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광복절에 보고 들은 어이없는 단어 '대동아전쟁'

Lesley 2012. 8. 17. 00:05

 

  지난 광복절에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중인 '한국근대미술 : 꿈과 시' 과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을 보러 갔다.

  휴일이라 관람객이 많을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었다.  까딱하면 그림 구경이 아닌 사람 구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  다행이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만,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쏟아진 폭우 때문에 관람객이 적어서 한적한 편이었다.  덕분에 수많은 그림을 느긋하게 잘 보기는 했는데...

  다른 날도 아니고 광복절이었던 이 날, 정말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전시회장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하도 기가 막혀서 핸드폰으로 몰래 찍었음.

 

  마침 미술관 직원이 설명해주는 시간에 딱 걸려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던 중, 문제의 그 사건이 벌어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 그림 저 그림 이 화가 저 화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던 그 직원...  그런데 위의 사진에 나오는 김중현이란 화가의 무녀도 앞에서 설명을 들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 이 때는 대동아전쟁 중이었고..."  대...동...아...전...쟁...이라니...!!!  도대체 대동아전쟁(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이들, 즉 일본 우익 등의 사람들이 '태평양전쟁' 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말함.)이란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나 쓰는건가?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 일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직원의 설명이 다 끝난 후 인상 깊었던 그림이라든지 직원이 건너 뛴 그림 등을 보려고 다시 한 번 전시회장을 둘러보면서, 설명 듣느라 못 읽은 그림 아래 설명판의 내용을 읽어봤다.  거기에도 분명히 '대동아전쟁' 이라고 씌어있었다.  즉, 그 직원이 뭘 몰라서 혹은 실수로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쓴 게 아니라, 이 전시회에서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었다...!

 

  이 날 나와 동행한 이는 '대동아전쟁' 이란 말 뒤에 '군국주의' 라는 말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위의 사진 참조), 미술관 측에서 친일적인 뜻에서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쓴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아마도 "이 때는 이미 ('소위' 또는 '일본의 소위') 대동아전쟁으로 군국주의 분위기가 강해져 갔는데" 정도로 쓰려다가, '소위' 또는 '일본의 소위' 란 말을 실수로 빠뜨린 것 같다고 했다.  분명 일리있는 말이기는 하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서 되씹어 생각해보니,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직원이 관람객들 앞에서 한 두 번 설명한 것이 아니었을텐데(이 전시회는 5월 중순에 시작되었음.), '세종대왕 때 한글 창제가 있었습니다' 하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입에 올렸다. 

  저런 전시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배울만큼 배웠고 이런 일에 경험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규모 전시회 관련한 인원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배울만큼 배우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이토록 무식할 수가 있나?  그 많은 관계자 중 어느 누구도 대동아전쟁이란 용어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못 했다는게 말이 되는가?  다른 그림들 보면 '일제의 식민 치하에서 민중의 고통이...' 뭐 이런 식으로 써놓은 것들이 눈에 띄던데, 그런 그림들 한 가운데에 대동아전쟁이란 말이 가당키나 하나...

 

  하기야, 어떻게 생각해보면 미술관 사람들에게만 뭐라고 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이번 정권 들어, 일제의 식민지배 관련한 허술한 역사 인식 때문에 계속해서 말썽이 있었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여당 소속 인사 또는 지지자인 인사들은 '식민지배가 우리 근대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 는 황당무계한 말을 했고('뉴라이트' 소속 사람들), 대통령 형이란 사람은 미국 대사관까지 가서 '내 동생은 뼛속까지 친미파, 친일파다' 라고 말한 것이 밝혀져 국민들을 기함시키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국무총리 입에서는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731부대가 우리나라의 항일독립군이라는 엽기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더구나 이 국무총리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의 총장을 지낸 인물이어서,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웃음거리가 되었으니...-0-;;)  나중에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도 국무총리에 뒤질세라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것도 남의 나라인 중국까지 가서, 독립운동의 중심부였던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국가의 지도층 인사들부터 저런 황당한 발언을 일삼는 판국이니, 미술관에서 대동아전쟁이란 말과 글이 나왔다 해서 그리 놀랄 일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ㅠ.ㅠ

 

  사람마다 어떤 사물 또는 사건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다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가뜩이나 독도 문제와 정신대 문제로 대일관계가 어수선한 시국이다.  일본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도 좋고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도 좋은데,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중심을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우리들 속에 잘못된 대일 역사관을 지닌 이들이 있는데(그것도 지도층 인사들 중에...), 그 상태에서 일본에게만 뭐라고 하다니 이게 무슨 블랙 코미디 같은 일인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쓰다가 돌아가신 분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모두들 정신 좀 똑바로 차리자...!!!