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1999, 면회

Lesley 2013. 3. 15. 00:22

 

  작년에 생겼던 무비서비스 무료관람권 4장 중 마지막 남은 것으로 '1999, 면회' 를 봤다.

  대학로 CGV 무비 꼴라쥬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정원이 50명 정도 밖에 안 될 것 같은 자그마한 상영관에서 대여섯 명 밖에 안 되는 관객과 보려니, 아주 오붓한 기분이었다. ^^ 

 

 

 

1999년에 20대였던 이들에게 이 영화를 강추하겠음! ^^

 

 

 

  ⊙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 그러나 따뜻하고 잔재미가 있는 이야기 

 

  영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세 친구의 이야기다.

  대학생 '상원(심희섭)' 과 재수생 '승준(안재홍)' 이, 재수를 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일찍 군입대를 한 '민욱(김창환)' 의 면회를 간다.  이 세 친구가 1박 2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겪게 되는 일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하지만, 친구 사이인 남자 세 명이 주인공으로 나올 때 흔히 예상하게 되는 '어마어마하고 극적인 사건' 은 없다.  다시 말해서, 사나이들간의 의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나온다든지, 피투성이 몸으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는 화려한 몸놀림을 선보이게 된다든지... 이런 장면이 없다는 말이다. ^^  여러 에피소드가 나오지만, 모두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사연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지루하냐, 그것은 절대 아니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시기에 누구나 한번 정도는 겪었을 법한 이야기이기에,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크게 빵 터질만한 장면은 없지만, 쿡쿡거릴만한 잔재미 주는 장면은 수시로 나온다. 

  초행길이라 잘못 찾아간 부대에서 "오늘 면회할 사병 중 김민욱 이병은 없다. 정말 이 연대가 맞냐?" 라는 질문을 받자, 승준이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하는 대답인즉슨 "김민욱은 연대(연세대)가 아니고 재수했다." 다. ^^;;  다소 썰렁한 웃음을 선사해줬던 이 '연대 사건(?)' 은, 나중에 민욱의 고참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사연의 복선이 된다.

  그리고 막 일병으로 승진해서 계급장을 바꿔 단 민욱에게, 승준이 "작대기가 두 개인데 왜 일병이냐?" 하고 질문하는 모습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솔직히 말해서 '작대기 하나를 일병(一兵)이라고 하고, 작대기 둘은 이병(二兵)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은 나도 오랫동안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순진한 표정으로 그런 질문하는 승준에게 동지애를 느낄 정도였다.

  또, 민욱 여자친구의 편지 문제를 놓고 상원과 승준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운전면허도 없는 민욱이 승준의 자동차를 몰고 근처를 뱅글뱅글 도는 장면도 웃음을 자아냈다.  대학 시절, 한 동기생이 부모님 차를 끌고 오자, 면허도 없는 다른 동기생이 딱 한번만 몰아보자고 사정해서는, 감히 도로로 나가지는 못 하고 넓은 공터만 빙글빙글 돌던 기억이 불러일으켜서 말이다. (단, 우스워보였던 이 장면은, 나중에 영화 마지막 부분의 반전과 맞물려 오히려 가슴 찡한 장면으로 변함.)

 

  그리고 그러한 소소한 재미가 녹아 있는 이야기에서도, 그 또래 젊은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는 고민과 상처가 엿보인다.

  민욱은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던 중, 소위 IMF 시대라고 하는 끔찍한 경제위기 시대를 맞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포기하고 입대해야 했다.  그런 민욱에게, 한번에 떡하니 대학에 붙은 것도 모자라 군대 면제까지 받았다는 상원은, 친한 친구라지만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술김에 "너는 왜 모든 게 그렇게 쉬운데?" 라고 시비거는 말에는 그런 복잡한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사실, 상원의 처지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면회가는 길에 승준에게 "집에서 이제 등록금 알아서 하랜다." 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상원 역시 IMF 시대의 그늘을 피해가지 못 한 듯하다.  하지만 내 손톱 밑에 가시 든 게 아무리 아프다 한들, 팔뼈 부러진 사람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민욱에게 "그게 내 잘못이냐?"(사실 이 대사는 잘 기억이 안 남.  "내가 뭘 어쨌는데?" 였던 것 같기도 하고... ^^;;)하고 받아치는 목소리에는, 억울함 못지 않게 친구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도 우러나온다.

 

 

 

  ⊙ 1999년에 20대였던 이들을 위한 추억의 아이콘들

 

  '1999, 면회' 속에는 1999년에 막 성인기로 접어들었던 이들을 위한 추억의 아이콘들이 주르르 나온다.

 

  영화 도입부는 주인공들의 고등학교 시절 찬송가 경연대회 장면이다.(아마 그 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인 모양임.) 

  그 때 나오는 노래가 바로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영화 '시스터 액트' 에 나왔던 'I will follow him' 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체육대회 때에도, 학생들이 수녀복 차림으로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그래서 그 장면을 볼 때 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고, 나도 모르게 최소한의 긴장조차 풀면서 좌석 뒤에 깊숙히 눌러앉게 되었다. ^^

 

  상원과 승준은 딱 그 시기 학생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무난하게 했던 옷차림새다. (아래 포스터 사진 참조! ^^)

  일단, 두 사람 모두 속칭 '떡볶이 단추 옷' 이라고 하는 더플코트를 입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남자와 여자,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가리지 않고 유행했던 옷이다. ^^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체크무늬 목도리를 하고 있다.  체크무늬 목도리는 더플코트보다 '유행 수명'(?)이 좀 더 길어서, 2000년대 중반까지도 살아남았더랬다.

 

  그리고 상원과 승준이 자동차 안에서 틀었던 것은 S.E.S의 카세트 테이프였다.

  내가 원래 대중가요와 담 쌓고 지내다시피 해서, S.E.S의 노래라고는 'Dreams Come True' 하나 밖에 모르긴 한다.  하지만 귀에 익은 그룹 가수의 이름 하나가 튀어나오고, 자동차 오디오에 그 가수의 테이프를 집어넣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옛날 생각을 하며 미소 짓게 되었다. ^^ 

 

  '다마고치' 는 아주 오랫동안 그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 영화 속에서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킬킬대며 웃었다. ^^

  민욱의 고참과 졸지에 한 방에 마주 앉게 된 세 친구가 모두 뻣뻣하게 굳어있을 때, 그 고참의 여자친구가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던 것이 바로 다마고치였다.  훗날, 지금 이 시대를 회고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영화에 이런 장면이 들어간다면, 아마도 그 여자친구는 다마고치 대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를 하게 될 것이다. ^^

 

 

 

 

이 포스터 참 귀여움.

입을 벌린 민욱도, 떡볶이 단추 코트 입은 상원과 승준도, 뒤편에 보이는 백골부대 상징물(?)도... ^^

 

 

 

  ⊙ 왜 하필이면 1999년인가?

 

  '1999, 면회' 라는 제목만 봐도 이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 내지는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군대 면회' 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겪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면회를 오든, 내가 누군가에게 면회를 가든, 어쨌거나 면회라는 일을 일생 동안 아예 안 겪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군복무 대상자 대부분이 20대의 남자라는 점 때문에, 남자들의 청춘 시절에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을 보는 순간, 누구나 이 영화가 '군대 면회라는 사건을 소재로 하고, 1999년을 배경으로 해서, 청춘 시절을 돌이켜 보는 영화'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점이 하나 있으니, 왜 하필이면 1999년이어야 했을까?

  이 영화 속 주요 소재인 '군대 면회' 라는 것도 그렇고, 그 면회 기간 동안 벌어지는 온갖 일들(즉, 친구간의 우정과 갈등, 첫사랑의 실패로 인한 괴로움, 어르신들은 좋은 때라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현실의 벽에 부딪치며 겪게 되는 암담함)도 그렇고, 결코 1999년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1989년에도, 1979년에도, 그리고 1969년에도, 이 땅의 청춘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저런 일을 겪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 굳이 1999년이어야 했을까? 

  짐작컨데, 8.15 해방이나 한국전쟁처럼 하늘과 땅이 완전히 뒤집혀지는 사건이 벌어진 경우를 뺀다면, 20세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가 1999년(또는 1999년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후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단,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는 1997년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 전에도 부도니 파산이니 하는 말을 신문이나 뉴스에서 종종 접했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기아자동차가 부도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기아자동차와 털끝만큼도 관련 없는 일개 대학생이었던 나조차 '정말로 우리나라가 망하려나 보다.' 하고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단국대학교의 부도 소식까지 맞으면서, 기업 뿐 아니라 학교도 부도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기도 했다.

  내 주위에, 혹은 한두 다리 건너서, 영화 속 민욱처럼 가정 형편상 일찌감치 입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역시 민욱의 아버지처럼, 개인 사업을 하던 사람이 거래처의 부도에 휘말려 연쇄부도를 맞고 교도소로 가거나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런 경제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일상 생활은 IT 기기의 발전으로 무섭게 변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PC통신이 인터넷으로 바뀌고, 컴퓨터는 '그들만의 세상' 에서 '모두의 세상' 에 속하는 물건이 되었다.  아직은 개인용 컴퓨터를 장만하지 못 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PC방이라는 신통방통한 장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누구나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일명 삐삐라는 무선호출기는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만 해도 아직 사치품에 속했는데,1990년대 후반에는 말 그대로 '천하를 평정'(!) 했다.  교정 안 공중전화기 앞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누군가 보낸 삐삐를 확인하거나 누군가에게 삐삐를 남기기 위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덕분에 공중전화카드도 덩달아 잘 팔렸고, 설문조사원들이 설문조사에 응해주는 이에게 답례로 공중전화카드를 주기도 했다. ^^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은 삐삐에게 가장 찬란한 시기이며 동시에 내리막길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티폰이라는 것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이전보다 훨씬 저렴해진 휴대폰이 야금야금 삐삐의 영역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 학생들이 등하교길에 휴대용 카세트로 음악을 들을 때, 휴대용 CD 플레이어로 음악 듣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기도 했다.    

 

  그렇게 1999년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했다...!

  IMF로 대표되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어둠과,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기술 발달이라는 빛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갑자기 몇 단계나 내려앉은 현실에 힘들어하면서, 동시에 눈부신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카세트니 공중전화니 하는 아날로그적인 것들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대신 인터넷이니 휴대폰이니 하는 디지털적인 것들이 대세를 이루며 자리 잡아 갔다.  그래서 공중전화기를 찾아 헤매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전화를 할 수 있다는 데 엄청난 편리함을 느끼면서도, 친구나 연인이 삐삐를 통해 호출했을 때 공중전화기를 찾아다니면서 '무슨 일일까?' 하고 궁금해하던 설레임을 잃었다.   

  한 마디로 빛과 어두움, 편리함과 아쉬움이 뒤범벅이 되었던 시절이 1999년이 대표하는 1990년대 후반이었다.

 

 

 

  ⊙ 조금은 따뜻하고 조금은 아팠던, 잔잔한 반전

 

  상원과 민욱 모두 이 면회 기간 동안 청춘 시절의 첫사랑으로 아파했다.

  환상 속의 사랑이냐, 현실 속의 사랑이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상원은 우연히 마주친 옛 첫사랑의 그림자를 붙들고 환상 속에 빠진다.  그리고 12시 종이 땡 치고 마법이 깨진 순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신데렐라처럼, 냉정한 현실에 부딪치며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 민욱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귀던 첫사랑을, 역시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잃게 된다. 

 

  1박 2일 동안 상원과 승준을 티격태격하게 했던 민욱의 여자친구 문제는 너무 어이없이 끝나버린다.

  두 사람은 민욱과 헤어진 후에야, 민욱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민욱은 속으로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면서도, 자기 옆에 있어준 친구들 모르게 혼자서 그 아픔을 삭인 것이다.

  민욱이 상원과 승준에게 몰래 남겨준 것들은, 휘발유가 없어 길바닥에 주저앉게 생긴 두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것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의 횡재에 기뻐하지 못 한다.  오히려, 자기들이 어찌해야 하나 노심초사 했던 일을 민욱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데 허탈해 하고, 자기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었던 민욱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먹먹해 한다.  민욱이 남긴 것들이, 그저 자신을 위해 무리해서 돈을 쓴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신세 갚기 위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버린 첫사랑을 잊겠다는 가슴 아픈 결심도 담고 있음을, 두 친구는 너무 잘 알고 있었을테니까... 

 

  그렇게 이 영화는 20살 청춘들의 아픔, 위로, 치유가 뒤범벅된 작은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막 청소년기를 벗어난 이 어리숙한 친구들은, 청춘의 아픔을 비록 서툴긴 하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위로하고 치유한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상처가 깨끗이 낫지는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그 상처로 인한 흉터를 지닌 채 또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갈 수 밖에...  1999년의 다른 청춘들, 그리고 다른 시기의 비슷한 또래 수많은 청춘들 역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