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 - 거인이 보여주는 공포감의 근원과 극단

Lesley 2013. 7. 4. 00:01

 

  요즘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 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정체불명의 거인들 때문에 위기에 처한 인간들이 투쟁하는 내용이라기에, 그 동안 SF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수도 없이 다룬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는 지구인들의 투쟁' 의 새로운 버전 정도로 생각하고 봤다.  그런데 이건 다른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너무 다르다!  '은하철도 999' 이후로, 이렇게 임팩트 강한 애니메이션은 처음이다...!

 

※ 이 포스트는, 진격의 거인을 12회까지 본 후에 쓴 것임.  그래서 13회 이후의 내용과는 안 맞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음.

 

 

제목부터 색다름.  '진격하는 거인' 도 아니고 '거인에게 진격하다' 도 아니고, '진.격.의. 거.인.'...!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삼천포로 빠져, 이 애니메이션이 나에게 준 임팩트가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진격의 거인' 을 분양받은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컴퓨터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다.

  그 동안 이런저런 일로 볼 기회가 없기도 했고,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모르다 보니 '요즘 큰 인기를 끈다니, 괜찮은 애니메이션인가 보네.' 정도로만 생각해서 반드시 봐야겠다고 마음 먹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이상하게 잠이 안 오던 6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 잠은 안 오는데 피곤해서 눕고는 싶고, 그래서 진격의 거인 1~5회를 스마트폰에 넣고는 캄캄한 방에서 누워서 봤다.  5회분을 스마트폰에 넣었다고 해서, 5회분을 전부 그 밤에 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한 회당 분량이 워낙 짧아서 5회분을 한꺼번에 넣었을 뿐, 1회를 보다 보면 잠이 오겠거니 했다. (한 마디로, 이 애니메이션을 수면제 대용으로 썼다는... -.-;;)

 

  1회 앞부분은 그냥 그런 편이었는데, 중간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어 버린다.

  특히나 100년만에 거인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는 장면은, 작화도 연출도 배경음악도, 하여튼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끔찍한 악몽이 막 시작되었는데, 화면은 안개가 살짝 낀 것처럼 흐릿해서(일명 '뽀샤시 효과')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  성벽을 움켜 쥔 거인의 붉은 손 앞으로 기러기 두 마리가 한가로이 날아가는 모습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목가적이다.  폭풍 직전의 고요처럼, 애니메이션 속 모든 소리가 멈춘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거인은 인정사정 없이 성벽을 때려부수고, 사람들은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고, 미친 듯이 쿵쿵 거리는 음악이 긴장감을 있는대로 끌어올린다. 

  그 후로 벌어진 상황은, 보는 내가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박감과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엄마가 거인에게 잡아 먹히고, 그것을 목격한 주인공이 절규하는 장면이야 더 말 할 것도 없고... (이 애니메이션은 15세 이상가임.  그러나 비록 성인이라도, 임산부 또는 심약한 이에게는 보지 말라고 권하겠음.)

 

  어느 새, 나도 모르게 4회까지 연달아 보고서 5회도 마저 보려는데, 스마트폰 배터리가 겨우 6% 남았다. (우째 이런 일이...! ㅠ.ㅠ)

  하마터면 스마트폰을 캄캄한 방 구석으로 내던질뻔 했는데, 아직 약정기간이 10개월이나 남았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

 

 

(위) 100년간의 불안했던 평화는, 거대한 붉은 손이 성벽 위를 움켜지는 그 순간 깨져버리고...

(아래 왼쪽) 아무리 거인이 크다고 해도, 50미터나 되는 성벽보다 더 큰 거인이 나타날 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 했음.

(아래 오른쪽) 뭉게구름 아래로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과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붉은 거인의 모습. 

 

 

  '진격의 거인' 이 큰 화제가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위기 속에서 아직 어린 병사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동료애라든지, 잔인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어린 주인공들의 온갖 심적 갈등이라든지, 인류 멸망의 위기 속에서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라든지, 병사들이 전투씬에서 보여주는 화려하고 빠른 몸놀림이라든지, 상당한 수준의 작화와 화려한 연출과 비장미 넘치는 OST 라든지...  거기에 거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와,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줌과 동시에 바깥세계로 나가지 못 하게 막는 존재이기도 한 성벽에 대한, 온갖 궁금증까지...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이 인상적인 가장 큰 이유는, 거인이란 존재를 통해 '공포' 라는 감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위에도 썼지만, 나는 이 거인이란 존재를, 기존의 영화 등에 나온 외계인의 다른 버전 정도로 생각했다.  즉, 다른 SF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재탕에 삼탕에 몇 번씩이나 우려낸, '지구 정복을 꿈꾸며 지구인을 공격하는 사악한 외계인' 을, 겉모습만 커다랗게 바꿔놓고 거인이라 이름 붙였다 생각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런 '뻔한 적' 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인의 진격' 은 그런 거인과 그 거인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을 통해서, '인간이 갖는 공포감의 근원' 과 '그 공포감이 극대화 되는 상황' 을 너무나 생생히 묘사한다. 

 

 

  공포감의 근원은 무지(無知) 내지는 미지(未知) 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 했던 시절, 우리 인간이 두려워 하는 것은 참으로 많았다.  천재지변이나 전염병 같은 것을 하늘의 노여움 또는 신의 저주로 생각하고, 제사나 기도 등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시각공해가 문제가 되는 현대의 밤과는 달리, 옛날에는 밤이라는 시간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분명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밤에 생기는 현상들을, 그 때는 귀신이나 도깨비의 짓으로 여기며 두려워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무언가에 맞닥뜨렸을 때,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고, 그에 대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 속 인간들은, 자신들의 천적인 거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들이 100년 전 쯤에 갑자기 나타나 인간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나 알 뿐, 그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어째서 인간을 공격하는지는 알지 못 한다.  그들의 생태에 대해서도, 그 동안 수천 명의 조사병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알아온 단편적인 지식이나 좀 갖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거인조차 넘어서지 못 할 정도의 높은 성벽 안에서 스스로를 가둔 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안정하게 이어지던 평화조차(이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곡의 가사에 의하면 이런 아슬아슬한 평화는 '거짓 평화' 고, 그런 거짓 평화에 안주하는 자는 '돼지' 임.), 보통 거인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한 거인들이 등장하며 산산히 부서져 버린다.

 

  그나마 초반부에서는 '왜 거인이 인간을 공격하는가' 에 대한 답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름 아닌, '거인은 인간을 먹고 사니까'...!  하지만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그 답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진다.  주인공들이 훈련병 시절 받았던 이론수업 장면을 보면, 거인이 반드시 인간을 먹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나온다.  인간이 성벽 안에서 숨어 산 100년의 세월 동안, 인간 이외의 생물을 잡아먹는 일이 없는 거인들이 줄줄이 굶어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거인들이 생존을 위해 인간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배우면서 훈련병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으로 봐서는,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내가 '진격의 거인' 속 인간세계의 지배계층이라도, 이런 사실을 일반인들에게 일부러 알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잖아도 거인들의 정체도 모르고, 거인을 물리칠만한 마땅한 방법도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짓눌려 있다.  그런데 그 거인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이유가,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는 식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전 인류를 공황에 의한 집단자살로 몰아넣을만한 어마어마한 공포다.  그냥이라니...  그렇다면 설마, 거인들은 그저 재미 삼아서 인간을 잡아먹는다는건가?  명색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인데, 거인들에게는 그저 말린 오징어마냥 심심풀이 삼아 씹어먹을 존재 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내용은 둘째치고라도 이런 화려한 작화와 연출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함. (모두 오프닝 중의 장면임.)

 

 

  그리고 이 거인들이 미지의 존재라는 점 말고도, 인간의 공포감을 극대화 시키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인간들 입장에서 최선책은, 거인들을 무찔러서 위협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거인의 힘이 월등한데다가 거인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으니,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 최선책이라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계획이다.

  그렇다면, 이 최선책은 일단 접어두고서 차선책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 차선책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일반적인 적' 과 맞서는 상황이라면, 차선책을 생각할 수도 있다.  가령, 적이 원하는 것(그게 재물이든 영토든 간에...)을 적당히 내어주는 식으로 타협을 한다든지...  혹은, 적이 너무 강해서 타협의 여지조차 없다면, 비록 굴욕적이지만 일단은 항복을 하고서 훗날을 기약한다든지...

  그런데 거인이 인간 세계를 공격하는 이유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함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도 아니다.  거인의 목적은 그냥 인간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복을 할 수도 없다.  거인에게 항복하는 것은, 그저 재물을 빼앗겨 굶주림에 고생하거나 그들의 노예가 되는 치욕을 겪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의 멸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거인과 맞붙어 싸우자니, 희생자만 늘어날 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자니, 모든 인간이 그대로 거인의 밥이 될 판국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래서 거인들이 습격할 때, 연료 보관소를 지키던 병사가 자살해버린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수십, 수백 명의 병사가 함께 달려들어도 거인을 물리칠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 그나마 상급자란 사람은 대부분의 병사를 이끌고 높으신 분들을 지켜야 한다며 떠나 버린다.  10명도 안 되는 병사들만 연료 보관소에 남게 된 것은, 말이 좋아 수비 임무를 맡은거지, 사실상 함락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소모품' 노릇이나 하라며 버림받은 것과 같다.

  모두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데, 한 병사만 태연하다 못 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표정으로 총에 화약과 탄환을 넣는다.  옆의 다른 병사가 어처구니 없어 하며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냐?" 고 소리친다.  거인들은 대포를 맞아 얼굴이나 손발이 잘려나가도 몇 분 후면 다시 그 부분을 만들어낼 정도로 무서운 재생력을 갖고 있다.  대포도 소용 없는데 소총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렇잖아도 겁에 질려 잔뜩 신경이 곤두선 동료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병사는 그 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 버린다.  그 병사가 동료들과 달리 태연했던 것은, 이미 모든 것을 깨끗이 포기한 탓이었다.  거인의 입 안에서 자기 몸이 씹히는 것을 느끼며 끔찍하게 죽느니, 차라리 고통 없이 한 번에 죽는 쪽을 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격의 거인' 은 공포물보다 더 공포스런 작품이다.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공포가 너무 생생하게 묘사된다.

 

 

(위) 어린 병사들이 전우들의 시체를 딛고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임.

(아래) 햇빛을 등 뒤로 받으며 성벽 아래 거인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이 어린 병사들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함.

(모두 오프닝 중의 장면임.)

 

 

  이제 12회까지 전개된 이 드라마에 대해 좀 걱정스런 마음이 든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애니메이션이 24회 또는 25회짜리로 편성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절반 정도 지났다는 뜻으니, 앞으로는 거인의 정체에 대해 뭔가 차츰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이 다른 애니메이션과 차별화 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 라는 점이다.  거인에 대한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면, 그 공포감도 자연스레 줄어들면서 내용이 느슨해질 수 있다.  물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에 따라서, 비밀이 차츰 밝혀지는 것이 오히려 긴박감을 더해줄 수도 있긴 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각 회차의 앞부분을 지난 회차 줄거리로 3~4분씩 때우고 있다.

  덕분에, 그렇잖아도 한 회차당 시간이 오프닝과 엔딩 빼면 20분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이제는 17분이나 되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사전제작된 것이 아니라 지금 제작하면서 동시에 방영 중인데, 진도빼기에 급급한 상황에 빠졌단다. -.-;;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멀쩡하던 드라마도 중반부터는 생방송식으로 정신없이 찍어나가다가, 나중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종영해버리는 것이, 바로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 아니던가...! ㅠ.ㅠ

  이러다가, 한국 드라마처럼 이 애니메이션도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다.  모처럼 괜찮게 본 애니메이션인데, 부디 마지막까지 질을 잘 유지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