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학교 2013' 속 시 - 나태주의 '풀꽃' /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Lesley 2013. 1. 21. 00:05

 

  '완전 대박' 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선전하며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학교 2013' 을 시청하고 있다.

 

  솔직히, 처음에는 100% 몰입해서 즐길 수 없었던 드라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한참 된 나로서는,  '격세지감' 이란 사자성어의 뜻을 팍팍 느끼게 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 관련 에피소드에서는 '저게 드라마라 저런거야, 아니면 요즘 학교가 정말로 저런거야?' 하게 되고, 대학입시와 관련한 에피소드에서는 '나도 쟤들이랑 같은 수능세대인데, 왜 대입 관련한 용어나 제도를 이해할 수 없지?' 하게 되는 식이었으니... ㅠ.ㅠ

  그래서 이 드라마 완성도의 탄탄함과 한국 드라마에는 꼭 들어가 있는 삼각관계를 포함한 애정관계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시큰둥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팬들(특히 현재 고등학교 학생이거나 교사인 이들)의 반응을 보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드라마인 모양이다.

  단지, A학교에서 일어나는 1사건과 2사건, B학교에서 일어나는 3사건, C학교에서 일어나는 4사건과 5사건 식으로 이 학교 저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드라마 속 가공의 학교 한 곳에 몰아넣다 보니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라나... (이 드라마가 현실적이라니...!  대한민국 학교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거니, 혹시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는 거니? ㅠ.ㅠ)

 

  그렇게 탄탄하고 현실적이지만 몰입할 수 없었던 이 드라마에 차츰 빠져들게 된 이유는...

  일단, 매 회차마다 시청자에게 생각할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학교 졸업한지 한참 되었고 교육 분야와는 털끝만큼도 인연이 없는 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고민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두 문학 교사의 상반된 교육관이라든지, 아이들 하나 하나가 품고 있는 고민이나 비밀이라든지...  무 자르듯이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확실하게 나눌 수가 없는,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이해가 가는 현실적인 딜레마가 가슴에 와닿는다.  뭐랄까, 한 번 읽을 때는 밋밋한데 곱씹을수록 제대로 맛을 느끼게 되는 인문서적 같은 느낌이랄까? ^^ 

  그리고 또 하나... 오늘의 본론이랄 수 있는 이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두 편의 시도, 이 드라마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사실 이 두 편의 시가 결정적인 이유인 것 같다. (그깟 시가 무엇이기에...! ^^;;)

 

 

 

  먼저 2회에 나왔던 '나태주' 의 '풀꽃' 은 이 드라마 속 학생역 중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고남순'(이종석) 과 학습장애를 갖고 있는 '한영우'(김창환) 사이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시다.

 

풀꽃 


                 - 나태주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원래 특수학교를 다녀야하는 영우는, 영우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길 경우 전학을 가겠다는 각서를 쓰고서 학교를 다니는 처지다.

  그런데 같은 반의 일진들이 장애를 앓는 영우를 만만히 여기며 속칭 '삥' 을 뜯느라 괴롭힌다.  반 아이들은 모두 관여하지 않는다.  누구는 일진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에, 누구는 어리숙한 영우에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항상 성적은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일진에게 눌려 무기력하게 지내던 남순이 나서준 덕분에, 영우는 그 상황을 모면한다.

  나중에 남순이 일진에게 폭행당하게 되자, 이번에는 영우가 남순을 도울 생각으로 의자를 교실 창문에 내던진다.  그런데 하필이면, 학교 행사에 참석했던 학부모들과 교장의 눈앞으로 유리창을 박살낸 의자가 요란하게 떨어지면서, 일이 엄청나게 커진다.

 

  만일 의자를 던진 사람이 영우라는 게 밝혀지면 강제로 전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라, 남순이 대신 죄를 뒤집어 쓰려 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교육관을 가진 두 교사 정인재(장나라)와 강세찬(최다니엘)이 이 일을 놓고 옥신각신 하는 것을 교장이 우연히 듣게 되면서, 영우의 짓이라는 게 밝혀진다.  그렇잖아도 학생들의 성적과 대입 합격률에 집착하는 교장은, 차라리 이 일을 기회 삼아 학교 평균 성적을 깎아내기리만 하는 영우를 전학시키려 한다. 

 

  종례 시간, 전학이 결정된 영우가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공교롭게도, 영우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태도를 보였던 남순만이 그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 받는 상황이다.  담임교사인 정인재는 지각을 한 학생들에게 시를 한 편씩 외우게 했는데, 남순은 정인재가 영우의 일을 고자질한 것으로 오해하고 반항심에 시를 안 외웠다.  그래서 교실 뒤로 나가 벽을 보고 서있는 벌을 받게 되는 통에, 영우가 작별인사 하는 모습을 못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영우의 인사를 등 뒤로 듣고 있던 남순이, 영우가 교실을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입을 연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남순에 입에서 저 시가 나왔을 때,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남순과 영우 사이에 벌어진 일을 잘 모르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기 싫은 학교를 떠나야 하는 영우는 고마움과 아쉬움이 뒤범벅된 표정을 짓는다.  학습능력이 남들보다 처진다고 해서, 감정까지 남보다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친구에게서 따뜻한 위로와 큰 감동을 받는 영우...

  그리고 정인재의 표정이 가장 인상적이다.  은근히 자신에게 힘이 되주었던 남순이 갑자기 반항하는 것으로도 힘 빠지는 노릇인데, 담임인 자신도 모르게 결정되어 버린 영우의 전학까지 겹쳐서, 울적하던 참이다.  그런데 남순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시를 듣고 '녀석, 제법인데...' 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남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잔뜩 부운 얼굴로 시를 안 외웠다던 아이가 멀쩡히 한 편을 외우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 (비록 엄청나게 짧은 시이긴 하지만... ^^;;)  그런데 그 시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투명인간 취급받던 영우도 알고보면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내용이기까지 하니, 담임으로서 정말 뿌듯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남순이가 깊은 뜻에서 그 시를 골랐을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짤막하니 외우기 쉬워서 골랐을 것 같지만... ^^;;),

 

 

 

  그리고 10회에 나왔던 '도종환' 의 '흔들리며 피는 꽃' 은,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과열된 입시제도와 그 나이에 의당 치르게 되는 성장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다독여주고자, 정인재가 읊은 시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정인재는 교장과 학부모들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소신대로 문학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에게 문학적 지식을 달달 외우게만 하는 방식이 아닌, 문학의 참맛을 알게 해주는 방식의 수업...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며 견제하게 하는 방식이 아닌, 여러 친구가 협력함으로써 함께 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방식의 수업...  인성교육이니 정서함양이니 하는 측면에서는 분명 바람직한 수업 방식이지만,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수업 방식이다. ^^;;

 

  처음에는 아이들 성적 떨어진다며 교장과 학부모들만 반대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마저 동요한다.

  색다른 방식의 수업에 어리둥절해하거나 다소 불만을 가지면서도, 정인재가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럭저럭 따랐던 학생들이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학력평가에서 안 좋은 점수를 받고 충격을 받은데다가, 이번 학기만 지나면 고3이 되어 대학입시를 발등에 떨어진 불로 맞닥뜨리게 생겼으니, 대학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수업 방식에 불안해진 것이다.

  결국 정인재는 자신의 소신을 포기한다.  애초에 교장과 학부모의 반대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학생들을 위해서' 라는 마음 하나였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불만을 갖는다는데야, 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꺾은 정인재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자기네 반 아이들에게 시를 읊어준다.

  원래는 자신의 수업 마지막 시간에 들려줄 생각이었지만 그 수업을 중간에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율학습 시간을 이용해서 들려주기로 한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정인재가 수많은 시 중 이 시를 고른 것은, 시의 내용이 자신의 바람을 잘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등생은 우등생대로, 열등생은 열등생대로, 모범생은 모범생대로, 문제학생은 문제학생대로,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름대로의 고민을 끌어안고 사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강주라는 여학생이 정인재에게 "어른들 눈에는 아이들 일은 다 쉽게 보이나봐요." 라고 했던 것처럼, 어른들 눈에는 정말 하찮은 일이지만 그 나이에는 정말 심각한 문제일 수 있는 일들을 수시로 겪으며 상처 받는 아이들이다.

  정인재는 비록 자신을 밀어낸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이 현재의 흔들림을 극복하고 훗날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바라며 나즈막하게 이 시를 읊는다. 

 

 

 

  앞으로 세 회차 남은 이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사실 지금도 미친 듯이 푹 빠진 드라마는 아니기에 조만간 잊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 두 편의 시만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중국어 공부하면서 고전시는 일부러라도 접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현대시는 꽤 오랫동안 관심을 안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 2013' 덕분에 오래간만에 현대시 두 편을 외우게 되었으니, 이것도 드라마 시청이 가져다 준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리고 그 전에는 1년에 한두 차례 바뀌는 종로의 교보빌딩 간판에 써있는 시를 무심코 지나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에서 알게 된 나태주의 '풀꽃' 을 작년 하반기에 교보빌딩 간판에서 보게 된 뒤로는, 숱하게 봐서 별 감흥 없던 그 간판마저 새롭게 느껴진다. ^^

  이 드라마에 이 두 편의 시를 이렇게 절묘하게 끼워넣은 작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것 같다.  비록 그 작가가 이 글을 볼 일은 없을지라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