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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갑자기 / 남쪽으로 간다

Lesley 2013. 9. 14. 00:01

 

  '지난 여름, 갑자기''남쪽으로 간다' 는 별개의 영화다.

  하지만 세 가지 공통점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1+1 묶음으로 함께 나오고 있다.  그 공통점이란...  첫째 이송희일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점, 둘째 퀴어영화라는 점, 셋째 단편영화라는 점이다.

  내 생각에는, 이 두 영화가 한 묶음으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 번째 이유일 것 같다.  두 영화의 상영시간이 각각 40분 정도 밖에 안 된다.  이런 짤막한 영화를 제값 치르고 볼 관객은 드물테니, 한 묶음으로 판매하는 것이 영업적인 측면에서 옳을 것이다. (대학시절에 '4월 이야기' 라는 일본영화의 상영시간이 60분 정도 되는 것을 모르고 영화관까지 가서 봤다가, 돈 아까워서 죽는 줄 알았음. -.-;;)   

 

 

 

1. 남쪽으로 간다

 

 

 

 

  ◎ 영화 '남쪽으로 간다' 말고, 노래 '남쪽으로 간다' 부터...

 

  사실 이 영화 묶음에서는 '지난 여름, 갑자기' 가 먼저 나온다.

  그런데도 내가 '남쪽으로 간다' 부분을 먼저 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애초에 아무런 관심 없었던 이 영화 묶음을 다운받아 보게 된 이유가 바로 '남쪽으로 간다' 에 대한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 묶음의 감상 이유가 된 '남쪽으로 간다' 는 이 영화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제목의 노래를 말하는 것이다. ^^

 

  인터넷에서 우연히 '남쪽으로 간다' 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거의 문화충격 수준의 느낌을 받았다...!

 

  이 노래의 장르는 분명히 트로트다.

  그런데 우리가 트로트 하면 흔히 떠올리는 주현미, 송대관, 현철 같은 가수들의 노래와 많이 다르다.  트로트에 지잉지잉거리는 전자음과 함께 쿵쿵거리는 베이스음이 깔리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최첨단(?) 악기 소리에 '동산에 올라가 보면 저 멀리 불어오는 바람 보이고, 떠난 애인 맘도 보이고, 내 작은 맘도 보인다' 라는 청승맞은 가사가 쿵짜라짜짜~~ 하고 어우러진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실험정신이란 말인가... -0-;;

  이 독특한 노래를 들었을 때의 느낌을, 나의 표현력으로는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직접 들어보라고 말할 수 밖에...  게다가 중독성은 어찌나 강한지, 가끔 무언가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 60년대 분위기 팍팍 풍기는 가사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

 

  게다가 노래만 특이한 게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른 가수(남성 2인조 그룹) 이름도 참 특이하다.

  이름하여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다. -0-;;  도대체 이 길고 괴상한 이름을 어디에서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구남과 여라이딩스텔라' 라고 읽어야 하나, 아니면 '구 남과여 라이딩 스텔라' 라고 읽어야 하나? (혹시 이 독특한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 분이 있다면 댓글로 설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여튼...  이 독특한 노래가 같은 제목의 영화 속 삽입곡으로 쓰였다고 해서 '어디, 그 영화도 이 노래만큼이나 특이한지 한 번 보자.' 하는 심정으로 보게 된 것이다. ^^;;

 

 

  ◎ 노래 '남쪽으로 간다' 만큼이나 독특한 영화 '남쪽으로 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쪽으로 간다' 가 동성애자와 탈북자가 나오는 따뜻한 휴머니즘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

  왜냐?  일단 이 영화가 퀴어영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동성애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당연히 예측할 수 있었고...  거기에 제목이 '남쪽으로 간다' 니까 꿈과 희망을 안고 남한을 찾아온 탈북자도 나올거라 생각했다.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남쪽으로 간다' 는 말은 보통 '북한 공산괴뢰의 압제에서 벗어나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온 탈북자' 와 연결되지 않던가? ^^;;

  그리고 위의 포스터를 보면, 벌거벗은 남자와 반바지만 입은 남자가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힘차게 뛰는 모습이 담겨 있다.  밀림 속을 원초적인 모습으로 달리는 두 남자라니, 비현실적일 정도로 희망찬 느낌이 든다.

  공교롭게도 동성애자나 탈북자나 우리 사회의 주변부를 떠도는 이방인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런 외로운 사람들끼리 어찌어찌 엮여서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게 되는, 그런 따뜻한 내용의 영화일거라 생각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겉도는 주인공들이, 반은 자신들을 얽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기분으로, 반은 동지애를 표출하기 위해서, 대자연 속에서 짤막한 일탈과 행복을 즐기는 내용이 아닐까 했는데...

 

  내 예상은 '동성애자가 등장한다' 는 것 하나 빼고는 다 빗나갔다! (퀴어영화니까 당연히 동성애자는 나올 수 밖에 없겠지... -.-;;)

 

  우선, 이 영화는 탈북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나로 하여금 이 영화를 탈북자와 연관짓게 한 '남쪽으로 간다' 라는 제목이 왜 붙은 것인지, 사실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위에 쓴 노래의 가사가 비록 청승맞지만 이 두 주인공의 사연에 들어 맞기 때문에, 노래 제목을 그대로 따오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군복무 중 만났고 현재도 한 사람은 아직 군인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군인이라는 집단과 뭔가 묘하게 어울리는 트로트 장르의 노래를 끌어와서 그 제목을 따왔다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이 영화 내용은 따뜻하고 희망차기는커녕, 너무 현실적이어서 씁쓸하기만 하다.

 

  '기태(김재흥)' 와  '준영(전신환)' 은 함께 군복무를 하던 중 연인이 되었던 사이인데, 현재 상황은 '연애하는 중' 이 아니라 '이별하는 중' 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떠나려 한다면 얼마나 깔끔하고 우호적으로 헤어질 수 있겠느냐만은...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 연인들의 이별 중 99%는, 한쪽은 떠나려 하고 다른 한쪽은 붙잡으려 하는 식의 이별이다.  그렇게 다른 수많은 연인들처럼, 이들의 헤어짐도 눈물, 원망, 애원, 죄책감, 비난, 변명이 뒤범벅 되어 서로의 밑바닥을 다 보여주는 '추잡한 이별' 이다.  더구나 이들은 남들 눈을 피해야 하는 '동성 연인' 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별 중 보이는 추잡함의 정도가 더 심하다.

  기태가 준영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기태는 납치와 탈영이라는 중범죄도 불사할 정도로, 준영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하지만 준영이 기태에게 보이는 감정은 참 모호하다.  준영은 제대한 후 지극히 현실적으로 굴며 기태를 밀어낸다.  어쩌면 자기 입으로 말한 것처럼, 기태를 정말 사랑하지 않았으면서도 군생활 중 너무 외로운 나머지, 잠깐의 불장난 상대로 기태를 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자기도 정말로 기태를 사랑했지만, 제대한 후 냉엄한 현실에 부딪치면서 평탄한 삶을 살기 위해 기태를 버리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주인공들의 해방감과 동지애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포스터 속 장면은, 사실은 두 사람의 균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순간의 행복을 위해 힘차게 숲으로 뛰어가는 게 아니었다.  기태(포스터 속에서 앞에서 뛰고 있는 남자)는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든 간직하려고 기를 쓰고 도망치는 중이고, 준영(포스터 속에서 뒤에서 뛰고 있는 남자)은 자기가 같은 남자와 사귄 적이 있다는 증거가 세상에 남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를 쓰고 쫓는 중이다.

  기태가 성관계 중 준영의 얼굴을 사진기로 찍은 것이, 설마 준영을 협박하기 위한 목적이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별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사라지려는 연인의 흔적 하나라도 붙잡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이별을 굳게 결심한 준영 입장에서는, 그 사진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설사 기태가 지금 당장은 정말로 협박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변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그 사진이 준영의 앞날에 어떤 식으로 걸림돌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준영은, 비록 순간적이나마 기태를 돌로 쳐서 죽일 생각까지 할만큼, 공포와 분노를 느꼈다.

 

  영화에 나오는 준영의 편지 속 구절도, 참 괜찮은 장치였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세 번에 걸쳐 검은 배경 위로 짤막한 글이 나온다.  처음에는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한 그 짤막한 구절이 도대체 뭔가 했는데,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야 깨달았다.  이미 제대한 준영이 아직 복무 중인 기태에게 보냈던 편지 속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그리고 그 짤막한 글을 통해, 우리 관객들은 준영의 심정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처음 편지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있던 부대의 나무를 언급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시간을 그리워 한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다음 편지에는 거리감과 딱딱함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서는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냉정히 이별을 선언한다. 

  꼭 영화 속 주인공들 같은 동성애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된 연인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처음에는 함께 할 수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고, 그 다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무뎌지다가, 마지막에는 이별을 고하게 되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터널 속 장면이다.    

  차가 터널 한가운데까지 들어갔을 때, 준영은 자기 차에 기태를 남겨둔 채 혼자 터널을 빠져나간다.  기태가 혼자 남게 된 어두운 터널은, 연인에게 버림받은데다가 이제 탈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기태의 암담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준영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 하는 동성애를 과거의 경험으로 돌리고 당당히 어깨 펴고 살 수 있는 안전한 쪽으로 가려는 준영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홀로 남겨진 기태는 차의 오디오로 노래 '남쪽으로 간다' 를 튼다.  노래가 터널 안에서 메아리 쳐 울려퍼지는 가운데, 기태는 맥주를 마시면서 되는대로 춤을 춘다.  그저 뭔가 특이하게만 들렸던 '남쪽으로 간다' 의 선율과 청승맞게만 보였던 가사가, 애써 부인하려던 이별을 결국 실감하게 된 기태의 몸부림에 그토록 잘 어울릴지 몰랐다. 

  카메라가 기태에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터널 출구로 보이는 저녁놀을 배경으로 미친 듯이 춤추는 기태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 위로 노래 '남쪽으로 간다' 가 계속 흐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2. 지난 여름, 갑자기

 

 

 

 

  ◎ 단순한 이야기라도, 섬세한 연기력이 스며들면... 

 

  줄거리는 단편영화답게 무척 단순하다.

  경훈(김영재)은 고등학교 교사고, 상우(한주완)는 경훈이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의 학생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과거 행적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안전' 을 위해서 둘 다 마음을 숨겼던 것 같다.  그런데 상우가 게이바에 갔다가 우연히 경훈을 보게 되었다.  경훈 역시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상우는 경훈 주위를 계속 맴돌게 되고, 경훈은 그런 상우를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는 내용임.)

  그러다가 상우의 반 협박으로 두 사람이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인다. (이 한 줄 짜리 내용이 이 단편영화의 내용 대부분을 차지함. ^^;;)

 

  겨우 몇 시간 동안의 밋밋한 데이트를 4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담아냈지만,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다.

  데이트라지만, 한 사람은 마지못해 상대방에게 끌려다니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제멋대로 상대방을 끌고 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데이트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고, 어쩌다 나온 말이라는 것도 짤막하게 툭툭 내뱉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관객은 '도대체 저 대사는 무슨 뜻이고, 저 행동은 또 뭐지?  이래서 독립영화는 짜증나~~' 하고 머리 쥐어짜가며 영화를 해석할 필요 없이, 아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그만큼 두 배우의 연기가 섬세해서, 관객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몰래 쳐다볼 때의 눈빛에서도, 푸른 강물을 바라볼 때나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의 표정에서도,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많은 뜻을 함축한 짤막한 대사에서도, 두 사람의 감정이 생생히 전달된다.  

 

  특히나 상우 역을 맡은 한주완은 이 두 편의 영화 묶음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배우다.

  청소년답게 아직 순수해서(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몰라서... ^^;;) 감정에 보다 솔직한 상우는, 영화 내내 온갖 표정을 보여준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설레임과 수줍음, 상대방이 끝내 자신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떻게든 상대방을 붙잡고 싶은 절박감...  아직 어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만큼,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표정 연기가 과장되지도 않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말 그대로 사실적인 표정이다.  누군가 상우의 다양한 표정을 캡쳐하고 편집해서 나에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

 

  경훈 역을 맡은 김영재도 좋은 배우다. 

  어떤 면에서는, 경훈 역이 더 연기하기 힘들 수도 있다.  상우 역은 다양한 표정을 보여줘야 하지만, 대신 표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는 점에서는 좀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경훈 역은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써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포커페이스 밑으로 마구 구겨넣은 온갖 복잡한 심사를 관객에게 슬며시 전달해야 한다.  자신에게 당돌하게 다가서는 상우에 대한 당혹감, 자신 역시 상우를 좋아하지만 어떻게든 감정을 통제하려는 노력, 상우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다른 학생이 보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이,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는 얼굴 밑으로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상우 역할이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아마도 현실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여서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경훈은 아주 현실적인 캐릭터다.  사실, 경훈의 입장에 처한 사람이라면, 99.9%의 확률로 경훈처럼 상대방을 밀어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될 게 뻔하다.  그리고 선생과 제자(그것도 미성년자인 제자)가 연애한다는 것 또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다.  그런데 '동성애 + 사제간의 연애' 라면?  이쯤 되면,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경훈은 계속 가면을 쓰고, 움츠러들고, 물러설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 하고, 상우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비껴날 때면 조심스럽게 상우를 훔쳐보게 된다. 

 

  주연을 맡은 두 배우 모두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신인이었다는 점이, 우리 영화계와 방송계에 대해 암담함을 느끼게 한다.

  10년 이상씩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고도 여전히 발연기라는 비난을 듣는 배우들이 제법 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연기력 갖춘 배우들이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마냥 재야(?)에 묻혀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다.  그리고 영화계와 방송계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이고, 그 발연기 대가들은 얼마나 대단한 뒷배를 지니고 있기에, 이런 좋은 배우들 대신 엉뚱한 사람들이 주연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것인지 분통이 터진다.

 

 

  ◎ '지난 여름, 갑자기' 와 '남쪽으로 간다' 의 공통점 및 차이점 

 

  '남쪽으로 간다' 가 마지막 터널 장면 때문에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는 했지만, 사실 영화의 분위기로만 보면 '지난 여름, 갑자기' 가 오히려 내 스타일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 가 전체적으로 잔잔하다 못 해 나른한 느낌까지 주는데 비해, '남쪽으로 간다' 는 삭막하고 거칠고 날이 잔뜩 서있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 묶음 속에서 먼저 나오는 '지난 여름, 갑자기' 속 잔잔한 분위기에 취한 채로 곧장 그 다음 편인 '남쪽으로 간다' 를 보고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 못 했을 정도다. ^^;;

 

  같은 감독이 똑같은 소재(동성애)를 갖고 비슷한 시기에 만든 영화인데도 그렇게 분위기가 다른 것은, 두 영화의 내용상 차이 때문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 는 서로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자기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탐색만 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에 비해 '남쪽으로 간다' 는 한 사람은 어떻게든 상대를 떼어놓으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든 상대에게 매달리려고 하다가, 결국 끝을 보게 되는 사연이다.

  즉, '지난 여름, 갑자기' 는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을, '남쪽으로 간다' 는 한 때는 좋았던 사랑이 처절하게 끝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 영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그런데 이 두 편의 영화 속에 나오는 동성애라는 소재는 특수하지만, 그 소재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보편적으로 진행된다.

  멜로물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랑 밖에 난 몰라' 식의 분위기로 흐르곤 한다.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멜로물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 사랑이 더욱 과장된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 따위 모두 깨끗이 무시해버리는 '위대한 사랑의 승리' 로 끝나거나,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말 그대로 '애절한 사랑의 슬픈 결말' 로 끝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남쪽으로 간다' 에서는 이별 과정을, 이 '지난 여름, 갑자기' 에서는 사랑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을, 무척 보편적이고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사실, 한 때 불같이 사랑했던 연인이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며 아름다운 이별을 나눌 가능성이라는 것은, 복날 보신탕집 앞에 아무 생각 없이 얼쩡거리던 개가 목숨을 건질 가능성보다도 더 낮을 것이다. -.-;;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면 사회적으로 매장될 것이 뻔한 사랑에 과감히 자신을 내던질 용기를 지닌 사람도, 유별났던 올해 여름 날씨 속에서 짜증 한 번도 안 낸 사람만큼이나 적을 게 뻔하다.

  소재는 특수한데 그 소재를 담은 이야기는 보편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이, 세상사 참 얄궂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준다는 느낌도 준다.

 

 

  ◎ 기대되는 배우, 한주완

 

  '지난 여름, 갑자기' 속 상우 역을 맡은 한주완이란 배우가 참 인상적이어서, 이 배우에 대해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그런데 다음넷의 영화 메뉴 관련 프로필에는 정보가 너무 없다.  해상도 안 좋은 사진 한 장만 달랑 있을 뿐, 나이도 출신학교도 연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나 계기 같은 사연도 없다.  그저 이 영화를 시작으로 찍은 몇 편의 영화 이름이 나와 있을 뿐이다. (그 영화들도 모두 단편영화라서 무척 생소함.) 

  그래도 이 배우에 대해 뭔가 하나라도 더 건지겠다고, 계속 검색을 했는데...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첫째로, 좀 충격적인 사실인데...  이 한주완이라는 배우가 '지난 여름, 갑자기' 에 출연했을 때 이미 30살이었다고 한다...! @.@ 

  물론 고등학생 역을 반드시 고등학생 나이의 배우가 맡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올해 초에 방영했던 드라마 '학교 2013' 에서도 학생 역을 맡은 배우들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이었다. 

  하지만 한주완의 경우는 워낙 동안이고 교복이 너무 잘 어울려서, 20대 배우일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너무 당연하게 '진짜 고등학생' 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 요즘은 어떻게 성인배우들보다 아역배우들이 연기를 더 잘 하냐?' 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봤다. -.-;;  그런데 20대도 아니고 30세라니...!  내가 남자배우 중에서는 이런 초절정 동안 배우를 본 적이 없다.  이쯤 되면, 남자배우계의 문근영이라고 해도 되겠다. ^^

 

  둘째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만 전전하던 한주완이, 공중파 방송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8월말부터 방영하고 있는 주말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에 출연 중이라고 한다.  비록 내 취향의 드라마가 아니어서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나온다고 한다.  처음 찍은 영화에서도 좋은 연기력 보여줬을 정도로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니,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