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1) - 라미 사파리(Lamy Safari)

Lesley 2013. 3. 23. 00:08

 

  이번 달에 만년필 한 자루를 구입했다.

  혹시나 괜한 충동구매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한 일주일 정도는 참고 버텨봤다.  하지만 뭐에 한번 꽂히면 비록 용두사미로 끝날지언정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결국에는 큰 마음 먹고 질렀다. ^^;;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만년필이라는 것이 필기도구로서의 목적보다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글씨 쓰기 위한 도구라기 보다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장식품' 내지는 '비즈니스맨들의 이미지 메이킹용 소품' 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덕분에, 만년필 고르기 위해서 인터넷 좀 뒤졌더니,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수십만원짜리 만년필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만년필 관련된 인터넷 카페까지 가입해서 알아봤는데, 그런 고가의 만년필이라고 해서 몇 만원짜리 만년필보다 특별히 더 잘써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저, 재료나 마감 상태 또는 디자인이 굉장히 세밀하다고 고급스럽다는 차이가 있을 뿐... (역시 장식품!) 

 

 

라미(LAMY) 케이스와 서비스로 받은 5개 들이 카트리지.

 

  결국 내가 고른 것은, 만년필 애호가들이 초보자용으로 많이 추천하는 라미(Lamy)의 사파리(Safari)다.   

  사파리는 독일에서 학생용으로 많이 쓰이는 제품이라고 한다.  학생용답게 가격대비질이 매우 우수하다.  게다가 대중적인 모델이라지만 색상이 워낙 다양해서 사파리를 색상별로 모으는 매니아들도 제법 있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어떤 색상을 골라야 할 지 알 수 없어 한참 고민했다.  처음에는 만년필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검은색으로 하려고 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빨간색도 꽤 예뻐 보이고, 2013년 한정판으로 나왔다는 애플그린색도 산뜻해보였다.  계속 보니, 새파란 바다를 연상케 하는 진한 파란색도 끌리고...  결국 간택(!)된 것은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차콜색이었다. ^^ 

 

  사실, 독일 만년필 하면 무조건 비싸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몽블랑, 펠리칸 등등), 라미는 made in German인데도 3만원 중반의 가격이어서 의외였다.

  물론 저 가격도 틀림없이 독일 현지 가격보다는 비싼 가격일 것이다.  수입하는 과정에서 운송비, 세관 비용, 수입업체의 마진 등이 붙을테니 말이다.  하여튼 구입할 당시에는 빛이 번쩍번쩍 나는 녀석들이 너무 비싸서 '차선책' 이라는 생각으로 고른 것인데, 막상 직접 손에 잡아보고 살펴보니 대만족이다.  몸체가 금속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되어 그런지 가볍고, 비록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지만 싸구려라는 느낌보다는 발랄하고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보라...!  백강고시체 교본 위에 다소곳한 자태로 누워있는 차콜색 사파리를...! ^^ 

 

  그런데 대학 신입생 시절 잠깐 손댔다가 포기해버린 만년필과 글씨체에 왜 새삼스레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 하면...

  2004년에 난생 처음 배낭여행을 떠나면서, 튼튼한 노트 한 권을 배낭 속에 넣고 가서는 거기에 여행기를 썼다.  최근에 뭐가 갑자기 생각나서 그 여행기를 오래간만에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여행기를 들춰보는 순간, 원래 찾으려 했던 내용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 시절에도 악필이란 소리를 수시로 들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때 글씨가 그나마 봐.줄.만.한. 글씨였다...! -0-;;  다시 말해서, 과거에도 악필이었지만, 그나마 자주 손글씨 쓸 일이 있어서 그 만큼의 필체라도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손글씨 쓸 일이 거의 없고 허구한 날 컴퓨터나 휴대폰으로만 글씨 찍어댔더니, 과거보다 더 심한 악필이 된 것이다. ㅠ.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무리 지금이 최첨단 시대라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구나 싶은 위기감이 들었다.  아, 물론, 최근에 내가 아날로그적인 물건에 관심 기울이며, 인터넷 서핑 통해 그런 물건들 눈팅하는 재미에 빠진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하다. ^^

 

  이 사파리를 구입하는 김에, 백강고시체 교본도 함께 구입했다.

  무슨 대단한 서체도 아니고, 고.시.를 위한 글씨가 교본으로까지 나온다는 게 좀 우습기는 하다.  하지만 그만큼 손글씨 쓸 일 별로 없는 요즘 세대가 논술답안 쓸 때 악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다른 펜글씨 교본이 '아름다운 글씨' 라는 이상적인 목표에 방점 찍는데 비해, 이 백강고시체 교본은 '최소한의 가독성 및 빠른 속도의 필기' 라는 실용적인 목표를 위한 책이다.  어차피 어려서부터 악필로 굳어진 글씨가 몇 달 연습한다고 명필로 바뀔 리는 없다.  하지만 백강고시체는 대단한 명필이 되기 위한 교본이 아니라, '남들에게 악필이란 소리 안 듣고 스스로 한 필기를 나중에 못 알아보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정도의 글씨를, 빠른 속도로 쓰기 위한 책' 이라니, 차라리 이쪽이 일반 펜글씨 교본보다 악필 탈출의 꿈을 이룰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만년필 카페에서도 그렇고, 각종 고시나 자격증 관련 게시판에도 그렇고, 이 교본으로 효과를 봤다는 경험담이 제법 있다.  다른 펜글씨 교본과는 달리 3개월만 연습했을 뿐인데도 글씨체가 확 바뀌었다는 둥,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 필기를 빌려갔다는 둥...  그래서 나에게도 그런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사파리와 함께 이 교본도 새로운 식구로 들이게 된 것이다. ^^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파리의 자태!  내가 찜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뚜껑에 이름도 새겼음...! ^^

 

  위에도 썼지만 대학 신입생 시절에 한번 악필 교정에 손댔었는데, 결국 포기했더랬다.

  내 전공의 특성상 모든 시험이 논술형이었는데, 보통의 경우 8절지짜리 답안지를 앞뒤로 꽉꽉 채워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답안지를 빽빽히 채운 내 글씨는 내 눈으로 봐도 정말 심란했다. ^^;;  오죽하면 주위 사람들이 "너는 열심히 공부할 것도 없이 글씨만 예쁘게 써도 학점이 오르겠다." 라고 했을까...

  그래서 큰 마음 먹고 한달 정도 펜글씨 연습을 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는 얻지 못 했다.  펜글씨 교본을 구입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치 중.고등학교 때 쓰는 한문노트처럼 깍두기 모양으로 칸이 그려져 있어서, 그 칸 안에 글씨를 쓰게 되어 있다.  그렇게 그 깍두기 칸 크기에 맞춰서 글씨 연습을 했더니만,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즉, 깍두기 칸 크기로 글씨를 쓸 때면 그래도 제법 봐줄만한 글씨가 나오는데, 보통 크기의 글씨(일반적인 노트 줄에 맞춰 쓴 글씨)를 쓰면 원래의 내 악필이 부활(!)하는 것이다...! ㅠ.ㅠ 

 

  그렇게 대학 시절의 첫 펜글씨 연습은, 근본적인 글씨체 교정에는 실패한 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엉뚱한 소득만 남겼을 뿐이다.

  그 소득이란 황당하게도...  나 같은 악필들만 우글거리는 우리집에서 그 후로 축의금 봉투에 글씨 쓰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 축의금 봉투에 쓰는 글씨 크기가 그 깍두기 칸에 맞춰 쓰는 글씨 크기랑 비슷하기 때문이다. ㅠ.ㅠ 

 

  그리고 그렇게 실패한 대학 시절 악필 탈출기(?)에 관련된 자그마한 추억이 하나 있다.

  펜글씨를 연습하려면, 당연히 펜이 필요하다.  마침 내가 악필 교정하려고 마음 먹은 때가, 대학 입학한 후 처음 맞게 된 내 생일 즈음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두 친구가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만년필을 사달라고 해야겠는데, 우리 모두 아르바이트 하는 처지였으니, 당연히 친구들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골라야 했다.

  문구점에 진열된 만년필을 살피던 중, 고급스럽게 생겼으면서도 2만원인 제품이 눈에 띄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나 물가를 생각해보면, 그 때의 2만원은 지금의 5만원은 되지 않았을까...)  그거라면 두 친구가 각각 1만원씩만 부담하면 될테니, 적당하겠다 싶었는데...  내가 그것을 고르자 마자, 두 친구는 무서운 눈으로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알고보니, 내가 0의 개수를 잘못 세어서, 20만원짜리를 2만원짜리로 착각했던 것이다. (어쩐지 2만원짜리치고는 좀 지나치게 번쩍번쩍하게 생겼더라니... ^^;;)

 

  하...여...튼...!

  이제는 악필을 탈출하고 싶다.  죽기 전에, 명필까지는 아니더라도 중필(혹은 평필? ^^) 정도는 된다는 소리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또 펜글씨 연습도 서예처럼 정신수양의 효과도 있다 하니, 악필 탈출하면서 마음까지 닦을 수 있다면 더욱 더 좋고... ^^ 

 

 

천하의 악필, 만년필에 꽂히다! (2) - 라미 알스타(Lamy Al-star)(http://blog.daum.net/jha7791/15790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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