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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라이프(A Simple Life / 桃姐)

Lesley 2013. 1. 6. 00:28

 

  지난달 초에(...라고 쓰고 보니, 이미 작년이군... ^^;;) 친구가 영화 한 편 보여준다며 나를 불러냈다. 

  어떤 영화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덮어놓고 광화문 근처 씨네큐브로 오라고 했다.  공짜로 영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 역시 굳이 어떤 영화인지 따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고... ^^  그 날 친구가 씨네큐브에서 보여준 영화는, 왕년의 홍콩스타 류덕화(劉德華)와 좀 낯선 배우 엽덕한(葉德嫻) 주연의 '심플 라이프' 였다.

 

 

  ※ 씨네큐브

 

  '씨네큐브' 는 광화문역 근처 흥국생명 지하에 있는 작은 영화관이다.

  흥국생명이라고 하면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도, 광화문역에서 서대문역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보이는 엄청나게 크고 움직이는 검은색 조형물인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 이 있는 건물이라고 하면 다들 '아, 거기~~' 하며 알아듣는다.  (그런데 몇몇 지인에게는 이 망치질 하는 사람이 '모가지 긴 에일리언' 으로 통하고 있으니... ㅠ.ㅠ)  씨네큐브에서는 CGV나 롯데시네마 같은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상영 기회 얻기 힘든 소자본 영화 또는 예술 영화 등이 상영된다.  그래서 다른 영화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일단 관객들의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고, 이제는 일반화된 디지털 영화가 아닌 필름 영화를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서 약간 거칠면서도 정겨운 영상을 즐길 수 있으며,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내 불을 켜지 않고 나가는 관객도 적어서 영화의 여운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상영관이 두 개 뿐인데 서너편의 영화를 걸어놓으려니 상영시간이 다양하지 못 하다는 것이다.  하긴, 영화관 입장에서는 돈이 안 되는 영화이거만, 그래도 관객에게 관람의 기회 주었으니 감사한 마음 가져야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

 

 

 

잔잔하고 소소한 내용이면서도, 여러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심플 라이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잔잔한 이야기

 

  잔잔한 영화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이 영화의 줄거리도 비교적 간단하다.  

 

  홍콩에서 잘 나가는 영화 제작자 '로저(류덕화)' 는 늙은 가정부 '아타오(엽덕환)' 와 둘이서 살고 있다.

  아타오는 중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친부모를 잃고 양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로저네 집안 식모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로저의 할머니, 로저의 부모, 로저와 그 누나, 누나의 아들 등 무려 4대에 걸쳐셔 이 집안 사람들을 위해 일을 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홍콩인들이 이민을 떠날 때, 로저의 식구들도 모두 미국으로 갔다.  이제는 바쁘게 홍콩과 중국 본토를 넘나들며 영화일을 하는 로저와, 항상 로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는 아타오, 그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로저는 자기 어머니와 동갑이며 자신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아타오에 대해서 무관심한 편이다.

  딱히 로저의 성격이 차갑거나 아타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공기나 물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물질이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그 소중함을 못 느끼는 것과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아타오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들의 일방통행식 관계는 음식 하나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아타오가 로저를 위해 요리할 때면, 생선 하나 마늘 하나 고르는 데에도 주위 사람들이 우스워 할 정도로 까다롭게 공을 들인다.  거짓말 좀 보태면, 로저의 음식에 임금님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 만드는 수준으로 정성을 들인다.  그런 음식을, 로저는 신문이나 읽으면서 아무런 감흥 없이 먹는다. 

 

  70세가 넘은 아타오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로저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면서, 이들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그 동안 아타오를 마치 집안의 가구처럼 무심히 대하며 일에만 몰두해 살았던 로저는, 비로소 아타오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 후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부지런히 아타오를 찾아가, 아타오의 요리솜씨가 얼마나 그리운지 말하고 옛 추억을 나누며 따뜻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타오는 입으로는 바쁘니까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만, 막상 로저가 찾아오는 날이 되면 평소보다 신경쓴 옷차림으로 요양병원 입구에서 로저를 기다린다.  같은 요양병원의 환자들이 로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자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난감해 할 때, 로저가 아주 당연히게 "양아들이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이 자존심 강하면서도 여린 속내를 지닌 노파의 얼굴에는 뿌듯한 표정이 스친다.  그리고 로저가 (아마도) 처음으로 자기 영화의 시사회에 아타오를 초대하여 영화계의 유명인사들 앞에서 "내 양아머니다." 라고 소개할 때, 아타오는 어린 아이 같은 자랑스러움과 설레임을 감추지 못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타오의 병세는 악화되고, 결국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아타오의 장례 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귀가하던 로저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로저의 환상일 수도 있고 옛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아파트 창문에 걸터앉아 로저를 기다리다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로저를 보고 얼른 저녁식사 준비를 하러 가는 아타오의 모습이 보인다. 

 

 

 

⊙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주제 말고도, 놓칠 수 없는 소소한 것들이 존재했던 영화 

 

  이 영화는 복잡하고 심오한 영화가 아니라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주 명확하다.

  '가족이란 반드시 핏줄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정과 추억으로도 가족이 될 수 있다.' 정도로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표면상에 드러나는 그러한 주제 말고도, 비록 소소하기는 하지만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운 것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 홍콩영화가 아시아를 휩쓸던 시절에 홍콩영화계를 빛냈던 인물들이 줄줄이 나온다.

 

  영화 초반부, 영화 제작 관련해서 몇몇 인사들이 베이징에서 만나 의견충돌을 빚는 장면과 나중에 뒤풀이로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에는 홍콩영화팬들에게 눈에 익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웅본색, 동방불패, 첩혈쌍웅 등 한 시절을 풍미한 영화를 제작 또는 감독했던 '서극' 과 역시 그 시절에 액션스타로 활동했던 '홍금보' 가 그들이다.  또한 로저가 요양병원에 대해 알아볼 때 우연히 마주치게 된, 과거 영화계 인사였던 인물은 '무간도' 시리즈에서 경찰로 나왔던 '황추생' 이다. 

 

  영화 속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는 않다.

  아마도, 실제로 홍콩영화계에서 영향력 높은 제작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유명 영화인들이 우정출연 내지는 특별출연 형식으로 잠시 얼굴을 비춘 듯하다.  어쨌든 간에 한 때 홍콩영화를 무척 즐겼던 사람으로서 잠시나마 낯익은 인물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 

 

 

  둘째, 우리나라에서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다름 없는 '고령화 시대' 의 그늘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아타오가 들어간 요양병원을 가득 채운 노인들은 분명히 조연급 내지는 단역 수준의 역할이다.

  하지만 잠깐씩 나오는 그들의 사연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을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우선 아타오가 막 요양병원에 들어왔을 때 친절히 대해줬던 할머니를 보자.

  다른 노인들에 비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해 보이고, 행동거지나 옷차림도 점잖다.  하지만 이 할머니를 찾아온 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푸념은, 이 할머니 역시 나름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세대인 우리네 할머니들이 그러했듯이, 이 할머니도 딸보다는 아들을 편애해서 전 재산인 집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재산만 물러받고 어머니는 나 몰라라 한 채 냉큼 중국 본토로 이주해서, 딸과 분담하기로 한 요양병원비도 내지 않고 전화도 일부러 안 받고 있다.  그렇게 아들만 챙기더니 이게 뭐냐며 분노를 터뜨리는 딸 앞에서,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한다. 

 

  그리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같은 요양병원 노파들에게 추근덕대는 할아버지는 어떤가...

  이 할아버지는 로저나 아타오에게 급한 일에 필요하다며 돈을 빌려서 젊은 여자와 성매매를 하러 간다. -.-;;  처음에는 추하게 행동하는 그 할아버지에 대해 아타오도 경멸하는 티를 있는대로 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돈의 용처를 알게 된 로저가 할아버지에게 돈 빌려주는 것을 거절하자, 아타오 쪽에서 오히려 돈을 빌려주라며 로저를 타이른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때 즐길 수 있도록 두라고...

  아타오의 뜻은, 노인들도 성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식의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도 불쌍한 인생이지. 갈 날도 머지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라도 위안을 찾는다면 된 것 아니겠니.' 하는 측은지심과 동정이 뒤섞인 말투다.

 

  또한 온통 노인만 우글거리는 요양병원의 유일한 젊은(?) 환자의 사연도 우리 주변에서 가끔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중년의 딸과 노모가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것을 보고, 아타오는 딸이 어머니를 면회왔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건낸다.  하지만 알고보니 거꾸로다.  딸이 만성질환을 앓고 있어서 항상 간호해 줄 이가 필요한데, 어머니도 이미 노인이어서 딸을 돌볼 수가 없다.  그래서 요양병원에 딸을 입원시켜놓고 노모가 종종 면회를 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어머니는 딸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 뜨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딸의 마지막 가는 길과 그 후의 장례를 자신이 손수 챙겨줄 수 있으니 말이다. 

 

 

  셋째, 한국식 돌잔치가 등장한다! ^^

 

  로저의 조카인 제이슨(제임스였나? 그냥 제이슨이라 치고... ^^;;)의 아들이 첫돌을 맞게 되자, 로저 집안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인다.

  그 잔치의 사회자 입에서 좀 익숙한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처음에는 귓등으로 흘러들었다.  이 영화가 홍콩영화라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당연히 자막을 통해 이해하고 있었기에, 소리보다는 글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잔치 사회자가 하는 말이 "한국에서는 아이의 첫 번째 생일에 여러 물건을 차려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에 따라 아이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라고 자막으로 풀이되는 것을 보고서야, 그 익숙한 말이 어색한 발음과 억양의 우리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더니 기념사진 찍을 때에는, 한 중년여인(로저의 누나, 즉 아기의 할머니)이 우리 한복을 차려입고서, 역시 전복을 깜찍하게 차려입고 복건까지 쓴 이 잔치의 주인공 아기를 안고 있는 장면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 부분에서 상영관 여기저기에서 가볍게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느낀 순간이었다.

 

 

  넷째, 류덕화도 세월이 흐르자 많이 변했다.

 

  천하의 류덕화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 하고 많이 늙었다는 뜻이 아니다. 

  홍콩영화가 잘 나가던 시절,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 또는 무협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류덕화...  분명히 멋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깨에 힘 잔뜩 주고 겉멋만 부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아, 열혈남아는 제외~~ ^^)  하지만 몇 년 전 '무간도' 시리즈로 복잡미묘한 심리를 잘 묘사한다 싶더니만, 이 영화에서는 왕년의 액션스타로서의 무게감을 내던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다.

 

  영화 속에서 유명한 영화 제작자로 나오는 류덕화가 에어컨 수리기사와 택시기사로 오해받는 장면이 차례로 나온다.

  류덕화가 정장 대신 편한 옷차림을 해서 생긴 오해인데, 이런 오해가 오히려 '멋드러진 모습만 보이던 류덕화의 연기가 이제는 사실성을 띠게 되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했다.

  언젠가 어떤 친구가 "청바지가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말로 옷을 잘 입는 사람이고, 아무 옷이나 입어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사실 정장이란 옷은 그 '정장' 이란 이름에 걸맞게, 그 옷을 입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격식을 갖추게 해준다.  하지만 청바지나 다른 캐쥬얼한 옷들은, 입는 사람의 안목과 몸매에 따라 '그냥 대충 편하게 입었다' 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옷 입는 센스가 상당하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젊은 날의 류덕화는 후자에 속했다.  좋게 말하면 옷을 입는 안목이 상당한,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겉멋이 잔뜩 들려있는 그런 상황...

  하지만 이제는 류덕화도 어깨의 힘을 한결 빼내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는 느낌이었다. ^^

 

 

 

⊙ 다만, 한 가지 의문점! - 영화 제목

 

  이 영화의 원제는 타오제(桃姐)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타오 언니' 또는 '타오 누나' 정도 된다.  평생을 한 집안의 가정부로서 살아왔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에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문제목은 도대체 왜 'A Simple Life' 인지 모르겠다.  혹시 simple 이란 단어에 '간단한, 소박한' 같이 내가 아는 뻔한 뜻 말고 다른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제목 속에 역설적인 또는 함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데 내가 잡아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