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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 '비포 시리즈'의 완결판?

Lesley 2013. 7. 18. 00:01

 

 

(왼쪽) 1995년 오스트리아 빈, 20대의 대학생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특별한 하룻밤을 보낸다.

(가운데) 2004년 프랑스 파리, 30대의 사회인이 된 두 사람은 엇갈린 인연에 대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 한 채 재회한다.

(오른쪽) 2013년 그리스의 어떤 휴양지, 40대가 된 두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6월에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을 봤다.

 

  이 영화는 1995년도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의 두 번째 후속편이다.

  비포 선라이즈가 처음 개봉했을 때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가 나중에 대학에 가서 비디오방에서 봤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괜찮았다.  하지만 후속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보통 후속편이 나오는 영화는 액션물, SF물, 공포물 등 뭔가 치고 받고 때려부수는 장르인데, 비포 선라이즈는 그런 화끈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긴, 이 시리즈의 감독인 리차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 스스로도, 비포 선라이즈를 만들 때만 해도 후속편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니... ^^  그런데 9년이나 지난 2004년에 '비포 선셋(Before Sunset)' 이라는 첫 번째 후속편이 나오더니, 또 다시 9년이 지난 올해 두 번째 후속편인 비포 미드나잇이 나온 것이다.

 

  즉,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비포 선라이즈(1995년)  2. 비포 선셋(2004년)  3. 비포 미드나잇(2013년) 

  에단 호크(Ethan Hawke)줄리 델피(Julie Delpy)가 함께 하는 모습을 무려 18년이나 보게 될 줄, 어떤 관객이 예상했을까? 

 

  첫 번째 편인 비포 선라이즈에서 세 번째 편인 비포 선셋까지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봤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16년이 지났는데, 그 16년 동안 나도 변했고 영화 속 두 주인공도 변했다.  개봉연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공교롭게도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한 걸음씩 떨어진 채 그들과 함께 세월의 흐름 속을 걸었다.  주인공들은 이 시리즈에서 20대와 30대를 거쳐 이제 40대가 되었고, 나는10대와 20대를 거쳐 마침내 30대가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변화를 보면서, 그들에 대한 나의 생각과 느낌에도 변화를 일으키면서 말이다.

 

  이 포스트를 쓰게 된 계기는 분명 '비포 미드나잇' 이지만, '비포 미드나잇' 이 '비포 선라이즈' 및 '비포 선셋' 의 후속편이기에, 세 편의 영화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다음넷 영화 메뉴에 남긴 한줄평을 보면, 시리즈를 모두 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평이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비포 선라이즈' 와 '비포 선셋' 을 봤던 이들은 대부분 호평과 함께 9점이나 만점인 10점을 줬다.  하지만 이 영화만 달랑 본 이들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라든지 '이게 도대체 영화냐 다큐멘터리냐?' 라든지 '10점 준 인간들은 전부 돈 받고 댓글 알바하는 것들이냐?' 식의 반응을 보이며 0점 아니면 1점을 줬다. ^^;; 

 

  그래서 여기에서는 '비포 미드나잇'  뿐만 아니라, 내 마음대로 '비포(Before) 시리즈' 라고 이름 붙인 이 연작을 뭉뚱그려 포스팅 해볼까 한다. 

 

 

 

 

1.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왼쪽) 셀린느가 입은 원피스는 보통의 원피스와는 다르게 속에 다른 상의를 받쳐 입는 스타일인데, 1990년대 중.후반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많이 유행했던 스타일임. ^^

(오른쪽 위) 제시는, 비록 머리는 며칠이나 안 감아 떡이 졌고 수염도 지저분하게 길렀지만(두 사람이 전화놀이 할 때 셀린느가 묘사한 제시의 모습 ^^), 싱그러움와 순수함이 넘쳤음.

(오른쪽 아래) 셀린느는 제시에 비해서 좀 더 논리적이고 똑부러지는 느낌인데, 손금점이나 죽은 자의 환영을 믿는 의외의 면도 보여줌.

 

 

  처음 본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볼 때만 해도 후속편이 나올 줄 몰랐으니, 그저 영화가 보여주는 것 그대로를 즐겼다.

  미국 남자 대학생과 프랑스 여자 대학생이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 거리를 저녁부터 다음날 해 뜰 때까지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온갖 소재로 유쾌한 대화를 이어간다.  어린 시절의 경험에, 전에 사귀었던 연인에 관한 사연에, 남녀평등 문제에, 점이니 예언이니 하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을까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재의 이야기가 다 나온다.  그만큼,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은 잘 통한다.  그래서 겨우 하룻밤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몇 년은 사귄 친구만큼이나 깊은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유명한 음악가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오스트리아 빈의 모습도 눈여겨 봤다.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상당한 사치였다.  나의 대학시절은, 외환위기로 화려하게(!) 펼쳐졌던 그 무서운 IMF 시대와 겹쳤으니 말이다. ㅠ.ㅠ  덕분에, 미국 남학생과 프랑스 여학생이 오스트리아에서 만나 낭만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사연은, '쟤들은 해외여행 마음껏 할 수 있어 정말 좋겠구나' 하는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 다시 본 비포 선라이즈

 

  하지만 몇 년 전에 후속편 '비포 선셋' 을 본 후 다시 비포 선라이즈를 보니, 주인공들의 대화나 행동에서 느껴지는 20대 젊은이 특유의 발랄함과 정열의 기운에 방점을 찍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서로 전화번호도 주소도 교환하지 않은 채, 더구나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닌데, 6개월 후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며 약속하는 것은 막연한 것을 넘어서 무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30대도 아니고 40대도 아닌 20대 젊은이들이기에, 그런 식의 약속을 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다. 

 

 

  20대의 열정과 미숙함이 담긴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처음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라는 제목을, 그저 영화의 줄거리를 함축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알게 된 두 젊은이가 다음 날 해가 뜨기 전까지 낯선 도시에서 두 사람만의 여행을 한다는...  아마도 예정에 없었던 후속편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 생각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속편 '비포 선셋(Before Sunset)' 이 나온 후에 비포 선라이즈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비포 선라이즈 와 비포 선셋은 각각 20대와 30대를 상징하는 것 같다.

  사실, 나이 든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낯선 이와 단 둘이서 낯선 도시를 한밤중에 돌아다닌다는 것부터가 위험한 짓이고, 둘이 다시 만나겠다고 한 약속이라는 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결국 다음 편인 비포 선셋에서, 이들이 서로 엇갈려 9년 동안이나 못 만났음이 드러남. -.-;;)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한 이들이 20대의 젊은이들이기에, 위험하고 어리석다 비난하기 보다는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하다고 보아 줄 수 있는 것이다.

  해돋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망, 정열, 상승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가 돋을 때까지(Before Sunrise), 두 사람은 특별한 시간을 공유했다.  그리고 드디어 해가 다 돋았을 때 슬픈 이별이 아닌,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는 희망찬 이별을 나눴다.

 

 

 

 

2. 비포 선셋(Before Sunset)

 

 

(왼쪽) 각각 소설가와 환경운동가가 되어 9년만에 만난 제시와 셀린느.

(오른쪽 위)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과거에 특별한 교감을 나눈 셀린느를 기억하는 제시.

(오른쪽 아래) 불가피하게 제시와의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는 셀린느.

 

 

  ◎ 꿈같은 첫만남과 헤어짐 이후로 9년만에 재회한 두 사람

 

  제시는 셀린느와의 특별한 인연을 소재로 해서 자전적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이 성공을 하면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제시는 그 소설의 홍보활동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뜻밖에도 자신을 찾아온 셀린느와 만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설레임과 어색함이 뒤섞인 분위기가 감돈다.  두 사람 모두, 오스트리아 빈에서 느꼈던 짧지만 강렬했던 교감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깨져버린 약속과 9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주는 회한과 어색함 또한 느끼고 있다.

 

  두 사람은 제시가 비행기를 탈 저녁 때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다. (그래서 제목이 '비포 선셋' 임. ^^)

  9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온갖 소재로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하지만 9년 전에는 쉴새없이 꼬리를 잇는 대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즐겼던 데 비해서, 이번에는 뭔가 변죽만 울린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다가 셀린느 쪽에서 은근슬쩍 본론을 꺼낸다.  9년 전에 헤어질 때 했던 약속대로, 헤어지고 6개월 후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빈으로 다시 갔었느냐고 말이다.  제시는 안 갔다고 대답하고, 셀린느는 자신도 안 나갔다면서 혹시 제시가 나갔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9년 전의 순수한 면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제시의 어설픈 태도 때문에, 제시가 안 나갔다고 말한 것이 거짓임이 들통난다. ^^;;

 

 

  ◎ 과거의 엇갈림, 현재의 안타까움 

 

  제시는 셀린느와 헤어진 후에도 셀린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셀린느에게 느낀 감정이 여행 중의 해방감 때문에 겪는 일시적인 객기나 불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약속했던대로 6개월 후에 셀린느를 만나러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하지만 셀린느는 나타나지 않았고, 제시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셀린느 역시 약속장소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통에 갈 수 없었다.  만일 두 사람이 연락처라도 교환했더라면, 비록 약속은 지키지 못 하더라도 사정 설명을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역시, 인생은 타이밍!  인생은 예측불허!)

 

 

  ◎ 30대의 세상으로 나감과 세상에 길들여짐을 그려낸 '비포 선셋(Before Sunset)' 

 

  첫만남 때 20대였던 주인공들은 이제 30대가 되었다.

  비포 선라이즈는, 어리숙하지만 낭만과 열정으로 가득찬 20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 비해 비포 선셋은, 세상에서 자기 몫을 해내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대신 세상에 길들여져가는 30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둘 다 9년전보다 원숙해졌고 또 나름대로 괜찮은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셀린느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보람을 느끼는 환경운동에 투신 중이고, 제시는 소설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20대 때 품고 있던 열정과 낭만은 많이 사그라들어서, 세상에 좀 찌들고 지쳐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원래도 서양인들은 20대 초반만 지나도 급속한(!) 노화를 겪는 편인데, 두 배우 모두 9년 전보다 많이 마르고 주름이 두드러져 보여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  특히나, 아들을 위해서 별 애정을 못 느끼는 아내와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제시의 경우, 그런 느낌이 더 하다. 

 

  비포 선셋 속 주인공들의 현재 모습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지나 '황혼(Sunset)' 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인생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비포 선셋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비포 선라이즈 때의 대화만큼 낭만적인 느낌이나 활기찬 느낌은 없다.  하지만 청년기에서 중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30대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소재들이 나온다.

  과거 두 사람의 인연이 엇갈리며 두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그저 사랑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이루지 못 한 사랑은, 20대 시절에 간절하게 꿈꾸었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실에 부딪치다가 30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포기하게 된 많은 것들을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3.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왼쪽) 18년 전 그 잘생기고 낭만 넘치던 남학생은, 지금 이런 40대의 아저씨가 되었음.

(가운데) 수많은 커플과 마찬가지로, 역시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사랑하고 갈등하는 제시와 셀린느.

(오른쪽) 18년 전 그 예쁘고 당당하던 여학생은, 지금 이런 40대의 아줌마가 되었음.

 

 

  내 예상을 뒤집은 도입부, 하지만 역시나 실망을 주지 않는 전개

 

  '비포 선라이즈' 와 '비포 선셋' 모두 대단한 반전이나 엄청난 사건을 다룬 영화는 아니지만, 두 편 모두 멜로 영화 특유의 '뻔한 이야기' 에서 벗어나 있다.

  '비포 선라이즈' 는 훗날을 기약하는 희망찬 헤어짐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사랑의 결실' 또는 '슬픈 이별' 로 확실하게 결말이 나는 보통의 멜로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비포 선셋' 은 오랫동안 서로 못 잊었던 남녀가 재회를 하지만, 그 흔한 키스씬 한 번 없이 그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담담히 대화를 이어가며 간간히 과거에 놓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역시 다른 멜로 영화와 달랐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세 번째 영화 '비포 미드나잇' 에서 두 사람이 결국 이어졌을거라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저기 태평양 너머도 내던져버렸다.

  그건 멜로 영화의 너무나도 뻔한 전개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 독특한 시리즈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물론, 두 사람이 주인공이니 함께 있는 장면이 틀림없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비포 선라이즈에서처럼 우연히 마주치게 되거나, 또는 비포 선셋에서처럼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찾아가게 되는 식이겠거니 하고 추측했다.  그리고 앞의 두 편에서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자신들의 현재 생활과 과거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심도 있는 대화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영화 도입부에서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두 사람이 쌍둥이 딸까지 낳고서 9년째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내 머리 속에서는 BGM으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울려퍼졌음...!)

  알고 보니, 비포 선셋의 마지막 장면(셀린느의 집에서, 셀린느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고, 제시는 그런 셀린느를 보면서 미소짓는 장면) 후로, 제시가 결국 비행기를 놓쳤고(혹은 안 탄 것인지도... ^^;;)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 하룻밤의 일로 덜컥 쌍둥이가 생겨서, 결국 제시는 이혼하고 셀린느와 함께 9년을 산 것이다.

 

  그렇게 영화 초반부에서 사람을 좀 놀래켰지만, 역시나 비포 시리즈답게 실망을 주지는 않았다.

  비포 미드나잇은 우리나라의 일일드라마식 공식대로 흐르지 않는다.  즉, '낭만적인 첫만남을 가졌던 한 쌍의 남녀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졌다가, 9년만에 만나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후로 다시 9년 동안 아주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로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만나고 운명처럼 재회한 커플조차, 현실 속에서 크고 작은 온갖 문제에 직면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 40대 커플의 현실적인 모습과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을 담은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비포 선라이즈' 와 '비포 선셋' 이 20대와 30대의 모습을 담아냈듯이, '비포 미드나잇' 은 40대의 모습을 담아낸다.

 

  '비포 선라이즈' 나 '비포 센셋' 과는 달리, '비포 미드나잇' 에서는 초반부터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앞의 두 편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함께 살고 있으니, 현실 속 온갖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든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나, 연애와 결혼은 엄연히 다르다고... (물론 이 영화 속 커플은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사실상 결혼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

  이혼한 아내가 키우는 아들에 대해 제시가 느끼는 걱정과 죄책감이, 영화 내내 간헐적으로 나오는 다툼의 발단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두 사람이 겪고 있는 갈등의 표면상 원인일 뿐이다.  사실은, 다른 '맞벌이 커플'(이들은 결혼은 하지 않은 채 동거를 하는 중이라, '맞벌이 부부' 라고 할 수는 없음. ^^;;)처럼, 이 두 사람 사이에도 온갖 문제가 켜켜히 쌓여있다.  식사 준비, 화장실 청소,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 등의 일상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상대방의 경력 유지를 위해 자기 경력은 희생당하고 있다는 자존심 다툼에, 두 사람의 국적이 다르다 보니 거주지 문제까지 뒤엉켜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영화 내내 끊임없이 말다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18년 전에 빈의 밤거리를 거닐며 나누었던 그 교감은 여전히 살아있다.  수많은 다른 커플들이 그렇듯이, 이들도 일상 속 간단한 농담이나 자그마한 사건에 즐거워하고 행복을 느낀다.  다만, 지난 9년간 쌍둥이 딸을 키우느라 정신 없이 지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이 느긋하게 대화를 즐길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을 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엇이 중요한 지 잘 알지만, 정신없이 바쁜 현실에 치여 살다보니 그 중요한 것을 자주 잊는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예를 들면 이 커플과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오래 전 사별한 남편의 모습이 비록 희미하게나마 환영처럼 떠오르는 일이 종종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새삼스레 서로의 소중함을 느낀다. 

 

  영화 끝부분에서, 모처럼 두 사람만의 로맨틱한 시간을 즐기려다가 오히려 대판 싸움이 난다. ^^;;

  두 사람 모두 그 동안 쌓인 것이 제법 많아서, 헤어지자는 소리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역.시.나. 다른 오래된 커플이나 부부가 그러하듯이, 유치함과 애교가 뒤섞인 양보와 노력으로 서로 한 발자국씩 물러서며 화해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사다난 했던 하루를 마무리 짓게 된다.

 

 

  ◎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이 이 시리즈의 완결판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두 사람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비포 시리즈 세 편은 모두 1시간 반 정도 되는 상영시간 동안, 만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의 사연을 담아낸다는 것을...  그 사실을 모르고 영화를 본 것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시간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매번 이 영화 시리즈를 볼 때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아, 맞다! 이게 며칠 동안 일어난 사연이 아니라, 하루도 안 되는 짤막한 시간 동안 벌어진 이야기였지!' 하고 깨닫게 된다. ^^

 

  '비포 미드나잇' 도 '비포 선라이즈' 이나 '비포 선셋' 과 마찬가지로 어떤 여지를 남기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열린 결말' 은 아니다.  그저 이 시리즈가 전부 눈에 확 띄는 엄청난 사건 없이 소소한 에피소드로 조용히 전개된 것처럼, 결말도 잔잔하게 맺는다는 뜻이다.  감정적으로 여백을 남기는 결말이랄까...

 

  그런 잔잔한 결말 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문득 '과연 이 영화가 이 시리즈의 마지막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년을 주기로 한 편씩 나왔던 시리즈인만큼, 어쩌면 또 9년이 지나 2022년이 되었을 때 제시와 셀린느의 50대 모습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18세가 된 쌍둥이를 독립시킨 후, 갑자기 확 늘어난 두 사람만의 시간에 오히려 적응을 못 해 갈등을 겪는 이야기가 나오려나?  혹은, 세월이 주는 관대함과 달관이라는 선물 덕분에, 18년이란 세월을 함께 걸으며 겪은 온갖 기억과 감정을 차분히 정리해보는 이야기가 되려나?

  9년 후 제시와 셀린느가 어떤 모습일지,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