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각종 행사

덕수궁미술관의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

Lesley 2013. 3. 2. 00:03

 

  지난 달에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 에 다녀왔다.

  사실, 체코의 미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특별한 관심은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관람할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새삼스레 느낀 것은, 무슨 전시회를 관람하려면 사전에 대강이라도 공부를 하고 가야 한다는 점이다.  1905년부터 1943년까지 활동한 체코 화가 28명의 작품 107점을 봤건만...  체코 미술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어도 너무 없다 보니, 가이드의 설명 들으면서 한 바퀴 둘러보고, 나중에 따로 다시 한 바퀴 더 돌아봤는데도, 뭘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

  그래도 몇몇 그림은, 그 그림의 원래 주제가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림 3점만 소개해보려고 한다. (107점이나 봤건만, 기억에 남는 것은 달랑 3점이라니...! ㅠ.ㅠ)

 

 

 

  먼저, 이 전시회에서 제일 마지막에 보았던, 그리고 이 전시회 그림 중 가장 강한 인상을 받았던, '에밀 필라(Emil Filla)' 의 작품 두 점이 있다. 

 

에밀 필라(Emil Filla)의 '적도의 밤'

 

 

에밀 필라(Emil Filla)의 '백야'

 

  위의 두 큼지막한 그림은 전시회장 마지막 골목(?)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렇잖아도, 같은 작가의 작품이며 그림의 소재도 같다.  그런데 나란히 걸려있기까지 하니, 더욱더 대비가 되었다.

 

  나는 위의 '적도의 밤' 보다는 아래의 '백야' 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두 그림 모두 초식동물(위에서는 말, 아래에서는 소)이 야수에게 무자비하게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풍경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두 그림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체코를 침공한 상황을 빗댄 그림이라 했다.  즉, 야수는 독일을, 초식동물은 에밀 필라의 조국 체코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그림의 소재는 같지만, 조명상태(?)가 다르다.  '적도의 밤' 은 그림이 담고 있는 끔찍한 풍경에 어울리게, 어두컴컴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백야' 속 밤은 발 그대로 백야, 즉 희끄무레한 밤이다.  그림 속 야만적인 광경과 다르게 밝은 풍경, 하지만 밝다고 해도 결국에는 밤일 뿐인 그 모순적인 분위기가 웬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두 그림은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림이라고 한다.

  우리를 이끌던 가이드가 "여러분, 이 그림들은 어떤 유명한 화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그림들을 보는 순간 어떤 화가의 그림이 떠오릅니까?" 하면서 우리 관람객들을 둘러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공교롭게도 가이드 정면에 서있다가 가이드와 눈이 딱 마주쳐버린 내가 웬지 모를 의무감(?)을 느끼고서 "이중섭의 소." 라고 대답했다.  가이드가 '역시...!'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기에 내 대답이 맞았는 줄 알아는데, 웬걸...  결과는 땡~~~ ^^;; 

  가이드 왈, 저 그림 속에 커다란 소가 그려져있고 또 강렬한 느낌의 그림이다 보니, 이중섭의 소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에밀 필라의 이 두 그림에 강한 영향을 끼친 이는 바로 앙리 루소라고 한다.  앙리 루소의 이름을 들은 순간, 이전에 드나들던 블로그에서 봤던 열대 밀림을 배경으로 한 독특하고 깔끔하고 강렬한 앙리 루소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가이드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두 화가의 그림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앙리 루소에 대해서는 그 블로그에 잘 정리 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가서 한번 읽어보시기를...  ☞ '저무는 여름을 보내며 - 초록숲의 몽환 앙리 루소(http://blog.naver.com/chosangwon89/100090845467)' 

 

 

 

  그리고 워낙 독특해서 좀 기괴한 느낌까지 받았던 '요세프 시마(Josef Šíma)' 의 그림 한 점...

 

 

요세프 시마(Josef Šíma)의 '내가 전혀 보지 못한 풍경의 기억'

 

  사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작품 그 자체가 좋았다기 보다는 작품의 제목이 좋아서 기억에 남는다. ^^;;

 

  이 그림 역시 위에서 소개한 에밀 필라의 그림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림이라 한다.

  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체코의 화가들이 독일의 침략이라는 비참한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내면의 세계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초현실적인 그림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초현실적인 그림' 보다는 차라리 '기괴하고 섬뜩한 그림' 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 얼굴과 피로 범벅된 듯 붉은 두 팔만 수면 위에 내놓은 기묘한 사람하며, 머리와 목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벌거벗은 뒷모습 하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절망이 반영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서 그런지, 그림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섬칫한 느낌이다. ㅠ.ㅠ

 

  그런데 그림이 주는 그런 끔찍한 느낌과는 달리, 제목은 묘하게 마음에 든다.

  '내가 전혀 보지 못한 풍경의 기억' 이라니, 그저 단순하게 '기시감' 의 뜻으로 지은 제목 같지는 않다.  전쟁의 참상이 너무 끔찍한 나머지,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어, 이건 꿈이야!' 하는 현실도피적인 감정에서 지은 제목인지...  만일 그렇다면, 정말 우울하고 서글픈 제목이다.

  하지만 화가가 어떤 의도로 제목을 이렇게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말장난 같은 이 제목이 좋다. ('백야' 도 모순적인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 제목 역시... 나 은근히 속이 꼬인 사람? ^^)

 

 

 

  이 전시회는 4월 21일까지 계속 된다.

  전에 소개했던 같은 덕수궁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 꿈과 시' 전시회(http://blog.daum.net/jha7791/15790924)처럼 무료가 아니라, 12,000원(!)이나 되는 관람료를 들여야 하는 게 좀 속이 쓰리기는 하다. ^^;;  그래도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체코 미술을 접할 기회가 있겠는가...  서구쪽 미술이야 수시로 전시회가 열리고, 또 우리가 굳이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정규교육과정 또는 언론을 통해 알게 모르게 접하게 된다.  하지만 동구쪽 미술은 접할 기회가 별로 없으니, 미술에 관심 있는 이 또는 관심 가지려고 하는 이라면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 위에 소개한 '한국근대미술 : 꿈과 시' 가 작년에 예정된 기간에서 두 달 정도 앞당겨 끝나버려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다시 하고 있었다.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회도 함께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