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러브레터(Love letter) - 14년만에 다시 접한 영화

Lesley 2013. 2. 21. 00:12

 

  지난 주, 용산 CGV에서 있었던 일본영화 '러브레터' 의 시사회에 다녀왔다.  

  이 영화는 1995년 일본에서 개봉했던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1999년에 개봉했다.  그런데 어떤 사정에서인지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 맞추어 재개봉하게 되었다.  운 좋게도 시사회에 당첨되어(올해 들어 첫 번째 시사회, 작년 것까지 합치면 네 번째 시사회... ^^), 무려 14년만에 다시 봤다. ^^

 

 

 

 

 

  영화관에서 최초로 감상했던 일본영화, 러브레터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관람에 얽힌 사연을 올리며 소개했듯이, 1998년에야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이 실시되었다.  '타이타닉' 과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의 불법(!)관람에 얽힌 추억 (http://blog.daum.net/jha7791/15790903)

  즉, 1998년 이전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일본 영상물을 접하는 게 불가능했다.  또한 개방 정책이 단계적으로 실시되었는데, 개방 초기에 허용된 작품들은 무슨 국제영화제 같은 데에서 수상한 '예술성 높은 영화'(바꿔 말하자면, 많이 지루한 영화... -.-;;) 밖에 없었다.  그러니 수입해오는 일본영화마다 죄다 파리 날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1999년에 개봉된 이 러브레터 덕분에, 한국에서 벌어지던 일본영화 참패의 신화(?)가 끊겼다.  러브레터는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첫 일본영화였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 영화의 불법 VCD와 비디오 테이프가 엄청나게 돌았는데도 뜻밖에 흥행에 성공했다고, 신문과 잡지에 기사가 날 정도였음. ^^;;)

 

  감동적이면서도 재미있다는 입소문에 솔깃해서, 나도 친구를 끌고 영화관으로 갔다.

  일본영화는 엄청나게 난해하거나 엄청나게 야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선입견 갖고 있던 나에게, 러브레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화면 한가득 펼쳐지는 일본 북해도의 설경...  오프닝부터 웅장하면서도 슬프게 깔리던 배경음악...  한국영화와는 다르게 느릿느릿 전개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던 줄거리...  전체적으로 잔잔하면서 간간히 웃음 터지게 했던 소소한 코믹적 요소들...  그 때까지만 해도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무 자르듯이 확실하게 결말 보여주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반은 슬프지만 반은 따뜻했던 결말...  정말이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 14년 전에는 놓쳤던 장면들

 

  똑같은 영화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이 영화 또한 그랬다.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나의 관점이나 감수성에 변화가 생긴 탓도 있겠지만, 14년 전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뭣 모르고 봐서 더 그러했을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머리 굴려가며 봐야 하는 복잡한 스릴러 영화도 아니건만, 초반부는 무슨 퍼즐 맞추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봤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그저 감동적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갔기 때문에,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 가 1인 2역으로 나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보통,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어떤 배우가 1인 2역 맡게 되면, 머리 모양 등 외모를 다르게 하는 방법으로 두 사람이 별개의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 속 나카야마 미호는 이 역할에서도 저 역할에서도 똑같은 머리 모양으로 나왔다.  그래서 영화 앞부분을 보는 내내 내용은 이해 못 한 채, '아니, 쟤는 왜 여기 나왔다, 저기 나왔다...  성격도 이랬다, 저랬다... 이 영화 뭐냐?'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

 

  14년 전 그렇게 내용 전개를 못 따라잡고 헤매느라 세세한 내용을 많이 놓쳤던지, 이번에 두 번째 보는 영화인데도 '앗, 저런 장면도 있었구나.' 싶은 부분이 있었다.

  가령,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 가 죽은 '후지이 이츠키' 의 문제로 갈등 어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랬다.  두 사람의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정이 잔뜩 실린 표정이나 섬세한 눈빛도 좋았고, 어두운 아키바의 작업실 속 유일한 불빛인 작은 가마의 불길 때문에 두 사람 얼굴에 진한 음영이 드리우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히로코가 이츠키의 어머니에게 "이츠키가 나와 사귀었던 이유가, 중학생 때 좋아했던 여학생과 내가 닮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정말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어요." 라고 할 때, "중학생을 질투하는거니?" 하고 묻던 이츠키 어머니의 복잡한 눈빛도 인상적이었다.  만일 이츠키가 그렇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이츠키와 히로코는 틀림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이츠키가 죽고 몇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이츠키를 잊지 못 하고, 이츠키의 중학 시절 첫사랑을 질투하는 히로코를 보는 기분이 어땠을까...  한편으로는 아들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이 너무 고마웠을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순수한 연인을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이 너무 안타까웠을 것이다.

 

 

 

  ⊙ 1999년의 감상 포인트 - 옛 연인의 그림자

 

  14년 전에는 히로코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봤다.

  죽은 옛 연인과 현재의 연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그 미묘한 상황에 눈길이 쏠렸다.  사실, 현실에서 누군가가 히로코처럼 행동한다면, 아직 옛 연인을 못 잊었으면서 외로움은 싫어서 어.장.관.리. 차원에서 아키바를 붙들고 있다고 욕먹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게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 식으로 딱 부러지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히로코 뿐 아니라 아키바 역시 이츠키 생전의 가까운 사람이었다기 때문에, 상황이 더 미묘해진다.  아키바가 옛 연인 이츠키의 절친한 친구라는 점과, 이츠키가 죽게 된 조난사고 때 아키바 역시 함께 등반에 나섰던 사람 중 하나였다는 점은, 히로코와 아키바 모두 죽은 이츠키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아니, 어쩌면 히로코가 아키바와 사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키바 역시 이츠키의 추억을 공유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 중에, 자신보다 이츠키를 더 오래 알고 지낸 아키바에게서, 자신이 모르는 이츠키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히로코가 '또 다른 이츠키' 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츠키의 그림자에 연연해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여자 이츠키(죽은 연인의 중학교 동창)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남자 이츠키(죽은 연인)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그가 과거에 살았던 집으로 편지를 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 이츠키와의 편지 연락이 우연에서 필연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자신이 몰랐던 시절의 남자 이츠키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히로코라는 캐릭터에 몰입해서 영화를 감상했기에, 히로코가 후반부에 나온 장면이 더욱 감동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겡끼데스~" 라는 대사는 다 알 정도로, 그 장면은 유명했다.  영화를 안 본 이들에게는, 일본어로 된 저 대사가 그저 재미있기만 했을 것이 분명하다.  혹은, 그 재미있다는 생각에, 새하얀 북국의 설경과 그 설경 속에서 소리치는 예쁘장한 여주인공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감정 정도나 하나 더 얹어 느꼈을테고...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입장에서는, 너무 간단해서 좀 우습게 들리기까지 하는 저 일본어 대사가 영화 속 메아리처럼 머리 속에서 계속 울릴 정도로,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저 평범한 인삿말은, 히로코가 몇 년 동안이나 떨쳐내지 못 했던 죽은 연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그 연인에게 고하는 마지막 인사였고, 동시에 그 연인 없이도 반드시 행복하게 지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 2013년의 감상 포인트 - 사춘기 아이들의 미묘하고 서툰 풋사랑

 

  하지만 이번에는, 두 이츠키의 중학교 시절 미묘하고도 서툰 풋사랑 이야기에 더 눈길이 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자 이츠키 쪽에...)

  14년 전 이 영화를 볼 때에는, 두 이츠키의 사연을 그저 학창 시절 웃긴 추억담 정도로만 보고 재미있어 하며 봤더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겉으로 드러난 소소한 재미들 뿐 아니라, 그 아래 숨겨진 두 사춘기 아이들의 복잡하고 미묘하고 모순된 감정선도 보였다. (역시...! 전에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내가 나이가 든 게 맞아~~! ^^;;)

 

  남자 이츠키는 자신이 여자 이츠키를 좋아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저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

  남자 이츠키의 그러한 심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굳이 진한 여운이 남는 마지막 장면까지 볼 필요도 없다.  여자 이츠키의 회고로 나오는 중학교 시절만 봐도 명확한 사실이다.  놀림감이 되어 우는 여자 이츠키를 계속 놀리는 다른 남자아이에게 싸움을 거는 것을 봐도 그렇고,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를 짝사랑하는 다른 여자아이의 큐피드 역할을 할 때 화난 태도로 책을 쾅 내려놓는 것을 봐도 그렇다.

  특히나 교통사고를 당해 깁스한 다리로 달리기 경주에 나서는 부분은, 첫사랑을 하게 된 사춘기 소년의 모순된 심리(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죽어도 자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오기 +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싶은 나머지 위험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무모함)를 잘 보여준다.

 

  그에 비해 여자 이츠키는, 자신이 남자 이츠키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같은 여자아이도 아니고 하필이면 남자아이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중학교 3년 내내 놀림 받으며 지냈다.  덕분에 여자 이츠키에게 남자 이치키는 '나에게 딱히 피해를 준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그 애의 존재만으로 나에게 피해가 되는 인물' 로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창 예민한 이 사춘기 소녀는, 놀림받는 게 끔찍하게 싫어서 남자 이츠키와 얽히는 상황을 그저 피하고 싶었을 뿐, '저 애가 혹시 나를 좋아하는거 아닐까?' 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못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 했으면서, 자신도 무의식 속에서 남자 이츠키를 좋아했다.

  자기가 결석한 사이 남자 이츠키가 전학갔음을 알고는 남자 이츠키 책상 위의 꽃병을 박살내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여자 이츠키 스스로도 깨닫지 못 했던 여자 이츠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남자 이츠키는 일부러 여자 이츠키네 집을 찾아가서까지 작별을 고했다.  문제는 너무 '자기만의 방식' 으로 한 인사라서, 여자 이츠키는 그것이 작별 인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는 점이다. ^^;;  오히려 학교에서와는 달리 둘이 함께 있어도 놀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뚝뚝한 남자 이츠키와 몇 마디 주고받으며, 처음으로 편한 웃음을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 이츠키에 대한 호감이 처음으로 무의식 단계에서 의식 단계로 올라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가능성이 보이려던 순간에 그 호감의 대상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엄청난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차라리 그 동안 남자 이츠키에게 아무런 호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남자 이츠키가 갑자기 떠났다고 해서 꽃병을 바닥에 내던질 정도로 화를 냈을 리 없다.  그렇게 막 의식 단계로 올라서려던 첫사랑의 감정은, 다시 무의식 세계로 잠겨 버렸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미처 깨닫지 못했던 첫사랑의 기억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에게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알리려다 그만 두었다.

  영화에서는 그 이유가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남자 이츠키와 오랫 동안 연락 없이 지낸 여자 이츠키에게 대뜸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히로코가 아직 마음 속에 남자 이츠키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그냥 싫어서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여자 이츠키는 우연히 만난 중학교 때 선생님에게서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듣게 되고, 곧 자신도 저승 문턱까지 다녀 오게 된다.

  여자 이츠키가 영화 앞부분에서부터 심한 감기를 앓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워질 지경까지 병세가 악화된 것이, 그저 추운 북해도의 날씨 속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남자 이츠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으로 심한 심적 타격을 받은 듯하다.  만일 남자 이츠키가 '수많은 동창생 중 한 명' 일 뿐이었다면, 그의 죽음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병세가 그토록 갑잡스레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일로 자신에게 남자 이츠키가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 같기는 한데, 남자 이츠키에게도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여전히 알지 못 한다.  그래서 히로코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  "(남자 이츠키가) 대출표에 쓴 이름이 정말로 그의 이름이었을까요?" 라고 귀뜀해 줄 때,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어린 후배들에게서 책을 한 권 받으며, 드디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 책이, 도서관의 하고 많은 책 중 하필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책의 대출표 뒷면에 연필로 그린 그림은 분명 중학교 시절 여자 이츠키의 모습이다.  또래 학생들이 절대 안 보는 특이하고 어려운 책만 대출해 가면서,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여자 이츠키에게 '대출표에 이름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 라는 유치한 답을 줬던 남자 이츠키...

  남자 이츠키가 대출표에 남긴 '후지이 이츠키' 란 이름은, 히로코가 추측한대로 남자 이츠키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까지 못 잊은 나머지, 쌍둥이처럼 닮은 히로코에게 첫만남의 자리에서 대뜸 사귀자고 했을 정도로 내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던, 바로 그 첫사랑 여자 이츠키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많이 어리고, 많이 서툴고, 많이 수줍었던 두 이츠키 사이의 '잃어버린 시간' 은, 10여년의 세월이 지나 아련하고도 코끝 시큰한 기억과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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