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후에 개봉되었던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다. (영화 내용 자체보다는, '도나루도 마꾸도나루도(도날드 맥도날드)' 라는 일본식 발음이 사람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주었던... ^^;;)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는 코미디 영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흥행성적이 좋지 못 했다.

  이 영화를 본 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리고 재미없다는 반응이 훨~씬~ 많았다.

  일단, 일본이 우리나라 바로 옆 나라이건만, 일본의 웃음 코드라는 게 우리나라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게다가, 영화 속 사건이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온갖 소소한 문제로 아웅다웅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적이고 화끈한 코미디에 익숙한 우리나라 관객들이 '지루하다' 또는 '어수선하다'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다행히 나는 무척 재미있게 봤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 학교 시청각실에서 비디오로 보면서, 미친 사람처럼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낄낄거렸으니... -.-;;  만일 그 때 본 그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면, 그 영화의 각본 및 감독을 맡은 사람이 대본을 쓴 '웃음의 대학' 을 안 봤을 것이다.

 

 

현재의 공연 또는 몇 년 전의 공연에서 구입했던 표가 있으면 재관람 할인(30%)을 받을 수 있음.

(고로, 나는 이 표를 앞으로 몇 년은 버리지 않고 고이 보관해 둘 생각임...! ^^)

 

 

  '웃음의 대학' 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 때문에 아시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여 있던 1940년대, 일본은 국가에 유해한 사상을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엄격한 검열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웃음의 대학' 이라는 극단의 작가(류덕환) 역시, 자신이 쓴 희극 대본을 검열관(서현철)에게 보여 검열을 받게 된다.  검열관 생각에,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희극 따위나 상영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에게 대본을 수정하지 않으면, 상영을 금지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검열관이 말한 수정 조건이라는 게 참으로 난감하다.  대본에서 '웃음을 주는 부분' 을 없애버리라고 한다.  하지만 희극이라는 게 원래 '웃긴 내용의 연극' 인데, 그런 희극 대본에서 웃음을 주는 부분을 없애라는 게 말이 되나...! (단팥빵에서 단팥을 전부 빼버리면, 그게 무슨 단팥빵이냐... -.-;;)

 

  작가는 '검열관이 내건 수정 조건' 과 '웃음을 지키려는 자신의 의지' 를 양립시키려고 애쓴다.

  즉, 검열관의 조건을 형식적으로는 수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웃음' 이 대본 속에 살아남게끔 머리를 쓴다.  물론 검열관은 그 때마다 화를 내며, 다시 수정하라고 한다.  그러면 작가는 검열관을 열심히 설득하기도 하고, 다시 검열관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수정본에 웃음 코드는 교묘하게 남겨두고...

  그렇게 두 사람이 대본을 사이에 두고 8일에 걸쳐 온갖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검열관이 자기도 모르게 작가의 웃음 코드에 물들어 가고 작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좀 의외였던 것은, 연극 끝부분에 진하게 깔려있던 정치성이다.

 

  사실, 이 연극의 장르가 코미디라고는 해도, 그냥 하하호호 웃으면 끝인 그런 연극은 아니다.

  굳이 연극을 볼 필요도 없이,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짤막한 줄거리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이 연극이 코미디지만, 국가 권력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은근히 비꼬는 내용이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연극을 직접 보면, 나중에는 그냥 '은근히 비꼰다' 수준이 아니다.  어느 새 서로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된 작가와 검열관이 하는 대화를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잘못된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그런 국가 권력에 깔려버린 개인의 고뇌를 보여준다. 

 

  특히, 7일째가 그렇다.

  검열관은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고 동조하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국가 정책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 한다.  독재시대에는 정말로 권력을 추종해서 적극적으로 국민의 권리를 짓밟는 공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국가가 시키는데 어쩔 수 없잖아.' 식으로 권력에 순응하는 공직자들도 많았다.  이 검열관은 전자에서 후자로 변한 것이다.

  또한, 작가가 검열관에게는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불순분자 취급받았으면서, 정작 동료들에게는 국가 권력에 굴복하는 배신자 취급받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잘못된 국가권력을 뒤에서 비판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권력의 앞에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며 대놓고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작가는 '자신의 신념' 과 '국가의 억압' 사이에서, 자기 나름대로 고뇌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양쪽 차선의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릴 때에는 어느 한쪽에 들어가 함께 달리는 것이 낫지, 가운데 서 있으면 양쪽 차선의 자동차 모두에게 치여 죽는다고 했다.  국가의 권력과 국민의 권리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시대에, 작가의 소극적인 저항 태도는 양쪽 모두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마지막 8일째에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작은 희망의 씨앗도 보여준다.

  작가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저항했지만, 그런 미약한 저항이 잔인한 시대의 냉정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이제 작가는 생사조차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고, '웃음의 대학' 극단은 작가를 잃어 문을 닫게 생겼다.

  하지만 작가의 자그마한 저항이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지는 못 했어도, 최소한 바위에 보일 듯 말 듯한 금을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작가를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작가를 억압했던 검열관이, 이제는 작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작가의 작품을 지켜주려 한다...!  검열관의 말마따나, 검열관은 국가 권력의 가장 끝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작가의 웃음에 물들고, 작가의 웃음이 담긴 작품의 가치를 지키려고 나선 것이다.  이 작은 변화는 이 암담한 현실에도 언젠가는 밝은 미래가 찾아올거라는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이 연극의 묘미는, 묵직한 주제를 재미있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군국주의' 니 '표현의 자유' 니 하는 소재를 다루는 연극이라면, 으레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그런데 이 연극은 시종일관 사람을 웃게 한다.  어떻게든 웃음을 살리려는 작가와, 어떻게든 웃음을 죽이려는 검열관이, 쉴 새 없이 서로에게 던지고 받아치는 말이 참 재미있다.  

  다만, 저 위에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의 경우처럼, 이 연극의 웃음코드도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실제로 나보다 먼저 이 연극을 본 사람이 '너무 지루해서 다른 관객들이 왜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는 평을 인터넷에 남긴 것을 보았다.  다행히도 내가 보러갔을 때, 대부분의 관객은 이런 종류의 연극과 이런 종류의 웃음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연극을 보는 내내, 관객 모두가 같은 취향으로 똘똘 뭉쳐서 유쾌한 웃음을 나눌 수 있었고,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도 힘을 전달해 줄 수 있었다. (관객들 웃기느라 한 연기에 관객들이 안 웃어버리면, 배우들이 얼마나 힘 빠지겠나... ^^;;)

 

 

류덕환씨, 연극에 너무 몰두하느라 신의 퀴즈 시즌4 계약서에 아직 도장 안 찍은건가요? ㅠ.ㅠ

 

 

  내가 '웃음의 대학' 을 보러 간 날이 설날이다 보니, 연극이 끝난 후 뜻밖의 팬서비스를 받았다.

  류덕환이 관객에게 손을 들어 보이는 평범한 인사를 하더니, 그 다음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큰절을 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관객들에게 내밀며 세뱃돈 달라는 시늉을 하는데, 그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에 관객들이 모두 자지러졌다. ^^  함께 연극을 본 친구 말인즉슨, 관객 중에 남자가 별로 없는 것도 그렇고, 관객들이 류덕환한테 보이는 반응 봐도 그렇고, 온통 류덕환 팬만 온 것 같았다고 한다. ^^;;

 

  함께 연극을 본 친구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친구는 연극 상영 중간에 잠들어버렸다. -0-;;

  사실, 그 친구는 이 연극에도 류덕환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는데, 나 때문에 보러 갔다.  게다가 최근 무리해서 일한 탓에 몸도 별로 좋지 않았고, 감기까지 걸렸고...  그래서 중간에 잠들었다가 끝부분에서 눈을 떴는데, 공교롭게도 눈을 뜨자마자 무대 위에서 열심히 연기 중인 류덕환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  그래서 무척 민망했다고... (정작 두 눈 부릅뜨고 보던 나하고는 눈이 안 마주쳤는데, 왜 잠이나 퍼자던 그 친구와 눈이 마주친거야...! ㅠ.ㅠ)  

 

  '웃음의 대학' 은 2월 23일까지 공연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시간 내어 관람하시기 바란다. ^^

 

 

류덕환의 발견(1) - 신의(http://blog.daum.net/jha7791/15790933

류덕환의 발견(2) - 아들(http://blog.daum.net/jha7791/15790931)
류덕환의 발견(3) - 복숭아나무(http://blog.daum.net/jha7791/15790936)

류덕환의 발견(4) - the story of MAN & WOMAN(http://blog.daum.net/jha7791/15790976)

류덕환의 발견(5) - 신의 퀴즈 시즌1 대강 훑기(http://blog.daum.net/jha7791/15790978)

류덕환의 발견(6) - 신의 퀴즈 시즌1 中 4회 '신이 내린 딸'(http://blog.daum.net/jha7791/15790979)
류덕환의 발견(7) - 신의 퀴즈 시즌1 中 한강커플(http://blog.daum.net/jha7791/15790980)

류덕환의 발견(9) - 연극 '에쿠우스'(http://blog.daum.net/jha7791/1579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