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황금의 제국 - 또 하나의 명품 드라마

Lesley 2013. 10. 15. 00:01

 

  거의 한 달 째, 지난 달에 종영한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의 OST를 듣고 있다.

  이 드라마가 24회짜리인데, 내가 보기 시작한 때가 이미 20회까지 방영된 후였다.  괜찮은 드라마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별 관심 없어하다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 드라마의 뮤직비디오를 보고는 마음이 동하게 되었다.  종영이 가까워지도록 무관심했던 드라마이건만, 한 번 손을 대니 몰입도가 보통이 아니어서, 한 일주일 정도 미친 듯이 몰아봤다.

  

 

 

 

  개인적으로는 이 '황금의 제국' 을 지난 상반기에 방영한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 과 함께 2013년 최고의 드라마로 꼽겠다.  

  ☞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 명품 타임슬립 드라마(http://blog.daum.net/jha7791/15790974)

 

  천편일률적인 드라마가 넘쳐나는 요즘 이 정도의 수작을 보게 되다니, 운이 좋았다.

  일단,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온갖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내용' 이다.  일본판 '하얀 거탑' 이후로 비 정치계를 소재로 한 정치극으로 이만한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  또한 우리나라 드라마의 뻔한 요소(친척이나 지인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애정관계, 출생의 비밀, 불치병 등등)가 많이 배제되어 있다.  그리고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출연진의 연기력이 평균적으로 높았다.  마지막으로, 요즘 내가 반복해서 듣고 있는 OST(특히 BGM)가 정말 일품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 드라마는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건만 시청률 측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 했다.

  아무래도 워낙 살기 빠듯한 세상이라 그런지, 요즘 두루두루 환영받는 드라마는 비교적 가벼우면서 따뜻한 내용을 다루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사는 인간들의 욕망을 소재로 하기도 했고, 그 내용이 재벌가의 경영권을 둘러싼 투쟁기여서 타 드라마보다 딱딱한 경제용어가 자주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계층의 시청자가 좋아하기에는 너무 어둡고 우울하고 어려웠던 것 같다.    

 

 

 

1. 황금의 제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세 사람

 

 

  이 드라마는 세 명의 주인공이 '성진그룹' 이라는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고자 벌이는 권력싸움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줄거리를 한 포스트에 요약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선,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드라마의 주요 소재가,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만한 거대한 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이다.  또한, 경제극이라는 껍질을 벗겨놓고 보면 한 편의 잘 짜여진 정치극이기도 하다.  거기에, 초반 1, 2회를 제외하면 거의 매회마다 반전이 한두 개씩은 나온다.

  또한, 표면적인 주연은 장태주(고수)지만, 사실상 최서윤(이요원)최민재(손현주) 역시 비슷한 무게감을 갖는 공동주연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인물들이 엇비슷한 비중을 갖고 각자의 입장에서 사연을 펼치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의 내용인데도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질 때가 있고, 반대로 여러 개의 사연이 하나의 줄기를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한 포스트로 끝낼 수 있도록, 어지간한 것은 다 쳐내고 내 식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미 가질만큼 가진 세 주인공(태주야 처음에는 무척 가난했지만, 서윤과 정략결혼해서 성진그룹으로 뛰어들 무렵에는 제법 재산을 모은 상태였음.)이 '어째서 성진그룹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었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나' 정도만 건드려볼까 한다.

  성진그룹의 경영권을 두고서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처절할 정도로 싸우는 사연은 전부 패스~~! (하위 에피소드와 반전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다 다룰 수가 없는... ^^;;)

 

 

◎ 장태주(고수)

 

  태주는 가난한 집안의 1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머리도 좋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해서 명문대 법대생이 되었고, 사법시험 1차를 통과한 상태다.  이런 가난한 집안의 잘난 장남이 흔히 그렇듯이, 태주도 어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평생 동안 힘든 일만 하면서 자기 남매를 키운 부모를, 이제 그만 편히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태주 한 사람의 학비를 대는 것만으로도 힘든 가정 형편에 실업계 학교로 진학해야 했던 여동생도, 언젠가는 대학에 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 전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과는 별도로,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즉, 그저 착하고 부지런하기만 할 뿐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 한 아버지에 대해, 애정과 연민 그리고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는 부정적인 마음도 품고 있다.

 

  얼마 안 남은 사법시험 2차를 준비하던 중, 태주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사건이 벌어진다.

  성진그룹이 시행하는 재개발사업 때문에, 태주 아버지의 밀면가게가 입주해 있는 건물이 철거 대상이 된 것이다.  평생 힘있는 자들에게 머리 숙이고 살았던 아버지는, 평생 고생하다가 몇 달 전에야 처음으로 장만한 자신의 가게만은 꼭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들이 "잘못은 아버지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힘있는 사람들이 한다." 고 만류하는 것도 뿌리친 채,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며 철거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힘있는 자들에게 대항한 결과는 참혹했다.  심한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다.  

  태주는 아버지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 개발업자가 된 고등학교 선배 '설희' 를 찾아간다.  설희가 시킨 불법적인 일을 한 대가로 수술비를 마련하지만, 아버지는 수술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뜬다.  그리고 촉망받던 명문대생 태주는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간다.

 

  인연이란 게 묘한 것이라, 태주는 아버지 죽음의 가해자격인 성진그룹의 '최민재' 와 마주하게 된다.

  민재는 처음부터 태주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태주가 원하는대로 태주가 가석방 되도록 힘을 써준다.  자신의 아버지이며 성진그룹 부회장인 '최동진' 이 자신의 큰아버지이며 회장인 '최동성' 에게 무모한 싸움을 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태주는 민재와의 첫만남에서, 민재가 아버지를 죽게 한 바로 그 강제철거를 지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주는 민재에게 복수도 하고 가족이 먹고살 돈도 구하기 위해,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을 벌인다.

  즉, 민재가 사촌여동생인 '최서윤' 과 그룹 경영권이 걸린 재개발사업을 두고 싸움을 벌일 때, 발빠르게 움직여서 그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땅 2평을 손에 넣는다. (부동산 투기판에서 '알박기' 라고 하는 바로 그 수법...)  이 일은, 앞으로 각자의 운명을 다 내걸고 싸우게 될 태주와 서윤과 민재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얽히는 계기가 된다.

  민재가 동원한 조직폭력배의 폭행과 위협에 태주가 굴복하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되려나 보다 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나면서 태주가 민재에게 통쾌하게 결정타를 날린다. ('시청자 뒤통수 치는 드라마'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끊임없이 나왔던 반전의 시작이 이것이었음. ^^)  태주와 서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 하는 상태에서, 민재라는 공동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잠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동맹 덕분에 각자 민재에게 빚을 갚으며 승리한다.   

 

  태주는 2평의 땅을 판 돈으로 세 식구가 함께 살 집과 밀면가게를 마련하여 평범하게 살려고 하지만...

  설희는 평당 1,000만원짜리 땅 2평을 평당 5억원에 팔아넘길 정도로 무서운 판단력과 두둑한 배포를 갖춘 태주를 그냥 두지 않는다.  '이번 한 번만' 이라는 설희의 말에, 태주는 설희와 손잡고 또 다른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다.

  겉보기에는 설희의 꾐에 넘어간 것 같지만, 어쩌면 태주 스스로 원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중간에 위험한 일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며칠만에 10억이라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땀흘려 일하고 늙으막에야 겨우 장만했던 밀면가게를, 태주는 겨우 며칠만에 장만한 것이다.  한 번 그런 짜릿한 경험을 한 사람이, 과연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 앞에서 다짐했던 말대로, 밀면 육수를 끓이며 평범하고 조용하게 사는 게 가능할까?  아마도 설희의 제안은 계기가 되었을 뿐, 이미 태주의 마음 밑바닥에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샘솟는 욕망이 깨어난 상태였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 태주는 부동산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다.

  부동산 투기라는 게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태주 역시 거금을 버는 과정에서 재개발 조합장, 관련 공무원, 정치인, 기자에게 향응과 뇌물을 제공하는 등 온갖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떳떳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철칙만은 마음 속에 품고 지켰기 때문이다.  그 철칙이란  "내 아버지처럼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이 때의 태주 모습은 '등쳐먹어도 가진 자를 등쳐먹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따뜻하게 아량을 베푸는 사람', 바꾸어 말하자면 홍길동 내지는 로빈훗처럼 보인다. 

  만일 계속해서 그렇게 살았더라면, 태주는 적당히 화려한 생활을 누리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적당히 베푸는, 그런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진그룹 경영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최서윤, 성진그룹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최민재, 이 두 사촌남매의 싸움에 다시 휘말리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성진그룹을 차지하기 위해서, 각자 태주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각성한 태주는, 서윤과 민재 어느 한 사람의 밑에 들어가 적당히 콩고물이나 받아먹는 것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성진그룹을 차지하려는 싸움에, 태주 역시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결국 서윤과 민재는 본의 아니게, 자신들의 싸움에 경쟁자만 한 사람 더 늘린 셈이다. 

 

  그리고 태주는 차츰 변해간다.

  그 잘생긴 얼굴에 유쾌한 웃음을 한 가득 띄우고서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승자가 모든 걸 갖게 됩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듯이, 성공한 사기는 사기가 아닙니다."

  "돈을 벌려면 땀을 흘려선 안 되고, 남의 땀을 훔쳐야 합니다."  

  성공을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히 알고 지켰던 태주가, 거대한 황금의 제국까지 넘보면서 그 선을 넘어서게 된다.

 

 

◎ 최서윤(이요원)

 

  서울 신림동 판자촌에서 태어난 태주와는 다르게, 서윤은 눈부신 황금의 제국에서 태어났다.

  서윤은, 태주처럼 중요한 시험을 코 앞에 둔 상태에서도 집안 살림 걱정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다.  아버지 최동성 회장은 임직원 20만명을 거느린 성진그룹의 창업자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평생 벌어도 못 만질 엄청난 재산(주식)을, 서윤이 겨우 초등학생일 때 선물로 주었다.

  또한 태주처럼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없다.  아들이, 그 중에서도 장남이 집안을 잇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게 우리나라의 정서다.  그렇기 때문에 2남 2녀 중 셋째이며 차녀로 태어난 서윤은 아버지의 귀염둥이 딸로 편안한 성장기를 보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면, 서윤은 자신이 원했던대로 계속 학계에 남아 문학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했.다.면. 말.이.다.

 

  서윤이 가진 것 중에 태주가 가진 것보다 못 한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족' 이다.

  서윤의 환경은 모두가 부러워할만 하다.  하지만 그 환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가족' 이 서윤의 삶을 비틀어버린다.

  최동성의 장남이며 장녀인 서윤의 오빠와 언니는, 최동성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권리만 알 뿐, 그 권리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의무는 알지 못 한다.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물려받아 마음껏 쓰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늘리는 것은 둘째치고 유지할만한 능력조차 없다.

  그래서 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차녀 서윤을, 최동성은 자신이 세운 황금의 제국을 지킬 자로 선택한다.  자신의 선택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서윤의 손에 거대한 부와 권력만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진흙과 피도 함께 쥐여주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치열한 전쟁터로 밀어넣은 딸에게  "두 가지만 기억해라.  좋은 사람이 되지 마라.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거라." 라는 섬뜩한 조언을 한다.  눈물 가득한 눈과 애잔한 목소리로...  그런 최동성의 선택은, 표면적으로나마 화기애애 하게 지냈던 가족 사이에 큰 균열을 일으킨다.

 

  처음에 서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로 한 것은, 무척이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평생 동안 일군 성진그룹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서윤은 최동성의 여러 자식 중 가족이라는 집단에 가장 큰 의미와 애착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형제자매 중 어린 편에 속하지만, 오히려 철없는 오빠와 언니를 대신해서 집안일(오빠의 외도 때문에 이혼할 판국인 오빠 부부를 진정시키기)에서나 회사일(호시탐탐 회사 경영권을 노리는 사촌오빠 민재를 쳐내기)에서나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서윤이다.

  그런 서윤이기에, 성진그룹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 중에는 '아버지의 피와 살을 함께 나눈 가족' 을 지키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결국 성진그룹을 위해서라면 혈육이고 뭐고 다 내치는 아버지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은 자식이 바로 서윤이었음.) 

 

  하지만 얄궂게도, 서윤이 성진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된 순간, 서윤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가족들이 서윤에게서 등을 돌린다.

  훗날 서윤이 자기네 집과는 달리 웃음꽃이 피는 태주네 집을 부러워할 때, 태주가 말한대로 '웃으면서 밥먹는 식탁' 과 '성진그룹'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서윤은 사촌형제인 민재 뿐 아니라 친형제자매까지 번갈아가며 자신을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다소 당위적이고 도의적인 이유에서 서윤이 지키려 했던 가족(날라리 오빠와 철부지 언니) 뿐 아니라, 정말로 애정을 갖고 있던 가족마저 서윤의 등에 칼을 꽂는다.  서윤의 계모는 생모 못지 않게 서윤 남매들에게 헌신적이었고, 그 계모에게서 태어난 이복동생(공식적으로는 이복동생이지만, 사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관계였음.)은 서윤이 유일하게 동기간의 정을 제대로 나눈 존재였다.  그런데 서윤이 실제로 핏줄이 닿은 형제자매보다 더 믿고 의지했던 계모는, 알고 보니 최동성에게 원한을 품고 27년이란 세월 동안 마음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아온 인물이다.  그리고 이복동생은 비록 어머니의 복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는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서윤을 속였다.  계모와 이복동생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서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가족이라는 집단은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서윤 역시 태주처럼 변해간다.

  어느 정도는,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가족에게 몇 번이나 배신을 당하며 환멸을 느낀 탓이다.  또 어느 정도는, 서윤이야말로 아버지의 냉혈한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인 탓이다.  마침내 서윤이 최후의 승자(과연 진정한 승자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후에 성진그룹을 차지한 것은 서윤이니까...)가 되었을 때, 서윤은 한 때는 가족이었던 사람들에게 각자 가진 지주회사의 주식을 전부 넘기라며 협박에 가깝게 통고한다.  다른 이들이 가진 재산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대항할만한 소지를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서다. 

  서윤의 언니는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명품관 있는 백화점 타령이나 하던 철부지였지만, 그런 언니가 서윤에게 절연을 선언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 만큼은 정곡을 찌른다.  "언니, 우린 가족이야." 라며 절연하려는 언니를 말리는 서윤에게 언니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니, 난 식탁에서 마주 앉고 싶은데, 넌 내 위에 앉고 싶어해.  나란히 앉아야 가족이지." 

  결국 태주가 한 말처럼 가족끼리 행복하게 웃으며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과 황금의 제국인 성진그룹을 둘 다 차지할 수는 없었다.  서윤은 성진그룹을 얻게 된 대신 가족을 잃게 된 것이다.  

 

 

◎ 최민재(손현주)

 

  민재는 성진그룹의 최동진 부회장을 아버지로, 최동성 회장을 큰아버지로 두고 태어났다.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때문에도 그렇고, 현실에서 재벌가 사람들이 종종 일으키는 사고 때문에도 그렇고, 흔히 재벌 2세 하면 '어쩌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에 비슷한 집안의 망나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주색잡기에 빠져 사는 날라리' 를 떠올린다.  사실, 민재의 사촌형이며 서윤의 친오빠이기도 한 최동성 회장의 장남이 바로 그 '머리 텅텅 빈 타락한 재벌 2세' 의 대표격이다. -.-;;

  하지만 민재는 달랐다.  그저 운좋게 재벌가에 태어나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다.  똑똑해서 공부 잘 했고, 회사일에 대한 의욕도 넘치고, 회사 창립자 겸 소유자의 가까운 친척이건만 대리로 입사해서 해외 건설현장에서 온갖 고생하며 경험을 쌓고 회사 성장에 기여했다.  게다가 10년째 병석에 있는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순정도 간직하고 있다. (요즘 유행어로 설명하자면, 엄.친.아...!)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으로 보이는 민재에게도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으니...

  큰아버지 최동성 회장이,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민재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최동성은,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지만 자기 자식을 제치고 똑똑한 조카 민재에게 성진그룹을 맡길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웠던 시절 자신과 함께 고생하며 성진그룹을 일군 동생 최동진에게 계열사 몇 개 챙겨줘서 독립시킬 생각도 없다.  최동성에게, 형을 원망하면서도 결국 형에 대한 정과 의리를 끊어내지 못 하는 동생 최동진과, 못난 자신의 장남과는 달리 뛰어난 업무능력을 갖춘 조카 민재는, 성진그룹을 원활히 경영하기 위한 가신(家臣) 비슷한 존재일 뿐이다.

  민재는 그런 큰아버지 최동성에게 증오를 품고 있다.  물론, 자신과 아버지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자신과 아버지가 성진그룹 경영권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 하도록 견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민재가 진정으로 증오를 품은 대상은 오히려 아버지 최동진인 듯하다.

  민재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큰아버지의 음모에도 "형제끼리 뭐 그런 걸 따지냐?" 하며 허허 웃다가 큰아버지에게 당하던 아버지...  큰아버지에게 한 번 크게 당하고 나면 당장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씩씩거리다가도, 막상 큰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그래도 내 형님 아니냐?" 하며 오히려 발벗고 나서서 큰아버지를 돕던 아버지...  민재는 그런 아버지를 "내 아버지는 평생 최동성 회장의 마차를 끄는 마부였다." 라고 평하며 몸서리 친다.  (아버지에 대해 애증을 품은 것이 태주와 민재 두 남자의 공통점이기에,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의기투합하며 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됨.)

  하지만 밉든 곱든 최동진은 결국 자신의 친아버지다.  그리고 비록 아버지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어쨌거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지만, 차마 아버지와 완전히 인연을 끊지는 못 한다.  대신 아버지에 대한 대한 분노까지 큰아버지에게 돌리며 큰아버지에게 더 큰 원한을 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큰아버지에게 원한을 못 갚은 상태에서 큰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이제 그 원한은 서윤을 향하게 된다.

  서윤은 큰아버지의 자식들 중 큰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고(외모가 아닌 능력과 성격적인 면에서), 큰아버지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윤과 사이 좋은 사촌지간으로 지냈던 시절, 서윤이 자신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그 시절부터, 무의식 속에서는 서윤에게도 분노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자신이 가진 주식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초등학생 서윤이 선물로 받은 주식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시절부터 말이다.

 

  민재는 태주나 서윤처럼 내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는 않지만, 그 두 사람처럼 황금의 제국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큰아버지에 대한 원한, 사촌여동생에 대한 박탈감, 태주에 대한 승부욕, 아버지에 대한 애증...  그렇게 언제나 곤두선 감정 속에서 지내야 하는 민재에게도, 마음을 편안히 풀고 대할 수 있는 상대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민재의 아내다.  비록 10년씩이나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아내지만, 그래도 민재는 아내를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힘겨운 싸움으로 회사가 무너질 지경이 되었을 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고 회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은행장의 딸과 재혼한다.  공교롭게도 아내는 민재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아침에 죽었고, 이 일은 민재에게 두고 두고 큰 한으로 남게 된다.   

 

  어찌 생각하면, 민재는 태주나 서윤만큼 독하지 못 한, 세 주인공 중 평범한 사람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물론, 현실 속에서는 민재 정도만 되어도 무척 독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나마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해서 그 독기가 약한 편이라는 뜻일 뿐... -.-;;

  태주나 서윤은 원래 소중하게 여겼던 것(인간성 또는 가족이라는 가치)을 잃어버리며 변한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주위 상황 때문이었는데, 나중에는 스스로가 소중한 것을 뒤로 한 채 오직 성진그룹만을 바라보며 달리게 된다.  좋게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결단력이 있어서, 하나를 얻기 위해 과감하게 또 다른 하나를 버리고 목표에만 집중한 것이다.

  그에 비해 민재는, 자신이 무척 사랑한 아내를 지키지도 못 했고, 자신이 욕심냈던 성진그룹에 완벽히 몰두하지도 못 했다.  아내를 버릴 만큼은 성진그룹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했지만, 재혼한 아내와 원만히 지낼 만큼은 그 욕망에 충실하지 못 한 것이다.  결국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태도는, 천신만고 끝에 성진그룹을 차지했던 민재를 다시 밑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성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재혼한 아내에게 이혼을 통고한 일이, 나중에 민재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그래서 민재는 승리자의 자리에서 밀려나, 또 다시 태주와 서윤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2.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지났다.

 

 

  꼭 이 드라마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언론이나 인터넷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지났다.' 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사회학자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부모의 재정적 도움 없이 자력으로는 중산층에 진입할 수 없는 세대' 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바로 내가 속한 세대임.  나 어떡해~~ ㅠ.ㅠ)  개천에서 용 난 경우에 해당하는 유명한 변호사는, 자신이 1950년대생이라서 다행이라고, 만일 20년 정도만 늦게 태어났어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혼자 죽어라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서울대에 입학할 수도,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지났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계급이 고착화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하위 계층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뜻이다.  무척이나 씁쓸한 일이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심지어 결혼정보업체에서 회원의 등급을 매길 때조차, 결혼하려는 사람의 능력보다 그 부모의 재력과 직업을 더 중시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아니던가?

 

 

  '황금의 제국' 에서도 그런 냉정한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다.

 

  1997년 외환위기로 우리 경제가 뿌리부터 흔들리던 시기, 흔히 우리가 'IMF 시대' 라고 하는 그 시기가 시작되었을 때, 태주가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시기가 끝나면, 가진 놈은 더 많이 가지게 될거고 없는 놈은 더 살기 힘들어질 겁니다.  우리에게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과연 태주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몇 년이 지나자, 요동치던 경제상황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국가 전체의 경제는 분명히 나아졌다.  그런데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격차는 외화위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고, 없는 자가 있는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기 위한 문은 바늘구멍이 되어버렸다.

 

  태주와 서윤이 정략상 겉으로나마 부부로 살다가 이혼을 불사해가며 마지막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이 때 벌어진 일도 그런 세태를 반영한다.

  처음에는 앞서 나갔던 태주가 곧 벽에 부딪치게 된다.  성진그룹의 사위라는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성진그룹의 임원들도, 청와대의 비서관도,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서윤과 이혼을 하기로 한 후 모든 것이 바뀐다.

  태주의 그 비상한 머리와 두둑한 배포로도 뚫을 수 없는 장벽이란 '태생의 한계' 다.  태주가 아무리 잘났어도, 정계 및 재계의 최고위층 인사들로 이루어진 상류사회에서, 결국은 이방인일 뿐이다.  애초에 재벌가에서 태어난 서윤이 가진 인맥(물론 서윤 본인의 인맥이라기 보다는, 성진그룹이라는 거대집단의 인맥임.) 앞에서는, 달동네 판자촌 출신인 태주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승기를 잡아 한결 느긋해진 서윤이 태주를 찾아온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두 계층을 상징한다.  서윤은 이미 꼭대기까지 올라선 상태에서 아래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상에 들어오지 못 하게 사다리를 치워버린 계층이다.  그리고 태주는 어떻게든 위의 세상으로 올라서려고 계속해서 사다리를 만드는 계층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는, 두 계층 사람들의 심리와 갈등을 압축해서 생생히 보여준다.  전에는 성진그룹의 창업주인 최동성을 비난했던 태주가, 이제는 한국전쟁 중 동생과 단 둘이 살아남아 맨 손으로 황금의 제국을 세운 최동성처럼 '개천에서 난 용' 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개천에서 난 용' 인 자신의 아버지 최동성은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서윤이, 정작 다른 사람이 아버지와 같이 '개천에서 난 용' 이 되려 할 때에는 심한 거부감을 내보이며 막으려 한다.

  서윤 :  전쟁에, 혼란에, 아빠가 살던 시대는 진흙탕이었어요.  개천에서 용이 나고 전쟁고아가 재벌도 되고...  그런데 이제는 땅이 굳었어요.

  태주 :  그 땅에 물도 뿌리고 침도 뱉어서, 진흙탕 한 번 만들어볼랍니다.

  서윤 :  판자촌에서 태어난 장태주씨가 성진그룹 회장이 되는 아름다운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어요.

  태주 :  그 쪽 아버지가 이겼다고 판을 접으면 안 되지.  장봉호의 아들 장태주, 최동성의 딸 최서윤, 이 둘이 다시 패 돌려보자는데 자꾸 판을 접으시네.    

 

 

 

3. 아버지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식

 

 

  몇 년 전에 명품드라마라는 찬사를 들을만한 8부작짜리 사극 '한성별곡 - 正' 이 방영했다.

  비록 시청률은 한 자리 숫자였지만, 묵직한 주제를 담은 내용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단, 여자 주인공의 연기는 보기 난감했던... -.-;;), 훌륭한 영상에, 멋진 OST까지 갖춰서 매니아층을 만들어냈던 수작이다.

  그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신을 경원시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백성을 위해 정치하리라 수없이 다짐했다.  그러나 백성은 고사하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현실이었다.  내가 권력만을 쫒는다 경멸하였더냐?  나도 내 아비에게 그리 말했다.  허나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 된 후에는 나도 내 아비처럼 되어 있었다.  너도 자식 낳고 살아 보아라.  그건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위의 대사에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에게 품게 되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잘 드러나있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식 세대는 부모 세대가 만들어 놓은 모순에 분노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 든다.  그리고 또 정도 차이가 있을지언정, 자식 세대는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부모 세대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황금의 제국' 속 세 주인공은 모두 부모세대, 특히 아버지란 존재에게 유독 얽매여 있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가 다루는 소재가 한국 경제의 굵직한 사건들, 그것도 남성적인 성향이 강한 건설업, 부동산업, 금융업 관련 사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의 부모가 한창 활동하던 때가 여성의 사회활동이 적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부각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태주와 민재에게 아버지란 애증 어린 존재다.  두 사람 모두 일단은 자신의 아버지를 좋아하고 어느 정도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지는 못 하고, 또 아버지처럼 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두 사람에게 아버지란, 때때로 측은한 생각이 드는 못난 존재지만,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어서,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하는 숙명 같은 존재다.

  그에 비해, 서윤에게 아버지란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다.  사실 서윤도 자기 아버지가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남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항상 아버지의 편을 들만큼, 서윤에게 아버지란 절대적인 존재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태주와 민재가 아버지에게 품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서윤이 아버지에게 품은 긍정적인 감정이나, 결국 세 사람을 같은 길로 이끈다.  

  세 사람 모두 그 아버지란 존재 때문에 성진그룹 쟁탈전이란 개미지옥으로 뛰어들었으니 말이다.  위의 '한성별곡 - 正' 속의 대사처럼,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결국 부모 세대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을 상징하는 듯하다.

  태주와 민재가 성진그룹의 주인 자리를 그토록 탐냈던 이유는,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자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태주는 아버지처럼 정직함과 성실함만 내세우며 식구들을 고생시키는 무능한 가장이 되기 싫었기에, 황금의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기를 원했다.  민재는 아버지처럼 평생 큰아버지네 마부 노릇이나 하면서 수고비 몇 푼 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에, 큰아버지네 식구들이 탄 그 황금 마차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애초에는 성진그룹 경영에 별 욕심이 없었던 서윤이 성진그룹의 주인이 되겠다고 나선 것 역시,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가 원했기에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무척 원했던 학자의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버지가 말한대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두려운 사람이 되었다.  그 때문에 성진그룹 쟁탈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음에도, 축하해 줄 사람 하나 옆에 남지 않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지만...

 

 

 

4. 아쉬운 점과 오류 

 

 

  '황금의 제국' 은 여러가지 면에서 수작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인데, 눈에 띄는 흠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1990년에서 2009년까지 거의 20년이나 되는 세월을 다루는 이 드라마가, 세월의 변화를 알려주는 데 너무 인색하다는 점이다. 

  그나마 1회에서는 맨 첫 장면에 나오는 살인사건 후로 이야기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면서 '1990년' 이라는 자막을 보여줬다.  그런데 그 후로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연도가 스치듯이 언급되거나, 아니면 드라마 속 사건을 통해 시청자가 연도를 '짐작' 해야 했다.  그나마 전자의 경우에는 귀 쫑긋 세우고 집중하면 연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드라마 속 사건이 실재 사건과 일치하는 경우(예를 들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는 괜찮지만, 실재 사건을 각색한 경우(2009년 두바이의 모라토리엄 선언 및 용산참사)에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어차피 드라마라는 것은 픽션이고, 또 이 드라마 속 사건들은 실재 사건을 어느 정도 각색한 것들이다.  그러니 비록 실재 연도와 안 맞더라도 몇 년씩 건너뛸 때마다 드라마 설정상 몇 년도인지를 보여줬더라면, 시청자들이 내용을 이해하기 한결 편했을 것이다.  특히나 태주와 서윤이 결혼하고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을 때는, 시청자들이 시간감각을 잃어버리고 헤매면서 연도에 대한 온갖 학설(?)을 내놓을 정도였으니...  

 

 

  또 다른 하나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품인 휴대폰 관련해서 치명적(!)인 사고가 있었다는 점이다. 

 

  1회 처음 부분에서 나오는 살인사건은 1997년 12월에 일어났다.

  시간적 배경을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드라마 속 TV 뉴스에서 외환위기, IMF 총재의 방한, 대통령 선거 후보들이 언급되었으니 1997년 12월일 확률이 99%다.  그런데 1997년 12월이라는 시점에서 절대로 등장할 수 없는 소품이 등장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0-;; 

 

  사실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는, 가끔 소품 관련해서 오류가 나온다.

  그러니 그 스마트폰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등장했더라면, 시청자들도 그저 픽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문제는...  그 스마트폰이 드라마 1회 첫 부분에서 나오는데다가, 드라마 속 살인사건에서 너무나 눈에 띄는 중요한 소품이라는 점이다. ㅠ.ㅠ  새 드라마 시작한다고 잔뜩 관심 갖고 보는 시청자들 눈에, 아직 삐삐 들고 다니던 사람도 넘쳐났던 1997년에 최신 스마트폰 들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했으니...  그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시청자들에게 크게 각인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이 중요하지요, 언제나... -.-;;)  게다가, 1회 처음에 나오는 살인사건에서, 휴대폰이 클로즈업 되기까지 한다!  그것도 아주 크게~~~ -.-;; 

  화면 한 가득 보이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것을 그냥 옥의 티 정도로 봐줄 시청자는 없다.  이 스마트폰 사건에 대해, 1997년으로 타임슬립 한 스마트폰이니,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을 발명했다느니 하는 야유성 글이 인터넷에 쏟아졌던 모양이다.

 

  더구나, 하필이면 이 1회 속 살인사건 장면이 13회에서 반복되면서, 문제의 1997년 12월 속 스마트폰은 두 번씩이나 출연한다. (설상가상이라는 사자성어의 뜻을 제대로 알려주는 아주 좋은 예라 할 수 있음. -.-;;) 

  드라마가  ① 1997년 12월 살인사건을 보여줌, ②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후 시간 순서대로 여러 사건이 전개됨, ③ 다시 1997년 12월의 살인사건을 보여주면서 그 살인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줌...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래서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나왔나 보다.  1회 방영 때 욕 실컷 먹고 겨우 잊혀질만 하니까, 13회 방영 때 다시 욕 먹게 되는... ㅠ.ㅠ  그나마 13회 방영 때는 1회 방영 때 나온 스마트폰 클로즈업 장면은 삭제해버렸다.  그래봤자 태주와 국회의원 손에 들린 것이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모를 시청자는 없었지만...

 

  정말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살인사건 장면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태주, 설희, 국회의원)이 있고, 그 장면 촬영에는 당연히 여러 스텝이 참여했을 것이다.  다 합치면 최소한 열댓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 누구도 1997년에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소품 담당자가 옛날 휴대폰을 미처 준비하지 못 한 것인지, 요즘 드라마상에서 너무 과도하게 나와 문제가 되는 PPL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신 스마트폰을 등장시킨 것인지...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5. 잘 만든 드라마, 그러나 두 번은 못 볼 드라마

 

 

  이 포스트 맨 윗부분에서,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 을 잠깐 언급했다. 

  '황금의 제국' 을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과 함께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겠다고 했다.  두 드라마 모두 한국 드라마의 뻔한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내용을 보여준, 매우 좋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 말고 단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으니...  두 드라마 모두 꾸준히 보다 보면, 시쳇말로 기가 빨린다.  그것도 아주 팍팍 빨려서, 보는 이의 정신이 피폐해진다. -.-;; 

 

  참 우스우면서도 얄궂은 일이다.

  차라리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뒤범벅 된 막장 드라마를 보다가 짜증이 나다 못 해 지치게 된다면 말이 된다.  그런데 드라마 내용이 너무 탄탄해서 지쳐버린다니...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두 드라마 모두 매 회차마다 반전이 최소한 한 번씩은 나오고, 앞에 깔아준 복선이 동일 회차 또는 겨우 한두 회차 뒤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밝혀진다. (적절한 떡밥 회수!)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가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봐야 한다.  로맨틱 코미디 볼 때처럼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보면, 보면서도 내용을 따라잡지 못 하게 된다.

  그리고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 이 시간여행에서 나오는 온갖 인과관계 때문에 시청자 머리를 쥐나게 했다면, '황금의 제국' 은 한 술 더 뜬다.  1990년 이후 우리나라 또는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제적 사건과 각종 경제용어에, 등장인물들 대사를 통해 수시로 나오는 역사 속 유명한 이야기나 유명한 시의 구절들까지...  많은 시청자로 하여금 수고롭게도 인터넷이나 책 같은 자료 뒤져가며 드라마를 보게 만들었다. ^^;;   

 

  그렇기 때문에, '황금의 제국' 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두 번 볼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우선 드라마를 볼 때 두뇌를 제법 혹사(!)시켜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미 한 번 봐서 내용을 다 파악했으니 다시 볼 때에는 한결 편하게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 이미 기가 다 빨린 나머지 맥이 풀려서, 두 번씩이나 볼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라는 점이 두번째로 볼 때 걸림돌이 된다.  반전의 묘미라는 것은, 예상이 뒤집어졌을 때 느끼는 놀라움과 감탄이다.  이미 반전의 내용을 다 알아버렸는데 다시 볼 마음이 나겠는가... 

 

  올해는 어떻게, 뱀파이어가 사람 피를 쭉쭉 빨아들이는 것처럼 시청자의 기를 쭉쭉 빨아들이는 드라마를 두 개씩이나 보게 되었다. 

  원래 나는 마음에 드는 드라마나 영화는 몇 번씩 반복해서 본다.  하지만 '황금의 제국' 은 95점짜리 드라마지만, 한 번 본 것으로 만족하련다.  드라마 분위기를 잘 살려주었던 OST의 BGM를 들으며, 각 BGM이 나왔던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나마 바닥에 얇게 깔린 채 겨우 남은 기마저 빨려버린다면, 정말 곤란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