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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3) - 중국 만년필 영웅(英雄/HERO)

Lesley 2013. 6. 28. 00:01

 

  악필 수준으로만 따지자면 대한민국 상위 1%에 들어갈만한 이 몸이, 만년필의 세계에 발을 담근지 어언 4개월...

  3월에 라미(Lamy)의 사파리(Safari)를 샀고, 4월에는 역시 같은 라미의 알스타(Al-star)를 샀다.  사실, 인터넷을 뒤지다보면 탐나는 만년필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악필 주제에 만년필 숫자만 계속해서 늘여서 무엇하겠는가...  '기왕에 구입한 두 자루나 열심히 써서, 명필 소리까지는 못 듣더라도 중간은 가는 필체를 만들어 보리라...' 하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1) - 라미 사파리(Lamy Safari)(http://blog.daum.net/jha7791/15790963)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2) - 라미 알스타(Lamy Al-star)(http://blog.daum.net/jha7791/15790975)

 

  뜻밖에도 지난 5월에 또 만년필(종류로는 둘! 개수로는 셋!)이 생겼다...! (아이, 좋아~~ ^0^ <--- 텔레토비 목소리)

  단, 이번에 손에 넣은 만년필은 구입한 것이 아니라, 중국 친구에게서 '결혼선물에 대한 답례 + 생일선물' 로 받은 것이다.  원래는 그 선물받은 만년필을 곧장 포스팅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쓰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아무래도 그 두 종류의 만년필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한국에서는 무척 생소한 만년필 브랜드를 먼저 소개해야 이야기가 매끄럽게 나갈 듯하다. 

 

 

  영웅(英雄/HERO) 만년필을 아시나요? 

 

  비록 만년필을 안 쓰는 사람이라도, 서양의 유명 만년필 브랜드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다.

  즉, 몽블랑(Montblanc), 펠리컨(Pelikan), 파커(Parker), 워터맨(Waterman)이 만년필 브랜드라는 사실 정도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안다.  그만큼 이런 만년필 브랜드가 무척 유명하기도 하고, 한국의 대형 문구매장이나 백화점 등에서 팔리는 통에 쉽게 접할 수 있기도 하고... (여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는 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지,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님. 유명 브랜드인 만큼 가격의 압박이... ㅠ.ㅠ)

 

  하지만 위에 나열한 브랜드와는 달리,  '영웅(중문명 : 英雄,  영문명 : HERO)' 이라는 브랜드를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게 뭔데?' 하는 반응을 보인다. ^^;;

  이 브랜드가 이렇게 생소한 이유는, 우리나라 만년필 시장을 주로 고가 제품을 생산하는 만년필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만년필 사용 인구가 적다 보니, 만년필을 일상적인 필기도구가 아닌 사치품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실용적인 중저가 브랜드보다는 유명 브랜드(위에 쭉 나열한 몽블랑 등의 브랜드)가 먼저 들어와서, 얼마 안 되는 만년필 시장을 휩쓸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중저가 품목을 주력으로 하는 브랜드 + 싸구려라는 인식이 강한 중국산' 인 영웅 만년필이 설 땅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이 영웅 만년필은,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만년필 애호가들이나 알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 에 속하는 브랜드다. -.-;;

  하지만 해외에서는 꽤 많이 알려진 만년필이다.  일단 중국에서는 국민 만년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널리 쓰이는 만년필이고, 지난 수십년 간 미국이나 유럽으로도 엄청난 양이 수출되었다.

  물론, 만년필의 본고장인 서양에서 널리 사용된다고 해서, 몽블랑이니 파커니 하는 고급 브랜드와 동급으로 취급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가격 대비 성능 괜찮고, 일상생활에서 부담없이 쓸 수 있는(즉, 망가지거나 흠집이 날까봐, 벌벌 떨어가며 쓰지 않아도 되는...) 대중적인 만년필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뚜껑과 배럴이 모두 은색이고 그립만 검은색인 만년필이, 영웅의 최고 히트 상품인 '영웅 100' 임.

배럴과 그립이 자주색인 만년필은, 영웅의 저가 품목 중 가격 대비 질이 가장 우수하다는 '영웅 616' 임.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 나름의 인지도와 인기도를 누리는 영웅 만년필

 

  한국에서는, 일본 만년필 브랜드(세일러, 파일럿, 플래티넘 등)가 비록 미국이나 유럽의 브랜드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취급받지만, 그래도 만년필 사용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고 많이 쓰인다.

  그런데 만년필의 홈그라운드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오히려 일본 브랜드보다 중국산인 영웅(물론 서양인들은 '영웅(英雄)' 보다는 'HERO' 라는 영문 브랜드가 더 익숙할 것임.)이 인지도도 높고 훨씬 많이 쓰인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물론, 일본 만년필의 질이 중국 만년필보다 떨어지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

 

  그보다는, 일본 만년필의 가격이 서양인들이 보는 제품 이미지와 안 맞기 때문이다. (즉, 가격 책정 실패!)

  영웅 만년필도 영웅 만년필 나름이긴 하지만, 위에 사진으로 소개한 영웅의 가장 유명한 두 가지 품목을 예로 들자면...  영웅 616은 한화 2,000~3,000원이고, 영웅 100은 한화 23,000~37,000원(영웅 100 중에서도 가장 널리 보급된 모델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가격임.  최고 8만원에 달하는 것도 있음.)이다.  서구의 소득수준과 물가수준으로 보자면 저가이기 때문에, 학생층이나 서민층이 쓰기에 딱이다. 

  그런데 일본 만년필의 경우는, 서양의 유명 만년필에 비해 '다소' 저렴할 뿐, '특별히' 저렴하지는 않다. (물론 구체적인 품목을 따지자면, 영웅 616 수준으로 저렴한 것도 있음.  다만, 전체적인 가격대를 봤을 때 저렴한 편이 아니라는 뜻임.)

  하지만 의류나 화장품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고가의 물건이란 그 품질 자체가 월등히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고급스런 이미지' 때문에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비슷한 가격이라면, 고급스런 냄새 펄펄 풍기고 누구나 다 알아주는 자기네 브랜드 만년필을 쓰지, 자기들로서는 만년필계의 변방으로 밖에 안 보이는 일본 제품을 구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이자면(이건 좀 황당한 이유이긴 한데...)영웅의 주력 품목이 서양 유명 만년필의 복제품(!) 이라 서양에서 인기를 끌기 때문이다...!

  다른 품목들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위의 사진에 나오는 두 가지 품목만 보더라도, 파커(Parker)에서 만든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던 '파커51' 의 복제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웅 616은 '파커51 원형(?)' 의 복제품이고 영웅100은 '파커51 플라이트' 의 복제품이다. 

  파커51은 이미 단종되었는데도, 그 중고품조차 전세계 만년필 애호가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보니, 파커51과 똑같이 생겼으면서 필기감도 괜찮고 가격은 저렴한 영웅 616과 영웅 100이, 서양인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 복제품이라는 것이 또 묘한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짝퉁' 과는 좀 다른...

 

  한국 인터넷상에서도 중국 인터넷상에서도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통된 부분만 모아서 대충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웅 만년필 회사의 전신은 1931년 중국 상하이에 건립된 만년필 공장인데, 원래 파커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파커에서 중국에 세운 직영공장인지, 파커에게 하청받은 중국회사가 세운 공장인지는 모르겠음.)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이 공장도 중국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그리고 1958년부터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파커 수준의 만년필을 만들어 보자!' 하며 온 공장 사람들이 일치단결해서 노력한 끝에, 지금의 영웅 만년필이 탄생했단다.

 

  자신들이 따라잡아야 하는 목표를, 하고 많은 만년필 브랜드 중 파커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냐...

  물론 그 공장이 원래 파커 제품의 생산지였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 되기 전, 즉 국민당 정권하에서 파커 만년필이 누리던 위상 때문이기도 했다.

  파커51은 처음 생산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인기를 누리는 만년필계의 수퍼스타다.  그래서 국민당 정권 때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이 자신의 측근 또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교들에게 파커51을 나눠줬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당시 중국에서 파커51은 '잘 나가는 사람' 의 상징이었다.  심지어 한창 물자가 귀했던 중일전쟁 시기에는 파커51이 화폐 비슷한 역할까지 했는데, 그 가치가 초급장교의 두달치 월급에 해당했다고 한다...! (비.싸.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을 내쫓고 새로 들어선 공산당 정권 입장에서는, 파커라는 이름은 국민당이란 이름과 함께, 자신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만년필 하나에도 이런 정치적인 의미가 깃들 수 있다니...)


  그렇게 새로운 중국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이제는 파커 본사의 기술자도 없이 오직 중국 기술자들의 힘만으로, 엄청난 속도로 기술을 익혀서 제품 생산에 성공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원래 파커 제품을 생산하던 기계설비를 그대로 사용하다 보니, 파커라는 브랜드만 안 찍혔을 뿐 파커 만년필과 똑같이 생긴 만년필이 생산되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영웅 만년필한테만 뭐라고 하기가 좀 그렇다.  독일의 몽블랑이나 이탈리아의 오로라 같은 유명한 만년필 회사조차,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파커51을 베낀 제품을 열심히 만들어서 신나게 팔았다고 하니 말이다. -0-;; (그렇게 너도 나도 베낄만큼, 파커51이 엄청난 제품이었던 모양임.)

  일반적으로 짝퉁이라고 하면, 어떤 제품을 흉내내서 만든 제품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아예 해당 제품을 찍어내던 기계를 써서 그대로 찍어낸 상품이라니, 이런 것도 짝퉁의 범주에 들어가나?  그렇다고 해서 짝퉁이 아니라고 한다면, 진퉁(?)이랄 수도 없으니,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참 헷갈린다... ^^

 

 

(왼쪽) 그 동안 초라한 집에서 살던 라미 형제... ㅠ.ㅠ 

(오른쪽) 라미 형제가 영웅 자매를 새 식구로 맞아, 제대로 된 집으로 이사를 했음. ^^

 

 

  만년필 가족, 새집을 장만하다!

 

  그 동안 사파리와 알스타를 책상 위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에 꽂아놓고 썼다. (이 몸은... 진정... 나쁜 주인이오... -.-;;)

  그런데 지난 달에 받은 영웅 100과 영웅 616까지 화장지에 꽂으려니, 역시 식구가 두 배로 늘어서 너무 복잡했다.  마치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복닥거리며 사는 것처럼 심란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이 만년필 가족에게 새로운 집을 장만해주리라 하고 마음 먹었다.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나무로 만든 고풍스러운 서예용 붓꽂이를 알아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에 굴러다니던(?) 괜찮은 연필꽂이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학교에서 졸업생 모두에게 기념품으로 준 도자기 연필꽂이!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동안 저 연필꽂이를 욕실의 칫솔꽂이로 썼다. -0-;;  사실, 그 칫솔꽂이가 고등학교 졸업 때 받은 그 연필꽂이라는 것도 최근에야 겨우 알았다.  벌써 10년 넘게 칫솔꽂이로 썼다는데, 내가 그런 쪽으로 워낙 무심하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되는 칫솔꽂이를 제대로 눈여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연필꽂이 입장에서는 만년필 가족이 은인인 셈이다.  만년필이 없었더라면, 연필꽂이는 본래의 용도로 쓰이지 못 하고 항상 물기 축축한 욕실에서 칫솔꽂이 노릇이나 계속 했을테니 말이다. ^^

 

  자, 이제 앞으로 최소한 5년 동안은 만년필 입양은 안 할 것이다.

  라미 사파리, 라미 알스타, 영웅 100이 각각 한 자루에, 영웅 616이 두 자루니, 모두 다섯 자루나 된다.  이제는 만년필 더 구할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만년필을 열심히 쓸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총을 종류별로 몇 정씩이나 구해놓고는, 정작 어떻게 총을 쏘는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1) - 라미 사파리(Lamy Safari)(http://blog.daum.net/jha7791/15790963)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2) - 라미 알스타(Lamy Al-star)(http://blog.daum.net/jha7791/15790975)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4) - 영웅(英雄/HERO) 100, 616(http://blog.daum.net/jha7791/15790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