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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 젊은 시절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Lesley 2014. 1. 6. 00:01

 

  지난 10월에 시작한 '응답하라 1994' 를 12월에야 보게 되었다.

  시청자 폭이 상대적으로 얇을 수 밖에 없는 케이블TV 방송국에서 제작하고 방영한 드라마인데도, 지상파 방송국의 어지간한 드라마보다 더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웬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안 보다가, 종영 2주 전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 보기 시작하니 중독성이 보통이 아니다.  어째서 이 드라마가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많은 드라마가 그렇듯이 이 드라마도 그 놈의 '멜로' 때문에 용두사미가 되었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답이 뻔히 나와있는 '나영이 남편 찾기' 때문에 앞에서는 쫀쫀했던 드라마가 뒤로 갈수록 헐렁해지는... -.-;;  10회까지는 '우와~~ 이 드라마 진짜 대단한걸~~!' 하면서 봤지만, 11회부터 재미가 좀 떨어지고 긴장감도 느슨해졌다.  그리고 18회부터 마지막 회인 21회까지는 '이왕 여기까지 본 거 그냥 끝까지 보지, 뭐.' 하는 심정으로 봤다. ㅠ.ㅠ

 

  

대학 진학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94학번 7인방의 좌충우돌 서울 체험기! ^^

 

 

 

1. 청춘은 아름답게 각색되어 기억된다.

 

 

  1990년대 초반, '케빈은 12살(The Wonder Years)' 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우리나라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한국과 달리 시즌제가 정착되어 있던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이기에, 시즌1에서 12살이었던 주인공 케빈은 시즌을 거듭하며 나이가 점점 많아졌다.  덕분에 한국어 제목은 '케빈은 12살' 을 시작으로 '케빈은 13살', '케빈은 14살'...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  제목만 봐도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응답하라 1994' 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성인이 된 케빈의 나레이션이 깔리는 가운데, 케빈의 중학교 시절 갖가지 사연이 나온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케빈의 중학교 시절인 1960년대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꿈과 희망이 살아 있는 시대였다는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6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무척이나 격렬하고 혼란했던 시기였다.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베트남 전쟁은 그 끝을 알 수 없게 점점 길어졌고, 전국에서 수시로 대규모 반전시위가 일어났다.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고,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제각각 길거리로 뛰쳐 나와 경찰과 대치했다.  젊은이들이 급격한 개혁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미국 정부는 경찰 뿐 아니라 군대까지 진압에 동원했다.  그 와중에 쿠바 미사일 기지 사태 때문에 각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과 구 소련간에 하마터면 인류 최초의 핵전쟁이 터질 뻔했다.  그러더니 미국 젊은이들에게 변화와 혁신의 상징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미국 국민들이 TV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쯤 되면, 당시를 살았던 미국인 모두가 '이제 곧 미국이 망하려나 봐.' 라는 두려움과 절망을 한두 번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난 후 기억 저 밑바닥에 묻혀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살펴보니, 겪을 때는 혼란스럽기만 했던 그 1960년대가 너무나 아름답게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인간을 보내고,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전세계를 휩쓸었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시대' 로 말이다.  그래서 1960년대를 아름답게 채색한 드라마까지 만들어졌다. (아예 드라마 제목부터가 The Wonder Years일 정도니... ^^)

 

 

  생각해 보면, '응답하라 1994' 의 시대적 배경인 1990년대 중후반도 한국 역사에서 아름다운 시절이기는커녕 무서운(!) 시절이었다.

 

  신문이니 TV뉴스니 전부 '대한민국은 사고 공화국' 이라고 떠들어댈 정도로, 1994년을 전후해서 대형사고가 줄줄이 터졌다.

  이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또래인 사람들, 또는 그 윗세대인 사람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서울 성수대교 붕괴 사고,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폭발 사고, 서울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구포 기차 탈선 사고 등이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 할 뿐이지, 이것들 말고도 틀림없이 다른 큰 사고가 여러 건 더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 드라마 속에 나왔던 서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는 사망자만 500명이 넘어서, 해외의 여러 유명언론에서 그 해 전세계 참사 중 1위 또는 2위로 꼽았을 정도로 최악의 사건이었다. (이상한 쪽으로 유명해진 우리나라... ㅠ.ㅠ)  그리고 이 많은 대형사고에서 가장 무섭고도 어처구니 없었던 점은, 이런 사고들이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끔찍한 사고가 줄줄이 발생한 후 최후의 결정타처럼, 1997년 말에 외화위기가 터졌다.

  드라마 속 나정(고아라)이 읊은 나레이션은 당시의 상황을 너무 간단하게, 그러나 동시에 너무 생생하게 설명해준다.  "1997년 11월 21일, 윤진이의 첫 출근날, 그리고 내 생애 최초로 채용합격 통보를 받은 날, 거짓말처럼 나라가 망했다.  대한민국은 하루 아침에 아시아의 용에서 지렁이가 되었고, 찬란한 X세대였던 우리는 하루 아침에 저주받은 학번이 되었다."  흔히 'IMF 시대' 라고 하는 경제적 혼란기를 초래한 외환위기는, 우리 한국을 정치.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바꿔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백제가 망하기 전에, 여우떼가 궁중으로 난입하는가 하면, 엄청나게 큰 여자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오고, 등에 백제의 몰락을 예언하는 글귀가 써진 거북이가 발견되는 등 불길한 조짐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면 수백년 쯤 지나서 역사책에 '1997년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맞게 되기 전에, 그 불행의 전조로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큰 참사가 연달아 발생했다.' 라고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다사다난 하고 불행했던 1990년대이건만, '케빈은 12살' 의 경우와 비슷하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나니 오히려 그리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같은 일을 두고서 '직접 경험할 때' 와 '세월이 흐른 후 회상했을 때' 의 느낌이 달라진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자신이 그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들어가서 생생하게 느끼는 것과, 한 발자국 물러서 차분히 관조하며 느끼는 것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고방식이 달라져서, 어떤 일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품게 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청춘 때 겪은 일이 훗날 아름답게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청춘에 관련된 일은 보다 좋은 쪽으로 각색되어 사람 뇌리에 저장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청춘이라고 해서 마냥 즐겁고 신나는 시기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사람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모두들 온갖 문제에 부딪치며 방황하고 상처받고 좌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청춘은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그래도 아직 꿈과 희망이 있던 때' 로,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현재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던 때' 로, 각각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무지개빛 시절로 기억되는 것이다.

 

 

 

2. 세세하게 표현된 1994년 전후의 모습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재미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깨알같이' 표현된 1990년대 중반의 모습들이었다.

 

  우선, 1990년 중후반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를 스치는 수준으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장동건, 손지창, 심은하 주연의 농구드라마 '마지막 승부' 는 정말이지, 한창 인기를 끌던 농구대잔치와 맞물려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장동건과 손지창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기 때문에, 신인배우인 심은하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사랑받는 역할로 막 등장했을 때 일부 여학생들 반응은 "저 못생긴(!) 애는 뭔데 장동건이랑 손지창이 다 좋아하는 걸로 나오냐?" 였다. -.-;;  그렇게 욕 잔뜩 먹으며 등장했던 심은하는,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 보고서 손지창에 푹 빠져버린 우리 반 아이 때문에, 그 아이 집과 학교가 뒤지어진 일도 있었다.  그 아이가 손지창 얼굴 한 번 보겠다는 일념으로 손지창네 집 근처에서 밤을 하얗게 새느라, 하룻밤 동안 행방불명(?) 되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역시 심은하가 주연한 공포 드라마 'M' 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특수효과 등이 유치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소재와 으시시한 배경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다.  심은하가 그 당시 유행했던 회색빛 섞인 칙칙한 립스틱으로 입술 칠했던 것이, 그 드라마의 공포 분위기를 더 높여줬던 것 같기도 하고... (해외에 나간 한국 여학생들이 그 요상한 색깔의 립스틱 칠하고 다닌 통에, 외국인들은 한국여자 대부분이 심장이 안 좋아 입술이 파랗게 질린 줄 알았다고... ^^;;)  

  또 '응답하라 1994' 속 해태(손호준)가 술에 잔뜩 취한 여자선배의 행동을 유혹으로 받아들이고 그 선배네 집에 갔다가 맞닥뜨렸던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 역시 그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드라마다.  선배네 식구들이 지켜보는데서 바지가 훌렁 내려가 시커먼 늑대 심보가 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인데, TV 속 포청천이 외치는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 라니... ^0^

 

 

1990년대 최고(?)의 공포 드라마였던 심은하 주연의 'M' 을 시청 중인 신촌하숙의 7인방... ^^

 

 

  그리고 드라마에 배경음악으로 깔린 그 시절의 노래들도 새삼스러우면서 반가웠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방 출신으로 설정되어서인지 '서울 이곳은' 이 가장 자주 나왔던 것 같다.  사실, 그 노래는 정작 1990년대 당시에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노래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서울을 낯설어 하거나 고향을 그리워 하는 장면에 너무 잘 어울려서, 그리고 이 드라마에 나왔던 다른 노래들과는 달리 원곡보다 이 드라마를 위해 새로 편곡해서 로이 킴이 부른 곡이 더 좋아서, 요즘 매일 듣고 있다. ^^

  또한 빙그레(바로)가 나오는 장면에서 알게 되어 요즘 즐겨 듣는 노래가 두 곡이 있다.  빙그레가 신입생 환영 MT에 가서 선배인 쓰레기(정우)에게 동경인지 사랑인지 모호하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는 장면에서 나왔던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 , 그리고 빙그레가 첫사랑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다이다이(윤진이)에게 첫키스를 하며 나오는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 은, 정작 1990년대 당시에는 그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  그런데 두 곡 모두 그 두 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장면과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20년이나 지난 지금 열심히 듣는 중이다.

  꽃다지의 '바위처럼' 의 경우에는 그 시절 처음 등장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1990년대 대학가에 몸 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다.  하숙집 친구들이 삼천포의 고향에 놀러갔다가, 본의 아니게 마을 주민들에게 '데모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를 보여주게 된 장면에서 나왔던 '바위처럼' 과 그 율동을 보니, 옛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생각났다.  선배들이 바위처럼을 틀어놓고 율동을 하고 다른 신입생들은 열심히 손뼉 쳐가며 박자 맞춰주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차라리 밥은 안 먹어도 잠은 꼭 자야만 하는' 나는 요란하게 음악 쿵짝쿵짝 하는 와중에도 책상다리 하고 앉아서 정신없이 졸았다. ^^;; 

 

  그 밖에도 1994년 전후의 서울을 묘사하는 깨알같은 장면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하나가, 처음에 이 드라마에 별 관심 없어하던 나에게 이 드라마를 보라며 가장 강렬하게 전도(?)했더랬다.  대학 시절 신촌에서 자취를 했던 그 친구는, 1회에서 하숙집 주인 아줌마(이일화)가 삼천포에게 하숙집 위치 가르쳐줄 때 나왔던 "...신촌역에서 나와서 '그레이스 백화점' 방향으로 나온 다음에..." 란 대사가 그렇게 재미있더란다.  지금은 다른 백화점들에 눌려 옛날 명성이 많이 바래버린 그레이스 백화점이, 그 시절 그 근처의 랜드마크 역할 하던 때가 생각나서일 것이다. ^^

  나 역시 1회에서 삼천포가 하숙집을 찾아갈 때 나왔던 지하철역에서 '빨간색 1호선 노선 표시' 를 보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 1호선 노선 색깔이 빨간색에서 군청색으로 변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이 드라마를 보고서야 비로서 '맞다, 예전에는 빨간색이었지!' 하고 무릎을 쳤다. ^^     

  그리고 빙그레가 다이다이를 처음 만난 우이동 MT촌에서, 다이다이가 새벽에 탄 버스를 보고는 완전히 빵 터져버렸다.  버스 겉면에 붙어있는 주요 정류장 이름을 보면 '우이동 수유역 대지극장 길음시장' 등, 서울 북동쪽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정류장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대지극장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아이들이 '우뢰매' 를 보기 위해 갔던 서울 북동쪽에서는 나름 유명한 영화관이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노리는 소위 바바리맨의 출몰지로 이름을 떨쳤다. -.-;; 

 

 

 

  그나저나, 1990년 중후반이 특별하긴 특별한 모양이다.

  단순히 그 시절에 대학을 다닌 세대만이 과거를 회상하며 '참 좋은 시절이었어~~' 라는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작년부터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는 것을 보니 말이다.  작년 늦겨울에 개봉했던 영화 '1999, 면회' 도 특별했던 1990년대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와 일맥상통한다. 1999, 면회(http://blog.daum.net/jha7791/15790964)

  누구의 청춘인들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되지 않겠느냐만은, 그 중에서도 199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이들에게는 1990년대 청춘기가 유독 특별했던 것 같다.  어째서 그 세대의 청춘이 그렇게 특별한가...  이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삼천포(김성균)의 나레이션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지금은 비록 세상의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지만, 이래뵈도 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신인류 X세대였고...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지만, 한때는 오빠들에 목숨 걸었던 피끓는 청춘이었으며...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