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공교롭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번 포스트는 지난 주에 미리 써놓았던 것이다. 오늘 오타 정도만 확인하고 올리려 했는데... 이렇게 별도의 내용을 덧붙이게 될 줄 몰랐다.
어제 점심을 먹다가 TV 뉴스를 잠시 봤는데, 자막으로 김종학 PD가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속보가 나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한 나머지, 동명이인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인터넷에 접속해보니, 바로 그 '김종학 PD' 였다. 작년부터 출연료 미지급 문제와 OST 판권 문제 등 안 좋은 일로 종종 기사에 언급되더니,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 나로서는, 그래도 김종학 PD의 드라마는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여명의 눈동자', 고등학교 때 '모래시계', 대학교 때 '백야 3.98', 그리고 대학교 때였는지 대학교를 졸업한 후였는지 가물가물 하지만 '대망' 을 봤다. 작년에 봤던 '신의' 가 가장 최근에 본 김종학 PD의 작품이었는데, 이제 김종학 PD의 유작이 되어버렸다.
저 드라마들은 나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 와 '모래시계' 는, 지금도 나에게 최고의 드라마로 각인되어 있다. 두 작품은, 영상이니 음향이니 그 밖의 모든 기술적인 것들이 그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진 요즘 드라마조차 감히 견줄 수 없는 수작이었다. 그저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 인물 좋은 젊은 배우만 앞세우는 요즘 드라마와는 너무 달랐다. 우리 아픈 현대사와, 역사라는 커다란 수레바퀴 아래 무참히 깔렸던 인간 군상들, 그리고 그 속에서 연약하게 피어나는 풀잎 같은 희망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나는 '여명의 눈동자' 덕분에 정신대와 제주의 4.3사건을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라는 장르의 특성상 상세히 알게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철없던 중학생이 '아, 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두 사건을 처음으로 '인식'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김종학 PD의 덕을 본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올리는 포스트 앞부분에 잠시 언급되는 '신의' 가 김종학 PD의 마지막 작품이다.
류덕환 중심의 포스트를 올리며 신의에 대해서도 감상을 남겼는데, 신의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 낮은 평을 했다.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라는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던져준 묵직한 주제는, 신의를 볼 당시에나 지금에나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있다.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에 비해 엉성한 전개에 실망하면서도, 드라마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주제의식은 '역시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함께 만든 작품이네.'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 김종학 PD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달 첫째 주말에 삼성역쪽으로 나갈 일이 있었는데, 시간도 넉넉하고 해서 '봉은사(奉恩寺)' 에 들렸다.
강남에 봉은사라는 절이 있다는거야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보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나는, 절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선, 옛스럽고 한적한 산사(山寺)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 한다. 그리고 봉은사와 마찬가지로 서울 도심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를 몇 번 가봤는데(단, 이 때는 절을 구경하러 간 게 아니라, 광화문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하느라... ^^;;), 갈 때마다 뭐가 그리 북적북적하고 어수선한지... 조계사에서 수행하는 승려들과 그 절에 다니는 신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찰이라기 보다는 무슨 시장통 같다. -.-;;
그래서 도심의 절은 조계사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봉은사 쪽은 털끝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작년에 드라마 '신의' 를 보고 나서,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물론, 이미 조계사 가본 경험 때문에, 역시 서울 번화가에 있는 봉은사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래서 굳이 일부러 시간 내어서까지 가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삼성역 쪽으로 나갈 일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그 근처에 있는 봉은사에 한 번 들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일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법인데, 혹시 아나... 나도 누구처럼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천혈(天穴), 즉 시간의 통로를 넘나들게 될런지... 그래서 고려시대로 가서 앞날을 족집게처럼 콕콕 찍어 맞추는 예언가로 이름 날리며 떼돈을 번 후에, 현대로 컴백해서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런지.. (우와~ 신난다~~! ^0^)
인도와 봉은사의 경계 부분 - 조계종 소속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코끼리상 아래 자리 잡고 있음.
봉은사 입구 - 저 문에 붙은 플래카드를 보고서야, 백중에 올리는 재를 우란분절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알았음.
입구 근처 한쪽에 있는 보우(普雨)대사의 동상.
갑자기 웬 보우대사의 동상인가, 혹시 이 절이 보우대사가 창건한 절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보우대사가 봉은사를 창건한 것은 아니지만, 봉은사와 보우대사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던 조선시대에, 드라마 '여인천하' 로 유명한 문정왕후(文定王后) 덕분에 한 때나마 불교가 다시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 때 문정왕후가 보우대사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승과를 부활시켰는데, 승과를 치른 곳이 바로 이 봉은사라고 한다.
물론 유학자들의 반발이 엄청나서, 문정왕후가 세상을 뜬 후 보우대사는 귀양을 갔다가 살해당했고 승과도 폐지 되었다. 하지만 이 때 치러진 승과 덕분에, 훗날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유명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이들이 발탁되었으니, 우리 역사에는 참 다행한 일이다.
백중은 한 달도 더 넘게 남았는데, 벌써부터 가족의 극락왕생 비는 등이 한가득임.
주련의 글씨체가 독특함. - 다른 절의 주련이라고 신경 써서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저런 글씨체는 처음인 듯.
(위) 우리나라 산이나 절에 가면, 꼭 사람들이 자기 소망을 담아 혹은 재미 삼아 저렇게 쌓아올린 돌멩이탑이 있음. ^^
(아래) 계단 난간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귀여운 동자승들의 상. ^^
언론을 통해 유명해진 봉은사 미륵대불.
저 미륵대불은, 일반인들에게는 봉은사의 상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유명하다.
일단 20미터가 넘는 석불이라 크기에서 사람을 압도하기도 하고, 저 미륵대불 뒤편 또는 옆편에서 해진 뒤에 바라보는 코엑스 쪽 풍경이 그렇게 멋지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덕분에 저녁 시간이 되면 저 근처에는, 사진에 취미 있는 사람들과 분위기 잡아보려는 연인들이 우글우글 한다고... ^^
그런데 딱 봐도 알 수 있듯이, 저 거대한 미륵대불은 오래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에, 특별히 전북 익산에서 가져온 석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굳이 익산에서 석재를 공수해 온 이유는, 삼국시대에 익산이 미륵신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란다.
어쩐지 미륵대불보다 그 옆에 있는 석등이 더 마음에 들었음. ^^
(위) 유감스럽게도 지금 무슨 공사 중이라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느긋이 둘러볼 수 없었음. ㅠ.ㅠ
(아래) 이 '판전' 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쓴 현판으로 유명함.
나의 예술적 안목이 형편없어서 그렇겠지만, 솔직히 추사체가 뭐가 그리 대단한건지 잘 모르겠다. -.-;;
그저 술 취한 사람이 쓴 글씨처럼, 획과 획의 균형이 안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추사 선생님... ㅠ.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외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김정희가 추사체라는 것을 처음 세상에 보였을 때만 해도, 많은 양반 문인들이 비웃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추사체가 갖고 있는 자유분방함 속의 질서와 품격을 인정해줬다고 하니... 확실히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
전통 건물과 최신 건물의 기묘한 조화? ^^
이쪽도 한옥과 현대 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
범종각을 통해 보이는 코엑스 건물.
('전통을 통해 현대를 보다' 라는 제목 붙이면 딱일 듯... ^^)
이 곳이 절이라는 기분을 흠뻑 맛보게 해 준, 작은 인공샘(?)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절이라지만, 한국전쟁 때 절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다 그 후에 지은 것들이다.
그래서 절 하면 떠오르는 고즈넉하고 차분한 느낌이 안 들기는, 종로에 있는 조계사와 마찬가지다. 봉은사 안에서 두세 명씩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이 제법 보이던데, 한국의 절을 보고 싶다면 다른 곳으로 가지 왜 굳이 봉은사를 찾아왔는지 이해가 안 갔다. 번화가에 있어서 교통이 편리한 입지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최근 봉은사가 유명해질만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내가 오지랖 넓은 성격이었다면, 그 외국인들 붙들고 "꼭 서울에 있는 절 갈거라면, 차라리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로 가봐요~~!" 하고 참견했을지도 모르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다시 그 쪽으로 갈 일이 있을 때 시간이 넉넉하다면 다시 한 번 들려보고 싶다.
미륵대불 쪽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그렇게 멋지다니 말이다. 어둠 속에 묻힌 봉은사라면, 대낮과는 달리 조금은 고즈넉하고 차분한 느낌을 줄런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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