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에 얽힌 추억

Lesley 2013. 5. 14. 00:01

 

  '스승의 날' 즈음하여, 기억에 남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단, 스승의 날을 언급했다고 해서, 존경할만한 선생님에 대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하여튼 워낙 인상(!) 깊어서, 학교 졸업한지 한참 된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콕 박혀있는 선생님들에 대한 사연이다. ^^

 

 

1.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 일본인은 정신력이 강해서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다?

 

  2학년 코찔찔이 시절에 만난 이 선생님에 대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 일본에 대해 무척 심한 양가적 감정을 갖고 계셨다는 점이다.

  그 분은 일본에 대해 '그것들은 사람도 아니다.' 라는 적개심과 함께, '결국 우리는 아무리 해도 일본을 이기지 못 한다.' 는 열패감도 갖고 계셨다.  그 선생님의 연세를 생각해봤을 때(당시 50세 넘으셨던 것으로 생각됨.),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니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추측하건데...  이 선생님은 어린 시절에 '가엾은 식민지 백성' 을 괴롭히는 '악독한 일본인' 의 사례를 수시로 보고 들으며 분노를 키우는 한편, '가난하고 못 배우고 더러운 식민지 백성' 에 비해 '부유하고 교양있고 깨끗한 일본인' 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선망도 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일본 다녀온 친척에게 받았다는 일제 연필 쓰는 학생을 무슨 대역죄인 대하듯이 하면서, 동시에 '한.국.인.과.는. 다.른. 일본인의  예의바름' 이나 '번.잡.하.기.만. 한. 한.복.과.는. 다.른. 기모노의 우아함' 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9살 어린 마음에도, 이 선생님의 태도가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음. -.-;;)

 

  이 선생님은 우리한테 유독 극기심을 강조하셨는데, 일본인에 대한 양가적 감정 때문에, 극기심이라는 고급단어(?)를 쓸 때마다 항상 일본 이야기를 빼놓지 않으셨다.

  이 선생님 왈 "극기심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이겨내는 마음을 말한다.  일단 나 자신을 이겨야 남도 이길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은 정신력이 너무 약하다.  극기심을 키우지 않으면 영원히 일본을 이길 수가 없다.  일본이 그렇게 못된 짓 하고도 왜 지금 잘 사는지 아느냐?  너희는 조금만 추워도 장갑 끼고 목도리 하며 요란 떨지만, 일본애들은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간다.  일본인들은 아이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키워주려고, 돈이 많은데도 두꺼운 겨울옷을 안 사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야 선생님 말씀이 곧 진리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꽤 오랫동안 일본인은 '극기심을 키우기 위해 한겨울에도 일부러 반바지를 입는 지독한 종자' 라고 믿고 살았다. -.-;;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 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일본 아이들이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었던 이유는, 날씨와 경제력 차이 때문이었다.  일본은 섬나라라 보니 기후가 해양성이라서, 겨울 날씨가 한국보다 따뜻하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난방도구로 일명 '드럼통 난로' 를 썼는데(그나마 연료가 석탄에서 조개탄으로 바뀌었던 것이 나름 발전이라면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음. -.-;;), 일본 학교에서는 이미 전기 난로니 온풍기니 하는 것들이 보급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일본이 우리보다 겨울옷을 훨씬 얇게 입어도 되는 상황인 것이다. (같은 일본땅이라도 한국보다 더 추운 북해도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한국인들 보다 더 두껍게 끼어 입는다고... -.-;;)  

  그렇게 일본 아이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뒤로는, 그 선생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애들한테 황당한 이야기 하는 선생님이었지.' 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직장에서 점심을 먹던 중, 내 추억(?)과 같은 사연이 나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그 '황당한 사연' 은 나 혼자만의 추억이 아니었다...! @.@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이 정신력이 강해서 추운 날씨에도 일부러 얇게 입고 다닌다고 믿었던 사람이,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혼자가 아니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우리 부모 세대 또는 조부모 세대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나의 2학년 담임 선생님도 그렇고, 같은 이야기를 한 다른 어르신들도 그렇고,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집집마다 깔려있던 시절도 아니고, 해외여행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지금 대학생 이하 세대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1989년에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음. 그 전에는 돈이 넘쳐나도 자기 마음대로 외국 나갈 수 없었음.)  바로 옆나라인 일본조차 별나라 달나라 수준으로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시절이다.  그런 때에 몇몇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보고 온 특이한 광경(한겨울에 반바지 입고 다니는 모습)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외국에 대한 얕은 지식의 틀을 거쳐 재해석(?) 되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당연한 지식인 것처럼 굳어졌던 듯하다. 

 

  직장에서 점심 먹다 그 일을 오래간만에 떠올린 이후로는 또 다시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중국 하얼빈에서 그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한 중국 여학생이 나에게 "한국 여자들은 정말 대단하다.  멋내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다.  한겨울에도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니더라." 하고 말했다.  그 여학생에게 혹시 한국에 가서 본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TV 드라마를 통해 그런 광경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이거야 말로 딱 그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같은 류의 생각이었다. ^^

  그래서 그 여학생에게 설명했다.  "한국 여자들이 중국 여자보다 멋내는데 더 관심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겨울에 미니 스커트 입을 수 있는 이유는, 난방이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모든 전철과 버스에서 다 난방을 해준다.  미니 스커트 안 입는 사람들도 하얼빈 사람보다는 얇게 입는 편이다.  만일 서울 사람이 하얼빈 사람처럼 두꺼운 옷을 입는다면, 거리를 걸을 때는 괜찮지만, 전철이나 버스를 타거나 실내에 있을 때 답답해서 참기 힘들 것이다."

  모든 전철과 버스에 난방이 다 된다는 말에, 그 여학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이 발전된 도시의 대중교통은 어떤지 몰라도, 하얼빈은 2010년까지도 대중교통에 난방이 안 되었음.  한겨울이면 한낮 최고기온이라도 영하 20도 정도는 보통인 지방인데도...!)

 

 

 

2. 초등학교 4학년 때 옆반 선생님 - 학생이 어떻게 같은 학생에게 기합을 줘!

 

  지금도 초등학교에 그런 주번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초등학교란 말이 발명(?)되지 않고 국민학교였던 그 시절, 주번이란 것은 청소당번 비슷한 역할이 아니었다.  최고학년인 6학년 학생들이 일주일씩 번갈아 가면서 주번을 맡았는데, 중.고등학교의 선도부 비슷한 역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긴 광경이기는 한데, '주번' 이란 글씨가 찍힌 손바닥만한 배지를 옷핀으로 한쪽 가슴에 달고 다녔다. ^^

  주번들은 교문 양옆으로 늘어서서 지각하는 하급생을 단속하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하급생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잡힌 하급생에게 한 마디 하고서 보내주거나, 선생님들에게 보고해서 따로 벌을 받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급생들을 무릎 꿇리거나 엎드려뻗쳐 또는 토끼뜀 등의 기합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보통, 자기 반에서 주먹 좀 쓴다 하는 남학생들이 그런 짓을 했음. -.-;;)

 

  그렇게 주번이 하급생에게 기합을 주는 일이,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허락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묵시적으로 용인된 일' 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일이 선생님들 눈에 안 띄는 으슥한 곳에서 몰래 벌어졌던 것이 아니라, 공공연히 벌어졌으니까...  그리고 선생님들도 그런 광경을 봐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나치곤 했으니까...  군사독재 시절의 권위적인 문화가 학교에 많이 스며든 탓이었을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나 역시 그게 뭔가 문제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일단, 내가 코찔찔이 초딩이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도 인권이 있다' 느니 '목적 뿐 아니라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 느니 하는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기합을 줄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 때문에도 더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즉, 주번들이 아무 이유없이 자기들보다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교칙을 어긴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니 괜찮다고 여겼다. (학교 선배가 잘못 저지른 후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벌을 내린다니, 이 얼마나 그럴 듯한 명분인가!)

 

  그런데 어느 날,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와 같은 4학년의 어떤 반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  얼굴은 기억 못 하지만,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가 많이 벗겨진 나이 지긋한 남자 선생님이라는 것은 기억한다.

  이 선생님이 주번한테 기합 받는 하급생을 보고는, 주번에게 그만 보내주라고 했다.  하지만 그 주번 아이는 주번이라는 배지에 꽤 자부심을 느꼈던지, 복도에서 뛰는 아이 잡아다가 기합주는거라고 아주 당당히 말했다.  아마도 '이 선생님이 지금 사정 모르고 이러시나 보다. 내가 왜 기합을 주는지 설명했으니, 이제는 참견 안 하시겠지.' 하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데 주번의 그 말에, 선생님이 "학생이 어떻게 같은 학생에게 기합을 준다는거냐?" 하고 벌컥 화를 내셨다...!  그 때 그 주번의 얼굴에는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 떠올랐고, 옆에서 그런 모습을 구경하게 된 다른 아이들이나 나나 모두 '저 선생님 왜 저래?' 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 한다.

  다만, "학생이 어떻게 같은 학생에게 기합을 준다는거냐?" 는 그 선생님의 말씀,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황당하게 들렸던 그 말씀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를 앞서가셨던 분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