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학습, 중국어 노래

왕비(王菲)의 단원인장구(但愿人长久)

Lesley 2014. 9. 3. 00:01

 

  이 포스트를 '중국어 학습, 중국어 노래' 와 '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중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지 고민했다.

  '단원인장구(但愿人长久)''왕비(王菲)' 라는 중국 여가수의 노래로 접했다.  그러면 '중국어 학습, 중국어 노래' 에 넣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노래는 원래 유행가가 아니라 고전시가다.  송나라 때 유명한 문인이며 관료인 '소식(蘇軾)', 즉 우리나라에서는 '소동파(蘇東坡)' 라고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 지은 사(詞)다. (동파(東坡)를 이름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던데, 동파는 이름이 아니라 '호' 임!)  그렇다면, 원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에 넣는 게 맞는 것이다.

  결국, 내가 단원인장구를 처음 접한 것이 사가 아닌 노래였기 때문에, '중국어 학습, 중국어 노래' 카테고리에 넣기로 했다.

 

  이 사의 원제는 '수조가두(水調歌頭)' 인데, 소식이 1076년 추석날 밤에 지은 것이다.

 그 당시, 소식은 조정의 정쟁에서 패해서 지방직으로 밀려나, 오랫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며 지내고 있었다.  밀주라는 지역에서 근무하던 중 추석을 맞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7년이나 만나지 못 한 동생 소철(蘇徹)이 떠올라 이 사를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사의 서문에 추석에 크게 술에 취해서 이 사를 짓고 동생을 생각한다고 써놓기도 했다. 

 

 

소식(蘇軾)의 수조가두(水調歌頭).  누가 썼는지 정말 명필이로세~~! @.@

(출처 : 무한과학기술대학(武汉科技大学)의 서예 작품 http://zkwhj.hbee.edu.cn/html/zkwhj/2010-05/72206.html)

 

 

  이 수조가두를, 중국어권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대만 가수 등려군(鄧麗君, 덩리쥔)이 가요로 바꿔 불렀다.

  새로 붙인 제목 '단원인장구' 는 이 사의 끝부분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그 구절을 가요 제목으로 쓴 것이다.  등려군 사후에는, 중국 본토 출신으로 홍콩에서 가수로 활동 중인 왕비가 리메이크했다.

  참고로, 왕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중경삼림' 의 주제곡 '夢中人(The Cranberries의 Dreams의 리메이크곡)' 으로 알려져있다.  어째 죄다 리메이크곡인가... ^^;;

 

 

 

但愿人长久(단원인장구)

그대가 오래도록 있기를 바랄 뿐이네.

 

                                             - 王菲(왕비) -

 

 

 

明月几时有 把酒问靑天

밝은 달은 언제 뜰지 술잔 들고 푸른 하늘에 물어 보네.

 

不知天上宮阙 今夕是何年

천상의 궁궐에서는 오늘 저녁이 어느 해인지 모르겠네. 

 

我欲乘风归去 唯恐琼楼玉宇 高处不胜寒

내가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지만, 옥으로 된 호화롭고 높은 곳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라네.

 

起舞弄淸影 何似在人间

일어나 춤추며 맑은 그림자를 희롱하니, 어찌 인간 세상과 같다 하겠는가?

 

转朱阁 低绮戶 照无眠

(달빛이) 붉은 기둥을 돌고, 비단 창가로 낮게 스며들어, 잠 못 이루는 이를 비추네.

 

不应有恨 何事长向別时圆

진정 한을 품고 있지 않건만, 어찌하여 이별할 때에는 (달이) 오래도록 둥근 것인가.

 

人有悲欢离合 月有阴晴圆缺 此事古难全

사람에게는 슬픔, 기쁨, 이별, 만남이 있고, 달에게는 어두움, 밝음, 가득참, 기울어짐이 있으니, 이런 일은 예로부터 완전하기 어렵다네.

 

但愿人长久 千里共婵娟

단지 그대가 오래도록 있어, 천리 밖에서도 함께 달빛을 누리기를 바란다네.

 

 

 

  정치적으로 몰락했던 소식의 모순되고 복잡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오랫동안 지방을 떠돌았으니, 다시 화려하게 재기하여 중앙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동시에, 복잡한 중앙의 상황을 보니, 괜히 돌아갔다가 더 큰 화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조정이 있는 궁궐을 '천상의 궁궐' 에 빗대어 그 화려한 곳으로 바람을 타고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호화롭고 높은 곳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 할까 두렵구나.' 라는 말로 또 다시 풍파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추석날 밤에 술에 크게 취해 춤까지 추며 즐기는 것을 들어 '이 어찌 인간 세상과 같다 하겠는가?' 하며, 번잡한 정치 같은 것은 다 잊고 초야에 묻혀 마음 편하게 살겠다는 뜻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입신양명이라는 속세의 꿈을 끊지 못 해서 잠도 이루지 못 하며, '진정 한을 품고 있지 않건만' 이라면서 '어찌 이별할 때면 달이 오래도록 둥근 것인가' 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달의 어둡고 밝음 및 차고 기움을, 인간사의 슬픔과 기쁨 및 이별과 만남에 빗대며, 한 때는 승승장구했지만 이제는 몰락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한다.  그리고 동생과 천리길을 두고 떨어져 있어서 한 자리에 같이 있지 못 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함께 똑같은 추석날 보름달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삼아, 언제가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유유자적한 삶을 바란다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정치에서 발을 뺄 수 없는 습성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

 

  이 노래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중국 가요 중에서도 매우 특별하다.

  중국의 가요 중에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곡을 여러 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고전시가에 새로 곡을 붙인 경우는 처음이다.  신선한 느낌도 들고, 또 자기 나라의 고전문학을 널리 알린다는 측면에서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