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에 처음으로 IBT(Internet-Based Testing, 즉 컴퓨터를 사용해서 인터넷을 통해 보는 시험) HSK를 봤다.
IBT HSK가 시행된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의외로 그런 시험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제법 있는 것 같다. 또 알더라도, 종이 HSK(편의상, 필기시험 형식으로 치르는 보통의 HSK를 '종이 HSK' 라고 하겠음.)와 뭐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은 듯하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IBT HSK를 치른 후기를 써볼까 한다. 그리고 장점 보다는 단점 위주로 써보겠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으로 치른 IBT HSK에서 장점 보다는 단점을 더 느꼈기 때문에...)
1. IBT HSK란?
중국과 한국에서 시작했던 IBT HSK는 여러 나라로 확대 시행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경우에는 종이 HSK와 IBT HSK의 시행처가 다르다. 종이 HSK는 'HSK 한국 사무국' 또는 한국 내의 '공자 아카데미(공자 학원)' 에서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IBT HSK는 '탕차이니즈 에듀케이션' 이란 곳에서 시행한다. IBT HSK를 치를 수험생이라면, 다음 주소를 링크해서 일정 및 접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바란다. ☞ http://ibt.tanghsk.net/common/index.action
IBT HSK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보는 시험이다 보니, 좌석이 한정되어 있다.
시험의 공정성 때문에 아무 컴퓨터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프로그램이 깔려있는 컴퓨터에서만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이 HSK처럼, 수험생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좌석을 늘릴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시험 본 서울 종로 파고다 학원의 경우에는, 정원이 40명도 안 되었다. 그러니 IBT HSK를 치를 사람이라면, 일찍 접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한정된 좌석의 문제일텐데, 각 등급의 HSK 수험생 모두가 한 시험장에서 시험을 보게 된다.
즉, 종이 HSK처럼 이 교실에서는 4급을, 저 교실에서는 5급을, 또 다른 교실에서는 6급을 보는 게 아니다. 시험장 한 곳에 이 등급 저 등급 수험생을 전부 몰아넣어(!) 시험을 보게 한다. 그러니 '6급 시험장은 어디에 있지?' 하며 헤매지 말기 바란다. (6급 시험장 찾아 파고다 학원 한 층의 교실을 다 둘러보고 다닌 1人의 충고... ^^;;)
또한 등급별로 시험 시간이 달라서, 먼저 시험 끝난 수험생(낮은 등급 시험의 수험생)들이 먼저 시험장 밖으로 나가게 된다. 시험 시간이 제일 긴 6급의 수험생들은, 다른 수험생들이 나간다고 덩달아 따라 나가서는 안 된다! 남들이 나가든지 말든지, 컴퓨터에 시험 종료 표시가 뜰 때까지 계속해서 시험에만 전념하면 된다.
2. IBT HSK의 장점
IBT HSK의 최고 장점은 '쓰기' 과목에서 점수 따기가 유리하다는 점이다...!
원래도 한자라는 문자가 복잡하게 생겼는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다 보니 손글씨 쓸 일이 별로 없다. 당장 중국인조차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 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글씨 쓰다 말고 핸드폰 뒤적이며 한자 모양이 어떻게 생겼나 검색하는 중국인의 모습은, 이제 전혀 신기한 광경이 아님. ^^;;) 중국인도 한자 쓰는 법을 잊을 지경인데 외국인은 어떻겠는가... 읽기는 곧잘 하지만 쓰기에는 서툰 중국어 학습자가 제법 많다.
그러니 IBT HSK는 '쓰기' 에서 유리할 수 밖에 없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 한자를 직접 쓸 필요 없이, 컴퓨터에 깔린 중국어 입력기(sougou pinyin)로 타자를 치면 되니까...
개인적으로는, 1급에서 5급을 치르는 수험생은 굳이 IBT HSK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IBT HSK는 종이 HSK보다 접수비가 비싸다. 그 비싼 접수비를 감수해가면서 IBT HSK를 보는 이유는 딱 하나, 오직 '쓰기' 과목에서 점수 따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급에서 5급까지는 '쓰기' 과목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비교적 간단한 유형(단어나 문장을 몇 개 쓰는 정도)이다. 그러니 비싼 접수비 들여가면서 IBT HSK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6급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6급 '쓰기' 에서는 한자로 400자 내외의 답안지를 작성해야 한다. 6급 HSK를 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기' 과목의 답안지를 작성할 때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 생각이 안 나서 쩔쩔맸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평소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이 별로 없는데다가 시험을 친다고 긴장해서 그런지, 초급반 시절에 배웠던 쉬운 한자도 생각 안 나 쩔쩔매는 경우도 있다.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들이 써놓은 경험담을 보니, '아내' 란 뜻의 치즈(妻子)를 어떻게 쓰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났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는 타이타이(太太)라고 쓰고, 또 누구는 아이런(爱人)으로 썼다고 했다. ^^;; 나 역시 써야 하는 한자의 모양이 대강만 떠오르고 정확히 생각이 안 나서, 새로운 한자를 창조(!)해서 쓴 경험이 있다. -.-;;
그런데 중국어 입력기(sougou pinyin)로 답안지를 작성한다면, 한자 모양을 정확히 몰라도 상관 없어서 편리하다...!
게다가 중국어 입력기에 자동완성기능이 있어서, 기다란 어휘의 경우에는 앞에 두세 글자만 쳐도 그 뒷부분이 저절로 뜬다. 또한, 복잡한 한자를 일일이 손으로 안 써도 되니, 당연히 답안지 쓰는데 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종이 HSK 때에 비해서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답안지를 작성하고, 나중에 혹시 틀리게 쓴 곳이 있나 검토할 시간도 확보할 수 있다.
3. IBT HSK의 단점
첫째, 접수비가 비싸다.
6급을 기준으로, 종이 HSK는 85,000원인데 IBT HSK는 110,000원이나 한다...! -0-;; 25,000원이나 차이가 나는데, 그 돈이면 내가 좋아하는 우동을 5그릇은 사먹을 수 있다. ㅠ.ㅠ
둘째, 위에서 말한 IBT HSK의 장점, 즉 컴퓨터로 한자를 찍을 수 있다는 점이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있다. (이 '둘째' 부분에는 큰 오류가 있으니, 아래 노란색 박스의 '덧붙임' 을 꼭 읽으시오...!)
전에 종이 HSK를 볼 때에도 질문지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처음 보는 단어라도 앞뒤 문맥을 보면 무슨 뜻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고, 그 단어가 너무 길지만 않다면 즉석에서 글자 모양을 보고 외울 수가 있다. 그래서 그 단어를 그대로 답안지에 활용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에 치른 IBT HSK에서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중국어 입력기를 이용할 경우, 답안지에 꼭 써야 하는 중요한 단어가 난생 처음 보는 단어라면 정말 대책이 안 선다. 왜냐? 그 단어의 '발음' 을 알아야, 중국어 입력기로 타자를 칠 것이 아닌가...! ㅠ.ㅠ
하필이면 이번 시험의 '쓰기' 과목 질문지 내용이 중국 역사에 관련된 것이었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맹상군과 풍환에 관한 사연)
역사적인 내용이라고는 해도 외국인 학생들 수준에 맞는 어휘로 순화한 것이라, 내용 파악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질문지에 나오는 고유명사, 즉 사람 이름이나 지역 이름이다. 맹상군(孟嘗君, 간체자로는 孟尝君)이란 이름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풍환(馮驩, 간체자로는 冯谖)이란 옛스런 한자를 쓰는 이름과 맞닥뜨린 순간, 머리 속이 투명하게 변해버렸다. -.-;; 그리고 설(薛)이라는 지역 이름도,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어떤 발음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ㅠ.ㅠ
결국, 잔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다.
일단, 풍환(馮驩/冯谖)이란 이름은 비슷하게 생긴 다른 한자로 대체(?)했다. 즉, '풍' 이 '말 마(馬)' 에 이수변(冫)이 붙은 글자인데, 발음을 모르니 그 글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삼수변(氵)이 붙은 글자로 땜빵(!)해버렸다. 채점자가 수많은 답안지를 채점하느라 지친 나머지 정신이 몽롱해져서, 점 두 개짜리 이수변과 점 세 개짜리 삼수변을 구별 못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요행을 바라면서... ^^;; '환' 도 적당한 글자 하나 찾아 때워버리고... (이 글자는 무슨 글자로 대체했는지 기억조차 안 남. -.-;;) 그렇게 풍환이란 이름을 틀린 글자로 한 번 써주고서, 그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그' 라는 대명사로 밀고 나갔다. 이름을 아예 안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틀린 글자를 계속해서 쓰면 여러 번 감점 당할테니, 맨 앞에 딱 한 번만 쓰는 편법을 쓴 것이다.
그리고 설(薛)은 비슷하게 생긴 글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薛)의 중국어 발음은 xue인데, 나는 xie라고 추측하며 그 발음으로만 찾았으니...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마음이 점점 초조해져서, 결국에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어떤 지방' 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넘겨버렸다. -.-;;
그렇게 발음 문제에 걸려서 한자 찾는데 시간을 많이 썼더니, 오히려 종이 HSK를 치를 때보다 시간이 더 많이 들었다.
IBT HSK의 장점 중 하나가 '쓰기' 과목에서 시간을 넉넉히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지... 그래서 답안지를 완성 못 시키고 시험 시간이 종료되어 버렸다. (딱 두 줄만 더 쓰면 되었는데...! 시간이 30초만 더 있었더라면...! ㅠ.ㅠ)
※ 덧붙임
알고 보니, 소구 핀인에 필기인식기능이 있었다...! -0-;;
소구 핀인을 몇 년이나 썼으면서, 여지껏 그런 기능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 (이래서 아는 게 힘이라고 하는 거다... ㅠ.ㅠ)
IBT HSK '쓰기' 과목에서 발음을 모르는 단어를 보게 되면 필기인식기능을 사용하기를...
셋째, 평소 노트북 컴퓨터만 쓰던 사람이라면, 데스크탑 컴퓨터의 자판으로 글씨 입력할 때 오타를 줄줄이 내게 된다...!
IBT HSK 시험장의 컴퓨터는 전부 데스크탑이다. 그런데 데스크탑 자판을 만져본 게 도대체 언제적 일인지... 지난 몇 년간 노트북 자판에만 익숙해진 손가락이 자꾸 엉뚱한 글자를 쳤다. 가뜩이나 듣도 보도 못 한 한자로 된 이름 때문에 시간을 허비해서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거기에 오타까지 작렬하니, 정말 신경질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아올랐다. 오죽하면, 나중에는 컴퓨터 자판을 때려부수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
4. 기타
시험이 끝난 후, 친구와 만났다.
친구가 시험 잘 봤냐고 전화를 했는데, 내가 시험 망쳤다고 하자 기분 풀어준다고 시내로 나온 것이다. 점심을 사준 것도 모자라, 책까지 한 권 사준다며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이 날 내가 고른 책이 중국어로 된 '사기(사마천의 사기)' 다. 물론, 중국어 학습자용으로 나온 책이라, 사기 전체의 내용 중 극히 일부분만 담은, 사실상 아이들 동화책에 가까운 수준의 책이다. (알록달록한 그림도 있음. ^^) 역사 속 인명과 지명에 치여서 시험을 망친 뒤라, 나중에 똑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고 고른 거다. 중국역사 속 대표적인 인물들 이름이 중국어로 어떻게 발음되는지 정도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막상 책을 사서 훑어보니, 다시 열이 올랐다. 시험에 나왔던 '맹상군과 풍훤' 에 얽힌 내용이 그 책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풍훤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니, 점심 먹으면서 겨우 가라앉혔던 부아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ㅠ.ㅠ 친구는, 나를 골탕 먹인 시험 문제가 그 책에 나오는 게 너무 웃기다고 막 웃고... -.-;;
9월에 본 IBT HSK의 점수가 발표되었는데, 깜짝 놀랐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마무리를 못 해서 폭삭 주저앉을 줄 알았던 '쓰기' 점수가, 그 전에 봤던 시험 때보다 오히려 올랐다! 비록 달랑 1점 오른 것이지만... -.-;;
친구는, 글이 중간에서 뚝 끊긴 것도 아니고 마지막 두 문장 정도 못 쓴 정도라면 거의 완성된 글 아니냐고 했다. 그러니 내가 쓴 답안의 내용만 괜찮다면, 무난한 점수를 받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쓰기' 과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단 한 편의 완전한 글을 완성하는 것 같은데... HSK의 채점 기준이 그런 내 생각과 다른 모양이다.
애초에 작문에서 10점 이상은 더 받을 것을 기대하고 IBT HSK를 치렀던 것에 비하면 불만족스런 결과다. 하지만 답안지를 완성 못 시킨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괜찮은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종이 HSK를 봐야겠다. 발음 모르는 글자 때문에 쩔쩔매는 '짜릿한 경험'(!)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 이 항목은 이 포스트를 올리고 1년 만인 2015년 11월 3일에 대대적으로 수정했음.
2014년 11월 6일에 올렸던 원래의 내용은 HSK 성적평가가 점수제에서 백분율제로(즉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뀌었다는 것이었음. 그런데 어떤 네티즌이 오류가 있다고 댓글로 알려줘서 한국HSK사무국에 문의한 후 수정함.
이 백분율표를 보면 자기 점수가 전체 응시자 중 어느 수준에 해당하는지 '대충만' 알 수 있음.
왜냐하면 백분율이 매번 변하지 않고 고정적이라서... -.-;;
성적표에 전에는 없던 백분율표가 나와서 성적평가방식이 바뀐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 혀~~~ 신경 쓸 필요없는 표라고 한다. (그럼 뭐하러 백분율 산출했니? -.-;;) 여지껏 그랬듯이 커트라인은 180점이고, 이 백분율표는 자신의 점수가 전체 응시자 중 어느 수준의 점수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중국 한반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시험문제가 똑같이 나오지 않는 이상 매번 시험 난이도와 성적 분포가 다를 수 밖에 없는데, 무슨 생각인지 매번 같은 백분율표가 나온다는 사실... HSK사무국 직원 왈 "그 표는 아예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전화하신 분 점수만 중요하지 그 표는 필요없어요." -0-;;
※ 뱀발
등기우편으로 온 HSK 성적표를 보고 기겁했다.
우편봉투 앞부분 중 일부가 비닐로 되어 있는데, 그 비닐을 통해 내 개인정보가 보였다! -0-;; 집배원 아저씨에게 우편물을 받아드는 순간, 이름(한글 이름, 한자 이름 모두), 수험번호, 내 사진이 떡 하니 드러난 것을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이름이야 어차피 우편물 배달을 위해 노출될 수 밖에 없지만, 사진이나 수험번호는 어째서 노출된 걸까? 비닐이 아래로 1센티미터만 더 길었으면 내 점수까지 다 보였을 것이다. (이것 보시오, 중국 국가한반 양반! 요즘처럼 개인정보에 민감한 시대에, 이렇게 개인정보를 마구잡이로 노출해도 되는 것이오?)
속 내용이 훤히 다 보이는 우편봉투.
(우리 수험생들의 인권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ㅠ.ㅠ)
'중국어 학습, 중국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어 학습자를 위한 유용한 스마트폰 앱 (0) | 2015.02.28 |
---|---|
중국 유머 (0) | 2015.01.14 |
왕비(王菲)의 단원인장구(但愿人长久) (0) | 2014.09.03 |
중국 잡지 '독자(读者, 중국명 두저)' (0) | 2014.07.21 |
광량(光良)의 동화(童话) (0) | 2014.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