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vs. 빅픽처(The Big Picture)

Lesley 2013. 8. 8. 00:01

 

  지난 달에 '빅픽처(프랑스 원제 : L'homme qui voulait vivre sa vie, 영어 제목 : The Big Picture)' 를 봤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광고만 봤을 때도 1999년도 영화인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를 떠올렸다.  주인공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후 자신이 죽인 사람의 이름으로 생활한다는 설정이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삶을 대신 산다는 설정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사실, 자신의 현재 삶에 완벽하게 만족해하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다른 인생을 꿈꾸지 않나? (혹시 나 혼자만 그런 상상 내지는 망상을 하는건가... ^^;;)

 

 

 

 

  그런데 영화관에 가서 보고 나니, 설정이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점도 있어서, 오히려 더 비교하게 되었다.

  아, 참고로, 이 두 영화 모두 원작소설이 따로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또한 영화와 원작소설의 결말이 다르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리플리가 빅픽처보다 완성도가 높다.  빅픽처는 애초에 시나리오가 듬성듬성 했는지, 혹은 편집하는 과정에서 상영시간을 고려해서 지나치게 쳐냈는지, ㅇ내용 전개가 좀 허술한 느낌이다.  그리고 서론이 긴 편이었고 나중에 허겁지겁 결말 짓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시작 - 인생은 예측불허다.

 

 

◎ 리플리

 

  주인공 '톰 리플리(맷 데이먼)' 는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세속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별 볼 일 없는 청년일 뿐이지만, 이런 톰에게 한 가지 아주 특이한 재능이 있다.  타인의 행동, 말투, 필체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는 재능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원제가 The Talented Mr. Ripley, 즉 '재능 있는 미스터 리플리'임.)  하지만 이런 재능은 지금까지 톰의 인생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재능이 톰의 인생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사건이 생긴다.

  친분 있는(혹은 그저 안면 정도나 있는) 피아노 연주자가 다쳐서 톰이 대신 상류층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 파티에 참석한 유명한 선박업체 소유주의 눈에 띄게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선박업체 소유주가 톰을 자기 아들 '디키 그린리프(주드 로)' 의 대학 동창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골칫덩이 아들에게 질린 이 대부호는 처음 만난 톰에게 좋은 인상을 받는다.  건방진 아들과는 달리 톰은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고 있고, 역시 여자 관계가 난잡한 아들과는 달리 톰은 여자친구와도 예쁘고 건실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사실은 톰의 여자 친구가 아닌데, 이 부분도 디키 아버지가 제멋대로 착각한 것임. -.-;;)  그래서 디키의 아버지는 처음 보는 톰을 믿을만한 젊은이라 판단하고, 이탈리아에서 방종하게 지내고 있는 디키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재능 있는 미스터 리플리' 는 평소 자신의 처지로는 감히 꿈도 못 꿀 이탈리아 여행에 나서게 된다.

  톰에게 이 여행의 목적은, 대부호의 망나니 아들을 데려오기로 하고 받은 짭짤한 보수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루살이 같은 삶에서 나와 화려한 삶으로 뛰어들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톰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장차 무엇을 어떻게 하여 화려한 삶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 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다.  타인을 모방하는 천재적인 재능에, 엄청난 허영심에, 대단한 임기응변 기술까지 갖춘 이 청년은, 그저 갑자기 자기 눈 앞에 펼쳐진 무지개빛 다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화려한 다리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덮어놓고 그 다리 위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 빅픽처

 

  '폴(로맹 뒤리스)' 은 프랑스 파리의 잘 나가는 변호사인데,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사실은 '단란한 가정' 이 아니라 '단란해 보이는 가정' 일 뿐이다.

  폴은 자신이 아내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사진작가라는 꿈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아내의 꿈만은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가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직장을 그만 두는 것에 찬성했고, 아내가 벌던 몫까지 대신 벌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아내는 폴의 이기심과 위선 때문에 자신이 평범한 가정주부로 전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이 가정을 위해 무언가 희생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너무 싫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은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음을 눈치챈다.

  아내는 폴의 키스를 피하는가 하면, 친구를 만난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외출을 한다.  하지만 폴은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고 싶다.  그래서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분노를 애써 참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아내에게 좀 더 신경을 쓴다.  하지만 폴도 사람인지라 감정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고, 아내는 아내대로 이미 폴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나버렸고...  그렇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결국, 아내는 이혼하자는 쪽지만 남긴 채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린다.

 

 

리플리 VS. 빅픽처

 

  영화 '리플리' 에서 톰에게 벌어진 일에는 톰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일의 시작이 전부 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빌려입은 프린스턴 대학 재킷을 보고, 디키 아버지가 아들의 대학 동창이라고 착각한 것에서 일이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단순한 착각을 바로 잡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한 것은, 분명히 톰의 의지다.  그 재킷은 그저 빌려입은 것 뿐이라고 솔직히 말했으면, 그냥 끝났을 일이다.  하지만 이 허영심 넘치는 청년은 너무나도 태연스레 상대방의 착각에 부응(!)하는 대답을 하고, 상대방이 하는 제의를 덥썩 받아들인다.

 

  그에 비해, 영화 '빅픽처' 에서 폴에게 벌어진 일은 폴의 의지와 무관하다. 

  결혼생활을 지키기 위해 폴 부부 중에서 과연 누가 더 희생을 했는가, 그리고 폴이 가정을 지키려고 했던 노력의 방향이나 형태가 과연 적절했는가...  이런 문제는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이런 문제는 원래도 무척 애매모호해서 쉽게 판단하기 힘든 법인데, 영화상에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기기 더욱 곤란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외도를 저지른 것은 분명히 아내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쓴 사람은 폴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어했던 톰과는 달리, 폴은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지키고 싶어했다.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될 자, 타인에게 자신의 인생을 빼앗길 자

 

 

리플리

 

  이탈리아로 간 톰은, 완벽한 연기력과 상대방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재주를 제대로 보여준다.

  일단, 우연을 가장해서 디키와 디키의 여자친구 '마지(기네스 팰트로)' 에게 접근한다.  그렇게 다가서는데 성공한 후, 망나니이긴 하지만 눈치 빠른 디키에게 '적.당.한. 솔직함' 을 보여 의심을 누그러뜨리고,  '놀라운 재주' 와 '공통된 관심사' 로 디키의 감탄과 호의를 이끌어 낸다.  즉, 디키 아버지가 보내서 왔다고 일찌감치 털어 놓으면서, 디키 아버지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어 디키를 놀라게 하고, 미국에서부터 미리 달달 외워둔 디키가 푹 빠져있는 재즈 음악에 대한 지식을 풀어놓아 디키를 기쁘게 한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디키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거만하게 굴지만 일단 마음에 든 사람에게는 무척 잘 해준다.

  톰은 디키와 함께 하는 생활에 완전히 빠져든다.  이 때까지는 디키의 자리를 빼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자유분방학 화려하게 사는 디키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디키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자신 역시 그렇게 살고 있다고 느끼며 만족했다.

 

  하지만 디키는 사람에게 급속히 빠져드는 만큼 급속히 싫증을 내는 성격의 소유자다. (한 마디로 변덕이 심한 성격임!)

  시간이 흐르면서, 톰이 자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귀찮게 여기게 된다.  톰은 톰대로 이미 스스로와 동일시 하고 있는 디키에게, 마치 떠나려는 연인에게 매달리는 사람처럼 집착한다.  디키는 원래도 남의 감정이나 입장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닌데, 자신에게 매달리는 톰에게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끝내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방법, 즉 '옆에 그냥 두고 투명인간 취급하기' 를 쓴다.  이제는 톰에게 떠나라고 종용할 것도 없이,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같은 상류층 친구 '프레디' 에게만 신경을 쏟으며 톰을 완전히 무시한다. 

 

  결국, 톰과 디키 둘이서만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일이 벌어진다.

  일의 발단은, 그 동안 피차간에 쌓인 감정이 폭발하며 벌어진 말다툼이었다.  그런데 디키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모욕하는 말을 내뱉자, 톰이 분을 못 참고 노로 디키를 내려친다.  홧김에 내려친 것 뿐인데 그게 그만 살인으로 이어진다. 

 

 

◎ 빅픽처

 

  폴은 아내의 외도 상대인 이웃집 사진작가 '그렉' 을 찾아간다.

  딱히 그렉에게 잘잘못을 따진다든지 싸우려든다든지 하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한 때는 무척 행복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태롭기는 할지언정 일말의 희망이 보였던 가정이었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상황이 급작스럽게 변해버린다.

  원인은 그렉의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태도다.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불륜을 인정한 것은 그렇다 치자.  어차피 서로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으며 또한 상대방이 자신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보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프랑스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렉이라는 사람이 원래 뻔뻔스러운 인간이어서 그런지...  어쨌거나 그렉은 남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주제에, 너무 당당하게 폴의 자존심을 잔뜩 긁으며 도발한다.

 

  두 남자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고, 그 싸움은 폴이 전혀 예상치 못 한 결과를 불러온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건만, 그렉이 마당에 쓰러지면서 하필이면 폴이 싸움을 시작하며 깨부수었던 맥주병에 목을 찔린 것이다.  그렉은 어떻게 손 쓸 사이도 없이 죽어버린다.  변호사 폴은, 이제 자신이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리플리 VS. 빅픽처

 

  두 사람 모두 살인의 대상에 대해, 살인의 동기가 될만한 부정적 감정을 품고 있다.

  톰은 자신의 열렬한 충성 내지는 사랑에도 불구하고(비록 잘못된 방식의 충성 또는 사랑이지만, 어쨌거나 본인은 그게 상대에 대한 진실한 감정이라고 믿고 있음.) 디키가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것에 대해,  좌절감과 함께 애증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폴은 폴대로, 그렉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고 가정을 깨뜨린 것에 증오심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또 그 일 아니더라도 자신이 포기해야 했던 꿈(즉, 사진작가가 되는 꿈)을 이루고 거들먹거리는 그렉에게 처음부터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살인은 모두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도발로 인한 우발적인 사건이다. 

  톰이나 폴이나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소 소극적이고 얌전한 성격이라 평소 같으면 살인은 감히 상상도 못 한다.  그런 톰과 폴을 살인으로 이끈 것은, 듣는 사람 기분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채 듣는 사람의 인격을 통째로 부정하는 말을 내뱉은 디키와 그렉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혓바닥 간수 제대로 못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할 수도 있다는 사실임.  모두 말조심 하며 삽시다...! -.-;;)

 

 

 

새로 살게 된 인생 - 행복과 불안이 뒤섞이다.

 

 

리플리

 

  남의 필체를 그대로 모방해내는 재주 덕분에, 톰에게 살 길이 생긴다.

  톰은 디키의 서명을 위조해 편지를 써서, 마치 디키가 혼자서 훌쩍 떠난 것처럼 꾸민다.  다행이라기에는 좀 그렇지만, 평소 디키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살았던 것이 톰의 음모에 도움이 된다.  디키의 연인 마지조차 디키가 자기를 버려두고 떠난 것을 슬퍼할 뿐, 디키가 제멋대로 떠났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톰은 디키의 짐을 가져다 준다는 핑계로 로마로 간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이 없는 로마에서 디키의 이름으로 호화로운 호텔에 투숙하고 고급 상점에서 쇼핑을 하며, 마치 처음부터 디키로 태어나 살았던 것처럼 디키의 삶을 만끽한다.  게다가 처음 디키를 찾아 이탈리아로 올 때 유람선에서 우연히 알게된 상류층 아가씨 '메레디스(케이트 블란쳇)' 와 재회한 것은, 이 멋진 삶을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 준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흐르는 돈, 노동에 얽매일 필요없이 그저 마음 내키는대로 즐기면 되는 시간, 자신에게 반한 매력적인 상류층 아가씨...  사실, 이쯤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두 번 정도는 꿈꾸는 삶이 아닐까...

 

  하지만 이 멋진 삶은, 애초에 거짓이라는 모래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은 성 같은 것이다.

  상류사회라는 것이 원래도 좁은 바닥인데, 자기 나라도 아니고 이탈리아에 나와 있는 미국의 상류층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러니 이탈리아의 미국인 상류사회는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로 엮여있을 수 밖에 없다.  메레디스의 입에서 그 얄미운 프레디의 이름이 나오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러더니 우연히 마지와 재회하게 되고, 이 영화에 등장한 모든 미국 상류층 젊은이와 친분이 있는  '피터' 까지 알게 된다.

  톰은 새로운 삶을 위해 일부러 무연고지인 로마로 왔다.  그런데 이제는 디키와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는 사람들이 모조리 로마로 몰려드는 형국이다...! 

 

  이제 행복한 시간은 멈췄고, 톰은 모든 사람을 속여야 하는 불안한 연극을 다시 펼쳐야 한다.

  마지의 경우는, 그 대단한 임기응변 재주로 그럭저럭 속여넘기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프레디의 경우는, 톰이 디키의 이름으로 세낸 집에 갑자기 찾아 온데다가, 마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톰에게 비우호적이라서, 속이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  결국, 프레디에게 꼬투리를 잡히자 프레디까지 죽이게 된다...! 

  로마는 대도시라 시체를 유기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탓일까?  디키의 시체와 다르게 프레디의 시체는 금세 발견된다.  그래서 이제 톰은 '디키의 이름' 으로 프레디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  톰은 꼬일대로 꼬인 이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죽여놓고 살아있는 것처럼 꾸몄던 디키를 다시 죽은 것으로 처리한다.

 

  모두들 톰의 의도대로, 디키가 얼떨결에 친구 프레디를 죽이고 그 죄책감에 자살했다고 믿게 된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여지껏 톰을 믿었던 마지가 톰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인상이 한 번 굳어지면, 그 사람의 똑같은 면을 봐도 각자가 품은 인상에 따라 달리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톰을 싫어하는 프레디는 톰에게서 곧 수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톰을 좋은 사람이라 여기는 마지, 메레디스, 피터, 디키의 아버지는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 했다. 

  하지만 이제 마지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마지가 톰에게 퍼부은대로, 톰 혼자만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리니까...  디키와 프레디는 차례로 목숨을 읽었는데, 톰만 무사하다.  더구나 처음 디키와 마지 앞에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근사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더구나 톰이 갖고 있던 디키의 반지를 마지가 우연히 찾아내면서, 톰은 벼랑 끝으로 몰린다.

 

 

◎ 빅픽처

 

  폴은 어쩌면 자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란벅적하게 경찰과 기자들이 몰려오고 자기 아이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자신이 연행되는 꿈을 꾸고나니, 도무지 자수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들을 살인자의 자식으로 자라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은폐하기로 한다.

  그렉의 명의로 자신의 사진이 붙은 여권을 발급받고, 그렉의 부재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아내에게는 그렉이 헝가리로 떠난 것처럼 이메일을 써서 보낸다.  그리고 그렉의 시체와 함께 자신의 존재도 '공식적' 으로 없애버린다.

 

  그런데 새옹지마란 말처럼, 인생이란 참 얄궂고 길흉을 점치기 힘들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변호사로 살 때에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일 때문에 많이 허전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토록 싫어했던 그렉의 삶을 살게 되면서, 오히려 그 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꿈을 다시 키우게 된다.  어차피 그렉의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데 마침 그렉의 직업이 사진작가이고, 가족도 직업도 다 잃은 마당에 남은 것이라고는 사진에 관한 열정 밖에 없다.  그래서 은신처로 삼은 헝가리의 항구마을에서 사진에 몰두하며 지내게 된다.

  그런데 폴이 찍은 사진이, 신문과 전시회장 관계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끌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좋은 일 같은데...  폴은 타인의 신분으로 사는 처지라 세상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눈에 띄면 안 된다.  그런 폴이 너무 유명해져서 언론에까지 얼굴이 알려질 상황에 처한다.  불행이 행복으로 변하나 싶더니, 다시 불행이 된 것이다.

 

 

리플리 VS. 빅픽처

 

  범죄은폐와 신분세탁을 하는데 있어서, 톰이 폴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다.

 

  톰은 상대적으로 경찰 수사망을 따돌리기 용이한 1950년대 또는 1960년대에서 살고 있다.

  디키가 50년대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니, 리플리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또는 1960년대다.  여권에 사진을 손으로 붙이고, 휴대폰이니 인터넷이니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범죄수사를 하는 데 있어서 DNA 검사법 같은 것도 아직 없던 시절이다.  톰처럼 머리 회전 빠르고 실생활에서 거짓말을 자연스레 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살인죄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인생 사는 게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폴의 경우는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기에 지금까지 뿐 아니라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다.

  구글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렉의 이름을 치자, 그 동안 그렉이 발표했던 사진들이 주르륵 뜬다.  그나마 그렉이 성공한 사진작가가 아니었으니 그 정도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가 인터넷으로 묶여 있고, 각국의 정보기관과 다국적 기업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다 수집하는 세상이다.  당장이야 경찰의 눈을 속이는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런지 아무도 모른다.    

 

 

 

반전, 그리고 마지막

 

 

리플리

 

  결국 들켰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톰은 기적처럼 회생할 뿐 아니라 디키의 재산 일부를 상속받기까지 한다...!

  영화 밖 관객들이야 마지의 의심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누구도 마지의 의심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마지의 의심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근거나 물증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직감이니 본능이니 하는 것을 바탕으로 할 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마지가 사랑하는 남자를 갑작스레 잃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생사람 잡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어떤 사람의 과거로 현재의 그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통념과, 체면을 중요시 하는 상류층 사람들의 속성도, 톰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디키 아버지가 고용한 탐정은, 톰이 사실은 프린스턴 대학 졸업생이 아니라 피아노 조율사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디키란 인물이 평소에 워낙 막 살았기 때문에, 디키 아버지나 탐정이나 '디키라면 술기운에 친구를 죽이고 자살하는 짓을 벌이고도 남는다.' 식의 생각을 품고 있다. -.-;; (그래서 평소 행동거지에 신경써야 하는 것임!)  애초에 디키가 범인일 거라고 생각하며 사건을 대했으니,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오히려 디키 아버지는, 디키의 아이를 임신한 채 자살한 이탈리아 여자에 대해, 톰이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을 고마워 하는 판국이다.  그리고 어차피 디키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면, 언론에서 살인사건 뿐 아니라 그 이탈리아 여자의 자살사건까지 알아내어 보도하는 일이 없도록, 서둘러 일을 끝맺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톰이 모든 것이 원만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안심한 순간,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홀가분함에, 톰은 피터와 같이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혼자 갑판에 나왔다가 공교롭게도 친척들과 함께 그 배에 탄 메레디스와 마주치게 된다.  이미 디키는 공식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처리되었건만, 그 사실을 모른 채 톰을 디키라 생각하며 여전히 깊은 관심을 보이는 메레디스...  그대로 두면 메레디스 일행을 통해 디키가 살아있다고 소문이 날테고, 그렇다면 경찰 수사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메레디스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메레디스의 친척들까지 떼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메레디스에게 혼자냐고 물어봤다가 메레디스의 친척들을 발견했을 때, 톰의 눈에 스치는 실망스럽고 낭패한 눈빛이라니...!

 

  그렇잖아도 태연을 가장한 얼굴 밑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 쥐어짜고 있을 톰에게, 메레디스가 다시 한 번 충격을 안긴다.

  메레디스의 친척 중 한 사람이 조금 전에 톰과 피터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한 배에 타고 있는 소수의 미국인에, 서로 친분도 있는 사이라니...!  메레디스 일행과 피터가 인사를 나누겠다며 만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렇게 되면 메레디스 일행이 '디키' 라고 부르는 사람이, 피터가 '톰' 이라 부르는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제는 메레디스 일행을 통해 디키를 사칭하는 인물이 있다는 소문이 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한다!  그리고...  머릿수 많은 쪽보다는 혼자인 쪽을 해치우는 게 손쉬운 법이다.

 

  영화에 나온 다른 상류층 젊은 남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톰에게 따뜻하고 친절했던 피터...

  그런 피터가 톰의 손에 죽는다.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톰의 손에 죽는다.  죽기 직전까지도 톰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 채 죽는다.  톰의 장점을 하나씩 말하면서 죽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톰의 모습을 비쳐주던 영화 도입부와 연결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처음 저지른 죄를 덮기 위해 끊임없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톰의 운명을 암시한다.  영화는 그렇게 톰의 저주받은 앞날을 슬쩍 보여주며 끝난다.   

 

 

◎ 빅픽처

 

  폴은 꿈을 이루고 재능을 인정 받았기에, 오히려 겨우 찾은 안정과 작은 행복을 잃고 떠나게 된다.

  볼리비아였나 에콰도르였나, 하여튼 남미의 어떤 나라로 가는 배에 오른다.  그리고 자기 선실의 좁은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눈물을 흘린다.  헝가리의 그 평화로운 항구마을에서 이루었던 새로운 삶을 잃게 되어 슬퍼하는 건지, 아니면 평생 이렇게 떠돌며 살아야 한다는 예감에 슬퍼하는 건지...

 

  그런데 뜻밖의 사건에 휘말린다.

  선원들이 밀항자들을 집단폭행하며 밤바다로 내던지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선원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영화만 봐서는 알 수 없음.)  폴은 사진작가의 본능으로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선원들에게 들켜 쫓기게 된다.  결국 폴도 어두운 바다로 내던져지고, 그 와중에도 밀항자 한 명을 구조해서 구명보트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 구명보트가 등장하는 장면이 참 뜬금없다.  한 선원이 다른 선원들을 말리다가 구명보트 쪽으로 다가서는 장면이 있기는 했는데, 그 때 구명보트를 던져준 것일까?  워낙 애매하고 빠르게 처리된 장면이라 확신을 못 하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망망대해 한복판에 갑자기 구명보트가 등장한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서울의 한강에 갑자기 상어나 고래가 등장한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되지 않는가... -.-;;)

 

  마지막 장면도 모호하게 처리되기는 마찬가지다. (끝으로 갈수록 더욱 불친절해지는 영화... -.-;;)

  나는 결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범죄현장을 찍은 그 필름을, 폴이 자기가 구해낸 밀항자에게 아무 조건 없이 넘겨준 것이라고...  신문사 측에서 엄청난 특종이 될 그 사진을 고가로 매입하기로 한 후, 그 밀항자가 몰려든 취재진 사이로 보이는 폴을 보며 미소 짓는다.  그것은 목숨을 구해줬을 뿐 아니라 밀항한 처지라 살길도 막막한데 돈까지 마련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리라.

  어차피 폴은 계속해서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 사진으로 다시 유명해지는 것은, 폴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이제 대서양을 넘어 다른 대륙으로까지 피해온 마당에, 먼저번 헝가리에서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 밀항자가 특종사진을 찍은 것으로 해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결말 부분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사진을 자신이 찍었다는 것은 안 밝히더라도, 그 밀항자의 명의로 사진값을 받아낸 후 폴이 그 돈을 건네받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 밀항자도 설마 생명의 은인에게 돈까지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같은 의견 말이다.

  하지만 결말의 따스한 분위기를 보았을 때, 폴은 새로운 땅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삶' (신체적 자유 뿐 아니라, 영혼의 자유까지 얻은 새로운 삶)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돈은 새 삶을 위한 최소한의 대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사람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그 사람의 인생을 탈취한 대신,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고 그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준다.' 라고 이해하는 게 맞지 싶다.

 

 

리플리 VS. 빅픽처

 

  이 두 영화는, 자신이 죽인 자의 이름으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기본 설정은 같지만, 차이점도 많다.

 

  일단, 리플리가 빅픽처에 비해 전체적으로 더 긴장감 있고, 전체 내용 속에 하위 에피소드를 더 많이 담고 있다.

  시나리오의 짜임새나 편집을 얼마나 매끄럽게 하는가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미국 영화와 프랑스 영화의 성향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리플리가 그저 아무 생각없이 한바탕 웃고 즐기면 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지만, 미국 영화라는 게 대체적으로 오락성 내지는 상업성이 강해서, 관객이 접근하기 쉬운 편이다.  그에 비해 프랑스 영화는 관객에게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대신 지루한 편이다. (최근에 '까밀 리와인드' 라는 프랑스 코미디 영화를 봤는데, 프랑스 영화는 코미디물조차 지루하고 심오한 면이 있는... ^^;;) 

 

  그리고 결말의 내용과 분위기도 다르다.

 

  리플리는 주인공이 끝없는 고통에 빠진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을 새드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행을 저지른 자가 후회와 고통을 겪는 것을 새드엔딩이라고 하는 것도 좀 우습지 않나...  ^^;;

  어쨌거나 리플리에서는, 주인공이 앞의 두 건의 살인 때와는 달리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아무래도 살인의 대상이, 순수하게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줬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앞서 저지른 범죄들을 숨기기 위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을 반복할 톰의 영혼은, 영원히 지옥을 헤매며 안식을 찾지 못 할 듯하다.   

 

  하지만 빅픽처는 열린결말이라고 해야 할 애매한 엔딩을 보여주는데, 일단은 위에 쓴대로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하긴, 폴은 톰에 비교했을 때 살인행위에 대한 비난을 덜 받을만한 입장이기는 하다.  톰은 자신을 밀어내는 상대에게 집착하다가 살인을 저질렀고, 피해자를 사칭하며 피해자의 재산으로 안락한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폴은 아내의 불륜 상대를 죽였고, 피해자의 죽음으로 어떤 이득을 취하려 한 적이 없다.  만일 법에 의한 재판이 아닌 여론에 의한 재판이라면, 폴은 정상참작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보면, 바람 피운 것들은 죄다 능지처참 해야 한다는 식의 댓글이 넘쳐남. -.-;;)

  게다가 톰이 최초의 살인을 감추기 위해 그 후로도 계속 살인을 저지른데 비해, 폴은 그 후로는 별다른 죄를 짓지 않았고 오히려 타인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다. 

 

 

 

정리하며...

 

 

  리플리를 10년 전쯤에 처음 봤던 것 같은데, 그 때는 톰이 하는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살인을 은폐하고 정체를 숨기며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마땅히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나라면, 차라리 디키의 재산을 한몫 뜯어낸 후(영악한 톰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디키의 돈을 합법적으로 양도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 수많은 서민 중 하나로 묻혀 살 것이다.  그 돈으로, 디키를 만나기 전보다 조금 더 넉넉한 생활을 누리는 정도에 만족하며 말이다.  비록 영화 속 톰처럼 호화로운 생활은 못 누리더라도, 어쨌거나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테니,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살인을 들킬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다. (무조건 안전제일...! ^^)

  따지고 보면, 톰이 몇 번이나 들킬 뻔했던 것은 상류층의 삶을 즐기느라 디키의 흉내를 내며 돌아다닌 탓이다.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은 이런저런 연줄로 얽혀 있고 행동반경도 겹친다.  그러니 상류층의 삶을 버리지 않는 이상, 디키를 아는 사람과 마주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 빅픽처를 보고서 리플리를 다시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개구리와 전갈에 대한 우화(전설이던가? ^^;;)가 있다.

  전갈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헤엄을 칠 줄 몰라서, 개구리에게 자신을 업고 강을 건너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개구리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  전갈을 등에 업었다가 전갈의 독침에 당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갈은 "나는 헤엄을 못 친다.  그러니 강을 건너다가 너를 독침으로 쏘아 죽인다면, 나 또한 강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독침으로 쏘겠느냐?" 라고 했다.  개구리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갈을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 한복판에서 전갈이 개구리를 독침으로 쏘았다.  기가 막힌 개구리가 죽어가면서 따졌다.  "왜 나를 쏜거냐? 이제 나도 너도 다 죽게 되었다."  그러자 전갈이 대답했다.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독침으로 쏘는 게 내 천성이니까."

 

  경찰의 수사망을 몇 번이나 피할 정도로 영악한 톰과,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폴이, 내가 아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들도 남의 눈에 띄는 짓을 자제해야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톰은 재벌 2세 행세하며 느끼는 희열을 포기할 수 없었고, 폴은 아름다운 사진을 찍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들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 했다.

  왜냐?  그게 바로 두 사람의 천성이니까!  화려한 삶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그걸 외면하고 평범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톰이 아니다.  또한 뒤늦게 사진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사진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폴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