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베를린

Lesley 2013. 2. 10. 00:12

 

※ 아직 개봉중인 영화라서, 최대한 줄거리를 생략해가며 감상을 썼다.  하지만 그래도 줄거리를 절.대.로. 알고 싶지 않다는 분은 '뒤로가기' 키를 살포시 눌러주시기를... ^^

 

 

  현재 흥행몰이 중인 영화 '베를린' 을 봤다.

  이 영화의 장르는 첩보물 및 액션물이다.  그리고 영화의 장소적 배경이 냉전시대 독일 동서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이다.  또한 주인공들은 남한과 북한의 첩보요원들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감독한 류승완 감독의 전작이, 조직간 그리고 조직속 음모와 힘겨루기를 빠른 전개로 다루었던 '부당거래' 다.

  이쯤되면 이 '베를린' 이 어떤 영화일지,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대충 예상을 하게 된다.  보나마나 '남북 양쪽의 첩보요원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펼치는 숨막히는 두뇌싸움과 액션, 그리고 그 속에서 배어나오는 분단의 아픔과 비극...' 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뻔한 예상을 뒤집어 엎는다...!

     

 

 

 

◎ 장점 : 첩보물로서의 요소를 충실히 갖춘 영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영화가 엄청나게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한국영화 하면, 무슨 엿가락처럼 축축 늘어지는 전개에, 뒤로 갈수록 너무 뻔하게 결말이 다 보이는 내용 때문에 '이래서 한국영화는 영화관 가서 돈 주고 보면 안 돼, 명절 때 TV에서 해주는 걸로나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영화는 내용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나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  이 영화 역시 관람하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영상이 빼어나다.

  하긴 이 영화 아니더라도 요즘 영화는 디지털 영화라서 그런가, 다들 어느 수준 이상의 영상미를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이 영화 같은 경우는, 베를린이라는 배경을 엷은 푸른색 도는 금속빛으로 잡아내어, 그 영상이 더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베를린은 우리나라의 대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일단 외국 도시라서 당연히 거리 풍경이 다르기도 하지만, 서울처럼 최첨단 설비로 치장된 고층건물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묘하게 신비한 느낌을 주는 도시다.  그런 이국의 도시를 쇠붙이 색깔이라고 해야 하나, 차가운 금속빛에 엷은 파란톤을 섞은 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차가우면서 선명한 색으로 잡아내는 것이, 이 영화의 무겁고 묵직한 내용(음지에서 활동해야 하는 첩보요원들, 같은 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과 어울렸다.

 

  그리고 액션이 정말 화려하다. 

  총싸움이든 몸싸움이든, 영화 속 액션들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으면서 속도감이 넘친다.  물론 액션장면을 맡은 대역배우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눈부시게 발전한 카메라 기술 및 CG의 효과를 톡톡히 보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평범한 관객의 눈으로 봤을 때, 어디까지가 주연배우들의 열연이며 어디서부터가 그런 연기 외적인 요소에 힘입은 부분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그만큼 연출이나 편집 수준도 우수하다는 말이 된다.

 

  또한 줄거리나 내용 전개 방식도 크게 흠잡을 데가 없다.

  이 감상문 앞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남북한 양쪽의 첩보요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때 관객들이 예상하게 되는 뻔한 내용을 탈피했다는 점이 참 좋았다.  처음에는 북한의 무기거래 및 그것을 막으려는 남한의 개입으로 시작하지만, 곧 김정일이 남긴 비자금에 관한 정보를 두고 벌이는 첩보전으로 바뀐다.  영화는 아직 초반부일 뿐인데 반전이 너무 빨리 일어난 게 아닐까 생각할 때, 그 반전이 또 다른 반전을 부르며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그렇게 반전이 거듭되면서, 남북한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첩보기관까지 얽혀드는 복잡하면서도 탄탄한 내용이 숨쉴 틈도 안 주고 전개된다.  덕분에, 관객 입장에서는 2시간의 상영시간 동안 내용 따라잡기가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중반부까지는 잠시라도 다른 생각하면, 영화 내용을 못 따라가는 수가 있음!)

 

  우리나라 영화의 질이 높아졌다지만, SF 부분과 첩보물 쪽에서는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 내가 본 영화만 놓고 말하자면, 그러함!)

  그런데 이 '베를린' 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첩보물인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와 견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첩보물이 갖추어야 하는 필수요소(서로 다른 국가 또는 조직에 속한 충실하고 능력 있는 첩보요원들의 대치, 배신과 음모, 복수, 반전, 액션) 중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갖췄다.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한국영화 중에서 이 영화를 넘어서는 첩보물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첩보물을 즐기는 이 또는 한 조직내에서의 배신과 음모를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이 영화를 강추한다!

 

 

 

단점 : 빈약하게 설정된 정진수의 캐릭터, 희미하게 표현된 표종성-련정희의 심리적 갈등.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니,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2시간짜리 영화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것은, 영화에 득이 되기도 했지만 해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거리가 풍성하기에, 첩보물 특유의 속도감 있는 전개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연을 한정된 시간에 구겨넣으려니, 세세한 면까지 다 살리지는 못한 것 같다.

 

 

  ⅰ. 우선, 주요인물 중 하나인 정진수(한석규)가 여러가지로 좀 어정쩡하게 나온다.

 

  영화의 주요인물들이 남북한 첩보기관의 요원들이건만, 남북간의 대치상황이 영화 속에서는 무척 희미하게 나온다.

  영화 도입부에서는 양쪽의 불꽃 튀는 첩보전이 등장했지만, 그게 영화 속에 나타나는 남북간 대결의 전부다.  물론 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북한 내부의 이권다툼에 얽힌 음모' 이기 때문에, 남북간의 갈등이 큰 존재감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 줄거리에서 남북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정진수(한석규)를 굳이 남한의 첩보요원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정진수를 한국과 독일을 오가는 사업가 또는 독일로 유학갔다가 독일 학계에 자리 잡은 학자 정도로 설정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해서 남한쪽 첩보기관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 부분을 과감히 들어내고, 주요 줄거리인 북한쪽 내부문제 부분에 좀 더 시간을 할애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속도감 있는 전개는 최근의 관객들 취향에 잘 맞았지만, 단순한 액션물이 아닌 여러 차례 반전이 일어나는 내용을 너무 숨가쁘게 진행하는 통에, 영화 끝나고서 좀 멍해지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정진수란 인물의 캐릭터도 애매하다.

  정진수는 '빨갱이 새끼' 란 말을 한국어와 영어 양쪽으로 달고 사는, 북한에 대한 적의로 철저히 무장된 인물이다.  더구나 표종성(하정우)으로 인해 함께 목숨 걸고 일하던 동료가 장애인이 되어,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  그런 정진수가 표종성을 돕게 되는 경위가 좀 개연성 없다.

  물론, 북한을 위해 목숨 내걸고 첩보활동 하던 표종성이 북한 정치인들의 더러운 이권놀음에 휘말려 억울하게 숙청당하게 생긴 상황을 다 알게 되었으니,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연민 정도는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평생 '북한 = 적' 이라고 생각하며 대북첩보활동 최전선에서 뛰었던 요원이, 그저 "도와주면 전향하겠다" 는 적의 말 한마디에 그 적을 돕겠다고 나서다니, 이게 말이 되나...  역시 정진수를 첩보요원보다는 사업가나 학자 등 민간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ⅱ. 또한, 표종성(하정우)와 련정희(전지현)의 심리가 세밀하게 나오지 못 했다.

 

  이 영화가 '정치인들 이권다툼에 얽힌 음모' 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데에만 너무 집중해서 그런지, 그 큰 그림 속에 담겨진 개인들의 사연을 도외시 했다는 느낌이 든다.

  위에 이미 쓴 것처럼, 차라리 남한쪽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부분을 많이 줄이고, 북한 내부 음모의 희생양이 되는 표종성과 련정희의 이야기를 좀 더 보강했더라면 좋았을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를 끝까지 보았을 때, 분명 두 사람 사이에는 부부로서의 끈끈한 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뭔가 구멍이 뚫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만나 어떤 과정을 거쳐 부부가 되었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 모두 베를린에서 북한의 대외공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애결혼이 아닌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은 부부이건만, 항상 사적인 감정보다는 공적인 임무를 먼저 생각하며 삭막하게 살아야 했다.

  그렇게 딱딱한 부부생활을 하던 이들의 마음 속에 사실은 서로를 향한 애정이 있었음을,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항상 임무를 우선으로 하고 살았기에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몰랐음을, 두 사람이 음모에 걸려들기 전에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줬어야 했다.  "국가도, 당도, 인민도 나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래서는 안 되는거 아닙니까?" 라는 련정희의 말이 가슴 아프게 와닿기 보다는 다소 뜬금없이 들렸던 것은, 이 부부 사이의 심리갈등에 대한 떡.밥.이 영화 초반부에 제대로 깔려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열린 결말, 그리고 기대되는 후속편

 

  이 영화는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보이는 '열린 결말' 로 막을 내린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았을 때, 어차피 해피엔딩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새드엔딩을 예상했다.  하지만 새드엔딩이 아닌 열린 결말로 끝났다.  영화를 다 보고서 생각해보니, 새드엔딩도 좀 이상할 것 같기는 하다.

  원래, 적인 줄 알았던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이에게 당하는 것보다,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이에게 당하는 것이 훨씬 뼈아픈 법이다.  적이 나를 해치려 하는거야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살기 위해 적을 무찌르면 그만일 뿐, 적에게 감정적으로 격앙될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러나 내가 위험할 때 나를 도와줄 것이라 믿었고 또 내 쪽에서 항상 충실히 대했던 내 편이 나를 해치려든다면, 그것은 분노를 넘어서는 배신감으로 치를 떨 일이다.  그러니  표종성 같이 조직과 임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평생을 산 사람이라면, 그 조직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았으려들 때, 절망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 표종성이 앞으로 복수를 하려고 하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되는 열린 결말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또한 이 열린 결말이 후속편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으로서 더욱 환영이다.

  내가 본 첩보물 중 최고였던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는 영화 내용 자체도 좋았지만, '원래 후속편은 본편보다 못 하다' 는 속설을 깨뜨리는 시리즈라 더 좋았다.  만일 이 영화의 후속편이 제작되고, 그 후속편의 질이 이번 본편만큼만 된다면(물론 위에서 말한 단점들을 보강해서 더 나아진다면, 더 좋고... ^^) 나는 기꺼이 후속편이 개봉하는 날 영화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