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문인이며 관료였던 '이조년(李兆年)' 이 지은 '다정가(多情歌)' 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유명한 시조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잠만 잔 사람이 아니라면, '이화에 월백하고...' 까지만 들어도 '아, 그거...!' 하게 된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배운 많은 문학작품이 거의 그렇듯이, 다정가 역시 배울 당시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저 '이거 한자가 섞여서 어렵네.' 또는 '중간고사 보려면 이 시 몽땅 외워야 하나? 에이, 이걸 어떻게 외워. 그냥 내용 파악이나 하면 되겠지.' 정도의 생각이나 했다. ^^;;
시가라는 게 원래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쓰다보니 여러 해석이 나오게 된다.
고등학교 때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일지춘심(一枝春心)' 을 가지고, 봄날 어느 나뭇가지에 걸린 정서 어쩌구 하며 배웠다. 자연히, 이 시조도 어느 봄밤의 애잔한 정서를 노래한 것으로 배웠다. (시를 무조건 한 가지 해석으로만 쭉 밀고나가는 우리 국어 교육의 현실...!)
지금 생각하면, 임금이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신하의 간절한 마음, 또는 정인을 생각하는 어떤 사람의 그리움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듯 한데... 그 때는 무조건 '봄날 어느 나뭇가지에 걸린 정서' 라고 외우기만 했으니, 참 재미없게도 배웠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배운 문학 작품 중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는데, 정작 배우던 그 때에는 하품만 삼켜야 했다. -.-;;
그런데 이 시조를 뜻밖에도, 지난 달에 종영한 드라마 '정도전' 에서 다시 접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정도전에 등장하는 고려 말기의 권신 '이인임(李仁任)' 이 이조년의 손자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에서는, '공민왕(恭愍王)' 이 이인임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 시조가 이인임의 조부가 지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다정가를 읊다가, 문득 뒤편에 걸린 노국공주 초상화를 돌아보는 공민왕의 모습.
(드라마 '정도전' 중 한 장면)
똑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보고 듣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 시조가 매우 강렬하면서도 슬픈 느낌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뜬지 10년 가까이 된 왕비 노국공주를 아직도 잊지 못 하는 공민왕의 절절한 심정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그윽한 눈빛과 묵직한 목소리로 다정가를 읊는데, 맨 마지막 구절인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부분은 차마 끝맺지 못 한다. 자신의 뒤편에 있는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돌아보고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까지만 읊조리고서,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입을 다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기막히게 공민왕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공민왕이야말로 정말로 다정이 병이 되어버린 대표적인 인물이니 말이다. 워낙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라, 다정가에 대해 갑자기 관심이 샘솟았다.
여기서는 다정가를 두 가지 형식으로 소개하겠다.
첫 번째는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시조 형식이다. 두 번째는 훗날 조선시대 사람인 신위(申緯)가 '자규제(子規啼)' 란 제목으로 번역한 한시 형식이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신위가 한역하기 전에는 이 시조의 한문본이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조년은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인 고려시대 사람이니, 당연히 다정가도 그 당시에는 한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후세 사람이 다시 한역해야 했을까? 신위는 조선 후기인 정조 및 순조 때의 사람이라는데, 설마 그 때까지 다정가가 책에 기록되지 않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일까? (사정을 아시는 분이 이 글 보시면, 댓글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多情歌(다정가)
- 李兆年(이조년) -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子規啼(자규제)
- 李兆年(이조년) 지음, 신위(申緯) 한역 -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천) 배꽃에 달빛 희게 어리는 삼경 하늘에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피울음 소리 들릴 때마다 두견새를 원망하네.
儘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다정함이 원래 병임을 모두 깨달았으니
不關人事不成眠 (불관인사불성면)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으려하나 잠을 이룰 수 없구나.
사족을 붙이자면...
이 시의 저자 이조년과 그 형제들의 이름이 참 재미있다.
먼저, 이조년과 그 형제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조년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일로, 당시 이조년의 집안은 천재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과거라는 게 워낙 어려운 시험이라서, 한 집안의 여러 형제 중 한두 명 정도 합격한 경우야 제법 있었지만 형제들이 모두 합격한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한 집안의 5형제가 모두 고시에 합격한 셈이니 그 유명세가 오죽했겠는가...
이조년이란 이름만 놓고 보면, '옛날 사람 이름이라 요즘 이름하고는 좀 다르네.' 정도의 생각만 들 뿐이다.
그런데 이조년을 포함한 5형제의 이름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첫째 이백년(李百年), 둘째 이천년(李千年), 셋째 이만년(李萬年), 넷째 이억년(李億年), 다섯째 이조년(李兆年)이다...! -0-;; 즉, '년(年)' 자를 돌림자로 해서, 백, 천, 만, 억, 조로 나가고 있다.
예전 시골 마을의 아들 많은 집안의 이름을 보면, 일동, 이동, 삼동... 혹은 일수, 이수, 삼수... 식으로 숫자 순서대로 짓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조년 아버지는 자식들 이름을 '숫자 순서' 가 아닌 '숫자 단위의 순서' 인 백, 천, 만, 억, 조로 지었다. 아마 자식들이 모두 입신양명해서 가문의 영광이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심지어 조년 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이조년 아버지를 두고, 욕심이 많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포부가 컸다고 해야할지... 어쨌거나 다섯 아들이 모두 당당히 과거에 급제했으니, 이조년 아버지의 소원 중 일부는 이루어진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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