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이 시리즈를 다시 이어, 이규보(李奎報)의 '백주시(白酒詩)' 를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연말연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술이라서, 일부러 이 시를 골랐다.
연말연시를 맞아, 송년회 한다고 술 마시고 새해맞이 한다고 또 술 마시고... 그렇게 지난 달과 이번 달 내내 술냄새 펄펄 풍기며 사는 이들이 많을 듯해서, 술에 관련된 시를 고른 것이다. ^^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유명한 문인이나 화가 같은 사람들은 술을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도 흥이 날 정도로 적당히 즐기는 게 아니라,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술독에 빠져죽을 수준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술고래로 살아야만 예술적 감성이 활짝 피어나는 건지 어떤 건지... (한때 대마초 피우다 걸린 가수들이 예술적 영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대마초에 손댔다고 항변하던 것과 비슷한 건가... -.-;;) 덕분에 술을 아내나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예술가와 그런 술주정뱅이 남편 덕분에 속 끓이는 아내의 일화가,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그러다 보니 시인들이 술에 대해 찬양(!) 수준의 작품을 경우도 종종 있는 듯하다.
이규보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술을 어지간히 즐겼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술에 관한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그 시를 쓰게 된 이유 내지는 배경을 설명한 서문까지 함께 남겼다. (어지간히 술을 좋아했던 모양임. ^^;;)
자, 먼저 이 백주시의 서문부터 살펴보자면...
予昔少壯時, 喜飮白酒, 以其罕遇淸者而常飮濁故也.
(여석소장시, 희음백주, 이기한우청자이상음탁주야.)
내가 예전에 젊었을 때, 막걸리(白酒)를 즐겨 마신 것은, 청주를 대할 일이 드물어서 늘 탁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及歷顯位, 所飮常淸, 則又不喜飮濁矣.
(급력현위, 소음상청, 즉우불희음탁의.)
높은 지위를 역임하는데 이르러, 늘 청주를 마시게 되자, 곧 탁주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豈以所習之然耶?
(기이소습지란야?)
이 어찌 습관이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近因致仕祿減, 往往有淸之不繼者, 不得已而飮白酒, 則輒滯在胷鬲間, 不快也。
(근인치사록감, 왕왕유청지불계자, 부득이이음백주, 즉첩체재흉격간, 불쾌야.)
요즘 벼슬에서 물러나 녹봉이 줄었기에, 청주를 계속 구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어, 부득이하게 막걸리를 마시는데, 문득 체하여 가슴에 얹혀서, 상쾌하지 못하다.
昔杜子美詩云, 濁醪有妙理, 何也?
(석두자미시운, 탁료유묘리, 하야.)
옛날에 두자미가 시로 말하기를, 탁주에는 오묘한 이치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일까?
※ 杜子美 : 당나라 때 시인인 두보(杜甫)를 말함.
予昔常飮時, 慣飮而已, 實未知妙處, 况今乎?
(여석상음시, 관음이이, 실미지묘처, 황금호?)
내가 예전에 자주 (막걸리를) 마실 때에는, 그저 마시는 게 습관이었을 뿐이고, 그 미묘함이 머무는 곳을 제대로 알지 못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이랴?
蓋甫本窮者也, 亦豈其以習而言之耶?
(개보본궁자야, 역기기이습이언지야?)
아마도 두보는 본래 가난한 사람이라서, 또한 일찌기 그 술에 익숙했기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遂作白酒詩云.
(수작백주시운.)
마침내 백주시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야 백주시 본문으로 들어간다. ^^
白酒詩(백주시)
- 李奎報(이규보) -
我昔浪遊時 所飮惟賢耳
(아석랑유시 소음유현이)
내가 옛날 떠돌아다닐 적에, 마실 것이라고는 오직 막걸리(賢 : 현인) 뿐이었네.
時或値聖者 無奈易昏醉
(시혹치성자 무내역혼취)
때로 혹시라도 청주(聖者 : 성인)를 대하면, 취하지 않을 수 없었네.
※ 막걸리(탁주)를 현인에 비유하고 맑은 술(청주)를 성인에 비유한 것은, 이백(李白)의 시에서 유래함. 이백이 지은 월하독작(月下獨酌) 제2수 중에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즉 '듣자 하니 청주를 성인에 비유한다 하고, 다시 탁주를 현인과 같다고 말하네.' 라는 구절이 있음. 이규보는 그 부분을 인용한 것임.
及涉地位高 飮濁無是理
(급섭지위고 음탁무시리)
지위가 높아지자, 탁주를 마시려 해도 있을 리 없네.
今者作退翁 俸少家屢匱
(금자작퇴옹 봉소가루궤)
이제 (벼슬에서) 물러난 늙은이가 되니, 녹봉이 적어 집(의 창고나 쌀독)이 자주 빈다네.
綠醑斷復連 篘飮亦多矣
(녹서단부련 추음역다의)
푸른 빛 좋은 술이 늘 다시 생기는 게 아니라, (값싼) 막걸리 마실 일이 많았다네.
滯在胷隔間 始覺督郵鄙
(체재흉격간 시각독우비)
체기가 가슴 속에 얹히니, 독우(나쁜 술)가 비루한 줄 이제야 알겠구나.
※ 督郵(독우)는 원래 중국의 벼슬 이름인데, 나쁜 술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됨.
중국 삼국시대에 환온(桓溫)이란 세력가가 있었는데, 술이 생기면 미각이 뛰어난 아랫사람에게 먼저 맛을 보아 감별하게 했음. 그 아랫사람은 좋은 술은 청주종사(靑州從事) 또는 종사(從事)라고 부르고, 나쁜 술은 평원독우(平原督郵) 또는 독우(督郵)라고 불렀음. (청주 및 평원은 모두 지명이고, 종사 및 독우는 모두 벼슬 이름임.) 청주에는 제군(齊郡)이라는 지역이 있어서 제(臍 : 배꼽)와 발음이 비슷해, 배꼽까지 내려갈 정도로 좋은 술이라는 뜻으로 청주종사 또는 종사라는 말을 썼음. 그리고 평원에는 격현(鬲縣)이라는 지역이 있어서, 격(鬲)자는 격(膈 : 횡경막)과 발음이 비슷해서, 술이 내려가다가 횡경막에 걸려 체하기 쉬운 나쁜 술이라는 뜻으로 평원독우 또는 독우란 말을 썼음.
그 아랫사람 시인으로 나섰으면 운 맞추는 데 엄청난 능력 발휘했을 듯... ^^
濁醪稱有妙 未會杜公意
(탁료칭유묘 미회두공의)
탁주에 오묘한 이치가 있다지만, 두공의 뜻을 아직 몰랐다네.
※ 杜公(두공) : 당나라 때 시인인 두보(杜甫)를 말함.
迺知人之性 與習自漸漬
(내지인지성 여습자점지)
이제야 사람의 성품을 알겠네, 습관과 함께 스스로 천천히 스며든다는 것을.
飮食地使然 何有嗜不嗜
(음식지사란 하유기불기)
음식은 처지를 따르는 것이니, 즐기고 안 즐기고가 어디 있으랴.
爲報中饋人 有入愼輕費
(위보중궤인 유입신경비)
아내에게 일러두노니, 돈이 들어와도 가볍게 쓰는 것을 삼가하시오.
※ 饋人(궤인) : 원래는 고대 중국에서 제왕의 음식에 독이 들어갔는지 감별하려고 미리 맛을 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요리사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도 쓰게 됨.
無使樽中酒 不作澄淸水
(무사준중주 부작징청수)
(그리하여) 술독 속에 든 술을 징청수처럼 만들지 말아주시오.
※ 澄淸水(징청수) : 한의학이나 풍수지리학에서 물의 종류를 나눌 때, 맑은 정도가 가장 우수한 물을 말함.
이규보 이 사람, 정말 술을 좋아했나 보다.
잘 나가던 시절 좋은 술 마셨던 것을 그리워 하면서도, 음식이란 처지 따라 먹는 것이니 좋은 술 나쁜 술 가리겠느냐고 하더니만... 결국에는, 아내에게 돈을 아껴쓰라는 이유가 건전한 소비 및 저축을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술 마실 돈도 없어서 물처럼 지나치게 맑아 밍밍한 술 마시게 될까봐 걱정되어서라니...! -0-;;
이규보의 백주시 읽으시는 분들이 새해를 맞아, 이규보만큼 지나치게 음주에 탐닉하지 않고, 적절한 수준으로만 음주를 즐기시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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