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류덕환의 발견(2) - 아들

Lesley 2012. 10. 27. 00:02

 

  먼저번 포스트 '류덕환의 발견(1) - 신의 (http://blog.daum.net/jha7791/15790933)' 에서 썼듯이, 드라마 '신의' 를 통해 류덕환이란 배우를 좋아하게 되어 류덕환이 출연한 장진 감독의 영화 '아들' 을 봤다.

 

 

영화 '아들' 중 15년만에 재회하는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차승원(강식)과 류덕환(준석).

(저 해맑은 동안을 보고, 누가 이 때의 류덕환을 만 20세의 대학생으로 생각하겠나...!)

 

 

 

  '신의' 를 보면서도 류덕환의 연기력에 감탄하기는 했었지만, '아들' 에 출연한 류덕환을 보니 새삼스레 이 배우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류덕환이란 배우는 한 사람이건만, '신의' 속 류덕환과 '아들' 속 류덕환은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물론, 좋은 배우란, 원래 새 배역을 맡으면 이전에 맡은 배역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새 배역에 맞추어 적절히 변신을 해야 하는 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극과 현대극이라는 장르 차이에, 일국의 왕과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는 신분(?) 차이에서 오는 옷차림과 머리 모양과 말투와 행동의 차이, 마지막으로 이 젊은 배우의 연기 내공까지 합쳐지니, 드라마 '신의' 속 공민왕영화 '아들' 속 준석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기란 쉽지 않다.  나처럼 현실세계에서도 사람 얼굴 기억하고 구별하는데 애먹는 사람은, 만일 공민왕과 준석을 연기한 배우가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 했더라면 각각 다른 배우라 생각했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신의 속 공민왕을 떠올린 경우는 딱 한 장면, 한밤중에 한강변에서 이 부자가 대화를 할 때 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 장면 내내 공민왕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아니다.  아버지 강식이 고해성사 하듯이 살인을 저지르던 날 아들 준석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말하는 것을 듣던 중, 어느 한 순간 준석의 얼굴 위로 공민왕의 감정 북받친 표정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  그만큼 류덕환은 어떤 배역에 몰입하는 수준이 상당히 높은 좋은 배우다.

 

 

  그런데 이 '아들' 이란 영화가 만일 2007년이 아닌 지금 개봉되었더라면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영화는 살인죄로 복역 중인 '강식(차승원)' 이 만 하루 동안의 짧은 외출을 허락받고, 15년간 못 만났던 아들 '준석(류덕환)' 을 만나는 사연을 담고 있다.

  즉,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 했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냉랬했던 공기가 따뜻하게 변해가는 미묘한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춘 가족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영화 후반부에 반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족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반전 뒤의 내용만 보자면, 휴먼영화 정도로 볼 수 있을까? ^^)

 

  하지만 만일 올해 개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수원의 여성 강간살인 사건(일명 오원춘 사건)이나 나주의 초등학생 강간 사건 등 인면수심의 강력범죄가 잇달아 일어나고, 그에 대한 경찰의 부실 수사와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온 국민이 분노했던 올해 개봉되었더라면 말이다.

  비록 이 영화가 의도하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고 해도, 그리고 영화 속에서 사형제도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자기와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그저 미칠 듯이 화가 날 때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살해한 미친 놈인데...  그런 놈도 자기 아들과 어머니를 사랑할 줄 아는, 우리랑 같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거야?" 식의 공분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살인죄나 강간살인죄 등 강력범죄를 지은 수감자들이 특별휴가를 신청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영화 도입부라든지, 강식이 아들에게서 "죽인 사람의 얼굴 기억해요?" 란 질문을 받고서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하는 부분에서, 그런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영화 개봉에도 타이밍이 참 중요하네.' 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15년만에 교도소 밖 세상으로 나가 아들을 찾아가는 강식(차승원).

3살 때 헤어진 후 만난 적 없는 아버지가 갑자기 찾아온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하는 준석(류덕환).

 

 

 15년만에 해후하게 된 아버지와 아들이 겨우 하루를 함께 지내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줄거리라고 하면, 누구나 뻔한 신파조 영화를 떠올리겠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그렇게 신파로 흐르기 딱인 사연을, 간간히 튀어나오는 코믹적인 요소를 이용해서 산뜻하게 덧칠한다.

  코믹적인 요소라고 해서, 배 잡고 데굴데굴 구르게 할 정도로 우스운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등장인물 딴에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 진지한 말이 영화를 보는 이에게는 은근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상황이다.  이런 소소하고 은근한 코믹 요소에 대해서는 보는 이들의 호불호가 갈릴 듯한데, 다행히도 나에게는 잘 맞는 개그 코드였다. ^^

 

  예를 들자면, 교도소 담당 신부와 강식의 대화 부분이 그렇다.

  막상 아들을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받자, 강식은 자기 잘못으로 15년간 돌보지 못 한 아들을 만나는 일에 망설임과 죄책감을 느낀다.  신부는 그런 강식을 위로하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무조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 죄를 뉘우친다면 천국보다는 못 해도 지옥보다는 좋은 곳에 갈 수 있다." 라고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말을 듣는 강식 쪽에서 눈물 고인 눈을 하고 애처롭게 신부를 쳐다볼 것만 같다.  하지만 강식은 그 특유의 느릿느릿하고 어눌한 말투로 "내가 무기수라 시간이 많아서 성경을 3번이나 읽었는데, 성경에 그런 이야기 없더라.  신부라도 거짓말 하면 지옥 간다." 라고 부드럽게(?) 신부를 면박 준다.

 

  그런가 하면, 15년 만에 돌아온 집에서 벌어진 TV에 얽힌 사연은 또 어떤가...

  어머니는 강식이 교도소 생활을 하는 동안 치매에 걸려서 오직 TV만 붙잡고 살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의 유일한 낙인 그 TV의 방송수신 상태가 너무 안 좋다.  그래서 오래 못 뵌 어머니에게 자그마한 효도라도 할 겸, 자신에게 냉랭하게 구는 아들에게 점수도 딸 겸, 강식이 나선다.  강식은 이웃집 TV 안테나에 몰래 손을 대서 자기네 집 TV의 수신 상태를 좋게 만든다.  그 후 아들 준석이 갑자기 깨끗해진 TV 화면을 보고 놀라서 중얼거리는 말은 "우리집 TV 원래는 칼라였구나~~" 다. ^^

 

  그리고 부자 사이의 틈을 메워줬던 한밤의 탈출사건(?)에서, 준석의 여자친구를 만나는 장면도 그렇다.

  아들이 미소 띤 얼굴로 여자친구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강식은 아들의 미소가 멋져서 여자들에게 인기 많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집에서 몰래 빠져나오느라 신발 신을 때, 이미 그 생각을 한 번 했음. ^^)  그리고 강식의 나레이션이 깔린다.  "아버지는 살인자인데 아들은 살인미소라니, 이것도 부전자전인가요?"  듣기에 따라서는 범죄자 아버지와 모범생 아들의 처지를 빗댄 슬픈 말인데, 솔직히 저 나레이션이 다소 긴장한 강식의 얼굴 위로 흐를 때는 빵 터져버렸다. ^^

 

 

교도관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한밤중 탈출을 감행해서 밤거리를 질주하는 아버지와 아들.

(별 것 아닌 장면인데도, 보는 이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유쾌한 장면이었음. ^^)

 

 

  이 영화의 독특함 점은 위에서 말한 코믹 요소 말고도 더 있는데, 우선 영화 전체에 나레이션이 깔린다.

 

  대부분은 강식의 나레이션이지만, 중간부터는 준석의 나레이션도 나오고, 몇몇 장면에서는 강식을 감독하려고 따라온 교도관의 나레이션도 있다.

  이 영화에 대한 다른 이들의 짤막한 평을 보니, 나레이션이 자주 나오는 것에 불만 있는 이들도 좀 있는 듯하다.  즉, 이런 종류의 영화는 관객이 보면서 알아서 느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괜히 몽땅 설명하겠다는 식으로 나레이션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코믹 요소 말고도 나레이션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나 보다.  나는 이 나레이션이 마음에 들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는 요소였다니 말이다.  나로서는, 이 나레이션 덕분에 전개가 다소 느린 편인 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심리가 드러나서 그냥 영화가 아니라 영화와 소설의 중간쯤 되는 새로운 매체를 보는 신선한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강식 역의 차승원이 약간 걸걸하고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하는 나레이션도 괜찮았지만...

  역시나 나는 드라마 '신의' 에서 알게 된 류태환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읊는 나레이션이 제일 좋았다. ^^  특히나, 자려고 누웠던 아버지 강식이 갑자기 "우리 나갈까?" 하고 말을 걸었을 때 나오는, "오늘 아버지에게 들은 말 중 가장 마음에 든 말입니다." 하는 준석의 나레이션은 담담한 말투인데도 설레임과 흥분이 잘 표현되어 참 좋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SF물도 아니고 판타지물도 아닌데, CG를 이용한 판타지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다행히도 이 영화 속  CG는 양호하다.

  그렇다고 해서 할리웃 영화에 나오는 정교하고 스케일 큰 그런 CG를 상상하지는 마시라...  그저 내가 본 최초의 류덕환 출연작인 드라마 '신의' 에 나왔던 유치한 CG에 비하면 훨씬 괜찮다는 것이다. (하기야... 2000년 이후로 나온 어떤 영화 또는 드라마 속 CG가 신의 속 그 우뢰매 같은 CG보다 못하겠느냐만은... -.-;;)

  그리고 CG를 남발하지 않고 적당히 사용하여 그 효과가 더 좋았다.  두 주인공 사이의 감정이 변화하거나 고조되는 순간, 그런 감정선을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썼다.  두세번 등장한 겨울여행을 하는 기러기 가족, 한밤중 한강 위에 떠오른 터무니없이 커다란 달, 대중 목욕탕을 헤엄치는 열대어와 거북이 등...  그래서 판타지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 이런 잔잔한 영화 속에 삽입되었는데도, 어색하거나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겨울비에 흠뻑 젖은 몸을 덮히려 들어간 목욕탕에서 한결 가까워진 모습을 보이는 강식(차승원)과 준석(류덕환).

 

 

 

※ 주의 : 여기부터는 이 영화 속 반전에 대한 스포가 나오니, 반전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살짝 눌러주는 센스를 보여주시기를... ^^

 

 

  하루 동안의 만남이 끝나고 기차역에서 애틋한 작별을 나누는 순간, 내내 잔잔하기만 했던 이 영화에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이라고 해서, 영화 '식스센스' 처럼 관객을 경악시키는 수준의 반전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식스센스는 애초에 심리물 내지는 스릴러물이라서 반전을 필수요소로 하기 때문에, 어느 수준 이상의 반전이 나와야만 한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이 감상문 앞부분에서 이미 썼듯이 가족물 내지는 휴먼드라마여서, 어마어마한 반전이 반드시 나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가족물 내지는 휴먼드라마라는 이 영화의 장르 때문에, 비록 식스센스급의 반전은 아니더라도 그 반전에 대해서 호불호가 확 갈리는 것 같다. (그로고보니, 이 영화에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가 참 여러가지임. ^^)  이 반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반전이라는 것은 앞부분에 복선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복선도 없이 뜬금없이 무슨 반전이냐' 또는 '잔잔하게 흐르던 영화를 너무 엉뚱한 반전이 망쳐놨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서, 지금부터 내가 이 영화를 위해 대신 변명(?)하고자 한다.

 

  일단, 이 영화의 반전에 아무런 복선이 없다는 의견에는 공감할 수 없다.

 

  나는 강식이 준석의 학교에 찾아오던 때, 그리고 강식이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던 때 복선은 충분히 깔려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전의 내용이 밝혀진 순간, '아, 그래서 앞부분에 그런 장면이 나왔었구나~~' 하며 뭔가 애매하고 미심쩍었던 마음이 확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첫번째 복선은 '이준석' 이란 이름의 명찰을 유독 강조하는 듯한 장면, 그리고 준석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낯선 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던 장면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영화를 봤을 때는, 강식이 만나고자 하는 아들 이준석이란 인물이 누구인지를 관객들에게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것은 준석이 되고자 하는 이가 강식과 마주치기 전에 거쳐야 했던 마음의 준비였다.

 

  두번째 복선은 다른 아이들이 이미 다 하교해서 텅 빈 복도를 홀로 걸어가며 수학 공식을 천천히 외우는 준석의 모습이다.

  그 장면을, 18세의 소년이 3살 때 헤어져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살인범 아버지와 만나는 일로 잔뜩 긴장한 모습이라고만 여겼다.  분명히 '긴장한 모습' 이기는 했다.  하지만 긴장의 원인은 낯설고 두려운 아버지를 대면하는 일이 아니라, 먼저 떠난 친구를 위해 그 친구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또한 그가 외웠던 수학 공식은 부담감을 덜어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주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주문을 통해서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혀서 보다 더 완벽하게 준석으로 변신하려 했을 것이다.

 

  세번째 복선은 분명히 준석과 특별한 관계로 보였던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다.

  나는 그 여학생이 준석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다.  준석이 학교 음악실에서 그 여학생에게 "아버지가 오신대." 라고 하는 장면을 보면, 그 학교의 수많은 아이들 중 특별히 그 여학생에게만, 또는 그 여학생에게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밤중에 준석이 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여자친구의 얼굴이 낮에 학교에서 나왔던 그 여학생과 달라서 의아했다.  하지만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나름 유명한 안면인식장애(?) 환자다 보니 '낮에는 교복 입은 깔끔한 모습이었는데, 밤에는 자다가 나온 흐트러진 모습이라, 내 눈에는 다른 얼굴로 보이는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알고보니, 정말로 두 여학생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0-;;  음악실의 긴 생머리 여학생은 진.짜. 준석의 여자친구였고, 자다가 깬 모습으로 나왔던 여학생은 가.짜. 준석의 여자친구였다.

 

  네번째 복선은 준석과 그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강식은 아들의 얼굴을 기억 못 하기 때문에, 집에 막 돌아왔을 때 그 사진을 보고 사진 속 남학생들 중 누가 아들인지 알지 못 했다.  그런데 강식이 교도소로 돌아가려 집을 나선 후, 혼자 남은 강식의 어머니가 그 사진을 쓰다듬다가 품에 안고 통곡한다.  그저 치매에 걸린 노인의 행동이거니 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원통하게 "내 새끼야~" 하고 울부짖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을 알지 못 했다는 점이 가짜 준석의 연극이 가능했던 원인이고, 강식의 할머니가 손주의 사진을 품고 비통해 했던 것은 후반부 반전의 내용을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또한, 반전 때문에 이 영화의 잔잔한 흐름이 깨졌다는 의견에도 공감할 수 없다.

 

  나도 처음에는 이 반전이라는 것에 대해 '으잉? 이게 도대체 뭥미?' 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아버지를 한번도 못 만난 한을 품고 죽은 준식을 위해 친구가 대신 준식 역할을 한다는 설정부터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준석(진짜 준석)이나 준석 친구나 18살의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꼭 불가능하다고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기가 어떤 시기인가?  부모형제보다도 친구가 더 좋고,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치하고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친구간의 정과 의리에 집착하는 시기 아니던가?  만일 세상의 쓴맛 단맛 다 본 성인이 친구를 위해 그런 연극을 했더라면, 정말 터무니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절절한 우정에 감동받기는 커녕, 진짜 철이 없다는 생각이나 했을 것임. -.-;;)  하지만 이들은 우정을 위해서라면 앞뒤니 좌우니 전혀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돌진하는 나이의 아이들이다. (기차 안에서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준석의 손이 힘없이 풀리는 순간, 류덕환이 보여준 표정과 눈물은 정말... ㅠ.ㅠ)

 

  그리고 위에서 이미 쓴 것처럼 이 영화가 몇몇 판타지 요소를 품고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준석 친구(즉, 가짜 준석)가 꾸민 연극이 반드시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를 세세히 따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가 지나고 교도소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타려는 강식(차승원)과 배웅하는 준석(류덕환).

 

 

  '은하철도 999' 를 연상하게 했던, 기차역 장면...

 

  좀 엉뚱한 감상일런지 몰라도, 나는 반전이 일어나는 기차역 장면에서 한국에서도 유명한 마쓰모토 레이지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를 떠올렸다.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은 주인공 데츠로(한국어 더빙판에서는 '철이' 라는 이름임. ^^)가 오랜 여행을 끝내고 메텔과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장면이다.  기차역의 시계탑이 12시 정각을 가르키는 순간, 아름답고 용감하고 신비로운 메텔과 함께 했던 꿈만 같던 시간이 다 하고 데츠로는 현실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도 강식이 15년만에 만난 아들 준석(사실은 준석의 친구였지만...)과 함께 하며 따스한 정을 나누었던 마법의 시간은, 기차역에서 끝이 난다.   은하철도 999와의 차이가 있다면, '마법이 어느 순간에 풀리는가' 다.  은하철도 999에서는 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순간이었고, 아들에서는 준석 친구가 준석을 대신하여 강식의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어떻게 맞잡은 손의 느낌만으로 상대방이 아들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아들이 3살 때 교도소에 들어가서 아들의 얼굴도 아들의 생일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아들의 아기 시절 손을 잡았던 느낌만은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만일 이 장면에 대해서 굳이 과학적인 근거 요구하며 따지고 든다면야 할 말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적인 드라마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판타지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  그런 독특한 장르적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 

 

 

 

강식(차승원)과 가.짜. 준석(류덕환) 사이의 마법의 시간이 깨지는 순간.

 

 

  이미 위에서 몇 번이나 류덕환의 연기력을 칭찬했지만, 그래도 역시 류덕환의 세밀하고 풍부한 연기력에 대해 따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가짜 준석이 세상을 뜬 진짜 준석을 위해 택한 방법은, 그저 단순히 준석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준석이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영화에 흐르는 가짜 준석의 나레이션을 들어보면, 가짜 준석이 1박 2일간의 연극을 하면서 스스로를 진짜 준석과 완전히 동일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런 상황에서 준석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했을거야.' 하고 계산해가며 움직이는게 아니다.  이미 자신을 준석 그 자체로 여기고 있기에, 준석이 살아있었더라면 재회한 아버지에게 품었을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아버지에게 했을 말을 그대로 하고, 아버지에게 했을 행동을 그대로 한다.  이건 마치 영화 '패왕별희' 속 장국영처럼 극 중 인물과 현실의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강식과의 마법이 깨지는 순간, 가짜 준석은 그냥 놀라는 표정이 아닌 마치 숨을 멈춘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게 아닐까... 

  강식이 울면서 "준석이 어디 있니?" 하고 처음 물었을 때, 가짜 준석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식이 다시 물었을 때에야,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린 채 흔들리는 눈빛과 살짝 벌어지는 입술로 마법의 시간이 다 한 것을 깨달았음을 보인다. (류덕환의 연기, 정말 예술임...!)  이미 세상을 뜬 절친한 친구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던 가짜 준석 입장에서는, 강식이 연극을 눈치챘다는 사실이 그냥 '아, 결국에는 들켰버렸네.' 라는 느낌보다는 '아, 맞다, 나는 사실 준석이가 아니었지.' 하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가짜 준석은 죽기 전에 아버지를 한 번 만나고 싶어했던 친구의 간절한 소망을 대신 이루어주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간의 애틋한 연극의 클라이막스로써, 강식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렇게 강식의 손을 잡은 것 때문에, 1박 2일 동안 이루어놓은 마법이 깨져버렸다.

 

 

  그리고 드라마 '신의' 를 보며 이미 반해버린 류덕환의 목소리를 이 '아들' 에서는 다른 버전(?)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영화에게서 얻어낸 즐거움이다.

 

  '신의' 에서는 류덕환이 맡은 역이 한 나라의 왕이다보니, 품위있고 신중하며 묵직하게 저음의 목소리를 낸다.

  그런 신의 속 목소리도 참 듣기 좋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듣게 된 미성도 신선하고 좋았다.  다만 약간 놀랐던 것은, 이 영화가 개봉했던 2007년에 류덕환의 나이는 만 20세였는데, 영화 속 가짜 준석의 목소리는 극중 나이인 18세도 아닌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만 했다.  그렇다고 어린 티 줄줄 흐르는 목소리라는 뜻은 아니다.  이미 성인이 된 나이인데도 사춘기 소년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변성기 겪느라 불안정한 목소리가 아닌 미성을 갖고 있다는 게 뜻밖이었다. 

 

  류덕환의 미성을 확 느꼈던 장면이 두 곳이었다.

  하나는 저 위에 이미 쓴대로, 한밤중에 강식이 밖에 나가자고 했을 때 눈을 번쩍 뜨는 가짜 준석 얼굴 위로 "오늘 아버지에게 들은 말 중 가장 마음에 든 말입니다." 라는 나레이션이 흐르는 장면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둘이서 몰래 나와 한강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이었다.  강식이 사람을 죽이던 날 어린 준석에게 했던 짓을 회한 어린 목소리로 고백하자, 가짜 준석은 눈물을 흘리며 "날 사랑하는구나? 날 사랑하네. 계속 그래줘. 아빠 죽을 때까지. 나 죽을 때까지." 라고 말한다.  사실, 손발이 너무 오글거리다 못 해 등골 위로 개미 한 마리가 쪼르르 기어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대사다. ^^;;  만일 저 대사를 어지간한 남자 배우가 했더라면, 듣는 내가 얼굴이 확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워낙 동안에 깨끗하게 생긴 류덕환이 눈물을 흘리며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저 대사를 하자, 오히려 뭔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장면에서 류덕환 목소리의 울림이 정말 좋았음. ^^) 

 

 

  이미 신의 때문에 류덕환에게 반해버린 나...

  아들이라는 이 영화 때문에, 나의 류덕환 사랑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 같다.  이 '류덕환의 발견' 시리즈도 함께 쭉~~~ ^^

 

 

류덕환의 발견(1) - 신의(http://blog.daum.net/jha7791/15790933)
류덕환의 발견(3) - 복숭아나무(http://blog.daum.net/jha7791/15790936)

류덕환의 발견(4) - the story of MAN & WOMAN(http://blog.daum.net/jha7791/15790976)

류덕환의 발견(5) - 신의 퀴즈 시즌1 대강 훑기(http://blog.daum.net/jha7791/15790978)

류덕환의 발견(6) - 신의 퀴즈 시즌1 中 4회 '신이 내린 딸'(http://blog.daum.net/jha7791/15790979)
류덕환의 발견(7) - 신의 퀴즈 시즌1 中 한강커플(http://blog.daum.net/jha7791/15790980)

류덕환의 발견(8) - 연극 '웃음의 대학'(http://blog.daum.net/jha7791/15791044)

류덕환의 발견(9) - 연극 '에쿠우스'(http://blog.daum.net/jha7791/1579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